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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의 그림세계 - 광주미술의 오랜 희망을 위하여
1992, 1999년 / 1, 2회 개인전 팜플릿
"광주의 이미지 - 남도적 예술의 맥을 잇고 있는 '예향'과 저항의 맥을 이어 오월 항쟁으로 세계에 급부상한 '의향'이라는 이미지는 그것이 민중예술운동이라는 저항적 승화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전통/현대가 결합하는 예술의 현대사를 이룩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의로운 소수로부터 출발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항쟁의 의의가 정부로부터 공인화되고 기념화 할수록 마치 4월혁명을 팔아먹고 이용하는 정치/문화행상꾼이 활개치듯이 정치적으로 변질되고 있으며 예술정신은 상품화되고 상투화되어 진정한 운동가들은 변두리로 몰리고 있다." - 원동석(미술평론, 목포대)
기운동아재 / 1990, 목판 人山 / 1984, 목판
"이 판화들 가운데 가슴을 때리는 작품은 역시 [인산]이다. 검은 바탕에 음화식으로 뒤엉킨 시체더미와 그 표정들 하며 그 왼편으로 파낸 처연한 초승달은 그날의 광주를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던 심정을 드러내준다. 이 판화는 소품이긴 하지만 1980년대 초반기 강연균의 [하늘과 땅 사이], 홍성담의 [오월 판화]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성과물로 꼽고 싶다." - 이태호(미술사, 전남대)
우리동네 / 1991, 다색목판
"주변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묵묵히 궂은 일 다 해내는 사람', 또는 "겉보기엔 유연하면서도 속엔 옹니가 차서 한칼에 보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듯이 이준석은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의 진솔한 인간성에서 우러나오는 순정스러움이 삶과 현실을 대하는 체험과 기량의 성숙이 더해감에 따라 밀도 있는 사실표현으로 진전되리라 믿는 바이다." -이태호(미술사, 전남대)
1992, 이준석 1회 개인전 서문
"이준석, 그는 누구보다 솔직하고 겸손하게 예술운동을 고민하고 있는 순수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티없는 맑은 표정과 명예욕이 없는 선비기질이 마음에 든다. 서두르지 않는 침착성이나 끈기가 작품에 베어 있는 것 같아서 좋다. ...서울에서는 '현실과 발언'이 억압적 현실을 풍자하는 충격적인 작품발표로 후배들에게 파장을 일으키고 한편 이를 불온시한 공안 당국이 블랙리스트 작성과 작품 압수라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을 때, 좀 더 대중적 의사 표현 방식으로서 판화운동부터 시작한 것은 광주쪽 작가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20대 힘이 결집된 84년 '20대 힘전'은 마침내 당국의 탄압을 받아 작가 구류, 작품 몰수라는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면서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이때 이준석은 대학 후배들과 반미를 주제로 한 합작으로 300호 크기의 유화를 출품했는데 물론 압수 당한 후 행방을 알 수 없는 형편이다." - 원동석(미술평론, 목포대)
화엄광주 4
화엄광주 3 / 1999, 유채
"이같은 기록화의 수작은 해마다 5월전 행사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던 화엄광주의 시리즈이다. '95년부터 시작하여 99년까지 작품들은 무등산을 하경으로 삼고 상경에 당시의 5월군상이며 사진으로 포착한 격렬한 민중삶의 이미지를 정밀한 흑백묘사로 담아내고 있으며 혹은 운주사의 천불상 이미지를 구심점으로 민중상을 원형구도로 끌어당기고 있으며, 천불상과 민중상을 번갈아 모자익식으로 배치하는 다양한 구성방식을 혼신을 다해 그려보여 주고 있다." - 원동석(미술평론, 목포대)
바람 / 1997, 유채
병풍산 유감 / 1998, 유채
"이준석은 역사의 아픔과 모순을 진지하게 화엄의 차원에서 새겨 넣고 있으며 일상적 삶의 정서와 자연의 접속을 통한 풍경을 내면화하는 그림도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운 산야가 군대의 포격 연습 대상으로 변하여 처참하게 부서지고 발가벗겨지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능욕의 풍경을 비정하게 보여주는가 하면... 애잔하고 적막한 풍경을 통하여 고향의 그리움에 대한 동경을 포기할 수 없는 근원적인 감정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 원동석(미술평론, 목포대)
큰나무 / 1997, 유채
"늦장가 든 이준석은 처가 동네의 묵은 농가를 개량하여 화실도 짓고 느긋한 마음의 여유로 살고 있다. 부지런하게 운동에 전념하던 바쁜 일정에 벗어나서 작업에 몰두할 시간도 많고 하니 도시 민중의 삶과 더불어 농촌/자연의 삶에 대한 깊은 체득적 감정을 얻을 것이며 그것이 그의 작품에 깊이와 영혼을 불어넣는 걸작품을 탄생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원동석(미술평론, 목포대)
이준석
"내 청춘의 한 자락이 묻어 있는 도청앞 금남로거리 망월동을 뒤로하고 이제는 섬처럼 느껴지는 작은 시골마을에 와 있다. 내 마음의 한 조각을 닦고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58년 광주생 힘전, 광주목판화 3인 초대전, 젊은 세대에 의한 신선한 발언전, 오월전, 동학 100주년 기념전, 민중미술 15년전, 해방 50주년 기념전, 통일미술제, 민인의 얼굴전, 반- 풍경전, 새로운 천년 앞에서전... (구)광미공 회장
epilogue
"우리가 작금에 '광미공'을 유지하고 여느 해처럼 전시회도 가져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이준석의 화실이 몇 평은 더 늘었을 것이다.조직 해체의 원치 않는 포스트로서 나는 '광미공의 해산 선언'을 감당하였고, 남겨진 짐은 모다 이준석 앞으로 물려졌다. 말 그대로 '짐'이다. 동안 사무실에 쌓아두었던 십수년의 자료며 기구며 잡동사니들... 이리저리 나누고 내보내면서 묵묵히 내다버리는데, 먼지 속에서 그가 가만 입을 떼었다. "이것들을 제 화실에 갖다 둡시다... " 아눌하던 가심이 탁 트이는 듯 눈물이 핑도는 것이 불어터진 자장면 같았다. 어디서 누군가 뭘 궁금해 하면 반드시 내어야 할 '한 잔 술' 이었으며, 부활할 수도 있는 새 마당의 '멍석'으로서도 무언가 그래야 했으리라. (아마도 '논문'을 고민하는 '초짜' 학자들은 벌써 여럿 그를 다녀갔을 것이다.) 해체를 주장한 사람이나 극구 지키자던 사람이나, 남은 사람 이나 나간 사람이나, 서운한 사람이나 시원한 사람에게나 '시간'은 무심하고 매정했다. '시대' 를 외치던 우리는 '시대'에 의해 강제퇴출 되었다. 역사는 살아남기 위해 몇 백번이고 죽어 마땅하였다. 우리는 스스로 손발을 자르고 꼬리를 끊고 종과 속과 과와 목과 강과 문과 계의 계보를 버렸다. 도마뱀인지 도룡용인지 도롱탠지 도꼬마린지 다 무언가! 다행한 것은 다만 '스스로', '그렇게 하자' 한 것! 돌아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날 저널과 매스컴과 학교와 거리에서 사랑을 받았던가! 이준석을 생각하면 민망스럽고 고맙다... 나는 이준석 이후로도 누군가에게 자주 뭘 떠넘기며 모른 체하며 내다버리기를 자주했다. 버리든 잊든 체념하든 가슴의 시대는 죽고 족보도 거의 닳고 무엇보다 욕망이라는 가슴 뛰는 병통이 많이 나았다. 세상이 오골계처럼 기육에서 뼈다귀까지 변한 오늘 무연히 어디서, 그를 만나지고 싶다. 2008, 2 김 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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