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살인, 1975년 4월의 학살> 지난해 12월말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펴낸 최초의 자료집 제목이다.
1973년 10월, 유신체제 아래 최초의 시위가 서울대에서 일어났다. 이듬해 1월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됐다. 4월에 전국의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를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의 책동으로 돌리고 그 배후에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인혁당'이 있다고 발표했다.
1975년 4월 9일, 대법원 확정판결 직후 20여시간만에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괴수'라 명명한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인혁당 사건은 그로부터 지금까지 27년간 '한국현대사의 가장 추악한 정치공작사'로 기록돼 왔으나, 이들에게 사형을 집행한 정부는 아직도 이 사건의 조작성을 인정하지 않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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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인혁당 사건 관련자 장석구씨 사망사건의 중간 발표에 대해 소감을 밝히고 있는 '인혁당 대책위'관계자들. ⓒ프레시안 |
27년 5개월만의 복권, 박정희가 사건조작 주범 2002년 9월 12일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위원장 한상범)가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이었다"며 인혁당 사건이 '사법살임'임을 공식발표했다. 27년 5개월여만의 복권이다. 진상규명위는 이날 정례브리핑을 통해 "중정은 당시 도예종씨 등 23명에 대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구성, 학생들을 배후 조종하고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했지만 위원회 조사 결과 이를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으며 혐의는 모두 피의자신문조서와 진술조서 위조를 통해 조작됐음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특히
"피의자신문조서와 진술조서를 조작하는 과정에 중정이 파견 경찰관을 동원해 구타, 몽둥이 찜질,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자행했다"며 "이같은 고문으로 사형이 집행됐던 하재완씨 등 관련자들이 탈장과 폐농양증 등의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는 또 "
재판을 담당한 군사법원 재판부 역시 피고인이 부인한 혐의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하거나 불법적 고문수사에 항의하는 발언을 기록에서 누락시키는 방식으로 공판조서를 허위 작성했으며, 피고인들의 증인 신청을 단 한차례도 받아주지 않거나 가족도 피고당 단 한명만 방청을 허락하는 등 재판과정을 위법하게 진행했다"고 밝혔다.
인혁당 사건은 당시 중정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수사팀장 윤모씨는 "사건과 관련해 박 대통령의 서명이 담긴 문서를 직접 본 적이 있다"고 진술했으며 담당 수사관도 "이모 국장이 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를 하고 결재를 받았다는 진술을 다른 수사관으로부터 들었다"고 진상규명위는 밝혔다. 박 대통령이 인혁당 사건 조작의 주범임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지난 98년 구성된 `인혁당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는 브리핑 직후 기자회견을 갖고 "그동안 인혁당 재건위 조작 의혹은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진상규명위 조사를 통해 유신체제하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조직된 사건임이 드러났다"며 "이번에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재심청구를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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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의해 부단히 저지돼온 인혁당 희생자 추모비를 세운 뒤 오열하고 있는 유가족들. ⓒ연합뉴스 |
"4월 9일은 사법사상 암흑의 날"
1974년 4월 3일
서울대 연대 성대 이대 등 주요 대학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로 전국적 규모의 유신철폐 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이 시민폭동을 유발, 정부를 전복하고 노동정권을 수립하려는 국가 변란을 기도했다"는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 뒤 학생을 비롯해 각계 민주인사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였다.
긴급조치에 의해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지하 시인을 비롯 인혁당 재건 관련자 21명을 포함, 무려 2백53명이 비상군법회의에 송치됐으며 이철, 김지하 등 14명은 사형, 정문화 등 16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최고 20년에서 최하 5년의 징역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중형이 선고됐다.
당시 중정이 탄압의 빌미로 내세운 것은 "도예종 등 23명이 인혁당 재건위를 결성,
북한의 지령을 받아 당시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이른바 인혁당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23명 중 8명이 군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나머지 15명도 무기징역(7명),징역 15~20년(8명)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시간 뒤인 75년 4월 9일 형이 집행됐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사법살인이자, 증거인멸이었다. 또한 인혁당 관계자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장석구씨는 옥사했다.
인혁당 사형집행은 전세계 인권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스위스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즉각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국제 앰네스티도 한국관계보고서를 통해
▲변호인측 증인이 한 사람도 채택되지 않은 점
▲피고인의 가족 중 한 명만 방청을 허용받는 등 재판이 통제된 점
▲관계당국이 공식적 재판기록 공개를 완강하게 거부한 점 등을 들어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국내 분위기는 달랐다. 같이 수감생활을 했던 김지하 시인이 인혁당 사건의 조작성을 알리는 '양심선언'을 하는 등 민주인사들은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시절이라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가 침묵하고 외면했다. 언론도 침묵했다.
이 기간중 죽은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홀로 동분서주한 유가족들은 중정 등으로부터 고문과 성폭행 위협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을 당해야 했다. 고인의 자녀들은 '빨갱이 자식'이라 따돌림 당했다.
'역사의 이름'으로 이런 가운데 정권교체가 이뤄진 지난 98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99년에는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각계인사 1천인 선언 성명이 있었다.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진상규명위가 지난해 3월 인혁당 사건과 관련, 감옥에서 사망한 장석구씨 사건을 직권조사 하기로 결정하면서 하나씩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특히 국방부가 그동안 관련자료가 없다며 `발뺌'해왔던 군사법원 공판기록을 진상규명위가 올해초 입수하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실은 점차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후 당시 수사를 맡았던 중정 관계자와 파견 경찰관 등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증거조작, 고문 등 중정의 개입증거도 속속 드러났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진상규명위는 마침내 12일 각종 의혹들을 국가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확인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로써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법살인된 8명의 고인들은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인혁당 사건의 진실규명은 이제부터라는 게 유가족 및 관련인사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우선 당시 정치공작에 누가 직ㆍ간접적으로 관여했는가가 '역사의 이름'으로 상세히 밝혀져야 한다.
당시 최고통수권자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관여했다는 증거가 이번 진상규명위 조사결과 밝혀졌다. 박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 그의 유족들은 마땅히 선친을 대신해 유가족과 국민앞에 사과해야 한다.
아울러 당시 사형판결을 주도한 군사법원 및 대법원 관련자들도 국민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 규명을 외면한 언론이 통절한 자성을 해야 한다. 그들의 입이 닫혀 있었기에 이같은 통치권력의 사법살인이 가능했고, 그로부터 27년간 진실왜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박태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20913093912&Section=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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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1975년 긴급조치 1호 위반 등 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고 도예종씨의 부인 신동숙씨(왼쪽부터), 문정현 신부, 고 하재완씨의 부인 이영교씨가 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가 확정되자 부둥켜 안은 채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문 신부는 사건 직후부터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대표를 맡아 진상 규명을 추진해 왔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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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에서 법원이 피고인 8명 모두에 대해 사실상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문용선)는 23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 등이 유죄로 확정돼 1975년 사형이 이뤄진 도예종씨 등 8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는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모든 게 사필귀정”이라며 “32년간 말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온 유족들의 승리이자 인권의 승리”라고 밝혔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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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가 확정되자 고 우홍선 씨의 부인 강순희 씨(가운데)가 고 여정남 씨의 조카 여상화 씨(왼쪽)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오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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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유가족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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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유가족들이 기자회견 도중 울먹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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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오전 정동영(왼쪽)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함세웅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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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 한국철도공사 사장이 23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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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인태 열린우리당 의원이 23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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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7-01-23 오후 05:18:27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86013.html
18시간만의 ‘사법살인’ 인혁당 재건위 8명 무죄 |
서울중앙지법 사형집행 8명 재심 공판
“고문 등 가혹행위 받아 진술 신빙성 없어”
민청학련 관련 부분 등 대부분 혐의도 무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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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1975년 긴급조치 1호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이 집행돼 숨진 우홍선씨 등 8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된 23일 오전 서울 서초동 지방법원에서 한 유가족이 오열하며 법정을 나오고 있다. 2007-01-23.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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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사법 사상 최악의 판결로 꼽히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법원이 숨진 피고인 8명한테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판결은 사건 발생 32년 만에야 진실이 밝혀진 것이지만, 사법부가 잘못된 과거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문용선)는 23일 1975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돼 유죄가 확정된 뒤 사형이 집행된 도예종씨 등 8명의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고문 등 가혹행위를 받은 것이 인정돼, 수사기관 및 검찰에서 신빙성이 보장된 상태에서 진술이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며
△인혁당 재건을 위한 반국가단체 구성
△북한 방송 청취 반공법 위반 혐의 등
주요 혐의사실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강철·유인태·이철씨 등과 접선해 ‘전국 민주청년학생 총연맹’(민청학련)을 구성하도록 지시했다는 여정남씨의 혐의(내란 예비·음모)를 두고도 “민청학련이 국가를 변란할 목적 또는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조직됐다는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1호 위반 부분은 이미 긴급조치 자체가 폐지됐다며 유·무죄 판단 없이 재판을 마무리짓는 ‘면소’ 결정을 내렸으며, ‘인혁당 재건위 사건’ 발생 이전에 여정남씨가 반독재 구국선언문 작성 등의 혐의로 대구지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가 군사법원에 병합된 부분은 “재심 사유가 없다”며 유죄를 인정했다.
재판부는 의사표현의 자유 등을 박탈한 유신정권의 긴급조치와 유신헌법 자체가 무효라는 변호인 주장에 대해서는, “위헌 여부를 심사할 권한이 재판부에 없다”고 밝혔다.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어 “32년간 말 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 온 유족들의 승리이자 인권의 승리”라고 밝혔다. 검찰은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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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란? 1974년 ‘전국 민주청년학생 총연맹’(민청학련)이란 이름으로 대학가 등에 유신반대 유인물이 배포됐다. 다음해 4월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됐다. 긴급조치에 따라 설치된 비상군법회의는 “민청학련 주동자들이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인혁당)과 연계를 맺어 왔고 공산혁명을 기도했다”며 관련자들을 구속했다. 구속된 도예종씨 등 8명은 대통령 긴급조치 및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돼 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유신정부는 선고 18시간 만인 다음날 새벽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이 사건을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 한다.
이에 앞서 대일 굴욕외교 반대시위가 거셌던 64년 8월14일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인혁당을 적발했다”며 41명을 구속했는데, 이를 ‘인혁당 사건’이라 한다. |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86091.html |
1975년 인혁당사건 때 조선일보 어땠나
[문한별 칼럼] ‘인혁당 사건’ 바라보는 비겁한 <조선>의 32년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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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서프 | 기사입력 2007.01.25 20:00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약칭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사형당한 8명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된 그 이튿날, 조선일보는 < '인혁당 사건' 재심, 무죄 선고의 의미 > (2007.1.24)라는 관련 사설을 냈습니다.
사설은 총 4단락으로 단촐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 단락에서 서울중앙지법의 무죄선고 이유를 밝히고, 둘째 단락에서 인혁당 사건을 간략히 회고하며, 셋째 단락에서 판결의 의미를 짚어보는 식의 구성입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신문의 사설들과 별 다를 바 없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결론부인 넷째 단락에 이르러 조선일보는 "다만 이번 재심을 계기로 정권의 과거사 파헤치기 바람에 올라탄 또 다른 재심 요구들이 무분별하게 잇따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며 그 특유의 색깔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진실의 발견은 중요"하지만 "그러나 판결 뒤집기가 남발되면 '
법적 안정성'이 위협받게 마련"이고, 따라서 "재심 결정권을 지닌 법원의, 옥석을 가려내는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법살인'을 바로 잡은 건 의미있지만 '과거사 파헤치기' 남발은 곤란하다?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과거사의 진실을 파헤친다는 이유로 이런 일들이 자꾸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인혁당 사건은 기왕 밝혀졌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 밖의 다른 사건들은 가급적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앞에선 인혁당 사건의 폭압성을 시인하며 마지못해 공감하는 척 했지만 뒤돌아선 눈 흘기는 조선일보의 복잡한 이중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앞의 세 단락만 보고서 "조선일보가 어쩐 일이야?" 하고 눈을 크게 떴다가 넷째 단락을 보고선 "그러면 그렇지" 하고 씁쓸한 웃음을 머금게 만드는, 생각하기에 따라선 자그마한 반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전개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조선일보가 마지막 단에서 이렇게 급커브를 틀 수 밖에 없는 딱한 사정이 있습니다. 소명을 기다리고 있는 사건들이 인혁당 말고도 무려 100건이 넘습니다. 어둠 속에 묻힌 군사독재 시절의 수많은
인권유린과 고문·조작 사건들이 오매불망 재심의 날만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조선일보에게 분명 좋은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장 인혁당 사건 하나만 갖고도 조선일보가 찬양해 마지 않는
박정희 유신체제의 정당성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터에 다른 사안들이 연쇄폭발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개혁세력에게 빼앗긴 '10년 한'을 풀기 위해 '
파란 나라' 쳐다보며 오매불망 기도하는 조선일보에게 이것은 아마 재난이나 다름 없는 일일 겁니다.
까닭에 겉으로는 "인혁당 사건은 정치권력이 법을 억압하던 시대의 산물이다"고 맞장구치는 척 하지만, 내심으론 교묘하게 딴지를 걸어 위기를 헤쳐나갈 궁리만 하고 있는 거지요. 그런 뒤틀린 심사가 이번 사설에서 적나라하게 노출된 것이구요.
이런 조선일보의 심정을 한 마디로 압축시켜 표현한 것이 바로 '법적 안정성'이란 말입니다. '법적 안정성'을 조선일보 시각에서 간단히 풀이하자면 "지난 시대의 잘못을 자꾸 들추면 이제까지 유지돼 온 기존질서가 크게 위협받게 되니 억울하더라도 좀 참아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더 쉽게 설명하면, "재심은 인혁당 사건으로 끝~! 더이상 과거는 묻지 마세요"가 되겠지요.
조선일보가 말하는 법적 안정성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인혁당 사건 당시 조선일보가 이를 어떤 식으로 보도했는가를 간단하게나마 추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혁당 사건 당시, 젊은이들에게 "고민하고 배우고 즐기라"고 충고한 조선일보
< 민청학련 노농정권 수립기도 > . 1974년 4월 26일자 조선일보 1면 톱입니다.
그 밑에 딸린 부제가 < 인혁당-조총련서 조종/폭력데모 4단계 조종 > 입니다.
조선일보 지면에 '인혁당'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이날 조선일보는 1,2,3,7면을 할애해 "공산계열인 인혁당이 학생시위의 배후를 조종했다~!"고 발표한 신직수 중정부장의 기자회견 내용을 앵무새처럼 충실하게 보도했습니다. 이때 작성된 사설 < 불순세력의 학원침투 : '민청학련' 사건의 중간발표를 보고 > 의 한 토막을 들어 보시죠.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공산계열의 불순세력이 우리 학원에 침투하여 다대수학생들의 움직임에 편승하면서 자기들의 독자적인 계획을 획책했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 학원의 불행임에 틀림없다....한마리의 미꾸라지가 강물을 흐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몇명의 극렬분자가 학원 전체를 어지럽힐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틀 후인 1974년 4월 28일, 조선일보는 <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 고민하고 배우고 즐기라 > 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시대의 암흑으로 고뇌하는 학생들더러 젊음의 혈기만 믿고 함부로 나서지 말라며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는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다 배웠다고 단정하고 쉽게 행동에 옮기는 것은 객기와 현기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살뜰하게 충고(?)해 마지 아니 하였습니다.
조선일보는 나아가 "
젊은이들이 미래에의 가능성을 성급하게 인식하고 미래를 현재에서 얻어 보려는 것은 덜익은 사과를 따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면서 "
젊은 세대의 행동은 기성세대에게 책임을 묻는 것으로 그쳐야 하며 행동의 좌절에 미(美)를 느껴야 한다"는 엽기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어지는 마지막 두 문단을 직접 감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결코 패배주의가 아니며 미래에 가능성을 보유한 젊은이가 가질 수 있는 슬기로운 마음의 여유이다. 젊은이들은 오히려 젊은 행동의 극대화를 충고하지 않는 기성세대를 경계하여야 한다. 그 기성세대는 정녕 젊은이들을 위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달리 무엇인가를 노리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왜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젊은이들에게 그것을 바라는가. 젊은이들은 그런 기성세대의 기대에 보답할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봄, 바로 젊은이들의 계절이다. 젊은이들이 이 절호의 계절에 깊이 생각하고 배우고 닦으면서, 폭풍우의 미주를 마시듯이 한껏 즐기기 바란다. 그것은 건강한 당신들의 특권이다."
요컨대, 미래를 바꾼답시고 괜시리 데모같은 것 하지 말고, 기성세대의 기대에 보답할 아무런 책임도 없으니, 이 좋은 꽃시절에 맘껏 즐기며 놀라는 겁니다. 긴급조치의 남발로만 겨우 버티던 박정희 유신정권의 '법적 안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일보가 내세운 논리가 이러했습니다.
해가 바뀌어 1975년 2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이 문공부 순시에서 인혁당 사건 등 진상 알리도록 지시하자,
조선일보는 예의 충성심을 다시 발휘해 < 일부 인사 정부전복음모를 무죄로 착각/인혁당 사건 등 진상 알리도록 > 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아 들었습니다. "긴급조치 없더라도 극형에 해당되는 것/알아듣지 못하면 법대로"라는 부제와 함께.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지시를 내렸다면 자칭 '비판신문' 조선일보는 아마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삼권분립의 정신을 훼손시키고 법적 판단까지 간섭하는 독재와 전횡을 일삼고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국민적 동의조차 구하지 못한 엉터리 판결을 홍보 부족 탓으로만 돌린다고 한 소리 했겠지요. 아무튼 그 시대에는 그랬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마침내
1975년 4월 8일 오전, 인혁당 관련 38명에 대한 상고심(대법) 판결에서 8명에게 사형이 확정되고, 형 확정 후 18시간만에 8명 전원을 교수형 시키는 사법사상 초유의 야만적인 참극이 빚어집니다.
이를 기사화한 조선일보의 지면에는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습니다. 그저 받아쓰기 시험 보듯 담담하게, 그 다음날인 4월 9일자 1면에 < 대법원, 39명 원심 확정 > (톱), < 사형 8-무기 9명 > (부제), 4월 11일 1면에 < 인혁당 관련 8명 사형집행 > (톱), < 대법 형확정 하룻만에
서울구치소서 교수형으로 > (부제) 기사를 실었을 뿐.
조선일보는 심지어 온세계에 충격을 던져 준 추악한 '사법살인'에 대해 그 흔한 사설조차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혹은 그럴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조선일보는 당연히 내야 할 목소리마저 스스로 억누르고 자크를 채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법적 안정성'에 기여하는 조선일보의 방식은 이처럼 독재권력에 대한 철저한 굴종과 비겁한 눈치보기, 그리고 죽음보다 깊은 침묵으로 나타났습니다.
암흑의 날에 조선일보가 내지른 언론자유의 목소리? 그러나 아주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혁당 관련자에게 대법에서 사형이 선고된 그 다음날, 조선일보는 '신문의 날' 기념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속내를 조심스럽게 토로했습니다.
< 자유언론과 양식 > 이라는 사설을 통해 조선일보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치졸한 변명이었습니다.
"항간에서는 우리의 언론이 모두 획일적인 제작을 하고 있어 그게 그것이라는 혹평을 가하고 있으며, 심지어 타락했다는 비난도 없지 않다. 신문과 뉴스를 멀리 하니 오히려 속 편하고 마음이 가볍더라는 사람도 있다. 신문이 천하에 태평무드를 조성하고 대중에게 점치적 무감각을 심어주며 좀더 많은 오락의 제공에 열중하기도 한다. 반면에 사회불안을 자극시키며 선정적인 지면제작으로 정치적 감정을 흥분시키기도 한다. 아무리 공정중립을 표방한다고 해도 언론매체가 지닌 양면성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대의 암흑을 제 입으로 떳떳이 말하지 못하고 대신 세인들의 입을 빌어 "획일적인 제작" 운운하며 복화술로 빠져나가는 조선일보의 신묘한 재주가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면서도 '공정중립'을 감히 입에 담는 용기 또한.
물론 언론자유를 탄압하는 무도한 정권에 대해 조선일보도 나름대로 할 말은 합니다. 한없이 정중하고 예의바르고 부드럽게.
"거국일치의 국민적 합의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세론과 판단력있는 세론에 의해 감독을 받고 지지를 받아야 하며 그러한 세론은 책임있는 언론에 보다 많은 비판의 자유를 용인하는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유가 효과적으로 작용할 것을 보증하는 힘은 오직 정부만이 발휘할 수 있다...."
비판의 자유를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게 용인해 달라'고 구걸하는 조선일보의 몸부림이 눈물겹지 않습니까? 언론자유에 대한 조선일보의 '타는 목마름'이 이 정도였습니다.
정부에 대해 한 소리 했으니 이제 독자에게도 할 말을 할 차례입니다. 조선일보가 당대의 지탄을 어떻게 비껴가는지 잘 지켜 보십시오.
"우리는 또한 국민과 독자에게도 할 말이 있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무책임하게 함부로 지껄이는 방언(放言)이 언론의 자유는 아닌 것이다. 신문이 사회의 거울이라고 해서 모든 사실을 부비판적으로 채용하여 보도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 정서적 기분에 빠지는 무책임한 언론은 취사선택되어야 한다.... 때로는 성역 속에 독자를 포함하여 영합하고 구미를 맞추려는 폐단이 없지 않다. 이런 언론의 자세가 바로 언론자유의 탈을 쓴 언론의 타락인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말해야 할 때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고뇌하는 신문이라 역시 남다르기는 합니다. 그런 신문이기로 오늘날 신문의 '사회적 책임'이 논의될 때 엉뚱하게 언론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일테지요. 하긴 진실보도도 제대로 못한 주제에 느닷없이 "독자의 구미에 영합하는 이런 언론의 자세야말로 언론자유의 탈을 쓴 언론의 타락"이라고 치받고 나서는 신문지에게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마는.
각설하고, 무죄한 사람들이 교수대에서 목을 메고 죽어간 인혁당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대한민국은 무려 30여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무죄'를 선고한 법정에서 터져나온 박수소리, 그것은 대한민국이 이제사 정의를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는 자축의 함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불편해 하는 어둠의 세력들이 아직도 우리 곁에 있습니다. 조선일보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선일보는 말합니다. "진실은 밝혀야 하지만 그러나 계속 밝히는 것은 곤란하다." 그러나....
어둠을 도려내는 '진실게임'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가해자가에겐 불편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계속 되어야 합니다. 암흑의 시대에 국가가 저지른 범죄를 드러내는 작업은 대한민국을 흑백공화국에서 여럿이 어울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칼라풀한 나라로 만드는 일입니다. 지난 세월의 억울함을 푸는 과거사 정리의 당위성이 거기 있습니다.
인혁당의 한을 풂으로써 우리는 겨우 따뜻한 미래를 향한 두번째 발자국을 떼었을 뿐입니다. 조선일보를 넘어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멉니다
http://media.daum.net/editorial/column/view.html?cateid=1052&newsid=20070125200012287&p=dailyse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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