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의 영업실적이 증명
내가 제일은행에서 처음 지점장으로 발령 받은 곳은 인천의 변두리지역인 검단 지점이었다. 행정구역은 인천광역시지만 눈 오는 겨울이면 서울에서 출근 시간이 3시간이 걸릴 정도로 여건이 아주 열악했다. 직원들 대부분이 서울이나 인천시내에서 출퇴근할 뿐 아니라 지하철이나 버스 노선도 없어서 차를 몇 번씩 갈아타야 하는 아주 불편한 곳이었다. 그 뿐만은 아니었다. 저녁의 퇴근길은 다니기가 더욱 힘들었다. 가로등조차 없는 캄캄한 논밭 사이의 오솔길을 한참이나 지나야 하고, 혹 우회하여 쓰레기 매립지 도로를 지날 때면, 덤프트럭들이 무섭게 질주하는 바람에 소름끼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와 직원들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임무에 충실히 임했다. 김석희, 이동희 대리는 자녀교육 등의 어려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점 부근으로 아예 이사를 와 의욕을 과시하곤 했다. 이로 인해 눈보라치는 겨울, 불편한 교통편으로 인해 은행 금고를 늦게 열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비단 직원뿐 아니라 용역직 청원경찰 신용원씨와 운전기사 김영민씨도 가족들까지 동원하여 신종 예금상품과 BC카트 권유에 적극 나서 주기도 했다. 모든직원이 지점장의 기대에 과분할 정도로 호응이 적극적이었다.
◉세일즈는 사느냐 죽느냐의 한판승부
검단지역은 5천여 세대에 인구 3만 여에 불과한 작은 곳이었다. 이렇게 작은 지역에서 은행의 예금유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점장으로 부임한지 한 달이 채 못 되어서의 일이다. H통신의 개인연금 유치전에서 지역본부 소속의 40개 영업점 총 실적의 1/4을 우리 지점에서 유치하는 놀라운 실적을 올렸다.
그렇다고 직원 수가 많다거나 여건이 좋아서 이런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직원은 12명에 불과했고, 영업장이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업무효율이 높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직원 1명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인천까지 나가서 교환업무를 해야 했다. 영업장도 확장공사를 벌려, 이전 준비에도 일손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우리 점포에는 H통신의 관할구역과는 거리가 동떨어진 서인천이어서 그 의미는 더욱 컸다.
지금까지의 경쟁은 대부분 은행권과의 경쟁이었지만 개인연금 신탁과 1996년 10월에 시판된 비과세저축(신탁)은 제2금융권을 포함한 32개 전 금융기관의 한판 승부였기 때문에 우리의 저력을 저울질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번 가입하면 3년에서 10년까지 가는 매우 좋은 상품이 우리의 열정에 불을 당겨주었다. 한번 고생하면 평생 팔자를 고칠 수 있는 대어가 눈앞에 번뜩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고동을 치고, 맥박은 빨라지며, 얼굴은 상기되어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였다.
이와 같은 열정으로 인해 우리 지점의 영업실적이 전국 1위라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하였다. 지점장인 나도 깜짝 놀랄 성적이었다. 1996년 10월 21일 전 금융기관이 동시에 판매한 ‘비과세 저축(신탁)’의 직원 1인당 권유 실적이 전국 1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이런 가시적인 성과들로 인해 부임 초기에 느꼈던 일말의 두려움이 자신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은행에 몸담은 이래 그때처럼 신나고 즐겁게 일해본 적도 드물 정도였다.
이때 마침 조선일보에 ‘파워점장, 불황을 깨는 영업전선’이라는 기사에 우리 지점의 영업실적이 보도되었다. 제일은행 검단 지점장 김의식씨는 부임한지 두 달 만에 ‘비과세 저축(신탁)’ 유치에서 전국점포 중 1위를 했다는 것과 지역의 문화행사를 열어 고객을 흡수했고 입행 후 받은 고객 명함은 모두 보관한다는 굵은 제목을 함께 실은 5단 기사였다.
이 기사에서는 당시 우리가 추진한 독특한 영업 전략을 가감 없이 소개해 주었다. 그 첫 번째는 맹랑해 보이던 이론을 버젓이 현실로 만들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직원들에게 프로세일즈 교육을 하여 ‘지역 밀착형 경영’을 목표로 ‘향토 은행을 지향하는 은행’을 내세워 지역주민들의 호응을 얻은 결과라고 소개했다.
내가 지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K은행이 시장 한가운데에서 바로 우리 옆으로 이전하여 넓고 쾌적한 환경으로 영업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우리 점포는 보잘 것 없었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내가 죽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어도 우리 은행의 연수원이나 금융연수원 등에서 나의 금융 마케팅과 세일즈에 대한 강의를 듣고, 또 책을 읽은 수천 여 명의 얼굴들을 볼 낯이 없구나!”하는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이 “금융 섭외와 세일즈는 이론과 현실이 다른 거야. 김 교수는 말뿐이지. 그건 뻔한 거야.”라고 조롱하는듯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느냐 죽느냐의 각오로 승부에 매달렸다.
◉이벤트로 영업의 승부를 거는 지점장;깃발을 높이 달아라
드디어 점포 확장이 끝나고 이전 식 때 근처의 예식장을 빌려 지역주민 400명을 초청하여 고객을 위한 행사를 벌렸다. 이 행사에 주차, 안내, 영접 등 행사 요원만 해도 수십 명의 일손이 필요했다. 그러나 직원은 12명뿐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누가 보아도 허무맹랑한 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났다. 주변의 고객들과 인근 교회의 여선교회 회원 등 30여 명이 자발적으로 협조하여 한복을 입고 안내에 나서 주었다.
초청행사는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고객 사은행사의 일환으로 밝은 가정 협의회 조동춘 박사를 초청한 문화강좌를 비롯해 생활인의 재테크, 오락 및 행운권 추첨 등 지역주민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성 행사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였다. 이런 행사를 기획하게 된 동기는 단순했다. 지역주민이 살아야 은행도 살고, 은행 역시 지역사회의 다양한 문화욕구를 충족시켜주며, 지역문화를 선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소박한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도 있다.” 이와 같은 열정에 힘입어 H통신의 개인연금신탁 유치 실적은 말할 것도 없고 골드신용카드 유치전 1위 등 헤아리기 숨 가쁠 만한 기록을 경신하였다.
이로써 내가 검단 지점장으로 재임하던 1년 동안 받은 표창장의 액자 길이가 1m나 되고, 함께 근무한 직원을 비롯해서 다른 점포로 이동한 직원까지 개인 표창을 받지 못한 직원이 없을 정도였다. 재임기간에 실시한 주요 이벤트는 다향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점포이전행사, 여성고객초청강좌를 비롯해 어버이날 창구고객 장미꽃 달아드리기, 기업체나 관내 관공서 방문 정신교육강좌, 기업체의 은행거래 담당자 초청 호프 마시기 대회 등 크고 작은 프로그램이 10여 개가 넘었다.
한번은 우리 점포에 레크리에이션 진행자로 초청된 박우성 원장은 S그룹 연수원에서 ‘이벤트를 통한 영업활동’이라는 주제로 우리 점포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검단지점은 제일은행은 물론 전국금융가와 조선일보, 내외경제신문 등에서 화제가 되어 그 명성이 전국에 자자하게 되었다. 화제의 내용은 나의 경영철학이 이론과 실천을 조화시킨 장본인으로, 고객 만족<감동<감격의 원조로, 신종상품 판매의 명수요, 이벤트로 승부를 거는 지점장이라는 닉네임을 얻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열악한 환경으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여건에서 지점장의 경영방침에 묵묵히 따라 주었던 직원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논과 밭으로, 눈길과 빗길을 마다하지 않고 활동을 하다가 자동차가 수렁에 빠져 폐차까지 시켜야 했던 박 과장, 자녀교육의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점 근처로 이사 온 두 명의 대리와 그 가족, 지점장의 말을 그토록 잘 따라준 직원들, 잇단 기업의 부도사태에 은행 이미지의 실추 속에서도 끝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거래해 준 고객 여러분, 본점과 지점 간에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다하지 않고 지원과 격려를 아까지 않았던 상사와 동료, 그리고 후배들은 평생 잊어지지 않고 기억 속에 남을 아름다운 얼굴들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그러나 모두가 주지하듯이 제일은행은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인해 대규모 부실채권이 발생하여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자구책의 일환으로 우리의 살점을 도려내듯이 대규모 명예퇴직의 회오리가 휘몰아쳤고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다. 나는 그 와중에 성동지점으로 전보되어 부임했는데, 거기는 분위기가 침울해 축하인사를 받을 겨를도 없었고, 또한 엄두도 나지 않았다. 세 분의 전임 지점장이 모두 명예퇴직으로 정든 은행을 떠났다. 더구나 내가 부임하기 바로 직전의 지점장은 부임한지 15일 만에 그만 명예퇴직을 하게 되어 전체 분위기가 극도로 침체되어 있었다. 거래처의 분위기도 최악이었다. 부임인사를 가면 “엊그제 인사를 하지 않았느냐?”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여 마음이 더욱 암담하였다.
내가 새로 부임한 성동지점은 동부 영업본부 소속 영업점 가운데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성동지점의 영업실적은 동부 영업본부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늘 부담감이 앞섰다. 이 부담감은 오히려 사명감으로 승화되어 나를 비롯한 모든 직원과 가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가가호호 방문하여 한 건이라도 더 유치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지점장이 볼 때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나 역시 강한 책임감에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였다.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벌떡 일어나 시계를 찾는 등 부산을 떠는 바람에 아내를 기겁하게 만들기도 할 정도였다.
연말에 예금을 중도에 해약하려는 고객이 줄을 있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정희선 대리는 자신의 아파트 집문서를 고객에게 맡기며 자신이 예금에 대해 책임을 지겠노라고 통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본 나와 직원들은 모두 눈시울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헌신적인 열정에도 불구하고 올해 1월에는 많은 동료 직원들이 명예퇴직으로 은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책상 내 자신이 그들의 면담 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이와 같은 현실을 피하고 싶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마음이 찢어질 듯했던 그 기억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남아 나를 괴롭혔다.
그 순간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비록 선배, 동료, 후배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영원한 ‘제일맨’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경쟁에서 살아남을 힘을 길러, 그들이 못한 몫까지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요기의 어록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있다.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이 말은 야구감독 요기레라가 자신이 맡고 있는 뉴욕 메츠팀의 스코어가 저조하여 기적적인 역전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말한 것이다. 야구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게임자체가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는 상황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악조건이 호조건’이라는 말도 있다. 캄캄한 그믐날 다음에는 환한 보름달이 비칠 날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이렇듯 소용돌이치는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면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국제화 시대, 개방화 시대를 맞아 과거의 안이한 생각이나 수동적인 사고방식(思考方式)은 우리를 현실에서 여지없이 도태시키고 말 것이다. 애플의 신화 스티브 잡스는 N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약 어떤 일을 훌륭하게 이루어냈다면 무엇인가 다른 일을 찾아내야지 오랫동안 성공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그의 삶을 돌아보면 성공에 도취해서 안주하기보다는 새로운 도전거리를 항상 찾아왔다.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술가처럼 창조적으로 살고 싶다면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되고 어떠한 성공을 거두더라도 버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이룩한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지 않았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분야에 불어 닥친 구조조정으로 인해 실업자의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현상에 영향을 받아 상아탑으로부터 새로 배출되는 우수한 인재들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취업 재수생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국가나 사회 환경만 탓하고 있을 것인가? 발전이 없는 것에 미래는 없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 그 현실에 안주하여 항상 그 위치가 지속될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야 한다.
◉승리는 피와 땀의 값진 선물
1997년 11월 21일 우리나라는 대외채무를 갚지 못해 발생할 국가부도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IMF(국제통화기금)의 강력한 경제개혁 요구들을 받아들이는 조건하에서 IMF 구제 금융을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IMF를 떼어놓고는 논할 수 없다. IMF는 바로 한미 FTA의 서막이자, New World Order 프락찌들, 특히 외국 자본가들에게 우리나라의 주권을 송두리째 '도매금'으로 넘겨준 제2의 한․일 합방격으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크나큰 분기점을 이룬 사건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한국을 지불불능사태에서 구출하기위해 제안된 IMF의 구제 금융제안은, 실상 국제적 은행가들의 이익을 지키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외국자본의 지배에 넘겨주는 길을 열어주었다. 한국의 경제적 주권을 앗아 가버린 '거래'는, 재벌의 해체와 수많은 중소기업들을 파산으로 이끄는 길을 열어주었다.
지나온 나의 삶이 오늘 우리가 맞는 시대에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나의 삶의 환경들은 그 때마다 더 혹독한 역경의 연속이었다. 능력도, 가문도, 배경도 모두가 보잘 것 없어서 어느 한순간 주저 앉아버렸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어렵고 극한 환경 속에서도 나는 미래의 꿈을 놓치 않고 신념으로 버티며 자신을 개발해 왔다.
카네기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자는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본다. 막연한 목표, 막연한 노력은 우리를 성취하지 못하는 약한 개인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시대는 항상 변한다. 가파르게 산등성이를 오르면 내리막길이 있고, 강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가면 바다를 만나게 마련이다.
우리는 항상 가장 어려운 터널 안에 서 있으며, 그곳을 벗어나려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야 된다. 지금 땀을 흘리며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개인과 기업은 반드시 캄캄한 터널을 뚫고 나가 성취의 기쁨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나약한 마음에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해 버리면 절망의 터널 어느 한 지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개인의 나이나 신분, 능력, 배경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각의 위치에서 얼마나 역할을 잘해 내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서가 아니라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손을 마주잡고 가는 길이라면 더욱 그 짐은 가벼울 것이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승리는 피와 땀의 결정체이며 끊임없이 준비하며 쟁취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값진 선물이다. 능력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이 존재할 수 있다.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해서…”
|
첫댓글 글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교수님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그 열정이 강한 사람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