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애정의 조건'아직도 남아 있는 가부장적 현실

[이노랠빌려서]

여자의 과거는 유죄인가? <애정의 조건>, 가부장제의 벌집을 건드리다

<애정의 조건> KBS2 토·일 저녁 7시50분

‘여자의 과거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주홍글씨인가?’ KBS 주말드라마 <애정의 조건>이 던지는 이 화두에 대해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드라마 중에서는 드물게 고전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애정의 조건>은 두 자매의 순탄치 않은 삶을 그리면서 방영 내내 높은 관심을 받아왔다. 얼마 전까지는 금파(채시라)를 둘러싼 외도와 이혼문제가 주요 테마였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다 맞바람을 피우고 이혼당한 금파의 괴로운 나날들이 이어지면서 시청자의 동정을 받았고 역경을 헤치고 꿋꿋하게 홀로서기를 하는 금파의 모습에 대리만족을 얻는 시청자도 있었다. 금파가 남편과 재결합을 하고 은파(한가인)도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 장수(송일국)를 만나 결혼하면서 해피엔딩의 기색이 보이는 듯했으나 최근 또 다른 갈등국면에 접어들었다. 혼전동거와 유산의 경험이 있는 은파의 과거를 장수가 알게 되면서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모진 핍박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다정한 부부인 척하면서 은파에게 온갖 방법으로 인간적 모멸감을 안겨주는 장수와 대역죄인처럼 그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사죄하기에 바쁜 은파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극단적인 갈등구조가 본격화되면서 시청자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30% 안팎이던 시청률은 40% 가까이 치솟으며 시청률 순위 1위를 차지했고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매일 수천건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 의견은 가지각색. 은파에 대한 동정과 장수 옹호, 이혼 종용 등 드라마 내용에 대한 의견부터 혼전순결에 대한 논쟁까지 그야말로 ‘설전’이 펼쳐지고 있다. 가장 주된 반응은 ‘은파의 과거가 그토록 죽을 죄인가’ 하는 것이다. ‘시대는 디지털이니 하며 하루하루 재빠르게 바뀌는데 이놈의 성관념은 어찌 이리도 안 바뀌는지. 은파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잖아요. 과거의 잘못으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야 하나요?’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되나? 장수도 깨끗한 사람은 아닌데 은파가 죄인취급 받으며 살아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은 건가요? 여자는 10% 잘못하고 남자는 90%를 잘못해도 모든 잘못을 여자한테만 뒤집어씌우는 것 같아요. 요즘 그렇게 사는 여자 없는데 너무 비현실적이네요.’

이러한 시청자 의견에서 알 수 있듯이 혼전순결, 특히 여자의 혼전순결에 대해 <애정의 조건>이 보수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사실 <옥탑방 고양이> 이후 최근의 <풀하우스>까지 동거를 소재로 한 드라마들은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된 혼전동거를 가볍게 풀어냄으로써 사회의식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혼전동거가 무책임한 불장난이 아니라 오히려 결혼에 대해 현실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와중에 혼전동거를 마치 원죄처럼 뒤집어쓴 은파의 불행은 구시대적 고정관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강혜란 사무국장은 “혼전동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반사회적이고 과거지향적인 가치관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여성의 혼전순결에 대해서만 문제삼아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며 “남편의 방만한 성관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결한 여성과 결혼하려고 하는 이중성이 부각됐다면 오히려 새로운 성관념에 대해 논쟁의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애정의 조건>은 전적으로 아내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 있어서 아쉽다”고 말했다.

물론 장수를 옹호하는 쪽 의견도 만만찮다. ‘은파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만큼 배신감도 큰 거겠죠.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지 생각하면 장수의 행동이 다 이해됩니다’ 하는 연민부터 ‘동거, 파혼, 유산, 유흥업 종사 등의 이력을 갖고 있던 여자가 부잣집 남자를 만나 순조롭게 사랑받으며 사는 것도 불평등하지 않나요? 은파의 욕심이 부른 자업자득 아닌가요?’라며 은파를 비난하는 의견도 많다. 이는 혼전순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연출을 맡은 김종창 PD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할 것일 뿐”이라며 “실제로 한국사회는 드라마에서보다 더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드라마에서 은파가 처한 상황만을 두고 <애정의 조건>을 가부장적인 드라마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금파의 경우 남편과 재결합한 뒤 자신의 외도를 알게 된 시어머니로부터 비난을 받으며 은파와 마찬가지로 ‘여자의 과거는 용서받을 수 없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던지지만 자신의 신념과 일에 대해 확신에 찬 당당한 여성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지난해 <노란 손수건>을 연출하면서 호주제 폐지에 대한 여론을 확산한 공로로 여성부 주관 남녀평등방송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김 PD는 “드라마 내용이 유치하고 통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여성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했다”며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인식의 변화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오히려 드라마를 보면서 남성 중심적인 사고에 대해 각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이제 <애정의 조건>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시댁에서 은파의 과거를 알고 분노하자 은파 아버지가 사돈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를 하고, 은파가 가출해서 자살 시도를 하자 장수가 구출해오는 등 논란의 소지가 있는 전개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어쩌면 10월 말로 예정되어 있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판단할 수 있을 듯하다. 김 PD는 “한국사회의 여건상 가족까지 모두 용납하고 화해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금파와 은파가 행복해지는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맺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회의 많은 여성들이 겪었을 법한 고난의 길을 걸어온 두 자매의 ‘해피엔딩’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피소현/ <스카이라이프> 기자 plav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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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과거에 대한 설문조사

어떤 과거도 밝혀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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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의 조건>이 논란을 일으키자 ‘여자의 과거’에 대한 각종 설문조사가 이어졌다.

먼저 여성포털사이트 젝시인러브(www.xy.co.kr)에서는 8월30일부터 9월7일까지 이용자 1743명(남 175명, 여 1568명)을 대상으로 ‘결혼 전 과거를 밝혀야 할까’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가장 많은 퍼센트를 차지한 것은 ‘어떤 과거도 밝혀선 안 된다’는 대답으로 남자 43%, 여자 47%가 응답했다. ‘대충 가벼운 정도만 밝힌다’는 남자 30%, 여자 28%, ‘들키기 전까지 침묵’은 남자 11%, 여자 8%로 집계됐다.

지난 9월6일 방송된 SBS <야심만만>은 좀더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내 여자의 이런 과거는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주제로 남자 5373명이 대답한 결과에서 1위는 ‘엄청난 카드빚, 돈 씀씀이가 헤픈 것’. 2위에서 5위까지는 ‘과거 남자를 잊지 못한 것’, ‘과거는 상관없다’, ‘과거에 남자였던 것’, ‘동거’가 뒤를 이었다. 1, 2위가 육체적인 관계에 관련된 것이 아니고 과거는 개의치 않는다는 대답이 3위에 오르는 등 인식의 변화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성관계를 한번이라도 가졌다면 안 된다’가 6위, ‘동성애 경험’이 7위, ‘낙태 수술 경험’이 9위에 오른 것을 보면 우리 사회 인식이 아직 그리 개방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찌보면 드라마 속 은파가 겪는 일이 아주 현실적인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노랠빌려서]

급격히 변화는 세태에 우리 나라 가정이 적응하기 힘들기도 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