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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고선
제16회 산행일지 : 경남 남해군 금산 (다랭이 마을과 봄 맛)
일시 : 2003년 12월 6(토)
날씨 : 구름 조금, 갬
지난 여름 '포구기행'이란 책을 통하여 우리나라 구석구석 포구들의 예기들을 편안한 사진들과 함께 감동적으로 내게 전해준 곽 재구가 올해 가을 두 번째로 내놓은 산문집 '예술기행'을 서점에서 골라든 것은 지난 달 말경이었다.
1981년 막차, 대합실, 톱밥난로, 귀향, 눈꽃 등의 주제어로 빚어진 '사평역에서'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 곽 재구는 현재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예술기행'의 첫 장 '이성복의 남해금산을 찾아서'를 막 읽고 돌아설 무렵, 김생곤은 우리의 등고선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하여 지난 번 백운산에서 논의한 바 있는 조계산이나 천관산이 12월 산행지로 어떠냐고 물어왔다. 나는 마침 방금 읽은 책의 감동을 느낄 겸 비교적 가까운 금산(681m)을 추천하여 제16회 정기산행지로 정하게 되었다. 주말에 날
씨가 굳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랬듯이 다소간 마음에 부담은 있었으나 연기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
지난 번과 같이 화원 IC에서 7시30분에 모이기로 하였다.
아직도 어수룩한 아침, 집을 나서자 비가 많이 내린다. 길도 많이 막혀서 조금씩 지각하여 모였다.
김이돌은 이번 달에는 새로 산 바지를 선 보였다. 늦바람은 아무도 말릴 수 없다더니 산에 바람이 들긴 오직이 들었나보다.
김생곤은 산뜻한 새 배낭을 메고 왔다. 장갑도, 모자도 새것이다. 다들 겨울준비가 완벽하다.
김생곤은 황남빵 대신 경주빵을, 그리고 김이돌은 김밥을 차안에 풀어놓았다.
비록 비는 내리지만 산행길에 즐거움은 충일하다. 남으로 내려와 남해고속도로로 접어드니 비가 멈칫거리고 군데군데서 시야가 확보되는 듯 먼 산들도 보인다. 빠른 속도로 구름들이 벗겨지면서 하동 IC를 나오자 간혹 하늘을 드러내 놓기도 한다.
역시 오늘도 날씨는 우릴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깨끗하고 상큼하게 산과 공기를 씻어놓았다.
19번 국도를 타고 내려와 남해대교에 이르러 그 위용을 카메라에 담고 곧이어 우측의 관음포에 닿았다.
관광안내센터에 들렀더니 상세 지도와 함께 남해의 볼거리들을 친절히 안내해 준다.
이곳 관음포는 충무공의 유허비가 있는 곳이다. 노량해전에서 왜적의 총탄을 맞고 순국하신 후 맨처음으로 영구를 모신 곳이다. 입구에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충무공의 마지막 유언이 거대한 자연석에 한자로 새겨져 있고 가지가 유난히 많은 독특한 소나무들이 도열하여 충무공의 유허비로 안내한다.
대밭 사이로는 400여년 전 그 바닷물이 고요히 밀려와 있다. 관음포를 나서자 이제 햇볕이 든다. 남해읍을 지나 우측으로 서면을 향했다. 남해스포츠 파크는 이국적인 야자수 가로수와 함께 파아란 바다 그리고 야구장, 축구장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남해에 겨울이 닿으려면 아직 길이 멀었나 보다. 아니 겨울이 지나고 봄인 듯 하다.
온 들판엔 연록색의 마늘이 싱싱하게 자라고 옥색바다와 맞닿은 땅들, 스치는 공기, 언뜻언뜻 보이는 동백꽃들을 두고 봄기운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듯 하였다.
차에 기름은 넣어야 하는데 주유소가 보이질 않는다. 마을에서 아주머니 한 분을 태우고 남면으로 5분여 되돌아가 주유소를 만났다. 외지인들이 최근 많이들 와서 땅값이 많이 올랐다고 아주머니는 전해 주었다.
서면에서 남면으로 달리는 길의 경치는 그만이다. 물론 이곳만이 아니라 오늘 들른 모든 남해의 경치가 매일반이다. 이건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차에 탄 네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다. 김이돌은 동해안보다도 훨씬 좋다고 몇 번씩이나 힘주어 강조한다.
남면의 최남단 가천마을에 이르면 왼편의 다랭이마을 표시와 우측의 가천 암수바위 표시가 마주하고 있다.
주차하고 우측의 다랭이 마을로 들어선다. 삶의 고단함이 뼈저리게 묻어나는 곳이지만 가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맞닿은 곳에 산비탈에 일구어 놓은 계단식의 층층 좁은 논밭과 그 경계들은 자못 정겨운 삶의 모습들을 연출한다.
산골에서 보아오던 모습들이 바다 앞에서 펼쳐지는 것이 자못 신기하기만 하다.
경사가 급한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질곡의 터널처럼 살아왔을 사람들의 얼굴들이 좁고 꾸불꾸불한 논밭들에 겹쳐지는 듯 하다. 최근 들어 이러한 모습들이 유명세를 타고 관광객이 많아졌다고 한다.
시멘트로 포장된 가파른 마을 중앙로를 내려가자니 감나무인 듯 보이는 고목이 마을 가운데 버티고 있고 여러 집의 담 모퉁이에는 동동주와 안주이름이 걸려 있다. 돌담길도 정겹고 오래 전 공동으로 사용했음직한 우물도 있다.
마을을 거의 다 지나면 우측으로 이곳의 명물인 가천 암수바위를 만난다.
우람한 남근을 닮은 수바위가 솟아있고 그 옆에는 아이를 분만중인 것으로도 보이는 암바위가 반쯤은 다소곳이 밭두렁 언덕아래 숨어있다.
실은 이 암수바위와 2-3미터 떨어진 옆에는 산달이 다되어가는 듯한 부른 배의 姙婦가 비스듬히 누워있는 것으로 보이는 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득남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마침 기도 중인 아주머니 한분을 만났다. 아주머니에 따르면 이 수바위는 원래 용바위로 용의 꼬리에 해당하며 용의 머리는 땅 아래쪽을 지나 바다로 향하여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용바위는 단군이 龍化되어 온 것인데도 이를 관광화할 욕심으로 남근을 닮았다고 떠들어대며 억지홍보하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고 기도처가 서야할 용의 등에 해당하는 아래쪽에는 화장실을 만들어 인분을 쏟아 붓고 있다고 분개하고 계셨다.
아니게 아니라 아래쪽으로는 기와를 얹은 한 칸 규모의 화장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라가 지금처럼 어지럽고 어려운 일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들에 기인한다고 한다.
대종교를 신앙하고 있다는 그 아주머니는 산은 남자, 바다를 여자를 상징한다며 앞으로는 바다에 소원을 비는 시대, 바다의 시대, 여자의 시대가 온다고도 하였다.
비교적 많은 꽃송이를 피워 올린 큰 동백나무나 돈나무를 뒤로하고 바다쪽으로 더욱 내려가자 지난 비에 계곡과 길들이 쓸려 내려간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바다쪽은 바위가 이어지며 경치가 좋았다.
마침 채소밭이 있기에 점심때 먹으려고 어린 배추와 잔파를 몇뿌리 뽑았다. 계곡으로 와서 물가에서 씻고 다듬자니 영판 봄의 모습이다. 계곡엔 수량도 풍부하였고 다슬기도 바위위에 빼곡히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남해군 남면의 다랭이 마을은 우리 한민족의 에센스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농촌이자 바다마을이다. 다음 기회가 되면 디시한번 더 들르더라도 결코 후회가 없을 그런 곳이었다.
많은 시간을 따뜻한 다랭이 마을에서 보냈다. 다시 해안으로 이어지는 절경의 해안도로를 따라앵강만을 끼고 돈다. 금산 이정표를 따라 저수지를 지나고 보니 이곳은 복곡 방면의 금산길이다.
다시 되돌아 나와 해안을 따라 진행하자니 작은 섬 노도를 우측에 만난다. 서포 김만중 선생이 유배생활을 하면서 인현왕후를 복원시키고자 사씨남정기를 집필한 곳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곳도 들르고 싶은 욕심이 있었으나 이미 시간을 많이 지체한 우리로서는 금산이 보다 소중했다. 상주해수욕장 위쪽의 금산 등산로 입구에서 4,000원의 주차비와 1,300원씩의 입장료를 지불하고서야 금산에 들어설 수 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 성복
이성복 시인의 '금산'이란 시의 판넬이 등산로 입구에 서 있다. 이 시는 상주태생이며 지금은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인 시인의 두 번째인 '남해금산' 시집에 실린 것으로 소설에 등장하는 금산을 느끼려 1985년 5월에 금산을 오른 후 낳은 작품이다. 돌, 여자, 사랑, 이별 그리고 바다 등 시어들이 역어내는 이 한편의 애틋한 드라마가 충분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돌, 푸른 하늘, 푸른 바닷물의 남해금산만은 내눈으로도 보이는 현세였다.
12시 40분, 정상까지 2.5km, 보리암까지 2.3km의 등산을 시작하여 30여분을 오르니 보리암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쉼터가 나타났다. 땀도 나고, 배도 고파서 물과 바나나를 먹고 잠시 쉬었다. 뒤로는 남해바다가 섬들 사이로 시야에 들어온다.
다시 20여분을 오르니 좌측으로 거대한 바위가 나타나고 앞쪽으로는 금산38경중 제일경인 쌍홍문이 두개의 큰 굴로 다가온다.
굴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줄기와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다. 곧이어 우측으로 진행하면 보리암에 닿는다.
주변의 무수한 바위들의 모습도 장관이지만 보리암은 거의 금산 정상에 있어 남해가 한눈으로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압권이다.
이곳은 팔공산 갓바위, 설악산 봉정암과 함께 국내 3대 기도처로 이름이 높다고 한다.
보리암전 3층 석탑으로 향하려 내려서자 왼쪽에서부터 역겨운 화장실 냄새가 바람에 묻어온다. 화장실의 위치가 잘못된 듯하다.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의 기분이 언짢아질 듯 하여 보인다.
보리암전 3층석탑은 어른 키 정도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의 낮고 귀여운 모습으로 이곳의 명물이다.
돌은 인도에서 들여왔다고 하는데 어느 한 부위에서 나침판이 거꾸로 작동한다는 이야기를 김생곤이 관광안내소에서 들었나보다. 마침 배낭에서 나침판을 꺼내들고는 김생곤과 함께 이곳저곳에 올려놓기를 반복하다가 유독 아래쪽 좌측(남해를 등지고) 기단석과 탑신이 교차하는 앞쪽 끝부분 그곳에서만 나침판을 놓자 아닌게 아니라 나침판이 거의 160도 회전하여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 일행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우리의 행동을 구경하던 모든 사람이 신기해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전에 들은 바 있다는 아주머니 한 분은 나침판이 거꾸로 도는 것을 보자마자 "부처님 감사합니다"를 기도하는 모습으로 읊조리고 있었다.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부처님의 사리가 그곳에 들어있어서 그렇단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몰려오자 그 아주머니는 다시 한 번 법공양(나침판의 바늘을 옮기는 부처님 사리의 위력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을 하랜다.
시간이 바쁘다는 핑계로 돌아섰지만 신기하다는 생각은 지금껏 뇌리에 남아있다. 금산의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고 그 고마움으로 비단으로 감싸주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대신 이름을 비단(錦)으로 지어주었음에 유래하고 있다.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그 암자는 수리 중이었다. 절집 보리암은 그저 그런 정도였으며 많은 사람의 통행을 위함인지 대리석으로 깔려진 계단과 길들은 보기에 다소 생경한 느낌을 주었다.
보리암에 대한 또 다른 생각들은 곽재구의 '예술기행'을 참고하면 된다.
복곡방면에서 차량으로 올라온 많은 관광객들로 보리암과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이 꽤나 붐빈다.
연인도 많고 아이를 동반한 가족도, 노부부의 모습도, 단체 관광객의 모습도 보인다. 작은 키의 대밭을 지나고 곧이어 남해금산 봉수대에 닿는다.
이 봉수대는 금산의 최고 높은 위치에 있으며 서울로 연결되는 최남단의 중요한 봉수대로 고려 의종 때 설치된 것이다. 지금은 사용한 흔적도 없이 그저 돌들로만 둘러놓아 원형으로도 보이지 않는 역시 그저 그런 봉수대로 보였다.
2시30분 바람이 조용한 바위 아래, 낙엽과 잔디가 푹신한, 햇볕이 잘 드는 남향에 점심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다랭이 마을에서 채취한 파와 나물 두 가지가 더 들어갔으니 백운산에서의 점심보다 더욱 화려할 것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오히려 그 나물이 부족한 듯 맛이 좋았다. 오후 3시 10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단군성전이란 곳에 들렀다. 일하는 사람들이 왁자하게 즐거운 모습으로 봄 대청소를 하듯이 쓸고 닦고 있다.
이층의 성전에 올라보았으나 절집 비슷하기도 하지만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다. 여러 바위가 많았으나 상사바위는 맨 마지막에 나타났다. 상사바위에 대한 나의 질퍽한 설명에 다들 한바탕 웃어 보인다.
양반의 아내를 짝사랑하여 상사병에 걸려 죽게 된 하인을 마음 좋은 양반댁이 불쌍히 여겨 이곳에서 사랑을 허락하여 정을 통했다는, 그래서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이 어쩌고 하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제부터는 하산길이다. 다시 조금 올라가는가 싶더니 우측으로 빠져 쌍홍문 바로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만난다. 쌍홍문에서 40여분 걸려 하산을 하니 저녁무렵이다.
상주해수욕장을 들르고도 싶었으나 미조포구와 죽방염을 보자면 속도를 높여야 했다. 미조(彌助), 미래에 인간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미래불인 미륵불이 도운다는 이름의 포구이다. 나에게는 여느 포구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으나 시인 곽재구는 이곳에서 유년 시절의 추억, 희망, 아름다움을 퍼올리며 하루를 묵었나 보다. 덩치 큰 조선소만 보아온 내 눈에 건너편 작은 규모의 조선소가 웃음을 자아낼 만큼 정겹게 들어왔다. 곧바로 남해의 오른 쪽을 돌아 창선교에 이르렀다.
날씨는 어두워지고 있다. 죽방염, 태고의 원시형태의 어업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이 이곳이다. 10미터 정도의 참나무로 말목을 박아 V자형으로 벌려 조류를 따라 들어오는 고기를 가두어 잡는 방식이다.
아직 23명이 이곳에서 죽방염 어업을 하고 있다고 방파제에서 만난 어부가 일러준다. 해가지고, 서편의 저녁놀이 조금 남아있기는 하나 주위에는 어둠이 몰려오고 있다. 사진을 찍어 보았지만 거리가 있어 잘 보이지 않아 매우 안타깝다.
이곳이 고향이며 이곳에서 죽방염을 천직으로 살고있는 류광춘씨를 '슬로푸드 슬로라이프'라는 김종덕 교수의 책을 통하여 읽은 적이 있다.
죽방염으로 멸치를 잡는 이분은 국제슬로푸드협회에서 1천년 전부터 사용해 온 전통 어획 방식을 지키고 그 일에 대한 자부심, 환경어업 등의 사유로 포루투칼에서 슬로푸드 상을 수상한 바 있다. 패스트라는 말로 요약되는 근대 산업사회의 빠르고, 획일화되어 가는 것에 대한 비판과 자성에서 출발한 슬로푸드 운동이 사회 곳곳에서 방부용 소금처럼 뿌려져 인간화, 다양화된 과거로 조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선교를 지나고 뭍인 삼천포를 잇는 다섯 다리가 각각의 방식으로 건설되어 새로 개통되었다는 연륙교를 건널 때는 이미 어둠이 자욱한 밤이었다.
식당 찾아 삼천포 이곳저곳을 기울이다 항구 주변의 횟집에서 저녁을 들고 다음 기회에 다시 방문하고픈 남해를 뒤로하고 화원에 도착하니 9시, 다음 달 산행지로는 겨울산의 진수, 눈의 산, 태백산으로 정하였다.
登·苦·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