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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남해안역사문화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사무총장
왕조 |
휘 |
본관 |
생몰연도 |
유배기간 |
유배시관직 |
최종관직 |
유배사유 |
숙종 |
김만중 |
광산 |
1637~1692 |
1689~1692 |
우참찬 |
판의금 |
기사사화 |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은 당쟁 속에서도 송시열 등과 같이 선비의 곧은 정신으로 직언하는 충신이었고, 지극한 효로서 모친을 봉양하는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으며, 유교사상의 소유자이면서 불교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타국의 말로 글을 짓는 것은 자존심과 애국애족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 된다면서 순 한글로 작품을 남긴 국문가사 예찬론자이며, 작품 중 사씨남정기는 한국 봉건가족제도로 빚어진 비극을 가정소설(통속소설)로 쓰고 당시 정계와 숙종을 풍자하였다.
이러한 충(忠)ㆍ효(孝)ㆍ문(文)의 대표 인물로 손꼽히는 서포 김만중은 누구이며 남해 유배생활 등을 알아보고자 한다.
서포 김만중(1637~1692)의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먼저 서포 김만중은 누구인가? 우선 시대적 상황을 보면,
숙종시대는 조선왕조 중 당파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시대로서 크게 4가지 사건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남인이 대거 축출 당하는 경신환국(1680년), 장희빈의 왕자 윤의 세자 책봉을 반대한 서인 제거와 남인이 득세한 기사환국(1689년),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통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갑술옥사(1694년),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헤치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장희빈이 사사된 무고의 옥(1701년)이 대표적인 것이다.
사색당파는 남인, 북인, 서인 노론파, 서인 소론파 4파이다. 당파싸움의 주도자나 중요인물을 열거해 보면, 남인 중심인물은 허적, 민암, 이의징, 권대운, 유명현 등이고 서인 노론파의 중심인물은 송시열, 김만기, 김만중, 김석주, 김수항, 김수홍, 이이명, 민정중, 김익훈, 목내선, 김덕원, 김춘택, 이미명, 심권 등이고 서인의 소론파 중심인물은 한태동, 남구만, 박세체, 박태보, 오도일, 윤증, 윤지완, 유상운, 최석정, 한중혁 등이다.
숙종 14년(1688)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장소의가 왕자 윤을 생산하자 숙종은 인현왕후의 양자로 삼아 원자로 삼으려 했으나 서인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두달 밖에 안 된 윤을 이듬해(1689) 원자의 정호를 정하고자 했다. 이에 서인측은 정비 인현왕후가 이직까지 젊어 왕자를 생산할 능력이 있으니 기다리자고 했다.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만에 왕자 윤을 원자로 정호하고 소의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서인 송시열을 비롯하여 노론계 관료들은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2번이나 올렸던 송시열은 사사되었다. 그리고 노론계였던 이이명, 김수항, 김만중, 김수홍 등도 유배되거나 사사되자 남인 권대운, 김덕원, 목내선, 이성제 등이 등용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되어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가 중전이 되면서 원자 윤이 세자에 책봉된다.
서포 김만중의 출생과 소년시절
부군 충정공 김익겸(金益兼)이 인조 15년(1637)에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굴복하자 강화도 남문 밖에서 순절한 후 부인 윤씨는 만삭된 몸으로 강화를 탈출하기로 결심하였다. 서포연보에『以爲宜浦邊 得船 則生 不得 則當投水 不見賊也』 즉, 나는 갯가로 가서 배를 얻으면 살 것이요, 얻지 못하면 마땅히 물에 몸을 던져 적에게 욕을 보지 아니함이 옳으리라 하였다. 배를 얻어 타고 가던 중 인조 5년(1637) 2월 10일 오시(오전11시-오후1시)에 배 위에서 김만중이 출생하니 어릴 때 이름을 선생이라 하였다.『二月 府君 生于舡上 小名曰船生』모자(母子) 서울 외갓집에 몸을 위탁하면서 윤부인의 각오는 대단하였다. 마음먹기를 내가 죽는 것이 참으로 시원하나 남은 어린것들로 하여금 입신케 하지 못하면 어떻게 군자(순절한 부군 김익겸)를 지하에서 볼 수 있겠느냐 라고 하였다. 『我死固快 使遺孤 不得立 則何以見君子於地下』이러한 굳은 각오로 두 아들을 양육하게 되는데 아들 만기와 만중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다른 사람에게 견줄 게 아니니 반드시 다른 날에 재주와 학문이 남보다 한 등급은 뛰어나야 겨우 남과 나란히 설 수 있나니라. 사람들이 행실 없는 이를 꾸짖을 적에 반드시 ‘과부의 자식이라’하나니 이 말을 너희들은 마땅히 뼈에 새길지어다. 라고 하였다.
『恒言汝輩 非他人比 必他日 才學 過人一等 纔得見齒於人 人之訽無行者 必曰寡婦之子 此言 汝宜刻骨』모친 윤씨는 친정에서 베틀과 수놓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소학(小學)ㆍ사략(史略)ㆍ당시(唐詩)는 윤씨가 직접 가르쳤고 맹자(孟子)ㆍ중용(中庸) 등은 곡식을 주고 사서 읽혔다. 그리고 좌씨전(左氏傳)은 너무 비싸 자식들이 사 달라고 하지 못하자 윤씨는 베틀 가운데 베를 끊어 사 주었고, 이웃에 홍문관 서리(書吏)가 있어 홍문관의 사서(四書)와 시경언해(詩經諺解) 등을 빌려다 읽혔다고 하니 윤씨의 자식 교육이 얼마나 정성스러웠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훈도 결과, 효종3년(1652. 16세) 진사 1등 제5인으로 합격하면서부터 초시와 과거에 급제하였다.
진사시 시관이 말하기를 이 아이의 재주와 문벌이 참으로 으뜸이 되기에 합당하나 나이가 매우 어리니 마땅히 복을 아끼게 하리라 『此子才地丨固合首選 而年甚少 宜與惜福』하였다.
효종 원년(1650. 14세) 7월 진사(進士) 초시(初試) 합격. 효종 3년(1652. 16세) 8월 진사 초시 합격. 9월 진사 1등(一等) 제5인(弟五人) 합격. 효종 7년(1656. 20세) 별시(別時) 초시 합격. 현종 3년(1662. 26세) 증광시(增廣試) 초시 합격. 현종 6년(1665. 29세) 4월 12일 정시(庭試) 장원 급제.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ㆍ예조좌랑(禮曹佐郞) 관직에 차례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서포는 숙종 13년(1687. 51세) 9월 13일에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여 나라 일로 말씀드리다가 엄중한 교지(敎旨)를 받고 금부(禁府)에서 명을 기다리게 된다. 하루 종일 문초를 받고 이튿날 14일에 숙종은 원찬(遠竄. 먼 곳으로 유배 보냄)하라는 명을 내리고 선천(宣川. 평안북도) 적소로 간다.
선천 귀양지에서 호를 서포(西浦)라 지었고, 부귀영화가 모두 몽환이라는 글(九雲夢)을 지었다는 내용이 서포년보에 나타나고 있다. 내용인 즉,
“부군이 이미 귀양지에 이르러 윤부인의 생신을 맞이하였다. 시를 지어 이렇게 말했다. ‘멀리 어머님께서 아들을 그리며 눈물 흘리실 것을 생각하니 하나는 죽어서 이별 하나는 생이별이로다’ 또 글을 지어 부쳐서 윤부인의 소일거리를 삼게 하였는데, 그 글의 요지는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두 몽환이라는 것이었으니 또한 부군이 뜻을 넓히고 슬픔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귀양살이하는 지방을 따라서 스스로 ‘서포(西浦)’라 호를 지었다”
『府君槪到配 値尹夫人生朝 有詩曰 遙想北堂思子淚 半緣死別半生離 又著書寄送 作消遣之資 其旨以爲一切富貴繁華 都是夢幻 亦所以廣其意 而慰其悲也 因謫寓之地 自號西浦』
남해 유배생활
서포는 선천적소에서 숙종 14년(1688) 11월 하순에 풀려났다. 풀려난 이유는 후궁 장소의(張昭儀)한테서 왕자가 태어난 이유였다. 이듬해 기사년 숙종 15년(1689) 정월에 숙종은 장소의의 아들을 원자의 위호(位號)를 정하라는 것이다. 이에 우암 송시열 등은 인현왕후의 나이가 한창이니 기다리자고 2번이나 상소를 올리자 2월 초순부터 대간들로부터 탄핵을 받게 되었다. 결국 송시열은 제주도로 귀양보내지고, 김만중은 윤3월 7일에 김씨라는 성도 쓰지 못하게 한 후 천극절도지명(栫棘絶島之命)을 받았다.
서포가 남해로 유배 온 것은 사실이나 적소 장소를 두고 의견이 많아 참고자료를 아래에 제시해 두었다.
이때 김만중의 집안의 큰조카 김진구(金鎭龜. 1651~1704)는 제주도로 유배, 둘째조카 김진규(金鎭圭. 1658~1716)는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숙종15년(1689. 53세) 3월 7일에 남해로 유배 떠날 때의 광경이 서포 연보에 나타나 있다.
“남해의 적소로 가다. 윤부인이 남성(南城) 밖 막차(幕次)에서 부군을 전송하게 되었는데 금오랑(金吾郞. 의금부 도사)이 부군에게 자기네들만 먼저 출발하겠다고 청하여 말했다. ‘들으니 대부인께서 나오셨다 하니 오늘은 잠시 머무르시고 내일 아침에 따라오셔도 무방합니다.’ 부군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 생각하고 함께 출발하자고 하였다. 윤부인이 말하기를 ‘나는 차마 네가 길 떠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겠으니 먼저 돌아가야겠다.’ 하고 가마에 올랐다. 부군은 가마 앞에서 절하여 하직하고 손수 가마의 주렴을 매어 드리고 문 곁에 서서 바라보다가 길이 구부러져 가마가 보이지 아니하자 눈물이 흘러 문득 얼굴에 가득해지니 비로소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부인도 또한 거리가 약간 떨어진 뒤에야 가마 안에서 소리나지 않게 울어 우는소리가 부군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김만중은 모부인 윤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상봉이 남해 유배지로 향하는 길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서포는 남해 유배지에서“재남해문양질배절도(在南海聞兩侄配絶島)”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다.
倉茫三島海雲邊(창망삼도해운변) 푸르고 아득하게 세 섬은 바다 구름 끝에 있고
方丈蓬瀛近接聯(방장봉영근접연) 방장과 봉래와 영주가 가까이 잇닿아 있어라
叔姪弟兄分占遍(숙질제형분점편) 숙부와 조카님 형제가 두루 나누어 차지하고 있으니
可能人望似神仙(가능인망사신선) 사람들이 보기엔 신선 같다 할 만도 하겠구나
두 번째 줄 ‘방장봉영’은 흔히 일컫는 삼신산으로, 방장(方丈)은 서포가 유배온 남해를 말하고, 봉래(蓬來)는 동쪽바다 가운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는 곳으로 거제도로 유배된 둘째조카 김진규가 있는 곳을 말하고, 영주(瀛州)는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사약을 구하려 보냈다는 가상적 선경으로 제주도에 유배된 첫째조카 김진구가 있는 곳을 말하는 것으로 삼신산이 남해도, 거제도, 제주도와 가까이 있다는 것이며, 세 섬을 서로 각각 차지하고 있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신선이라 표현하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해 9월 25일 어머니 생신일을 맞이하여 칠언율시로 “사친시(思親詩)”를 지어 읊었고 같은 해 늦가을이나 초겨울쯤에 적소에 오래된 나무와 대나무 숲이 있는데 칠언율시를 지었다.
이 시를 볼 때 김만중의 남해 적소를 짐작케 한다. 고목(古木)과 죽림(竹林) 그리고 용문산(龍門山)의 지명이 나온다. 그러나 현존하는 용문사(龍門寺) 인근에는 서포와 관련되는 지명이나 구전 등이 없지만, 용문사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앵강만 노도(櫓島)에는 서포와 관련되는 초옥터, 우물지, 허묘터 등이 있어 구전으로 적소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칠언율시는 앞으로 서포 남해 적소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며, 후일 참고자료가 될 것이라 보아진다. 그리고 사위 이이명(李頤命)이 숙종 18년(1692)에 남해로 이배되어 서포가 적사한 1달 뒤 5월에 적소를 찾아보고 지은 매부(梅賦)에는 동쪽에 있는 섬(노도?)을 지칭하는 내용이 있어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즉, 서포의 적소가 용문사 주위냐? 노도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지만, 필자는 노도라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서포의 사위 이이명의 매부는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고, 노도에서 용문사라 바라보며 시문을 지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산인 금산은 노도에서 가까이 보이는 곳에 있고, 죽림은 가택이 있으면 대부분 있다. 바다의 물결과 파도는 노도는 직접 영향을 미치지만, 용문사는 해안에서 골짜기를 따라 1km이상 떨어진 계곡 상부에 있다. 정확한 기록이 없을 때는 구전을 무시할 수 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노도에 적소가 있었음을 가능케 한다.
우선 김만중의 시 내용으로는 지형과 주위 풍광을 배경으로 어머니와 타계한 형과 김만중 자신을 비유하여 지은 시를 보자.
南海謫舍有古木竹林有感于心作詩(남해적사유고목죽림유감우심작시)
其一
龍門山上同根樹(용문산상동근수) 용문산 위에 있는 같은 뿌리의 나무
枝柌摧頹半死生(지사최퇴반사생) 가지는 꺾이고 시들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生者風霜不相貸(생자풍상불상대) 산 가지는 풍상이 너그럽게 보아주지 않고
死猶斧斤日丁丁(사유부근일정정) 죽은 가지도 오히려 날마다 도끼가 찍어대네
億我弟兄無故日(억아제형무고일) 생각하노니 우리 형제 탈 없던 날
綵服壎篪慈顔悅(채복훈지자안열) 색동옷 입고 재롱부리면 어머니 기뻐하셨지
母年八十無人將(모년팔십무인장) 어머니 나이가 여든인데 돌볼 사람 없으니
幽明飮恨何時歇(유명음한하시헐) 이승과 저승에서 머금은 한 어느 때나 그칠까
其二
北風蕭蕭吹竹林(북풍소소취죽림) 북풍이 쏴아하고 대숲에 불어
今朝憶我兩阿咸(금조억아양아함) 오늘 아침 두 조카 생각나게 하네
自我南邊汝心苦(자아남변여심고) 내 남쪽으로 쫓겨오면서부터 너희 마음 괴롭더니
何知汝亦海天南(하지여역해천남) 어찌 알았으랴 너희마저 바다 위 하늘 남쪽인 것을
風濤滔天不可越(풍도도천불가월) 바람과 물결 하늘에 넘쳐 넘을 수가 없는지
六月曾無一書札(육월증무일서찰) 여섯 달 동안 지금까지 편지 한 장 없네
我今病瘴日昏昏(아금병장일혼혼) 나 이제 풍토병 앓아 날로 어질어질해지니
死去誰收江邊骨(사거수수강변골) 죽어서 떠나면 누가 강변의 뼈를 거두어주나
그리고 거제도에 귀양 갔던 둘째조카 김진규가 숙부 김만중에게 보내려고 쓴 시 “망운산가봉기숙부(望雲山歌奉寄叔父)” 제목 밑에 세주(細註)로 “남해유망운산(南海有望雲山) 무편불과기(無便不果寄)”라 하였다. 즉 “숙부 김만중에게 남해에 있는 망운산가를 지어놓고 인편이 없어서 부치지 못했다”라는 시도 소개하겠다.
望雲山歌奉寄叔父(망운산가봉기숙부)
太行有孤雲(태행유고운) 태형산에 외로운 구름 있으니
縹渺山之巓(표묘산지전) 산꼭대기에 아득하네
狄公別母曾遠遊(적공별모증원유) 적공이 어머니 이별하고 일찍이 멀리 나와서
登山望雲心悽然(등산망운심처연) 산에 올라 구름 바라보니 마음이 처연하였네
自從公去雲亦散(지종공거운역산) 적공이 가고 나서부터 구름 또한 흩어져
飛落東韓滄海畔(비락동한창해반) 날아가서 떨어졌네 동한의 넓은 바닷가
海畔有山似太行(해반유산사태행) 바닷가에 산이 있어 태행산 같은데
幾年卷舒無人看(기년권서무인간) 몇 해를 오락가락 해도 보는 사람 없었던가
阿大中郞孝出天(아대중랑효출천) 숙부께서는 효도가 출천하시니
孺慕不衰耆艾年(유모불쇠기애년) 아이처럼 어머니 그리는 마음 늙은 나이에도 쇠하지 않네
晨昏溫淸固壽常(신혼온청고수상) 아침저녁으로 따스한가 시원한가 언제나 살피더니
白髮兒啼慈母前(백발아제자모전) 백발에도 어머니 앞에서 아이처럼 우는구나
天公爲憐遠別離(천공위련원별이) 하느님이 멀리 이별해 있는 걸 불쌍히 여기시어
謫居使住玆山邊(적거사주자산변) 귀양살이 이 산 가에 살게 하셨네
소재 이이명이 기사사화로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숙종 18년(1692) 5월에 남해에 이배되어 서포 적사를 둘러보고 말하기를 “맑고 깨끗하며 뛰어나 보통과는 다르고 또한 선어(禪語)도 능히 훤하니 알더니 불행히도 여로에 오른 널이 이미 섬을 나갔구나”하였다. 적소에 매화나무 2그루가 있어 자기 적소로 옮겨 심고 지은 매부(梅賦)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규장각 소장 『疎齋集』 권1에 있는 『梅賦』(영조 35년(1759)에 간행)
梅賦(매부)
凡物之有生氣者(범물지유생기자) 만물이 있음에 생기가 있는 인물로서
皆似有性情知覺(개사유성정지각) 성품과 정서 지각을 모두 가지고 있고
若孝子哭而墓柏死(약효자곡이묘백사) 효자로서 묘에서 곡을 하니 잣나무가 죽었다
兄弟分而庭荊枯者是巳(형제분이정형고자시사) 쇠잔한 형제들도 유배로 각각 떨어져 있으나
感應之理(감응지리) 감응의 이치는
不可誣也(불가무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西浦公謫舍(서포공적사) 서포공의 유배 유허에
嘗種二梅樹(상종이매수) 매화나무 2그루가 있어
每歲開花結子(매세개화결자) 매년 개화하여 종자의 결실을 맺었다
余自東邊移入島中(여자동변이입도중) 스스로 동쪽변에 있는 섬에서 생활하던 중
旅櫬巳北歸(려츤사북귀) 죽어서 관이 북으로 돌아갔다
而二梅獨立荒庭(이이매독립소정) 매화나무는 황폐한 마당에서 홀로 있었는데
憔悴欲死(초췌욕사) 초췌하여 죽어가고 있었다
余撫遺躅而憐之(여무유독이련지) 적소에서 나무를 어루만지며 가련한 나무를
移植於所居堂前(이식어소거당전) 나의 적소에 옮겨 심으니
謁然復蘇(알연복소) 일찍히 소생하여
枝葉巳向茂矣(지엽사향무의) 그때와 같이 무성하였고
卉植百品(훼식백품) 많은 풀들도 자랐다.
惟梅獨稟其幽貞皎潔之性(유매독품기유정교결지성)매화는 맑고 밝고 곧은 자취를 나타내니
公之好之也(공지호지야) 좋아하였다
正以其氣味之相近(정이기기미지상근) 서로 상통하니
而梅之不二公於存沒之際者(이매지불이공어존몰지제자)살고 죽는 것은 오직 어울림에 있다
眞若士之爲知巳(진약사지위지사) 선비로서 참을 깨달아
女之爲所天(여지위소천) 아내가 남편을 위하듯이
其意有足悲者(기의유족비자) 흡족하면서 슬픔이 있어
作賦以頌之(작부이송지) 부를 지어 노래한다
남해 적소에서 저술한 대표 작품
작 품 명 |
참 고 문 헌 |
창 작 동 기 및 내 용 |
주어찬요(朱語纂要) |
서포연보 |
*숙종13년(1687).남해향교에서『주자어류(朱子語 類)』전질(全帙)을 빌려다 완독(玩讀)하고 요점을 초록(抄錄)하여 한 책으로 엮음. |
선비정경부인행장 (先妣貞敬夫人行狀) |
서포집 서포연보 |
*숙종15년(1689)12월22일. 모친 윤부인이 73세로 하세 (下世) *숙종16년(1690) 정월. 김만중은 부고를 받고 당상 (堂上)에서 아래로 떨어져 기절함. 위패를 모셔놓고 메를 올리고 곡을 하니 이웃 할머니가 사립 밖에 앉 았다가 곡이 끝나면 자리를 뜨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 음. *8월에 대부인 행장을 쓸 때, 지난해 감옥에 있으면서 평소 대부인의 언행을 남모르게 기록해 두었던 것을 기록 함. |
서포만필(西浦漫筆) |
서포만필(홍인표 역) |
*서포만필은 상ㆍ하권이 있음. 하권에『내가 선천에 있을 때, 늙은 중을 만났는데...오늘 우연히 주자어 류를 보니....』하는 구절이 있음. 여기에 나오는 주 자어류는 남해 유배지에서 완독하였기에 서포만필 하 권은 남해에서 지었다고 봄. *서포만필 상권은 선천에서 지었다고 하며 중국역사와 인물에 관한 것이고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와 인물 및 시화(詩話) 등 임. |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
이규경(李圭景.1788- ? )의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ㆍ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김춘택(金春澤.1670-1717.김만중증손)의 논시문부잡설(論詩文附雜說)ㆍ북헌집(北軒集) |
*이규경은 구운몽을 서포가 지었고 남정기는 북헌이 지었다고 하였으나, *북헌 김춘택은 “사씨남정기는 김만중이 지은 것이고 자기는 다만 한문으로 옮겼다” 함. *사씨남정기는 장희빈 사건을 소설화 한 것.
*허구소설『사씨남정기』기록소설『인현왕후전』비교 (사)사씨의 취첩 권유. (인)인현왕후의 후궁 간택 권유. (사)교씨 취첩. (인)장씨를 후궁으로 삼음. (사)교씨 득남 후에 오만방자 함. (인)장씨 득남 후에 오만방자 함. (사)교씨의 사씨 모함. (인)장씨의 인현왕후 모함. (사)교씨가 사씨의 출문 후 처가 됨. (인)장씨가 인현왕후 폐출 후 왕비가 됨. (사)사씨 남정(南征) 함. (인)인현왕후 안국방에서 근신 함. (사)사씨 복귀하고 교씨 타살 됨. (인)인현왕후 복위되고 장씨 사약을 받음. *사씨=인현왕후, 교씨=장씨, 숙종=유연수 |
지극한 효성
서포 김만중은 유복자로서 소년시절에 철저한 어머니 윤씨의 훈도 아래 자랐고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어머니 윤씨를 위한 정성은 남달랐고 생을 마감할 까지 변함이 없었다는 사실이 글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도암(陶菴) 이재(李縡)(1680 - 1746)는 김만중을 평하기를,
“김만중 공은 성품이 지극히 효도스럽고 유복자로서 부공의 얼굴을 보지 못함을 평생의 아픔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모부인 섬기기를 심히 사랑(孝)으로 한 나머지 모부인의 뜻을 즐겁게 하는 것이 있으면, 옛날의 효자 효래자(孝萊子)가 하던 병아리 울음소리와 어린이의 울음소리까지 연출하였고, 모부인이 즐겨하신 옛 역사와 신기한 책으로부터 비관잡기(椑官雜記)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모아 밤낮으로 모부인의 좌우에서 읽어 드려 웃음꺼리로 삼았고,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공사(公事)가 아니고서는 모부인 곁을 떠난 적이 없었으며, 매일 아침저녁 신성(晨省)에 한번도 차질이 없었음을 이웃 사람들이 모두 알았다. 김공의 지성스런 효도가 이와 같았다.”
이렇게 김만중의 효도심을 극도로 표현하였다.
대표적인 문학 작품인 구운몽은 모부인 윤씨의 외로움을 위로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하고 사씨남정기도 숙종의 기사환국의 비리적 처사를 상징적으로 풍자한 것으로 어머니께 읽어 드리려고 지은 소설이다.
숙종15년(1689)년 3월 7일에 남해로 유배를 왔던 해 12월 22일에 모부인 윤씨는 세상을 떠났으나, 부고는 숙종16년(1690) 1월에 남해 유배지에서 비로소 소식을 듣게 되자 김만중은 당상(堂上)에 앉았다가 깜짝 놀라 부르짖으며 당하로 몸을 던져 까무러쳐서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김만중은 적소에 위패를 모셔놓고 곡(哭)을 할 때마다 섬사람들이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였으며, 이웃 늙은 할머니는 사립밖에 앉아 있다가 곡(哭)이 그치면 자리를 뜨기를 하루도 거르지 아니 하였다. 그러던 중 숙종 18년(1692. 56세) 4월 30일에 동복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병으로 세상과 하직하게 되었다.
서포연보에 의하면,
숙종 18년(1692) 4월에 김만중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하느라 지나치게 마음 상하여 병이 되었다. 게다가 남녘땅이 찌는 듯 덥고 습해서 부습(浮濕)과 해수(咳嗽.기침)와 혈담(血痰.피가 섞여 나오는 가래) 등 증세가 해가 갈수록 차차로 심해졌다. 또 귀양살이 하고 있는 여러 공(公)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잇달아 듣게 되자 3월에 육화공(사촌 김만증)에게 답장하는 편지에서는 “신상(身上)의 여러 증세들은 진실로 끝내 지탱해낼 도리가 없고 같은 시기에 쫓겨난 신하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 거의 없으니, 인생은 진실로 한바탕 꿈인가 합니다. 지난 가을 형님과 걸상을 마주하고 앉았던 일이 더욱 마음속에 또렷이 빛남을 깨달았습니다.”하였으니 아마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줄을 스스로 짐작했던 것 같았다.
병이 심해져서 모시고 있던 사람이 약을 바치면 물리치며 말했다. “내 병이 어찌 약을 쓸 병이겠느냐?” 마침내 30일에 고복(皐復)하였다.
목사공(서포 아들 진화)은 모친 이 부인을 뵈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단지 동복(僮復) 두어 사람만 곁에 있었다. 섬에 함께 유배 온 이(필자추정, 서인노론 심권ㆍ이미명)가 안타깝게 여기어 염습을 해 주었다.
그리고 서포 김만중의 시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알아볼 수 있다.
현종15년(1674) 정월에 첫번째 금성(고성)유배지로 떠날 때 지은 유시(有詩)에 어머니와 헤어지는 슬픈 심정이 나타나고 있다.
呑悲腹中結(탄비복중결) 슬픔을 삼키어 뱃속에서 맺히니
行子別母情(행자별모정) 길 떠나는 나그네 어머니와 헤어지는 정이로다
情知啼不可(정지제불가) 울어서는 아니되는 줄이야 분명히 알고 있으나
索笑從底生(삭소종저생) 공허한 웃음은 어디서 생겨나는고 하였다.
서포는 또다시 숙종에게 직언을 하게 된다. 숙종13년(1687. 51세) 9월 13일에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여 나라 일로 말씀드리다가 숙종에게 엄중한 교지(敎旨)를 받고 금부(禁府)에서 명을 기다리게 된다. 하루종일 문초를 받은 다음 이튿날 14일에 원찬(遠竄. 먼 곳으로 유배 보냄)하라는 명을 받고 두번째로 선천(宣川. 평안북도) 적소로 간다.
이별할 때 모친 윤씨는 “영해로 귀양가는 것은 옛 선현들도 면하지 못했던 바이니 가거라. 몸을 스스로 사랑하고 내 걱정일랑 말아라(嶺海之行 前修所不免 行矣 自愛勿以我爲念)”하고 당부한다. 이에 서포는 “슬픔 머금은 채 어머니 이별하고/손을 흔들어 친척들과 헤어졌네”하고 읊었다.
숙종13년(1687) 어머니 생신일인 9월 25일에 선천 적소에서 지은 시를 보자
其一
去年今日侍萱堂(거년금일시훤당) 지난해 오늘은 어머니 모시고
兄弟聯翩捧壽觴(형제연편봉수상) 형제가 나란히 장수하시라 잔을 올렸네
一落塞垣音信斷(일락새원음신단) 한번 적소에 떨어지니 소식은 끊기고
蘆山新塚巳秋霜(노산신총사추상) 노산의 새 무덤엔 어느 듯 가을 서리 내리네
其二
人間倚伏莽難推(인간의복망난추) 인간 회복의 인연은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니
歌哭悲歡只一朞(가곡비환지일기) 노래와 울음이며 슬픔과 기쁨이 단 한 해에 일어나네
遙想北堂思子淚(요상북당사자루) 멀리서 어머니가 자식 생각하는 눈물 생각하니
半緣死別半生離(반연사별반생이) 반은 사별 때문이요 반은 생이별 탓일세
其三
塞門殘月半窓明(새문잔월반창명) 변방 성문에 지는 달은 반나마 창에 밝은데
萬事關心睡不成(만사관심수불성) 온갖 일 관심사에 잠 못 이루네
夜夜林鳥廳未了(야야임조청미료) 밤마다 수풀 속 까마귀 소리 끝없이 들리고
更堪雲外斷鴻聲(갱감운외단홍성) 다시금 구름 밖 애끊는 기러기 소리 이겨내야 하리
기일은 어머니 생신일을 맞아서 작년에는 형제가 나란히 어머니를 모셨는데 올해는 그렇지 못했다. 기이는 형이 봄 3월에 죽으니 사별이고, 귀양간 서포는 생이별하였다. 기삼은 근심 걱정 때문에 잠 못 이룬다.라고 하였다.
숙종15년(1689) 9월 25일 어머니 생신일 남해 유배지에서 맞이하여 칠언율시로 “사친시(思親詩)”를 지어 읊었다.
思親詩(사친시)
今朝欲寫思親語(금조욕사사친어)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립다는 말 쓰자고 하니
字未成時淚巳滋(자미성시루사자)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 이미 흥건하다
幾度濡毫還復擲(기도유호환복척)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도로 던져 버렸던가
集中應缺南海詩(집중응결남해시) 문집에서 남해에서 지은 시는 반드시 빼버려야 하리
서포 김만중은 어릴 때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공직에 근무할 때를 제외하고는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렸다. 어머니 곁을 떠난 3번의 유배생활 중에는 더욱 어머니를 그리워했고 어머니의 편안함을 늘 걱정하고 있었다. 남해로 유배 갈 때, 부인 이씨와 아들을 데리고 올 수도 있었지만, 부인 이씨와 아들 진화를 어머니 곁에 두고 봉양하도록 하였다.
유배지에서는 유배에서 풀러나면 읽어 드리려고 쓴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국문소설은 고전소설의 선구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작품을 쓰게 된 동기는 역시 서포의 효(孝)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해 적소에서 남긴 사씨남정기
서포 김만중은 남해로 유배지에서 사씨남정기를 지었다.
사씨남정기는 철저한 국자의식(國子意識)에서 비롯된다. 자기나라 말을 버려두고 남의 나라 말로 시문을 짓는다는 것은 자존심과 애국 애족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주장한 국문가사 예찬론자이다.
한글소설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큰 획을 이루었으며 당시 생각조차 못할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 보아지며, 그 곳이 남해였다는 것이다. 사씨남정기는 서포의 조카 김춘택에 의해 한문으로 번역되어 궁중으로 몰래 들어가 읽혀졌다는 사실을 보드라도 문학적 가치성이 매우 높다.
사씨남정기는 한국의 봉건가족제도에서 야기되는 씨앗 싸움으로 비극성을 소재로 한 가정소설로서 숙종이 무고한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대신 장희빈을 왕후로 받아들인 기사환국 처사에 일침을 던진 풍자소설이다. 특히 사씨남정기는 국문으로 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고 현재 기록상으로는 한국 소설사상 최초의 국문소설로 알려져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인물중 유연수는 명나라 때 개국공신 유기의 후예로 명문거족인 사씨 집안에서 재색을 겸비한 사소이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유연수는 사씨와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안락하게 지내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는데 부인 사씨의 권유로 교씨를 소실로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교씨는 성격이 고약하고 요사스러운데다가 교씨가 아들을 낳았고 따라서 사씨도 아들을 낳자 질투심이 강한 교씨는 사씨를 모함하여 마침내 사씨를 남편 유연수로 하여금 축출하는 비극을 낳았다.
교씨는 집안 살림을 독차지하면서 선량한 시녀들을 학대하고 문객인 동청과도 사통하면서 남편 유연수를 해칠려는 음모에 유연수는 이에 휘말려 행주로 유배를 당한다.
동청은 현령이 되어 지방의 고혈을 빠니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가고 있는데 유연수가 유배에서 풀려나 북쪽으로 오던 중 동청이 살해하려고 하였으나 사씨의 음덕을 입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고 사씨와 다시 재회하게 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의 장소와 인물은 중국이다. 등장하는 인물은 중국의 한 가정을 숙종의 처사와 동일하게 하였고 숙종의 행위를 비유한 것으로 정면 묘사는 하지 않았으나 현실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유연수를 숙종으로, 사씨를 인현왕후로, 교씨를 장희빈에 비유한 것이다. 더욱 세밀하게 정리하여 보면,
1. 유연수의 부친 유현은 이부시랑 참지정사였다. 유연수는 급제하여 구혼하니,
2. 누이 두 부인이 매파를 통하여 유연수 부인 사씨(정옥)을 맞이하였다. 여승 묘혜의 관음 찬으로 사씨의 성품을 가름하였다.
3. 10년이 지나도 자식이 없자 사씨의 간청으로 교씨(채란)를 첩으로 들이다.
4. 교씨 혼인한지 반년 만에 잉태하여 아들 장주를 낳고 거문고와 노래와 술로서 유연수를 취하게 하다.
5. 사씨가 아들 인아를 낳다. 교씨의 본격적인 질투가 시작되고 동청이 문객으로 들어오다.
6. 교씨는 사씨를 헤칠 계획을 세우고 동청과 사통하여 동침까지 하다.
7. 사씨는 모친 병환으로 신성현으로 갔으나 별세하고 이때 유연수는 산동으로 백성을 살피 려 떠났다. 저택에 남아있는 동청과 교씨는 계략으로 가보인 옥지환을 훔치고 사건화시 켜 사씨를 쫓아내기 위해 음모를 꾸미다.
8. 교씨 두 번째 아들 봉추를 낳다. 유연수의 누이 두부인은 옥지환사건의 범인을 찾지 못 하고 아들이 장사부 총관으로 승진되어 장사로 떠나므로 따라가다.
9. 교씨는 사씨를 없앨 계략으로 장남 장주를 죽이고 그 죄를 사씨에게 뒤집어씌우다.
10.교씨의 모함으로 사씨는 출거되었으나 친정으로 가지않고 성도에 있는 시부모 묘소 아래 로 가자 교씨는 4번째 계략으로 사씨를 흠모한 냉진에게 누이 두부인의 필적을 위조하 여 냉진의 첩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1.사씨의 꿈속에 남쪽 5천리로 떠나라하였다. 남쪽5천리는 두부인이 있는 장사 쪽이다.
12.동악양루에서 몸을 더져 죽을 각오하였으나 잠깐 조는 사이 꿈속에 낭랑이 나타나 따라 가 보니 순임금의 두 왕비가 말하기를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니 50년 후에 만나자면서 바 삐가라 하였다.
13.여승 묘혜는 비몽사몽간에 관음이 현몽하여 사씨를 구하라하여 묘혜는 사씨를 찾아서 배로 동정호 수월암에 오니 16년 전에 사씨가 지은 백의관음화상과 찬시를 만났다.
14.동청과 교씨는 유연수를 쫓아낼 계략을 세우다. 동청은 유연수의 글 중에 천서옥배(옥으 로 만든 술잔과 하늘에서 내려온 글)를 임승상을 통하여 임금에게 바치다.
15.유연수는 행주로 귀양을 가다. 동청은 현령이 되고 이어 태수가 되어 유연수의 모든 재 물을 가지고 떠나다. 사씨의 아들 인아를 죽이라고 하니 시녀는 수풀 속에 두다.
16.천자 책봉으로 유연수는 특사로 유배에서 풀려나다. 길에서 동청태수 부임을 만나고 데 리고 있던 설매를 만나 그동안의 모함을 듣다.
17.묘혜는 유연수를 강가에서 구하여 사씨와 상봉하게 하다.
18.유연수 고향으로 돌아오다. 동청은 조정에서 죄를 물어 죽이다. 교씨는 문객 냉진과 통 하여 도망가다 도적에게 재물을 빼앗기다. 유연수는 복직되어 이부시랑이 되다.
19.사씨는 동정호 수월암에서 돌아와 유연수와 같이 부부생활을 하다.
20.사씨는 유연수에게 임씨를 제첩으로 간청하다. 아들 인아를 만나다. 낙양 창루에서 창기 노릇하는 교씨를 불러와 치죄하고 저자에서 죽이다.
서포의 대표작인 사씨남정기를 요약해서 정리해 보았다. 자기 앞의 행복을 위해 불의를 저지런 일들은 언젠가는 밝게 밝혀져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서포 김만중의 남해유배 생활을 종합하여 볼 때, 기사사화로 숙종 15년(1679) 3월 7일. 53세로 유배 되어 숙종 18년(1692) 4월 30일까지 3년 54일 동안 남해 적소에서 남긴 작품은 사씨남정기, 서포만필하권, 윤부인행장, 주어찬요를 저술하였고, 대표적인 시문으로는 사친시, 남해문양질배절도, 남해적사유고목죽림유감우심작시 등이 있다.
남해의 적소를 용문사 주위 또는 노도를 말하고 있다. 남해의 용문사는 남해의 대표적인 신라 고찰이고 망운산은 진산, 금산은 영산으로 표현하는 지명들이다. 용문사와 노도의 위치는 앵강만이 시작되는 곳에 노도가 있고 끝나는 해안 내륙에 용문사가 있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포의 시에는 용문사를 배경으로 주위를 소재로 하여 시를 지었고 사위 이이명은 동쪽에 있는 섬이라 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유허 노도에는 초옥터, 우물지, 허묘터가 있어 간접적으로 노도가 유배지 적소임을 암시하고 있다. 차후 연구 과제임을 밝혀둔다.
서포 김만중은 적소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병을 얻어 생을 마감하였다. 서포 년보에 같이 유배 온 이가 안타깝게 여기고 염습을 해주었다고 하는 데 염을 해준 유배객은 누구일까? 숙종 때 남해로 유배 온 사람은 대제학 서포 김만중을 포함하여 한성좌윤 남구만, 대사헌 이이명, 영의정 권대운, 이조판서 유명현, 지평 심권, 부교리 이미명 등 모두 7명이다. 이 중에 있을 것이라 본다. 남구만은 서인 소론으로 적사 전에 유배에서 풀려났고, 이이명은 서인 노론으로 적사한 한달 후 널이 떠난 다음 이배되어 왔고, 권대운은 남인으로 관직에 있다가 적사 후인 1694년 갑술옥사로 유배 왔고, 유명현도 역시 남인으로 숙종6년(1680)에 관직에 있다가 경신대출척에 의해 남인이 대거 실각되어 남해로 유배 와서 기사사화로 풀려났다.
나머지 심권과 이미명은 기사사화로 서포와 같이 남해로 유배를 왔고 적사 때 남해에 유배되어 있다가 숙종 20년(1694)년 갑술옥사로 풀려났다. 서포의 병사가 숙종 18년(1694)이고 같은 당파인 서인 노론이기에 서포가 적소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적소로 가서 염을 해 주었을 것으로 필자는 추측하여 본다.
서포는 숙종 18년(1692) 4월 30일에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후 5월 아들 목사공에 의해 널이 남해를 떠났고 9월 27일에 형 서석공 김만기의 묘가 있는 경기도 광주로 이장하였다. 다음해 숙종 19년(1693)에 관작이 회복되었고 숙종 28년(1702)에 장남인 목사공 김진화가 의성에서 ‘서포집을 간행하였다.
숙종 37년(1711) 8월 12일에 서포선생의 묘를 경기도 대덕산 서좌로 다시 이장하였다.
모진 시련의 세월을 걸어야만 했던 서포 김만중! 끝으로 서포선생의 인생과 인격 됨을 종합 정리하겠다.
유복자로서의 출생과 모친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생을 마감한 서포는 인생을 어머니로부터 시작하였고 어머니로 인하여 마쳤다. 또한 생의 50%를 어머니의 철저한 훈도아래 교육되는데 어머니의 한손엔 회초리, 한손엔 책으로 공부시키면서 과부자식이란 소리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머니는 자주와 자립정신을 키웠던 것이다.
이렇게 성장해서인지 식견은 좁았지만, 옳다는 일에는 고집이 세었고 자기의 논리를 펴는데 다른 사람보다 많은 지식을 가져 떳떳하게 정립하였다. 서포는 유가의 명가에서 태어났기에 유학은 물론이었고, 불서, 도가서, 제자백가서, 범어, 비관잡기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였기 때문이다.
서포를 말하면 정치가, 효 실천가, 문필가, 국문 애찬론자, 유학자, 불교옹호론자이다.
서포는 태어나서 정시에 장원급제하기 까지 29년 동안 인격과 인품이 형성되었고, 관직생활 25년은 본인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격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결국은 남해 유배생활에서 병고에 시달리다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정치가로서의 어려움의 첫째는 숙종 비(인경왕후)의 근친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겸손하고 경계하며, 요직을 피하여 멀리했고 청렴하게 행동하였다. 벼슬이 높을수록 언론이 강직하고 악(惡)이 신장할 때마다 선(善)을 추구하였기에 찢어지게 가난하였지만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효 사상을 실천한 사람이다.
모친이 서포를 포태하여 출생하게 된 것도 모친의 억척같은 삶과 혼란 중에서도 포태한 서포를 출생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서포는 탄생충격을 받은 것이다. 흔히들 포태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서포 모친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서포는 출생하여 자랄 때, 주위에는 부친을 비롯하여 남자들은 없었고 오직 어머니의 사랑과 교육으로 성장하였다.
그래서 믿는 것은 어머니뿐이었다. 이렇게 되니 어머니에게 효를 행하게 된 것은 남의 눈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서포의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왔다고 볼 수 있다. 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공직 업무를 떠나서는 항상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효자 효래자가 하던 병아리 울음소리까지 내었고 서적을 읽어드려 어머니를 즐겁게 하였다.
유배로 인하여 어머니 곁을 떠날 때는 어머니를 그리는 시와 글을 지었고 남해 유배시 죽음을 맞이한 것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적소에서 받고난 후 충격을 받아 병을 얻어 결국은 서포도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서포의 생사는 어머니로부터 발생한 일 이었고 관직 동료나 선후배들도 어머니에 대한 서포의 효(孝) 실천을 모두 알고 있었다.
서포는 조선시대 손꼽히는 문필가였다.
글을 짓는다는 것은 해박한 지식이 없이는 활기찬 문장을 만들지 못한다. 짧은 지식으로 인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기둥 같다 또는 코끼리 배를 만지면서 천정같다고 하듯이 일부분을 전체인양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포는 글을 고심 끝에 아껴 쓴 흔적들이 보였고 서포가 지은 글들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서포만필과 작시한 365수의 시들은 정치, 문화, 역사, 문학, 종교 등 전체를 담고 있어 후대인들의 연구과제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작품을 통하여 그 시대의 실상을 알 수 있고 대중과 관료들에게 간접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국어를 사랑한 국문 애찬론자이다.
서포는 학사나 사대부 집안에서 지은 한시(漢詩)나 부(賦)가 훌륭하다고 하지만, 그 진가를 따진다면 국어가 더욱 훌륭하다는 것이라 하였다. 아낙네들의 ‘에야디야’ 노래가 저속하지만 글과 뜻이 통한다. 라고 했다. 즉 자기나라의 말을 자기나라의 글로 적어야 천지가 감동하고 귀신과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이기에 한문으로 적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 국문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사씨남정기를 지었던 것이다.
근대에 있어 1860년에 최제우 수운대신사가 동학을 창도하고 경전인 용담유사를 지어 교인들에게 교도 하였는데 역시 순 한글로 지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서포와 수운대신사는 국어의 우수성을 과시하였고 이러한 것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널리 알려질 때, 우리나라의 국어 위상도 거듭날 것이다.
전통 유가 집안에서 태어난 유학자이다.
조선시대는 숭유(崇儒)시대로서 유학을 알지 못하면, 정계에 나아가지 못하는 때로써 태어날 때부터 오로지 유서(儒書)에 매달려야 했다. 서포도 역시 유식한 어머니의 훈육아래 소학·사략·당시 등을 배우기 시작했고 맹자·중용 등을 습득하도록 했다. 그러한 서포의 노력 결과 서포는 14세의 어린나이에 진사시 초시에 합격함으로써 시관들을 놀라게 했다.
정시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임금과 같이 베푸는 경연자리에서도 유학의 여러 문구들을 인용하여 답하고 강연하였을 뿐 아니라 현종7년(1666. 30세)에는 세자시강원이 되어 세자(숙종)를 가르치기도 했다. 유학자로서 선비정신을 살려 주위의 눈치를 보지 낳고 직언하면서 주위로부터 시선이 집중되기도 했다.
억불(抑佛)정책에도 불구하고 불서(佛書)를 연구하고 불교우위론과 불교옹호론을 폈다.
서포는 기자(箕子)보다 불씨(佛氏)가 우리나라 문명화 되는 가정에 기여한 바가 많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나라는 비록 운태사가 봉해졌던 나라라고 일컬어지지만, 진한(秦漢)에 이르러 그 유풍이 없어지고 나라의 풍속이 어리석고 사납기가 선비(鮮卑)·말갈(靺鞨)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동진 말(末)의 승려 아도가 와서 비로소 문자지교(文字之敎)가 있음을 알고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김만중은 려말(麗末)에 정몽주와 이색 등도 불교 때문에 공맹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은 려말선초에 주자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도 상당부분 불교의 전파에 의해 마련되었다는 논리이다.
서포의 작품 중 구운몽은 금강경(金剛經)을 소재로 하여 불교의 공사상(空思想)과 수선자각(修禪自覺)을, 사씨남정기는 화엄경(華嚴經)의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을 소재로 부녀·대중에게 관음사상과 지비구제를 실현코자 했던 것이다.
<문헌 : 西浦文集, 西浦漫筆, 金萬重(李明九, 韓國의 人間像, 新丘文化社, 1967), 西浦小說硏究(金戊祚, 螢雪出版社, 1976), 西浦의 漢詩考(金戊祚, 又軒丁仲煥博士回甲紀念論集, 1974), 西浦評論硏究(金周漢, 嶺南語文學 3, 1976), 九雲夢硏究(丁奎福, 高麗大學校出版部, 1976), 西浦漢詩硏究(趙鍾業, 語文硏究 9, 1976), 金萬重(趙東一, 韓國文學思想史試論, 지식산업사, 1979), 西浦漫筆에 나타난 批評의 特性(崔信浩, 韓國學報 25, 一志社, 1981), 金萬重硏究(丁奎福, 새문社, 1984), 金萬重文學論硏究(尹浩鎭, 韓國學大學院석사학위논문, 1982), 西浦의 漢詩硏究(權永大, 高麗大學校大學院석사학위논문,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