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오늘은 우리나라의 개천절 날이다.
조금 여유로운 아침 식사 후 헝거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건립 하였다는 영웅광장과
두나 강변을 습격해오는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어부들이 높게 쌓은 성채 위에서 파수를 보았다는
어부의 요새 (이곳에서 페스트 지구의 전경이 한눈에 보임)
그리고 역대 헝거리 국왕의 위관식이 거행 되었다는 마챠시 교회 등을 둘러보았다.
영웅 광장 높은 탑위에 조각된 독수리상이 인상적이었다.
점심 식사를 맛있게 먹고 오랜만에 아내와 상점에 들려 과일을 좀 사왔다. 헝거리는 비교적 포도등 과일이 싼 편이다.
땅이 기름져 돌보지 않아도 열매가 잘 자라서 그렇다고 한다.
어젯밤 보았던 화려한 야경의 두나강 랑키드교와 중후한 성채나 교회, 의사당 건물들이 구름낀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그리 멋 스럽게 느껴지진 않았으나 이제 민주화가 된 동유럽의 가난한 나라려니 하였던 인식은 사라지고 그들의 화려한 지난날 문화가 조금은 거대하게 뇌리에 남는다.
계속 폴란드 쪽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에 쫒겨 버스에 올라 슬로베키아의 타트라로 향 하였다.
슬로베키아 입국은 국경선에서 여권 검사 등 한 시간 정도 휴식 겸 기다린 후에야 이루어져 타트라에 도착하니 밤 8시였다.
10월 4일
타트라에서는 한적하고 조용한 호텔에서 잠만자고 주변 아름다운 경치를 차창 밖으로 구경만 하면서 아침 일찍 다시 버스에 승차 하였다.
그야말로 강행군이다.
동구권은 아직 국경을 넘는데 여권을 걷워 검문소에서 승인을 받아야하는 번거러움 때문에 한 두어 시간씩 기다리는 시간이 길므로 서둘러 폴란드의 옛 수도인 크라카우로 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크라카우는 생각보다 관광객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500년동안 폴란드 왕이 거처했다는 바벨성, 유럽 광장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는 중앙 광장과 프로리안스카문을 돌아본 후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으로 향 하였다.
소금이 부의 원천이던 당시에는 소금광산이 국가의 중요 재원으로 이곳이 국익의 대부분을 차지 하였으리라.
하여 많은 소금을 운반하기 위하여 입구가 좁은 통로 계단으로 지하 100m가 넘는곳 까지 어린 말을 들여와 키워서 어른말이 되면 좁은 통로로 밖으로 나갈수도 없고 죽는날까지 운반용 도르레를 돌리는 일을 시켰다고 한다.
말들은 평생을 햇빛을 보지 못하니 빨리 시력을 잃었다고...
끊임 없는 세월을 돌고 돌았을 당시와 똑같은 실제 크기의 말 모형들을 보니 왠지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이 광산은 폐광직 후 광부들이 앞장서서 지하 공간에 수십년에 걸쳐 소금 성당을 조성하고 천정에는 소금 클리스탈 대형 샹들리에를, 벽면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등 각종 조각상들을 만들고 다듬어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키웠으며 한해의 평균 관광객만도 50만명이 넘는다니 소금덕 한번 대를이어 톡톡히 보고있는 셈이다.
처음 지하로 내려갈때는 통나무 계단을 이용 소금으로 반들 반들한 굴속 통로를 수 없이 돌아 들어갔으나 올라올때는 순서를 기다려 덜컹거리긴 하여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분만에 밖으로 나올 수 있어 그나마 좀 편하였다.
10월 5일
오늘은 크라카우 서쪽으로 61km 떨어진 제2차 세계대전 비극의 현장인 '오쉬비엥침' 으로가서 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를 방문하였다.
1940년 4월 나치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으로 세워졌다는 이 수용소에서 1945년 1월까지 약 4백 50만명의 유태인이 학살 당하였다고 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녹슨 철길과 높은 철조망을 지나 우산을 걷고 삭막하게 생긴 건물 내부로 들어서니 사망자들의 사진이 벽에 가득 걸린체 당시의 가스실과 시체를 소각한 화장장 등이 그대로 남아 있고 수감자들의 머리카락 뭉치와 안경태, 가방, 신발과 옷가지들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으며 머리카락으로 천을짜서 옷감이나 모포로 사용 하였다는 설명에 조금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수감자들에게 목욕을 시켜 주겠다고 속여 옷과 신발등을 벗기고 가스실로 보냈기에 더욱 많이 남아 있는 듯...
독일 나치 병정 가해자들의 채찍과 군복등도 전시되어 있으며 사용했던 식기, 수감 감방, 세면장, 총살장 등이 모두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나오면서 보니 수용소로 들어가는 철문위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 라고 적혀 있는데,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의미의 이 글귀가 얼마나 많은 유태인을 울리고 노동 착취를 강요받게 하였는지...
하루종일 스산하게 계속하여 내리는 빗방울에 더 더욱 마음이 무겁다.
울적한 심정 가라 앉히고 다시 버스에 올라 '쉰들러 리스트' 영화를 피곤하여 반쯤 감긴 눈으로 보면서 체코의 브르노로 향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