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한일합방이 강제로 이루어지자 많은 인사들은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의 독립운동은 망명인사들에 의한 무력투쟁 및 외교적 독립운동과 국내에서의 비밀결사운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고종의 장례일 앞두고 민심이 들끓어 손병희을 중심으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전국적인 만세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대전·충남지역에서도 75회의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군중은 약 5만에 이르렀고, 충돌 횟수도 절반이 넘는 40회였다. 그리고 시위군중에 의하여 파괴된 일제기관은 경찰관서 1, 헌병소 4, 군청 또는 면사무소, 기타 1개소로서 모두 10개소였다.
대전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3일 인동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만세를 외치면서 시작되어 3월 16일 인동가마니장터에서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되었다. 주동자는 산내면에 사는 양사길로 김노원·장운심·권학도 등과 함께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와 보병대의 사격으로 양사성 등 15명이 사망하였다. 같은 날 유성시장에서도 이상수·이권수 형제가 주도하여 300여명의 만세시위운동이 있었다. 대덕구 회덕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1일 회덕지역의 인사들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밤 12시경에는 회덕역 앞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10년 일제는 회덕군청을 회덕읍에서 지금의 원동으로 강제로 이전시켰다. 1914년 3월에는 회덕군을 진잠군과 공주군 일부와 합쳐 대전군으로 바꾸어 회덕군은 역사상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 대전군은 회덕군과 진잠군 전부를 포함하였고, 공주군 현내면(유성) 57개 리·반포면의 4개 리·명탄면의 1개 리가 대전군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연산군의 두마면 2개 리, 식한면의 1개 리, 벌곡면의 1개 리가 포함되었다. 따라서 당시 대전군은 12개 면으로 대전·내남·외남·산내·유천·동면·북면·구즉·진잠·기성·탄동·유성 등으로 이루어 졌다.
당시 대전군에 포함된 대덕지역을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에 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면 |
리 |
개편이전의 면 |
소 속 리 |
북 면 |
문평리 |
회덕군 북면 |
문평리, 신흥리, 목중리, 구즉면 봉산리 각 일부. |
목상리 |
동 |
신흥리, 목상리, 목중리, 목하리 각 일부 |
평촌리 |
동 |
귀암리, 하서당리, 덕운리, 평촌 각 일부 |
신대리 |
동 |
신대리, 계상리, 계하리, 학소리, 목상리, 목중리, 구즉면 봉암리, 봉산리 각 일부 |
상서리 |
동 |
죽림리, 입암리, 상서당리, 송암리, 방등리, 평촌, 덕암리 각 일부 |
덕암리 |
동 |
니동, 덕운리, 덕암리, 석봉리, 목하리, 구즉면 가작리 각 일부 |
석봉리 |
동 |
신촌, 내동, 자암리, 달송리, 석봉리, 덕운리 구즉면 가작리 각 일부 |
용호리 |
회덕군 일도면 |
하산리, 용호리, 장동리 각 일부 |
장동리 |
동 |
상산리, 장동리 일부 |
미호리 |
동 |
미호리, 동현리, 삼정하리 일부 |
삼정리 |
동 |
삼정상리, 삼정중리, 산촌, 용호리, 삼정하리, 갈전하리, 삼산리 각 일부 |
부수리 |
동 |
부수리, 삼산리, 형지원리 각 일부 |
갈전리 |
동 |
갈전상리, 부수리, 갈전하리, 직동 각 일부 |
이현리 |
동 |
심곡리, 이현리 |
황호리 |
동 |
황호리, 지명리, 서당리 형지원리 일부 |
내남면 |
비래리 |
회덕군 내남면 |
대양리, 신촌, 비래리 일부 |
송촌리 |
동 |
비래리, 송촌, 중리 각 일부 |
중 리 |
동 |
봉동, 중리, 오정리, 상오리, 법동 각 일부 |
법동리 |
동 |
법동 일부 |
오정리 |
동 |
내동, 노촌, 상오리, 오정리, 봉촌, 외남면 동산리 각 일부, 서면노촌 |
대화리 |
동 |
율사동, 대화리, 구만리, 법동 각 일부. 서면 구만리 |
읍내리 |
동 |
후곡리, 금성리, 교동리, 읍내리, 당하리 |
용전리 |
동 |
송촌일부, 외남면 용전리 |
연축리 |
회덕군 현내면 |
연축동 일부 |
신대리 |
동 |
신대리, 목동, 와동, 연축동 각 일부 |
와동리 |
동 |
평촌, 목동, 와동 각 일부 |
위의 표에서 대덕구의 행정구역명과 동리 명이 이 때에 확정되었고, 이후 큰 변화 없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26년에는 대전면의 구역 확장에 따라 외남면의 일부를 대전에 편입시켰다. 1931년에는 읍제의 실시에 따라 대전면이 대전읍으로 되었다. 이후 1935년에는 대전읍을 대전부(大田府)로 승격시켜 15개 정(동)을 관할하도록 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대전부에서 분리하여 대덕군을 신설하면서 이곳에 편입시켰다. 즉 대전부와 대덕군을 분리하였는데 대덕이란 명칭은 대전의 '대(大)'와 회덕의 '덕(德)'을 합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때 대덕군이 관할하던 면은 산내면·동면·회덕면·북면·구즉면·유성면·탄동명·진잠면·기성면 등 9개 면이었다. 1940년 1월 31일에는 대덕군 유천면의 문화리·산성리·오류리·태평리와 외남면의 가양리·자양리·용운리의 각 일부를 대전부에 편입하였다. 다시 1940년 11월 1일 대전부 구역 확장에 따라 대덕군의 일부 지역을 대전부에 편입시키고 동명을 모두 일본식의 정(町)으로 고쳤다. 이때에 대덕군에서 대전부로 편입된 지역은 외남면의 판암리·용운리·자양리·가양리·성남리·홍도리 등 6개 리이고, 유천면의 용두리·태평리·유천리·산성리 등 4개 리와 산내면의 석교리 등이었다.
|
1962년 11월 21일 법률 제 1175호에 의거, 대덕군의 유천면 전체, 회덕면의 대화리·오정리·용전리, 산내면의 옥계리·가오리·호동리·삼천리·삼정리 등을 대전시에 편입시켰다. 1973년 7월 1일에는 유성면을 유성읍으로 북면을 신탄진읍으로 승격시켜 대덕군은 2읍 7개 면의 체제가 되었다. 1983년 2월 15일에는 유성읍 전체, 회덕면 전체, 구직면의 문지·원촌·전민 등 3개 리, 탄동면의 아정·내동·덕진·도룡·신성·장동·하기·화암 등 8개 리, 진잠면의 교촌·내동·대정·용계·학하 등 5개 리, 기성면의 가수원·관휴·도안 등이 대전시로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 진잠면 학산리를 대전시에 편입시켰다. 이로서 대덕군은 1읍 6개 면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1962년 이후 계속된 대전시의 지역 확장은 대전시를 둘러싸고 있던 대덕군의 축소로 이어졌다.
1977년 9월 1일 대전천을 경계로 동쪽 지역을 동구(20개 동)라 하고, 서쪽 지역을 중구(25개동)라 하여 2개 구청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대덕구 대화동·오정동은 당시에는 동구에 속해 있었다. 1983년 2월에는 대덕군의 회덕면·유성읍 전역을 비롯하여 구즉면·탄동면·진잠면의 일부지역이 대전에 편입되었다. 1980년대 대전지역의 확장은 주로 유성과 대덕연구단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유성출장소가 시 직할의 출장소로 승격하였고, 종래의 중구를 나누어 서구청을 신설(1988.1.1)하였다. 그리고 대전천을 경계로 동쪽은 동구, 유등천을 경계로 하여 동쪽은 중구, 서쪽은 서구로 분할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거처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기존의 대덕군 전역(진잠면 남선리 제외)이 대전직할시에 편입되었는데, 이때 회덕의 옛 지역을 중심으로 대덕구가 신설되었다.
이로써 대덕구는 대전천·유등천, 대전천·갑천이 합류하는 부근의 동쪽지역 8개 행정동을 관할하는 자치구로 발전하였다. 1990년 1월 1일 회덕 2동을 중리동으로 분동 함에 따라 9개 동으로 되었고, 1991년 9월 1일에는 중리동을 다시 중리동과 법동으로 분동하여 10개의 행정동에 25개의 법정동이 되었다. 그후 법동이 법1동과 법2동으로 분리되어, 2000년 현재 대덕구의 관할지역은 11개 행정동과 26개 법정동이 되었다. 관할지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행정동 |
소속 법정동 |
오정동 |
오정동 |
대화동 |
대화동 |
회덕1동 |
읍내동, 연축동, 신대동, 와동, 장동 |
회덕2동 |
송촌동, 비래동 |
중리동 |
중리동 |
법 1동 |
법 1동 |
법 2동 |
법 2동 |
신탄진동 |
신탄진동, 용호동, 미호동, 삼정동, 황호동, 부수동, 갈전동, 이현동 |
석봉동 |
석봉동 |
덕암동 |
덕암동, 상서동, 평촌동 |
목상동 |
목상동, 문평동, 신일동 |
대전직할시가 1995년 1월 1일자로 대전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서, 대덕구도 대전광역시 대덕구로 개칭되었다.
현재의 대덕구는 대전광역시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북과 동은 충북과 경계하고, 남은 동구·중구와 경계하며, 서는 서구·유성구와 경계를 하고 있다. 대덕구 지역은 경부, 호남고속도로와 경부, 호남선 철도 그리고 국도와 고속전철이 통과하고 있고, 또 경부고속도로의 신탄진 인터체인지와 경부·호남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가 위치해 있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그리고 대화동 지역에는 1·2공단을 비롯하여 문평동과 목상동 그리고 신일동지역에 3·4공단이 위치해 있어 대전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구청의 소재지는 대덕구 오정동 500번지에 있다. 1999년 12월 현재 대덕구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제8회 대덕구 통계연보 (1999년 현재)
구분 연별동별 |
면적(㎢) |
구성비(%) |
동 |
통 |
반 |
행정동 |
법정동 |
1994 |
68.47 |
100 |
10 |
25 |
385 |
1,661 |
1995 |
68.48 |
100 |
10 |
25 |
409 |
1,739 |
1996 |
68.46 |
100 |
11 |
25 |
416 |
1,777 |
1997 |
68.46 |
100 |
11 |
26 |
419 |
1,788 |
1998 |
68.45 |
100 |
11 |
26 |
420 |
1,801 |
오정동 |
3.05 |
4.5 |
1 |
1 |
45 |
206 |
대화동 |
3.15 |
4.6 |
1 |
1 |
35 |
168 |
회덕 1동 |
16.83 |
24.6 |
1 |
5 |
56 |
225 |
회덕 2동 |
5.27 |
7.7 |
1 |
2 |
48 |
214 |
중리동 |
1.52 |
2.2 |
1 |
1 |
47 |
208 |
법 1 동 |
0.77 |
1.1 |
1 |
1 |
38 |
145 |
법 2 동 |
1.87 |
2.7 |
1 |
|
49 |
188 |
신탄진동 |
22.94 |
33.5 |
1 |
8 |
38 |
163 |
석봉동 |
1.23 |
1.8 |
1 |
1 |
16 |
74 |
덕암동 |
6.21 |
9.1 |
1 |
3 |
35 |
156 |
목상동 |
5.61 |
8.2 |
1 |
3 |
13 |
54 |
|
19세기에 이르면 안으로는 세도정치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밖으로는 제국구주의 도전이 조선사회를 위기로 몰아 넣었다. 이런 시기에 철종이 죽고 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집권 후 각종 내정을 개혁을 하는 한편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양반지주의 아성이었던 서원을 국가재정을 좀먹는다는 이유로 전국에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대덕구 회덕 지역에 있었던 숭현서원·정절서원·종회사·용호사·미호서원 등 모두가 훼철되었다. 숭현서원은 건립 년대는 잘 알 수 없지만 배향 인물로 보아 16세기 말경에 건립되었다가 1609년(광해 1)에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처음에는 정광필·김정·송인수 등이 배향되었다가 김장생·송준길·송시열 등이 추향되었고, 이시직과 송시영을 별묘에 배향한 서원이었나 1871년 대원군의 서원정리 때 훼철되었다. 정절서원은 1684년(숙종 10)에 회덕 흥농(동구 가양동)에 건립되어 송유·박팽년·송갑조·김경여·송상민·송국택 등을 배향하였다가 1871년 훼철되었다. 종회사는 1697년(숙종 23)에 회덕 흥농에 건립되어 주희·송시열을 배향한 서원이었으나 서원철폐 시 훼철되었다. 용호사도 1697년(숙종 23)에 회덕 용호동에 건립되어 강학년·강세구 등을 배향한 서원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다. 미호서원은 1709(숙종 35) 회덕 미호동에 건립되어 송규렴을 독향하였으나 서원정리 때 훼철되었다.
이시기 회덕을 중심으로 한 대덕지역은 위정척사론에 입각한 반개화적 분위기가 팽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회덕지역에는 송달수·송근수·송병선·송병순 등 위정척사론에 철저한 유학자들이 거주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게되자 문석봉의 유성봉기를 가능케 하였다 할 수 있다. 이는 회덕지역의 척사론적 분위를 보여준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반봉건 민중운동인 동시에 반제국주의 운동이었다. 나라에서는 동학을 위험시하여 철종 14년(1864)에 혹세무민의 죄로 최재우를 체포하여 대구감영에 가두었다가 이듬해 고종 1년(1865)에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자 2대 교주 최시형은 교조신원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교조신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최시형은 제폭구민과 척양벌왜를 표방하면서 보은 취회를 감행하였다.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종 29년(1892)에 고부민란이 일어나 전주·충청도 일대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그러나 전봉준은 전주에서 전라감사 김학진과 타협하면서 동학군을 해산하였다.
그후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동학군의 2차 봉기가 일어나자 충청도 공주부 여러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였는데 회덕·진잠·청산·보은·옥천·문의 등 대전을 둘러싼 지역이 중심이 되었다. 동학농민 전쟁시기에 회덕지역에서는 동학군이 회덕 관아를 공격하였다. 이때 참여한 동학군은 회덕·진잠·옥천 등지에서 집결한 부대로 보인다.
한말 항일 의병운동은 을미사변 직후에서부터 본격화되었으며 대전의 유성·회덕지역이 그 시초를 이룬 지역이다. 문석봉이 1895년 8월에 명성황후의 시해소식을 듣고 복수를 위하여 1895년 9월 18일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에 회덕의 사족이었던 송도순이 군향으로 참석하였고, 전 좌의정 송근수 역시 신응조와 함께 문석봉의 의병항쟁을 지원해 주었다. 문석봉 의병은 유성에서 1천명의 부대를 편성한 후에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를 탈취한 후 공주로 진격하다가 관군에 패했다. 이처럼 대덕구 지역에서는 의병운동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회덕에 거주하였던 사족인 송병선·송병순 형제가 자결 순국하는 등 민족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 |
|
16세기말 조선은 계속된 사화(士禍)와 당쟁으로 정치력이 많이 쇠잔해 있었고, 병농일치의 개병제는 사실상 무질서한 방군수포제로 전환되어 국방력은 극도로 허약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1592년(선조 25)에 왜구의 15만8천7백 명이나 되는 대 군단의 침입을 받아 불과 20여일 만에 도성을 적에게 함락을 당하고, 선조 임금이 북으로 몽진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때 구국을 위해 일어난 것이 의병이었다. 의병운동은 4월 24일 경상도 의령에서 곽재우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5월 3일에는 회덕과 인접한 옥천에서도 조헌의 의병봉기가 있게 되었다. 조헌은 처음에는 공주·청주간을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마침내 옥천에서 거병하였다. 조헌이 이끌었던 의병은 차령에서 적에게 포위되었지만 격퇴하였고, 이어서 조헌은 회덕·온양·정산상·홍주 등 여러 고을에서 의병 1,600여명을 모집하고 영규의 승병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후 조헌은 금산전투에서 필사의 각오로 싸웠으나 조헌·영규 등을 포함한 700명 모두가 전사하였다. 전투가 끝나고 왜군이 철수한 후에 박정량과 김승철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한 7백구의 시체를 거두어 하나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를 '금산칠백의총'이라 하였다.
임난 때에 회덕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즉 태종조 좌명공신 부원군 연사종의 5세손이고, 남대 장령 연정설의 손자이었던 연복이 의병을 일으켰다. 참정을 지냈던 연복은 임난이 일어나자 그의 형인 전봉사 연희와 부장 나수, 수문장 변세호, 출신 변용 등과 함께 의로운 군사 40여인을 이끌고 문의벌 전림에 잠복해 있다가 왜적 30여명을 만나 수명을 참수하고 사살하였다. 또 회인 휴류암 밑에 매복해 있다가, 왜적 100여명이 마을을 분탕질하기 직전에 나아가 적을 잡고 8명을 참수하고 적을 무수히 사살하였다. 이들의 공로로 당시 형강 일대의 군·읍이 안전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는 회덕 출신의 정치·사상가들이 대거 등장하여 활약한 시기이다. 당시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던 송시열·송준길·김경여 등으로 이들은 인조반정 이후 스승 김장생이 중용되고 김집 등이 관직에 나감에 따라 함께 출사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에 대하여 굴욕적인 굴복을 하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산림계이었던 김상헌·김집·송시열·송준길·이유태 등이 대거 등장하여 효종과 더불어 북벌 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1659년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들의 북벌계획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는 회덕 출신의 노론계 산림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사상계에서도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후기 회덕현의 면별 호구 상황을 1760년에 간행된 {여지도서}의 [회덕현 공주진관] '방리'조 의하면 다음과 같다.
행 정 구 역 |
편호 |
남 |
여 |
인구계 |
1914년 행정구역 |
현 행정구역 |
현내면 |
비래동리 |
250 |
513 |
492 |
1,005 |
내남면 비래리 |
대덕구 비래동 |
연축동리 |
140 |
309 |
306 |
615 |
내남면연축동리 |
대덕구 연축동 |
동면 |
추 동 리 |
59 |
109 |
111 |
220 |
동면 추동리 |
동구 추 동 |
주 산 동 |
75 |
169 |
125 |
294 |
동면 주산리 |
동구 주산동 |
비룡동리 |
30 |
44 |
40 |
84 |
동면 비룡리 |
동구 비룡동 |
내남면 |
상송촌동 |
102 |
438 |
445 |
883 |
내남면 송촌리·비래리 |
대덕구 송촌동·비래리 |
하송촌동 |
65 |
151 |
172 |
323 |
내남면 중리 ·용전리 |
대덕구 중리동·용전동 |
오 정 동 |
130 |
263 |
363 |
626 |
내남면 오정리·중리 |
대덕구 오정동·중리동 |
연 효 리 |
73 |
167 |
202 |
369 |
외남면 연효리 |
동구 성남동 |
외남면 |
주 동 리 |
144 |
402 |
391 |
793 |
동면 주촌리 |
동구 주촌동 |
초 동 리 |
94 |
228 |
211 |
439 |
외남면 용방리 |
동구 용운동 |
흥 농 리 |
134 |
331 |
321 |
652 |
외남면 가양리 |
동구 흑농동 |
서면 |
갑 천 리 |
60 |
112 |
152 |
264 |
유등천면 삼천리 |
서구 삼천동 |
정 민 리 |
113 |
169 |
162 |
331 |
구즉면 전민리 |
유성구 전민동 |
북면 |
목 포 리 |
160 |
312 |
336 |
648 |
북면 목상리 |
대덕구 목상동 |
자운동리 |
62 |
253 |
179 |
432 |
북면 석봉리 |
대덕구 석봉동 |
방 등 리 |
78 |
186 |
246 |
432 |
북면 상서리 |
대덕구 용호동 |
일도면 |
상산대리 |
120 |
201 |
202 |
403 |
|
대덕구 장동, 용호동 |
미 호 리 |
281 |
349 |
333 |
682 |
북면 미호리 |
대덕구 미호동 |
이 현 리 |
180 |
262 |
237 |
499 |
북면 이현리 |
대덕구 이현동 |
총 계 |
2,350 |
4,968 |
5,026 |
9,994 |
|
|
위 표에 의하면 조선 후기 1759년 회덕지방의 주민의 호수는 2,350호, 인구는 총 9,994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남자는 4,968명이었고, 여자는 5,026명이었다. 즉 남녀인구는 여성이 조금 더 많았으나 크게 의미를 부여할 만한 차이는 아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회덕현 7개 면 가운데 지금의 대덕구 지역은 현내면·내남면·북면·일도면 지역이다. 대덕구 지역의 호구는 총 1,568호에 6,548명으로 회덕현 전체의 호수 중 66.7%로 인구수 65.5%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보다 30년에 늦게 간행된 1789년(정조 13) {호구총수}에 의하면
회 덕 |
元戶 2491, 口 10,330( 남 5,207 여 5,123) |
동 면 |
元戶 312, 口 791( 남 405, 여 386) |
상추동리, 하추동리, 아야매리, 양천리, 운교리, 관동리, 반암리, 사동리, 동산치리, 아감리, 세천리, 신대리, 옹고치리, 묘동리, 삼거리, 홍동리, 주산리, 비룡동리, 줄동리 19리. |
외남면 |
元戶 396, 口 1,971(남 991, 여 980) |
줄동리, 신사동리, 세곡리, 삼정리, 제전리, 오리동리, 가오대리, 도사리, 구덕리, 와지리, 대별리, 응전리, 명월리, 상신대리, 천동리, 모오리, 산소동리, 초동리, 용방리, 선암리, 초곤리, 신대리, 대아동리, 온언리, 가양리, 솔즉리, 흥용리, 매봉리 28리 |
내남면 |
元戶 397, 口 1,891(남 958, 여 933) |
대양리, 상리, 북리, 남리, 평리, 용전리, 중리, 송촌봉촌상오정리, 하오정내동리, 동산리, 신설리, 홍도동리, 연효리, 갑천리 14리 |
서 면 |
元戶 187, 口 730(남 368, 여 362) |
갑천리, 이수정상신대리, 서원리, 하대리, 방축리, 중리, 산소동리, 역촌리, 정촌리, 청류리, 왕동리 11리 |
근북면 |
元戶 273, 口 1,539(남 773, 여 766) |
계담리, 신대리, 목포리, 신촌리, 가작리, 석봉리, 이동리, 덕암리, 덕연리, 내동리, 대탄리, 자운동리, 평촌리, 다즉리, 방등리, 죽촌리, 학소동리, 서당리, 장인촌 19리 |
일도면 |
元戶 559, 口 1,675(남 840, 여 835) |
상대산리, 장동리, 하산대리, 용호리, 미호리, 삼지리, 형지원리, 내동리, 부수동리, 삼산리, 갈전리, 이현리, 직동리, 당산리, 서점리, 마산리, 달감리 17리 |
현내면 |
元戶 367, 口 1,733(남 872, 여 861) |
비래동리, 법천리, 후곡상리, 중리, 중북리, 중남리, 교동리, 금성동리, 당하리, 대치상리, 와지리, 대화리, 연축동리, 신대리, 와동리, 본동리, 평촌리, 탑립리 18리. |
에서와 같이 7개 면 128개 리에 2,491호이었고 인구수는 10,330명(남 5,207, 여 5,123)이다. 이는 {여지도서}에 비하여 약간 명의 주민수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나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지도서}에서는 남자에 비하여 여자가 많았었는데 {호구총수}에서는 오히려 남자가 약간 명 많은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호구총수}는 회덕의 옛 지명을 가장 많이 알려주고 있고, 실제로 이 지명이 지금도 대부분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의 대덕구 지역에 해당되는 것은 근북면·일도면·현내면 등인데 원호는 1,199호에 4,947명이었고, 남자는 2,485명이고, 여자는 2,462명이다.
임란 직후 토지는 54만 결에 불과하여 국가는 재정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농지개간을 장려하고 개간지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3년간 면세혜택을 주었다. 또한 양전 사업을 통해 양안(量案)에서 빠진 은결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으로 인조 때에는 120만 결, 숙종 때에는 140만 결, 정조 때에는 145만 결로 늘었다. 그럼에도 실제 토지의 파악은 원장부와 크게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회덕의 경우에도 같다. 즉 이 시기의 {여지도서}의 「회덕 조」에
한 전 |
원장부 2,375결 25부 5속내, 진잡이 1,497결 78부 3속, 기묘시기실 877결 47부 2속. |
수 전 |
원장부 1,218결 88부 5속내, 진잡이 594결 58부 7속, 기묘시기실 624결 29부 8속. |
라 하여 실제 원장부상에 있는 토지의 결수에 비하여 기묘(1759)시 실제로 파악된 토지는 절반을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회덕의 경작지는 한전이 수전의 2배나 되어서 당시에는 산촌의 형태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호서 대동법에서는 군·현을 산군(山郡)과 해읍(海邑)으로 구분하여 해읍은 미(米)로 산군은 목면(木棉)으로 징수토록 하였는데 회덕은 산군에 해당하여 목면으로 징수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조선후기 국가의 재정위기는 전세의 조정만으로는 개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부는 공납과 균역세의 개편을 시도하였다. 즉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을 경기도에서부터 처음 시행하여 상공(常貢)은 폐지하고, 그 대신 대동미(大同米)로 결당 미(米) 12두(斗)를 거두고, 산간지방에서는 포나 전(錢)으로도 납부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필요한 물품은 징수된 대동미를 공인에게 공가로 지불하여 납입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공업과 상품경제·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수취기준을 재부의 원천인 토지에 둠으로써 국가는 재정을 확충할 수 있게 되었고, 하층 농민을 보호하는 이 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왕실 수요를 위한 진상이나 별공(別貢)은 여전히 남아 그 폐단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후기 대표적인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켜 양인의 유망을 가져와 농촌의 황폐화를 초래한 것이 군포이었다. 따라서 양인에게 받던 군포를 1필로 감하여 주고 그 부족 분을 위하여 토지 1결당 결작(結作)으로 미(米) 2두씩 거두고 어세·염세·선박세 등을 균역청에서 징수케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후기 수취체제의 개편에 따른 회덕의 구체적인 부담을 {여지도서}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진 공 |
약재진상 2월 모향4근. 3월 길경10양 건지황2양 모향4근 백급2양 전호1근 5양 백모근5양. 6월 행인5양전 모력자1양 금은화3양. 7월 청상자5전 백급 3양 태수1합. 10월 목과13개 모향4근 전호14양 목단피12양 진하진상 활치5수 |
전 세 |
기묘시기목28동14필29척 2월시봉 3월육로수납호조 |
대 동 |
기묘시기목 42동 25필 전포삼리 3월시봉 4월 육로수납혜청. 저치미 92석2두 |
균 세 |
기묘시기 결전 765양6전 태세목21필29척. 선무군관포 25필 9월시봉 10월수납 |
조선후기 임란이후 인구의 유리와 경지의 황폐화에 대처하여 개간지의 면세 등 법적 조처를 통해서 인구를 환집시키고, 경지를 복구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평지와 저지대로 개간이 확대되었다. 이처럼 저지대로 개간이 확대된 것은 17·8세기 이르러 집약농업기술의 발달과 수전 농업이 일반화되면서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수전 농업이 활성화되면서 저수지와 제언들이 축제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처럼 조선후기 수전 농업의 발달로 수리시설의 정비 및 확대가 진행되면서 18세기말에 이르면 전국에 저수지가 약 6,000개에 달할 정도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회덕 지역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회덕 지역에서도 활발히 하천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제언이 구축되었다. 특히 현재의 대덕구가 있던 지역에는 대전천과 갑천이 흐르고 있어 제언이 크게 발달하였다. 당시 회덕에 있었던 제언은 {증보문헌비고} 권146, [제언]조에서는 17개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제언의 명칭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여지도서}의 제언 조에는 17개 제언의 명칭과 위치 그리고 크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 구체적인 명칭과 크기를 {여지도서}에 기록된 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화병자제언 |
관문 남쪽 13리. 주위 1,006척, 동서 255척, 남북 210척. |
소제계자제언 |
관문 남쪽 10리. 주위 2,618척, 동서 822척, 남북 850척. |
조교맹자제언 |
관문 남쪽 7리. 주위 1,670척, 동서 379척, 남북 281척. |
용천사자제언 |
관문 남쪽 5리. 주위 876척, 동서 234척, 남북 207척. |
광사동어자제언 |
관문 남쪽 5리. 주위 334척, 동서 152척, 남북 115척. |
준구추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730척, 동서 280척, 남북 197척. |
묘동장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449척, 동서 130척, 남북 110척. |
대화등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616척, 동서 180척, 남북 152척. |
장봉개자제언 |
관문 남쪽 5리, 주위 509척, 동서 118척, 남북 94척. |
호명백자제언 |
관문 서쪽 5리, 주위 673척, 동서 211척, 남북 191척. |
정민감자제언 |
관문 서북쪽 9리, 주위 660척, 동서 201척, 남북 181척. |
방도지이자제언 |
관문 북쪽 15리, 주위 876척, 동서 280척, 남북 198척. |
외다랑당자제언 |
관문 북쪽 13리, 주위 365척, 동서 105척, 남북 94척. |
덕음암형자제언 |
관문 북쪽 15리, 주위 874척, 동서 204척, 남북 158척. |
내다랑종자제언 |
관문 북쪽 12리, 주위 566척, 동서 198척, 남북 150척. |
계담복자제언 |
관문 북쪽 15리, 주위 765척, 동서 254척, 남북 195척. |
흥농대자제언 |
관문 동남쪽 15리, 주위 824척, 동서 285척, 남북은 196척. |
이처럼 회덕 지역에는 17개의 제언이 축제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에 이르러 회덕 지역에서도 집약농업 기술의 발달과 수전의 활성화에 따라 평전의 개간이 활발하여 많은 축제(築堤)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회덕에서 차출된 군병을 {여지도서}에 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공주진파총 1인, 초관 2인, 기패관 4인, 교사 1인, 마병 18명에 보 18명, 속오군잡색병 274명 |
○ 감영기패관 1인, 수첩별군관 6인, 아병 14명, 수미아병 15명, 재가군관화병 2명. |
○ 병영아병기패관 1인, 대맥군관 1인, 신선마병 1명 보 1명, 보군 16명, 납포 9명, 군뇌보 1명, 각색장인 1명, 봉수별장 1인, 감관 5인, 봉군 25명 보75명, |
○ 수영수군 20명, 보 14명. |
○ 훈련도감 포수 보 85명. |
○ 어영청 정군 25명, 자보 36명, 관납보 119명. |
○ 병조기병 171명, 보군 75명. |
○ 장악원 악공 보 1명. |
○ 기상품외안부 1,080명. |
|
조선의 건국과 함께 태종대에 8도 체제로 지방행정체제의 대폭적인 개편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방통치체제도 왕(중앙정부)→감사→수령→면리임으로 이어졌으며, 행정구역도 서울→도→주·부·군·현→면(방·사)→리(동·촌)로 편성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구역은 종적인 상하관계로는 크게 3층을 형성하여 목민관인 수령이 통치하는 군·현(읍=고을)을 중심으로 위로는 상급 행정구역인 8개의 도역으로 편성되어 있고, 아래로는 군·현의 관내에 하부 행정구역인 면 또는 그 밑에 리로 편성되어 있다.
태종대에 8도제는 전국 8도(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강원도·함길도·평안도)에는 관찰사를 두고 그 밑에는 부·대도호·목·도호부·군·현 등 310여 개의 행정구역을 설치하여, 그 수령으로 각각 부윤·대도호부사·목사·도호부사·군수·현령·현감을 배치하였는데 수령은 중앙에서 파견하는 외관으로 충당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외관이 파견되지 못한 속현이 373개나 되었던 고려시대와는 다른 것이고, 고려적인 향·소·부곡이 소멸되어 직촌화 하면서 면·리 제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이들 수령은 행정체계상으로는 모두 병렬적으로 직속상관인 감사의 관할 하에 있었으며, 다만 이들 수령이 겸대하는 군사직으로 말미암아 수령간에 상하의 계통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충청도는 태종 13년 도역이 조정된 뒤에는 한말까지 변동이 없었으나 도명은 도를 구성하고 있는 있던 계수관(忠·淸·公·洪州)의 읍격 승강에 따라 충청(忠淸)·공청(公淸)·공홍(公洪)·충홍(忠洪)도 등으로 개칭이 빈번하였다. 충청도의 사방 경계는 동으로는 단양현의 죽령에 이르고, 서로는 태안의 후근이포에 이르며, 남으로는 은진현의 작지에 이르고, 북은 직산의 아주제에 이른다. 동서의 거리는 477리, 남북이 244리이며, 소관 읍 수는 목 4, 군 11, 현령 1, 현감 39읍이었다. 감영은 국초에는 충주에 있었으나 선조 31년(1589)에 공주로 옮겼다.
조선초기 태종 13년의 개편에 따른 충청우도에 속해있었던 33개의 주·부·군·현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목사(종3품) : |
공주·홍주(2) |
군수(종4품) : |
임천·태안·한산·서천·면천·서산·온양(7) |
현감(종6품) : |
홍산·평택·정산·청양·은진·회덕·진잠·연산·니산(노성)·부여·석성·비인·감포·결성·보령·해미·당진·신창·예산·전의·연기·아산·대흥·덕산(24) |
위에서처럼 지금의 대덕구 지역인 회덕현은 공주·홍주목 등과 함께 충청우도에 속해 있었던 24개 현 가운데 하나로 종6품의 현감이 다스리는 관아였다. 회덕현의 지리적 위치로 사방의 경계는 동쪽으로 청주에 이르기 14리, 서쪽으로 공주에 이르기 7리, 남쪽으로 진산에 이르기 22리, 북쪽으로 문의에 이르기 24리이었다.
조선초기의 지방군제는 세조 3년에 성립한 진관 체제이었는데, 이것이 뒤에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뒤 {경국대전}에 법적으로 규정되었다. 진관 체제하에서는 각 위의 지휘관을 수령이 겸대하도록 되어있어 회덕현감은 병마절제도 위를 겸대하였다.
조선초기 종6품 현감이 다스리는 현의 기본구조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현감(종6품) 1원, 좌수 1원, 별감 2원, 읍사는 현사이고, 교관은 훈도이고, 향교유학생도 30원, 관둔전결수 12결, 늠전은 아녹전이 40결이고, 공수전이 15결, 외아전은 서원이 18원이며 일수(日守)가 28원, 관노비 수는 100명, 향교노비 수는 10명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수는 어디까지나 법제상 정해진 것이고 실제는 읍세의 융성과 쇠잔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회덕현의 경우에도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현감·훈도 각 1인으로 되어 있다. {여지도서} 회덕현 관직 조에서는 현감은 음직으로 종6품, 좌수·별감이 각각 1인, 군관 5인, 아전 18인, 지인 9인, 사령 14명, 관노 12명, 관비 17명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라 {여지도서}의 내용이 보다 구체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원 외에도 회덕현에는 {경국대전} [공전]에 의하면 외공장으로 유구장(油具匠) 1원, 야장(冶匠) 1원, 시인(矢人) 1원, 지장(紙匠) 2원, 석장(席匠) 1원, 목장(木匠) 1원, 피장(皮匠) 1원, 칠장(漆匠) 1원씩을 두었다.
조선시대 외방의 도로는 그 멀고 가까움에 의하여 대로·중로·소로로 나뉘었는데, 이와 같은 등급은 한양에서의 거리에 따라 구분된 것이었다. 따라서 회덕에 연한 도로는 대로로 연결되는 도로는 없고, 다만 소로로서 중로에 연결되는 도로만이 있었다. 지금 대전과 연결될 수 있는 각종 도로는 다음과 같다
· 서울→소사→공주→삼레→고성간 간선도로 · 서울→소사→성환→차령→공주→삼례→고성 · 서울→차곡역→동래→부산간 간선도로 및 지선도로 · 서울→한강→판교침→용인→직곡→좌찬→진촌-+-→광암→충주→조령→차곡역→대구-+동래 · 서울→한강→판교침→용인→직곡→좌찬→진촌 └-→진천→청주
· 원치대로(遠峙大路) : 현의 동쪽 20리. 옥천으로 통하는 길. · 형각진대로(荊角津大路) : 현의 북쪽 30리. 문의로 통하는 길. · 질치소로(迭峙小路) : 현의 서남쪽 10리. 공주로 통하는 길. · 신탄진소로(新灘津小路) : 현의 서북쪽 20리. 문의로 통하는 길. · 양정자소로(凉亭子小路) : 현의 남쪽 5리. 공주로 통하는 길.
이와 같은 전국의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마다 역을 설치하고, 역에는 마필과 역원을 두어 공문을 전달하거나 공무 여행자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고, 관물의 수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회덕현에는 정민역(현의 서쪽 10리에 위치, 지금의 유성구 전민동)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민역은 청주의 율봉도 관할에 속하여 청주-문의-회덕-옥천을 잇는 지방 소역 가운데 하나이었다. 정민역에는 소역으로서 대마 1필, 역마 4필, 복마 3필과 역리 31인이 있었으나 역노비는 없었다.
역과 더불어 공무 여행자의 숙식을 위해 객사와 원(院)이 준비되어 있었다. 객사는 각 고을에서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었고, 원은 역과 같은 장소에 설치된 경우가 많아서 역과 원을 합하여 역원이라 하였다. 회덕에 설치된 원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미륵원 : 일명 굴파원. 일도면.(지금의 동구 마산동 소재) · 덕창원 : 서면(지금의 유성구 문지동 소재) · 총술원 : 북면(지금의 대덕구 읍내동 소재) · 형지원 : 일도면(지금의 대덕구 부수동 소재). · 여아원 : 남면(미상)
이중에서 미륵원이 가장 유명하다. 미륵원은 고려시대에서부터 있어온 것이었으나 일시 중단되었다가 조선초 회덕황씨 황연기에 의해서 다시 시작된 일종의 무료여관이었다. 이에 관하여 『동국여지승람} '회덕조'에는 목은 이색이 쓴 미륵원 남루기와 하륜이 쓴 발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회덕에는 역원이외도 이원진(속칭 형각진이라 하며, 나룻배가 있다.)이라는 나루가 있었다.
조선시대 통신수단의 하나가 봉수이었다. 봉수란 밤에 불로서 알리는 연봉과 낮에 연기로서 알리는 번수를 합친 말이다. 봉수는 연락을 그 기능으로 하기 때문에 각 봉수대는 이웃 봉수대와 연락망을 이루고 있었다. 봉수의 연락망은 기능의 중요성에 비례하여 간선과 지선으로 나뉘었다. 간선은 변경지방에서 중앙으로 직접 통하였기 때문에 직봉(直烽)이라 하였고, 그 사이에 보조 선으로 지선이 있었는데 이를 간봉(間烽)이라 하였다. 봉수법으로는 평상시 아무 일이 없으면 1거, 육지에서 적병이 국경 쪽으로 움직이면 2거, 국경에 접근하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우리 군대와 접전하면 5거로 하였다. 바다에서는 적선이 나타나면 2거, 해안 가까이 오면 3거, 우리 병선과 접전하면 4거, 적이 육지에 올라오면 5거이었다.
조선에는 모두 5개간선 봉수망에 직봉과 간봉을 합하여 670개의 봉수가 있었다. 회덕에는 계족산에 봉수가 하나 있었다. 계족산 봉수는 제2거로 동래에서 서울간에 있던 봉수 중 제9간 봉의 하나이었다. 기점은 초기 금산(남해)에서 시작하여 진주-사천-진주-단성-삼가-협천-거창-지예-금산-황간-영동지역의 봉수를 거처 월이산(옥천)-환산(옥천)-계족산(회덕)-소이산(문의)-거칠대산(청주)-소흘산(진천)-충주 망이성(직봉)으로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하였다.
기타 조선초기 회덕의 실정을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용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회덕의 호수는 3백 호에 인구는 1,266명이었고, 군정은 시위군이 7명이요, 수호군이 4명이요, 선군(船軍)이 149명이다. 그리고 조선초기 회덕의 세거성씨는 토성은 4이었는데 황·임·이·방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곽이요, 정민역의 속성이 2이니, 배·김이다. 회덕의 경작지는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었으며, 간전이 2,688결이었다(논이 5분의 2가 된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모과이다. 토공(土貢)은 느타리·싸리버섯·칠·잡깃·밀·대추·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산달피)·지초·종이요, 약재는 오배자이요, 토산은 석철이다(현의 북쪽 20리 직동에서 나는데, 하품이다). 이밖에 회덕의 월경처(越境處)는 유성의 동촌 낭산리가 현의 남면에 들어와 있었다.
조선전기에 회덕에 세워진 교육기관으로는 회덕향교와 숭현서원이 있다. 숭현서원은 김정·정광필·송인수를 배향하여 삼현사(三賢祠)라 하였었으나 광해군 1년(1609)에 사액을 받은 후에는 숭현서원이라 하였다.
|
|
선사시대를 지나 한반도 충남과 전라도 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에 진국이 존재했었다. 진국을 이은 마한에는 54개국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이었던 신흔국 또는 내비이국이 지금의 대전 진잠과 유성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들 소국들은 대전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지석묘 사회와 괴정동이나 탄방동·문화동에서 출토된 청동기사회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삼한시대에는 괴정동의 농경문 청동기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농경생활과 소도의 풍속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대덕구 지역에서도 인접지역인 괴정동 지역과 마찬가지로 삼한시대에는 농경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삼한시대를 지나면서 한강유역에서는 마한의 54개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가 성장하여 백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백제국은 한강유역을 배경으로 성장하여 제8대 고이왕(234∼286)때에는 16관등과 6좌평의 명칭과 업무분장을 이루고, 공복제을 실시하는 등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그후 근초고왕(346∼375)때에는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전라도 남해안에까지 확대되었다. 이 때에 대전지역이 백제의 영역에 귀속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에 회덕이 역사상에 등장하는 것은 백제가 서울을 웅진으로 옮긴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잡지] 제5지리에는 "비풍군(比豊郡)은 본래 백제(百濟)의 우술군(雨述郡)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회덕군(懷德郡)이다." 라 하여 회덕군이 백제시대에는 우술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술군은 {고려사} 권56, 지(志) 10, 양광도 공주목조에 의하면 우술군을 "일운오천"이라 하여 오천이라 하기도 하였음 알 수 있다. 즉 대덕구 지역은 백제시대 우술군 혹은 오천이라는 행정구역명을 가진 지역이었다.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으로 한강유역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후 백제의 동성왕(479∼501)은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신라와는 결혼동맹을 맺어 동맹체제를 강화하여 국력을 신장시켰다. 이에 신장된 국력을 배경으로 보다 넓은 벌판이었던 사비(부여)로 무녕왕을 이은 성왕(523∼554)이 천도를 하였다. 성왕은 천도 후 국호를 남부여 라하고, 신라의 진흥왕과 더불어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유역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백제가 회복한 남북한산성을 탈취하여 자국의 주와 현으로 삼아 신주(新州)라 하였다. 이에 격분한 백제 성왕이 신라의 관산성(옥천부근)을 치다가 전사하였다. 성왕이 전사후 백제와 신라는 동맹관계에서 극심한 대립관계로 변모하였다. 특히 백제 무왕은 신라 서쪽 변경에 있던 모산성 등 많은 성을 함락하여 신라를 위기로 몰아 넣었다. 무왕을 이어 즉위한 의자왕도 신라의 대야성 등 40여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와 공동으로 당항성(남양)을 처서 신라와 당나라와의 통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와 긴밀한 국제관계를 통해 백제에 대항하고자 나·당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단결된 힘으로 효과적으로 대적하지 못하고 660년 7월에 패망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백제와 신라가 대립하면서 대덕구 지역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신라와 대립의 전초기지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는 대덕구 일대가 신라에서 보은→옥천→대전→공주에 이르는 소위 웅진도의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백제에서는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대덕구 일대에 계족산성(대덕구 장동)·이현동산성(대덕구 이현동)·장동산성(대덕구 장동)· 성치산성(대덕구 부수동)·질현성(대덕구 비래동)·연축동산성(일명 우술성 : 대덕구 읍내동) 등의 산성을 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 침공으로 붕괴된 후에 백제의 유민들은 신라에 대항하여 부흥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백제 부흥운동에 있어서도 대덕구 지역은 웅진도에 해당하는 곳에 많은 산성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어서 부흥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덕구의 계족산성(옹산성)과 우술성(연축동산성)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었다. 그러나 신라의 품일장군이 이끄는 공격으로 계족산성과 우술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운동은 점차 위축되어 마침내 부흥군의 왕도인 주유성이 함락됨으로써 끝을 맺게 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내외의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민족융합정책을 취하였다.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의 지배층을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을 하는 한편으로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특히 경덕왕 16년(757)에는 주·군·현의 일대 개혁하여 전국의 군·현을 120개 군, 305개 현으로 개편하고 읍호도 개칭하였다. 이때에 대덕구 지역도 {삼국사기} [잡지] 제5 지리에 의하면 "비풍군은 본래 백제의 우술군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회덕군으로 영현(領縣) 둘이다. 유성현은 본 백제의 노사지현을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도 이에 따른다. 적오현은 백제의 소비포현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덕진현이다." > 라 하여 경덕왕이 백제시대의 우술군을 비풍군으로 읍호를 바꾸었고, 비풍군의 영현으로 유성현과 적오현을 그 밑에 두었다. 이처럼 지금의 회덕지역에 있었던 비풍군이 유성구 지역에 있었던 유성현과 적오현을 속현으로 거느린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현재의 대덕구 지역이 이 지역의 중심이 되는 행정구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이후 번영을 누리던 신라는 36대 혜공왕 대에 이르면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들의 세력이 팽창하여 왕위계승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의 하나가 김헌창의 난이다. 김헌창은 원성왕계이었던 김주원의 아들로 공주도독으로 있었다. 그런데 부친인 김주원이 왕위계승에서 탈락하자 헌덕왕 14년(822년)에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무진주·청주·금관경 등을 장악하고, 국호를 장안국(長安國),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으나 패전하여 자살하였다. 그런데 김헌창이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청주를 점령하였던 것으로 보아 공주와 청주사이의 교통로 상에 위치하였던 대덕구 지역도 난에 휩싸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후기대 이르면 고대사회의 폐쇠성에 따른 모순이 노정되어, 귀족들의 반발로 인한 왕권의 약화와 그에 따른 잦은 왕위의 교체는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되었고, 골품제의 모순에 따른 6두 품들의 도전 등은 신라사회의 해체를 가속화하였다. 그리고 가혹한 수탈에 대항하여 피지배층이 광범위하게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중앙통제력의 약화를 가져와 각 지역에서는 분리 독립화 경향이 심화되어 결국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이 때 지금의 대덕구 지역은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 지역에 포함되게 되었다. | |
|
한반도에서 사람이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에서부터이다.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인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유적은 196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발견조사 되기 시작하여 현재 약50여 개소의 유적이 알려지고 있다. 대전에서도 서구 둔산동, 유성구 송강동, 대덕구 용호동 등 몇몇 곳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1991년도에 조사된 둔산동 유적에서는 찍개·긁개·밀개 등 60여 점의 타제석기가 출토되었으며, 송강지구의 지표조사에서 찍개·안팎날 찍개·밀개 등 구석기가 채집되었다. 그리고 대덕구 용호동에서 12만년∼1만년전의 구석기시대의 유물층이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석영, 규질암, 이암, 유문암, 수정 등을 이용하여 만든 석기가 4개의 문화층에서 발굴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둔산동과 송강동의 구석기 유적에 대해서는 그 성격이나 규모 등이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근 용호동의 하용호 마을과 석봉정수장 신축부지에서는 많은 양의 구석기 유물이 다양하게 출토되어 우리고장의 구석기 문화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용호동의 대규모 구석기 유적의 발견은 앞으로도 우리지역에서 더 많은 구석기 유적이 발견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유적들을 통하여 대덕구 지역에서도 구석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석기시대를 지나면 중석기시대를 거처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나 한반도에서는 아직 중석기시대 유적의 발견이 희소한 편이라 문화상이 잘 드러나 있지 않은 상황이다. 중석기시대를 이어 신석기시대가 기원전 5000년경부터 한반도에서는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석기시대는 식량의 채집 단계에 있었던 구석기시대에 비하여 신석기 후기에 이르면 식량의 생산단계로 진입하면서 인류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인류가 식량을 생산에 의존하게 되면서 이동생활에서 벗어나 농경이 유리한 지역에 정착하여 촌락을 형성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원형이나 방형의 수혈주거를 구축하였고, 도구도 구석기시대와는 달리 정교하게 돌을 갈아만든 마제석기을 제작 사용하게 되었다. 신석기인들이 제작한 마제석기로는 농경과 관련된 돌보습·돌괭이·돌낫·반달돌칼 등의 농경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빗살문토기이다. 한반도에서 빗살문토기는 처음에는 덧무늬 토기가 사용되다가 한반도 특유의 반란형의 즐문토기가 사용되었고, 후기에 이르면 평저토기 문화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문화를 향유한 한반도의 신석기인은 대체로 고아시아족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자급자족 형태의 씨족공동체 사회를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 약 150개소가 발견되었다. 대전지역에서도 갑천 유역인 서구 둔산동에서 신석기유적이 조사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직경 2∼3m의 집자리가 발굴되었고,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와 석기들도 출토되었다. 대덕구 지역에서도 지표조사결과 갑천 유역의 여러곳에서 빗살무늬토기 편들이 채집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대덕구 지역에서도 신석기시대에 주민들이 살고 있었음은 보여준다.
신석기시대가 지나고 기원전 1000년대가 되면 한반도의 청동기시대가 시작된다. 한반도의 청동기문화의 특징은, 토기는 무문토기 문화이고, 주거도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움집의 깊이가 얕아지고 규모가 커지고 장방형의 형태를 뛰었으며, 무덤으로는 고인돌과 석관묘가 주로 구축되었다. 그리고 청동기문화는 한반도 특유의 세형동검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대덕구 지역에서도 청동기 문화유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서구 둔산동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라 판단되는 2기의 평면 직사각형에 가까운 움집이 발견되었고, 유성구 구성동에서도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판단되는 4기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대전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로는 괴정동 석관묘 출토품이 유명하다. 이 곳에서는 세형동검을 비롯하여 청동거울·검·손잡이 모양의 의기·둥근 뚜껑이 달린 의기 등 세형동검 문화 초기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그리고 대덕구 관내에서도 갑천변을 따라 무문토기가 산포된 지역이 여러 곳이 밝혀졌고, 특히 청동기시대의 무덤이었던 고인돌이 신대동과 비래동에서 여러 기가 분포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의 주민들의 거주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신대동 고인돌에서는 홍도 1점·혈구가 있는 이단병식 마제석검 1점·삼각만 입석촉 10점·이단경식석촉 3점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대덕구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