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의 母國 가진 유일한 소수민족 교육열·지역감정… 한국과 닮은꼴 길림성성은 이북 출신, 흑룡강성은 경상도 출신… 주도권 싸움 최고위 인사는 소수민족 정책 총괄했던 장관급 이덕수(李德洙)
한반도계 중국인을 뜻하는 조선족(朝鮮族·이하 조선족)은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독특한 존재다. 인구 192만명으로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인구 기준 13번째에 불과하지만 영향력과 정치적 위상은 인구 수 이상이다. 중국 영토 밖에 한국과 북한(조선)이란 2개의 ‘모국(母國)’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중국 영토 밖에 2개의 모국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조선족이 유일하다. 게다가 한국과 북한은 각각 황해와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그중 한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G20에 속하는 세계 10위권 경제강국이고, 북한은 사실상 핵무기로 무장한 핵보유국 중 하나다.
▲ 한복을 입고 집회에 참석한 중국의 조선족. photo 바이두
조선 말기 식량난에 동북 3성으로 농업이민 총 192만명… 지린 옌볜 자치주에만 40% 거주
조선족이 주로 사는 곳은 만주(滿州)로 불리는 동북 3성(요녕, 길림, 흑룡강) 일대다. 조선 말 식량난을 피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농업이민을 떠난 것이 동북 3성에 눌러앉게 된 계기가 됐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탄압을 피해 동북지방으로 넘어간 정치이민자와, 만주국을 세운 일제가 강제로 보낸 개발이민자도 상당수다. 인구 수로는 길림성성(61%), 흑룡강성(23%), 요녕성(12%) 순으로 조선족이 많다. 그중 함경도, 평안도 등지에서 넘어간 초창기 조선족은 고향과 가까운 길림성 연변 일대에 터를 잡았고, 뒤늦게 이주한 조선족(주로 경상도 출신)은 내륙으로 밀려나 흑룡강에 자리를 잡았다. 길림과 흑룡강 양 지역 조선족 간의 지역감정은 경상도와 전라도 간 지역감정 못지않다. 나머지 4%가량은 북경과 청도 등 중국 전역으로 퍼졌다. 그중 조선족이 집중 거주하는 곳은 길림성의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다. 1952년 자치주로 지정된 연변자치주는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국경을 이루는 곳이다. 백두산을 기점으로 동북쪽에 있으며, 러시아와도 일부 국경을 마주한다. 함경도와 가까워 북한에 연고를 둔 조선족이 비교적 많다. 전체 조선족(192만명) 중 40%가 조금 넘는 80만명가량이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살고 있다. 하지만 한족을 포함한 전체 자치주 인구(218만명)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중은 36%에 불과하다. 1958년에는 백두산 서쪽 지린성 장백(長白)현도 조선족 자치현으로 지정됐다. 장백 자치현 역시 전체 인구(8만3000명) 가운데 조선족은 1만4000명으로 16%에 불과하다. 소수민족 자치주답게 행정책임자는 조선족 리용희(李龍熙·47) 주장(州長)이다. 1963년 길림성에서 태어난 리용희는 연변농학원(농업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2007년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으로 일하고 있다.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가진 소수민족 엘리트로 자치주장으로 선출되기 전 줄곧 지린성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에서 활동했다. 2001년에는 길림성 공청단 제1서기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소수민족 자치구역과 마찬가지로 자치주 최고권력은 한족인 등개(鄧凱·51) 공산당 서기가 쥐고 있다. 요녕에서 태어난 등개 서기는 공청단에서 활동하다 길림성 선전부장을 거쳐 지난 2004년부터 연변자치주의 당서기를 맡고 있다. 조선족 리용희 주장과는 공청단 선후배 관계로 공청단에서부터 파트너로 일한 경험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한·중 수교 직후인 1993년부터 서울 주재 연변대표처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 기업의 중국 진출에 결정적 역할 경제기반 취약해 한국으로 탈출 러시
한국 기업의 중국 진출 때도 조선족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중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조선족이 대중투자와 무역에 있어 가교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연변자치주에 자리잡은 한국 기업만 650여개다. 조선족은 중국의 투자관행 등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부동산과 같은 고정자산 투자에 있어서 조선족의 명의를 빌려 투자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덕분에 한국 기업은 우리보다 30년 앞서 수교(1972년)하고 중국에 진출하기 시작한 일본 기업들을 바짝 추격할 수 있었다. 조선족의 도움으로 일본을 물리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임진왜란(중국명:항왜원조전쟁) 때 명(明)군 4만30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명군 사령관 이여송 역시 조선족이다. 그는 조·명 연합군을 지휘해 평양을 탈환하고 개성까지 수복해 전세를 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후일 소수민족인 티베트(토번)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우리나라 성주(星州) 이씨 대종회에서는 조선족 1세대라 할 수 있는 이여송을 선조로 받들고 있다. 농업이민으로 출발한 만큼 조선족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조선족자치주인 옌볜은 중국에서 ‘북방 논농사의 고향’으로 불린다. 기후가 건조해 밀재배와 낙농을 주로하는 북방에서 논농사를 짓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한반도에서 이주한 조선족은 논농사 기술을 북방에 도입했다. 한·중 수교 이후에는 한국인을 상대로 한 서비스업 진출이 돋보인다. 한국인 관광객이나 사업가를 위한 숙박업(호텔·민박)은 물론 요식업(식당) 등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관광가이드, 통·번역, 부동산 중개업, 아이돌보기(보모) 등에도 상당수 조선족이 종사하고 있다. 조선족 중 일부는 탈북브로커를 비롯 불법외화송금(환치기), 보이스피싱, 매매춘과 같은 지하경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지하경제에 종사하는 조선족은 칭다오, 옌타이 등 한국인이 많은 항구에서도 흔히 접할 수 있다.
경제적 기반은 취약한 편이다. 옌볜 조선족자치주의 연간 GDP는 305억위안에 불과하다. 이는 지린성의 주도인 창춘의 2073억위안에 비해 거의 7분의 1 수준이다. 옌볜 자치주의 GDP `수준은 동북지방 41개 도시 가운데 28위에 불과하다. 옌지와 같은 도시주민의 연평균 수입은 1만600위안(약 200만원)으로 대도시인 창춘(1만2700위안)에 비해 2000위안 넘게 차이가 난다. 농촌 지역의 경우 상황이 더 심각해 농촌 주민들의 연평균 수입은 4400위안(약 80만원)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옌볜 자치주를 포함한 동북지역은 1990년대 이후 연해지방의 급속한 경제성장에서 철저히 소외됐다. 취약한 경제기반은 옌볜 탈출을 부채질하고 있다. 옌볜 조선족자치주에서만 20만명 가까이 한국으로 취업이주를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은 대개 한국에 있는 친척이 초청하는 형식으로 한국에 입국한다. 자리를 잡은 후에는 옌볜 현지에 있는 일가친척을 다시 한국으로 초청하고 있다. 결혼이민을 통해 국내로 들어온 조선족도 3만8000명가량이다.
교육열 최고… 소수민족 첫 종합대학 설립 정계·軍 진출 활발, 정협(政協) 부주석도 배출
▲ 옌볜 조선족 자치주장 조선족 리룽시(왼쪽)와 당서기 한족 덩카이(오른쪽).
조선족은 한족을 포함한 중국 56개 민족 가운데 교육열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소수민족 가운데 최초로 ‘옌볜대학’이란 종합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옌볜 조선족자치주도(州都)인 옌지(延吉)에 있는 옌볜대학은 조선족 엘리트의 산실이다. 신중국 건국(1949년 10월 1일)보다 6개월 이상 빠른 1949년 3월 20일에 조선족 주더하이(朱德海·1972년 사망)에 의해 설립됐다. 설립자 주더하이는 자치주 최고 책임자인 당서기와 지린성 부성장까지 역임한 조선족 정치가다. 하지만 조선족 권위 신장에 힘쓴 것이 화근이 돼 문화대혁명 때 ‘지방민족주의 분자’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렀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는 한국에 있는 대학으로 자식들을 유학시키는 사례도 점점 늘고 있다. 이들이 선호하는 학문 역시 법학, 경영학 등이다. 실제 최근 국내 대형 로펌에서는 중국 현지 법학과를 졸업하고 국내 대학에서 연수를 마친 조선족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중국 사회에도 광범위하게 진출했다. 초기에는 정치·군사 방면으로 진출이 두드러졌다. 조선족 출신 차오난치(趙南起·83) 장군은 중앙군사위원, 상장을 지내고 1997년 퇴역 이후에는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에까지 올랐다. 그에게는 ‘고선지(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장군) 이후 중국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조선족 무장’이란 별명이 붙는다. 일제에 맞서 한족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인 것이 계기가 됐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10만명가량의 조선족이 중공군과 함께 무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 정부가 건국 60주년을 맞이하여 선정한 ‘건국영웅 100인’에도 조선족은 3명이나 이름을 올렸다. 이봉선(李鳳善), 안순복(安順福), 정율성이 그 주인공이다. 이봉선과 안순복은 ‘팔녀투강(八女投江·8명의 부녀자가 1000명의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강에 투신한 사건)’으로 이름을 날렸고, 정율성은 중국 인민해방군가의 작곡자이다. 헤이룽장성 무단장(牧丹江)에는 한복 치마 저고리를 입고 소총을 쥔 이봉선과 안순복의 석상이 있고, 하얼빈에는 정율성 기념관이 들어섰다.<주간조선 2068호 ‘중국 영웅 100인 후보, 작곡가 정율성’ 참조>
최근에는 정치와 무관한 연예계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다. 지난해부터 중국 연예계에서 떠오른 진메이얼(金美兒·26)이 대표적이다. 1984년 지린성 옌볜 자치주 옌지에서 태어난 조선족 가수다. 2004년 옌볜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뒤 지난해 CCTV의 ‘성광대도(星光大道)’란 스타 발굴 프로그램에서 30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우승을 차지했다. 화끈한 무대매너와 가창력, 수려한 외모로 ‘조선족 이효리’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유망주로 최근에는 화장품 CF 촬영까지 마쳤다. 중국 현지 검색엔진에 그의 이름을 치면 사진만 수백 장이 떠오른다. 국내 방송에도 출연한 바 있으며 추석을 맞아 지난 9월 29일과 30일에 국내 무대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그 외에도 ‘중국의 영화황제’ ‘중국의 제임스딘’으로 불린 영화배우 ‘진옌(金焰·1983년 사망)’과 ‘중국 록음악의 대부’로 추앙받는 추이젠(崔健·49) 역시 대표적인 조선족 출신 연예인이다.
▲ 조선족의 환갑잔치
조선족 사회 급속 해체 중… 소속감도 약화 모국어 한마디도 못하는 2, 3세도 많아
정체성 문제는 조선족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으로 취업이주가 늘면서 조선족 사회가 해체되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일부 조선족들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이 경제적으로 급부상하면서 ‘조선족’보다는 ‘중화민족(중국 56개 민족을 모두 아우르는 명칭)’으로서의 정체성을 앞세우기도 한다. 지난 10월 1일 베이징 톈안먼광장에서 열린 국경절 열병식에서도 조선족 대표들은 다른 54개 소수민족과 함께 행진하며 중화민족의 일원임을 나타냈다. 1980년대 중국인민은행에서 발행한 ‘2자오(角·위안(元)보다 한 등급 아래의 화폐단위)’ 지폐에는 한복을 입은 조선족 여인이 부이족(布依族) 여인과 함께 중화민족의 모델로 들어갔다. 일부 조선족은 ‘조선족’이란 말에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중국동포’로 불러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반면 모국(한국과 북한)에 대한 소속감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다. 언어문제도 심각해 20~30대 조선족 사이에선 중국어가 더 빈번하게 쓰이는 것이 현실이다. 민족학교가 아닌 한족 학교를 졸업한 2~3세 조선족은 모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 조선족이 모델(오른쪽)로 들어간 중국지폐.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정치적 혼란을 겪기도 한다. 특히 옌볜 지역 조선족은 한국보다는 북한에 정서적 동질감을 갖고 있다. 한국전쟁 때만 해도 약 5만명의 조선족이 ‘항미원조’란 구호 아래 북한 인민군과 함께 유엔(UN)군과 국군에 총부리를 겨누었다. 조선족 최고위급 인사인 차오난치 정협 부주석 역시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지원군 사령부 작전처 참모 자격으로 참전했다. 과거 개혁개방 전까지 중국 경제가 피폐했던 시절에 옌볜 조선족은 북한에 있는 일가 친척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성공모델이었다. 하지만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과의 교류가 급증하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2009년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만 모두 44만명가량이다. 10~20대 조선족 상당수는 이들이 한국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싫든 좋든 한국과 가까울 수밖에 없다. 또 한국이 뜨면서 구 주류였던 옌볜 조선족을 제치고 경상도가 고향인 헤이룽장 조선족이 신(新)주류로 뜨는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덕수 前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장관급)
연변대 출신, 소수민족 정책 이론가로 영향력 티베트 유혈사태 배후 책임자로 피소 당하기도
▲ 이덕수
조선족은 한때 중국 55개 소수민족 정책을 총괄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소수민족 정책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곳은 국무원(행정부) 산하 국가민족사무위원회다. 조선족 최고위급 인사인 이덕수(李德洙·67)는 지난 1998년부터 10년 동안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장관급)을 역임했다. 1943년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태어난 이덕수는 조선족 종합대학인 연변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1965년 공산당에 입당해 길림성 공청단 부서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서기 겸 주장, 길림성 부성장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1992년에는 중국 소수민족 대외교류협회장, 통일전선공작부(통전부) 부부장을 역임하고 1998년부터 10년 동안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역임했다. 지난해 3월쯤 후진타오의 측근인 몽골족 양정(楊晶·57) 전 내몽고 주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한 상태다. 하지만 이덕수는 퇴임 후에도 소수민족 정책 이론가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세운 소수민족 정책의 핵심방향은 ‘한족(漢族)의 대량이민’으로 요약된다. 실제 지난 2008년 3월 티베트 유혈사태 때 모 방송은 ‘왕러취안 신장위구르자치구 서기’ ‘장칭리 시짱티베트자치구 서기’와 ‘이덕수 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소수민족 탄압의 3대 주범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왕러취안과 장칭리는 각각 후진타오의 측근으로 한족이지만 소수민족 출신으로는 리더주가 유일하다. 그는 한 티베트 지원단체로부터 티베트 유혈사태의 배후 책임자 7명 중 한 명으로 지목돼 피소를 당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첫댓글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조선족에 대해 많은걸 배웠습니다.
조선족 우리 동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