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느리밥풀꽃
불암사에서 내려와 오솔길에 접어들자 나무아래 그늘진 곳에 빨간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그 저 요즈음 자주 볼 수 있는 ‘물봉선’이려니 하고 지나치려다 보니 물봉선과는 다르게 보인다. 새빨간 아랫입술에 하얀 게 두개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가. 물봉선이 아닌 전혀 다른 꽃이다.
듣기만 해도 재미있고 궁금한 들꽃인 ‘꽃며느리밥풀’이다. 지방에 따라서는 ‘새애기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꽃은 전국의 산과 들녘의 주로 낙엽활엽수 숲 가장자리에서 높이 50cm 내외로 자라는 ‘현삼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이다.
△ 불암사의 ‘며느리밥풀’꽃의 전초(전체 모습) - 아침이슬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 그런지 깨끗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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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추수의 시 '꽃'이다.
그 시인의 말마따나 꽃에게는 저마다 이름이 있다. 이름뿐만 아니라 그 꽃에 담긴 전설과 사연이 있고, 꽃말도 있다.
이 꽃 이름의 유래는 좀 생뚱맞고, 가슴 아픈 전설이 있다.
그 사연인 즉 갓 시집간 새댁이 밥알을 물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제삿밥을 훔쳐 먹었다는 오해를 받고 죽은 며느리의 무덤에서 피어났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옛날, 외동아들 집에 얌전한 며느리를 맞게 되었는데, 그 홀어머니는 처음에는 며느리에게 잘 대해주다가, 아들을 빼앗긴 듯한 느낌에 점점 심하게 박대를 했단다.
어느 날 제삿밥을 짓던 며느리는 밥이 다 익었는지 알아보려고 밥알 몇 개를 입에 넣었다가 들켰다.
조상에게 올리기도 전에 먼저 밥을 먹었다고 트집 잡아, 때리고 구박을 했다. 변명도 못해보고. 원통해서 속앓이 하다가 끝내 죽고 말았단다.
동네 사람들이 불쌍해서 정성껏 묻어주자, 그 무덤에서 꽃이 피었는데, 마치 밥알을 안 먹고 입에 넣고 씹어만 봤다는 말없는 시위처럼 혓바닥에 밥알 두 개를 물고 있는 듯이 보였고, 그로부터 ‘며느리밥풀’꽃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 ‘며느리밥풀’꽃의 꽃 접사 - 105mm 마이크로렌즈로 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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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밥풀’꽃의 가지는 길게 뻗고, 잎은 마주보기로 나고, 긴 난형이며, 끝은 뾰족하나 밑 부분이 둥글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잎자루는 1cm정도이다.
그리고 꽃은 8-9월에 붉은색으로 이삭처럼 피어나며, 연한 백색 털이 많다. 그러나 햇볕을 많이 받는 곳에서는 적자색이 된다.
꽃받침은 4개로 갈라지고, 아랫입술의 가운데에 흰 밥알 같은 2개의 백색 무늬가 있다.
△ ‘며느리밥풀’꽃의 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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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밥풀’꽃은 우리의 옛 여인들의 한 맺힌 시집살이를 대변하는 꽃이다. 이 꽃은 다른 식물의 양분을 얻어먹고 사는 반기생식물이라는 것도,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남자에 예속된 존재로 살아가야 했던 우리네 옛 여인들의 운명과 어쩌면 그리도 똑 같은지 모르겠다.
위에서 보았듯이 ‘며느리밥풀’꽃은 가난했던 시절 며느리의 한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꽃은 세상을 한탄스러워 하며 수줍음을 잘 타서 산 속에서만 피지만, 밀원용이나 관상용으로 쓰이고 있다.
□ 며느리밥풀꽃의 종류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며느리밥풀’꽃이란 이름은 식물도감에 없다".
참나무라는 식물이 식물도감에 없는데, 굴참. 신갈. 떡갈. 졸참.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과 식물을 통칭해서 그냥 ‘참나무’라고 하는 것이지 참나무라는 식물은 없다.
또, 가을에 야생으로 피는 국화과 식물을 통칭해서 그냥 들국화라고 부르는 것이지 실제로 들국화라는 식물은 도감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듯이 ‘며느리밥풀꽃’도 마찬가지다.
식물도감을 아무리 뒤져도 며느리밥풀꽃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꽃며느리밥풀’, ‘흰며느리밥풀’, ‘수염며느리밥풀’, ‘알며느리밥풀’. ‘애기며느리밥풀’ 같이 앞에 수식어가 하나씩 더 붙는다.
며느리밥풀속에는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꽃며느리밥풀’(Melampyrum roseum)류
와 중부 이북 등 북부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애기며느리밥풀’(M. setaceum)류
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꽃며느리밥풀’은 며느리밥풀꽃의 기본종이고, ‘애기며느리밥풀’은 이름 그대로 꽃이 작고 가는 잎을 가진다.
또 그 꽃며느리밥풀에 속하는 종류 중에서 포 가장자리가 가늘게 갈라지는 변종인 ‘수염며느리밥풀’이 있다.
이럴 때마다 그냥 기본종인 꽃며느리밥풀이라든지 며느리밥풀꽃이라고 하면 될 터인데 굳이 구분하려고 해서 비전문가들을 헷갈리게 하고 식물명을 잘 모르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한 것 같다.
그냥 기본종으로만 부르고 그에 속하는 변종과 품종들을 모두 포함해서 함께 부르면 좋을 성 싶다.
생물의 종을 구분하여 부름으로써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자연물의 이용을 보다 원활하게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고 하지만, 세세한 특징까지 들어가면서 개체변이 수준에 불과한 식물을 나누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게 생각할 때가 너무 많다.
△ 며느리밥풀꽃의 기본종인 ‘꽃며느리밥풀’ - 이 기본종과 다른 새로운 종이 발견되거나 변이가 이루어져서 각기 다른 종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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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밥풀꽃의 기본종 중의 한가지인 ‘애기며느리밥풀’ - 꽃며느리밥풀에 비하여 꽃도 작고 잎이 가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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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며느리밥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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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며느리밥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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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 불암사 앞 계곡에 보이는 며느리밥풀꽃은 대부분 수염며느리밥풀로 보인다. 전문가들도 정확하게 동정하기란 어려운 법이니까 그저 며느리밥풀꽃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빨간 혀바닥이라 해도 좋고 빨간 입술이라 해도 좋다. 그 위에 하얀 밥알 두개가 보이면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다.
△ ‘꽃며느리밥풀’(Melampyrum roseum)류에 속하는 <수염며느리밥풀 (Melampyrum cili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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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관련 자료를 찾다 보니 재미있는 게 있어서 여기 소개해 본다. 여자의 한을 주제로 하여 ‘유재무’가 감독하고 ‘나영희 천호진’이 주연하는 영화가 1989년에 개봉된바 있다.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이다.
이 영화는 ‘이현세’의 본격적인 성인만화 ‘며느리밥풀꽃에 대한 보고서’ 3권을 영화화하면서 제목도 그대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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