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덕이 : 안성지방의 사당패 여자 꼭두로 여러 가지 재주에 능하였음. 경복궁 지을 때 일꾼들을 위로한 공로로 옥관자를 하사받아 이름을 날렸으나 일찍 요절함. 사당패 발전에 공헌하였고 안성 서운산 기슭에 추모비와 묘지가 있슴.
지렁이와 쇠북소리
이오장
수덕사 가파른 돌계단에
말라가는 지렁이 한 마리
절 마당에 불두화나무 심을 때
흙더미에서 떨어졌을까
밤새 내린 빗물 적시며 풍경소리 듣다가
돌아갈 때를 놓쳐버리고 말았는지.
꼼짝하지 않고
구부러진 채 바짝 엎드렸다.
햇살은 맨돌 바닥에 쏟아져 이글이글 타오르고
나뭇가지 위로 법당의 목탁소리 멀리멀리 퍼져가도
사람들 발길은 거칠기만 하고
대낮의 그늘 너무나 멀어
끝내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가.
금당 아래 약숫물 해맑게 떨어지고
불경소리 그치지 않는 절간
둥둥 쇠북(鐘)이 울리기를 고대하는 귓가에
이름 모를 새들만 우짖는다.
송전탑(14)
지창영
독
립
군
초병의
흔들림 없는
자세인가.
선뜩한 빗방울이
총탄처럼 퍼붓는 밤에도
결코 고개 숙이지 않는다.
사선으로
내리 꽂히는
칼날같은
빗줄기에도
무너지지 않는
강철 의지
잦아드는 눈물의 유혹도
무섭게 을러대는 우레도
제풀에 지쳐 달아나기까지
억센 산맥 깊이 뿌리박은 채
동포의 가슴 속에 등대 불을 밝히려
수 십만 볼트의 열정을 말없이 전송한다.
파도리 조약돌
지창영
파도리에서
조약돌 하나 집어 들고 왔다.
밀려와 발목을 어루만지는
바다의 언어들이
설익은 생각들을 여지없이 쓸어갈 때
모가 닳지 않았던 시절이
하얀 포말로 일어선다.
때로는 쓰다듬고
때로는 몰아치는 파도의 말씀에
깎이고 부서지던 추억들
나는 얼마나 닳아졌는가
얼마나 더 닳아야 하는가.
추억의 쌈지에 간직한 채
세월의 무게를 가늠하며
가만히 매만져 보는
파도리 조약돌
안개를 다듬는 여자
유회숙
안개가 되어
바라보는 그대로 있음을
보고 싶을 뿐
시를 쓰는 동안은
바람 부는 일도 그에게 맡긴다.
길음역 8번 출구
한 평 남짓 지하철 꽃집엔
발끝 살짝 물에 담그고
안개 하얗게 웃는다, 사계절
안개를 다듬는 여자
시의 마디마디 꺾어
21개째 코사지 만드는 동안
출구를 찾는
안개,
내가 따라 걷는 건지
그가 나를 따라오는 건지
기우뚱 기울어진다.
안개를 다듬는 지금
나는 그의 배후가 된다
그가 선명해지고
중심이 보인다 .
길이 되고 싶다
유회숙
길 위에서 아침을 맞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길이어도
누군가 그 길을 가며
먼저 걸어간 사람을 기억하듯이
길은 끝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 만큼 길이 있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길에서
화려한 꽃이나 높은 담
서로 등 돌리는 좁은 길 만나면
먼 길을 돌아가리.
이제 남은 쓸쓸한 소망 하나
수많은 길을 지나 그대에게 닿는
길이 되고 싶다.
새들 잠든 밤이면
풀씨 같은 이야기 무릎에 내려놓고
그대 곁에 밤을 새리.
은은한 달빛 따라오는 고향 길
동네 어귀 느티나무 그늘을 내어주는
그대 발길 따라 나는 길이 되고 싶다.
비 그친 개울가 망초꽃
김혜경
장맛비 그치고
불어난 개울가에 나가보니
먼 길 씻겨온 모래 이랑지어 곱다.
백로는 수면을 쪼며 날아다니고
이슬 마른 망초꽃 하얗게 뒤덮힌 언덕
이토록 가까이서 마주하여 본 지도 오래
선들바람에 희살짓는 별꽃들
은하가 출렁이듯 아롱인다.
작은 꽃떨기 하나 꺾어 들여다보니
가물한 얼굴
한 때 누군가의 별이었다가
돌아갈 길 잃어버리고
오늘은 개울가에 내려 앉아
처음 왔던 길 되짚나 보다.
망초꽃 한아름 꺾어와
창가에 꽂아두었다.
누구라도 알아 볼 것 같은
청명한 밤하늘
오늘은 기어이 별꽃을 따라나서야지
표본실에서 부화한 나비
김혜경
유년의 여름방학 과제에
빠지지 않았던 곤충채집
산과 들로 종아리 할퀴어가며 나비를 잡아
아버지 와이셔츠 상자에
실못으로 고정시킨 표본은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았다.
등의 못을 빼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이륙직전 나비모습으로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
카르티에 브레송*이
빛의 올가미로 저장해 놓은
이십세기 명사들 사진이 전시 되었다,
지치도록 끌고 다니던 그림자 따돌리고
순간에 채집하여 모아놓은
표본들의 생시꿈이
정물속에서 꿈틀거리며 깨어나
전시실 가득 날아오른다.
천정에 부딪히며 난무하는 나비떼
사람들은 날개를 하나씩 얻어 달고
밖으로 나온다.
동행 없는 토요일 오후
유난히 크고 빛나는 날개를 달고
모처럼 잊었던 날개짓 하며
저문 하늘 멀리로 비상한다.
* 카르티에 브레송 : 프랑스가 낳은 20세기 최고의 사진작가, 매그넘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내 자리 여기우다
오정수
지금은 잊혀진 보리고개 시절
방앗간 일하다 한쪽 팔 잃어버리고
동네 궂은 일 도맡아하시던 사촌형님
간밤에 애 낳고도
새벽녘 밭에 나갔다는 형수님
몇해 전 자식 하나 잃어버리고
상심 끝에 병상에 누우셨네
문병 간 나를 되려 걱정하다가
햇고사리 건네주곤
이게 마지막일 것 같다며 고개를 떨구시네
평생에 육지 구경이라곤 한번도 못하고
눈발 날리는 한겨울에도 ※태왁에 매달려
물질하시던 형수님
해질녘 돌아간 집에는
늘상 기다리는 시어머니 병수발, 아홉 자식 치닥거리
자정께사 쓰러져 누우면
지붕을 들썩이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귤밭 돌담 사이에 갯내음 풍겨오던 지난 해 여름
억새풀 무성한 조상무덤 벌초하다가
“내 자리도 바로 여기우다”하며
웃으시던 형수님 모습 떠오르네.
※태왁 : 해녀들이 바다위에서 잠시 붙잡고 쉬기위해
띄어논 공모양의 구명우끼 같은것
벌써 5년이 되었다네
- 북청 노인 (2)
오정수
전쟁통에 혼자 내려와
새사람 만나 금슬 좋게 살던 김 노인
몇 해전 부인을 먼저 보내고
늘상 해질 무렵이면
귀퉁이 내려앉은 평상에 주저앉아
머위 밭 건너 행길 가를 바라보며
‘장에 갔다가도 이맘때면 꼭 돌아오더니’
장맛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밤
우산 하나 더 옆에 낀 노인을 버스정류소에서
보았다고들 했네.
오랜만의 문안인사에 묻지도 않았는데
“마누라 떠난 지 벌써 5년이나 되었다네.
이제 내게 좋은 일 하나 남았다면
그 사람 곁에 가는 일이야.“
장맛비 주춤한 저녁 하늘에 타는 노을
오늘도 마을 어귀를 어정거리다가
벼포기 사이 헤집고 다니는 백로 한 쌍 바라보며
어둡도록 일어설 줄 모르네.
영안실에서
송선애
친구의 영정 앞에서
국화 한 송이를 내밀고
명복을 빌 때
눈물이 입 속으로 파고들었다.
물을 마시면서도
건강을 말했었는데……
삶의 마지막 그네 줄을 놓고
저 하늘 멀어지기 위해
대자연의 입으로 들어가는가.
나의 눈물이
나의 입 속으로 스며들 듯
친구의 잔해가 스며드는
무덤은 완만한 신의 입술,
나도 돌아가야 할 본향집인가.
손
송선애
버스 유리창에 마주 댄
두 손바닥 사이에 경계가 차갑다.
철통같은 억압의 세월만큼
맑은 창속의 아득한 벽
잡을 수 없는 北男 南女의 손이
가난한 시간에 떨어져 나간다.
며칠 후에 만나자던 약속
헤어진 지 반백 년 만에
깊은 한숨 거둬내고
마주한 노부부(老夫婦),
초침이 가듯 여러 날 지나
애초에 정해진 이별의 날,
남편은 버스에 오르고
아들 어깨에 타고 앉아
차창에 마주대고 있는 손
땅이 꺼지는 소리로 운다
모진 인연의 끈은
견고한 이념의 포승에 묶인 채
심장이 멎은 듯
뼛속에서 꿈을 꾸듯
북에서 온 남편과 남에서 온 아내는
저마다 기약 없이 돌아간다.
치과병원에서
이병훈
달착지근하거나
시원한 냉수만 마셔도
뇌관을 건드린 듯
어금니에서 불꽃이 튄다.
더는 참지 못하고
부끄러운 고백을 하며
입을 크게 벌렸더니
썩은 이를 뽑자고 한다.
오십을 갓 넘긴 나이에
편견을 허물지 못하고
벌벌 떨며 망설였더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사랑니라고 한다.
참회하듯 지그시 눈을 감으니
소독 냄새 흥건한 솜뭉치
어금니에 가득 물려준다.
이제부터라도 조신하게 살라는 듯,
구석에서도 깊은 뿌리 돋아나는
그런 사랑은 하지 말라는 듯,
수건에 대하여
이병훈
입이 무거워서 미더웠다
함부로 흥분하지 않아서 안심이다
물기 젖은 여인의
은밀한 곳을 어루만지고도.
물고문을 당해도
온몸을 빙빙 돌려 비틀어 짜더라도
구정물만 토해낼 뿐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다.
언젠가 바람으로 말했다
높은 줄에 매달려
바람에 펄럭이면서
가슴으로 말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말하고 나면
세상, 살맛나지 않겠느냐고
햇볕에 수건이
고슬고슬하게 마르고 있다.
출렁이는 하늘 아래
최연숙
배넷저고리 지어놓고
어머니는 새벽마다 정한수 떠놓고
두 손 부벼 잘 자라기만 빌고 빌었다.
먹구름 가르고 뇌성 치더니
열병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후
다시는 바른 자세로 걸을 수 없었고
이때부터 넘어지기 일상으로
하늘이 출렁거렸다.
며칠 전 외출 했다가
성형외과에 들렸더니
멀쩡한 눈 코 광대뼈 지닌 사람들
마주 보며 양손으로 눈을 가린다.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때면
발자국 마다 눈물 어리고
굳어가는 근육보다 더 두려운 건
짐짓 외면하는 행인들의 시선이었다.
늪에 빠질 때는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
연꽃이 되기를 기도 올린다.
이른 봄날
최연숙
어디선가 두런거리는 소리에
밤새내 잠 설치고
떠도는 소문에 귀 기울이며
잠복 중인 바람기는 고샅길을 서성인다.
햇살에 어우러진 울타리마다
눈부시게 피어나는 꽃무더기로
가슴앓이 도져와
처방전 없이 약국 찾는다.
둥둥 떠다니는 발길 갈앉히고
켜켜이 쌓인 먼지 털어내
창문을 닦는다.
이런 날엔 햇볕이 보약이라며
옆집 할머니는 마루 끝에 앉아
훨훨 날아가는 흰나비 따라
엊그제 꽃가마 타고 오던 길 떠올리는지
지난 저녁 돋아난 상사화
제 그림자 한 뼘 늘리고
저 멀리 강 가에
버들가지 하늘 거리네.
월광곡을 짜시는 어머니
안중득
뒷문을 열어놓고
어머니는 베틀에 앉으셨다.
하얀 달빛이 내려와 노래를 부른다.
스르륵 딸그닥 스르극 딸그닥
그 때부터 어머니는
바디로 오선을 그리시고
묵으로 음표를 달으셨다.
스르륵 딸그닥 스르륵 딸그닥
툭 올 하나 끊어지면서
월광곡은 멈추고
달빛에 호롱불빛 보태어 올을 잇는다.
방바닥에 누워있는 달빛 주무르던 아이가
돌담 옆 우물로 간다.
별들이 내려와 목을 축이나
바람이 별을 흔든다.
베틀에 앉아 눈 부치시더니
동이 틀 무렵쯤
이내 들판으로 나아가 누런 돌이 되고
가을은 영글어간다.
하루해 지면 달빛 맞으며
월광곡은 이어지고
스르륵 딸그닥 스르륵 딸그닥
밤을 지새는 어머니의 월광곡
아이들 설빔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날개옷 되어
달빛 좇아 날아 가셨다.
종이배와 손님
안중득
잔잔한 호수에 종이배 한 척
사공도 없이 개미 손님 혼자네
호수엔 햇빛만 가득하고
하늘엔 뭉게구름 떠 있네.
기다리는 사공은 끝내 안 오고
산 넘어온 바람이 배를 미네
손님 갈 곳은 묻지도 않고 밀고 가네.
한참을 가다가
건너편에 다다른 종이배
손님은 내려서 걸어가네
가려 던 곳도 아니련만
터벅터벅 걸어가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가네.
나무와 바람
최혜숙
이제 아무도 너를 보러
도시의 숲에 오지 않는다
오랜 기다림으로 지친 너는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하늘을 올려다 본다
나무 위에 걸린 구름 한 조각
바람 속으로 흩어진다.
지하철역 입구 가로공원
온 몸으로 그늘을 드리운 느티나무
지나가던 바람이 잠시 머물러
너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보도를 지나가는 빠른 발소리
사람들이 가버린 텅 빈 길 위에
혼자 남은 나무가
긴 그림자를 접어들고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숨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자
구름에 담겨온 바람이
나무의 마른 가지를 흔든다.
골목을 지나가며
최혜숙
설핏 해 기운 저녁나절
차곡차곡 개킨 박스 실은 리어카
골목 안 담장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집으로 들어가던 노파
눈을 크게 뜨고
지나가는 청년을
유심히 쳐다본다.
담장 밖으로 가지를 내놓은 감나무에는
떫은 감 몇 개 매달렸고
칠 벗겨진 대문짝은
녹이 슬어 붉다.
조금 열린 샛문 사이로 보이는 뜰 안에는
봉숭아꽃 흐드러지고
댓돌 위에 신발 한 켤레
몇 년째 소식 없는 아들을 기다린다.
지나가던 바람이 살며시 문을 밀자
방문이 열리며 내다보는 주름진 얼굴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명시 감상
청포도(靑葡萄)
이육사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서다,
어데다 무릅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교목(喬木)
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내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湖水)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광야(曠野)
이 육 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참아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여선 지고
큰 강(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약력
호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활(活). 경북 안동(安東) 출생.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안동시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 다시 찾아 읽는 글(수필)
복원 불국사
법 정
한낮의 기온에는 아랑곳없이 초가을의 입김이 서서히 번지고 있는 요즈음. 이른 아침 우물가에 가면 성급한 낙엽들이 흥건히 누워있다.
가지 끝에 서성거리는 안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져 버린 것인가. 밤 숲을 스쳐가는 소나기 소리를 잠결에 자주 듣는다. 여름날에 못 다한 열정을 쏟는 모양이다. 비에 씻긴 하늘이 저렇듯 높아졌다. 이제는 두껍고 칙칙하기만 하던 여름철 구름이 아니다.
묵은 병이 불쑥 도지려고 한다. 훨훨 털어버리고 나서고 싶은 충동이, 어디에도 매인데 없이 자유로워지고 싶은 그 날개가 펴지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엊그제 다녀온 곳이 불국사, 새로 복원되었다는 불국사다.
가을이면 불쑥불쑥 찾아나서는 경주, 신라 천 년의 꿈이 서린 서라벌. 초행길에도 낯이 설지 않은 그러한 고장이 경주다. 어디를 가나 정겨운 모습들. 이제는 주춧돌마저 묻혀 가는 황룡사, 그 터만 보아도, 그리고 안산인 남산과 좌우로 연해 있는 그 능선만 보아도 마음이 느긋해지고 은은한 향수 같은 걸 호흡할 수 있는 고장이 또한 경주다.
어디나 옛 도읍지에 가면 느끼게 되듯이 경주도 어딘지 텅 빈 것 같은, 뭔가 덜 채워져 아쉬운, 그래서 배 떠난 나루 같은 그런 분위기가 마음을 끈다.
그 중에도 불국사는 허전하고 안타까운 신라 천 년의 잔영殘影을 한아름 지닌 가람이다. 난간이 떨어져 나간 청운교, 백운교의 그 유연한 곡선, 단청 빛은 바랬어도 장중한 자하문, 날듯이 깃을 올린 범영루(泛影樓), 그리고 앞뜰에서 자하문 좌우로 올려다 보이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공간...... .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천 년의 세월을 성큼 뛰어넘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기억들은 온전히 과거완료형.
복원된 불국사는 그 같은 회고조의 감상을 용납지 않는다. 가득 들어찼기 때문에 기댈 만한 여백이 없어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방에 둘러쳐진 회랑이 과거에 대한 기억을 가로 막는다. 그리고 현란한 단청 빛이 1973년에 직립해 있는 오늘의 우리를 의식케 한다.
불국사는 지난 4년간에 걸쳐 많은 인력과 재력으로 말짱하게 복원해 놓았다. 돌 한 덩이, 서까래 하나까지도 허투루 하지 않고 모두가 과학적인 고증에 의해 거의 원형대로 복원했다고 한다. 원형대로 복원해 놓았다고 하니 지난 천여 년의 허구한 세월이 도리어 무색할 지경이다.
관계 당국과 전문가들의 끈질긴 열과 성의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서운해 하는 것은, 그렇다. 못내 안타깝고 서운해 하는 것은 이제껏 길들여진 그 불국사가 사라져 버린 일이다. 천 년 묵은 가람의 그 분위기가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복원된 불국사에서는 그윽한 풍경소리 대신 씩씩하고 우렁찬 새마을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