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문 2절가운데 先祖之忠義 節有餘於龍山에대한 자료.
여기서 선조는 정무공 최진립, 용산은 용산서원.
사진 :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30821.010200743580001
자료1
대신사의 6대조 정무공 최진립에서 유명한 최부자댁이 유래되었다는~
자료2
최진립 정무공문서 동아일보기사
자료3
최부자댁에서 세운 대구대학~영남대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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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출처 http://blog.daum.net/choicheon/8405150
아래글은 위 글의 일부임.
최부자 그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경주 최부자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경주 내남면 이조리 <용산서원>.
용산서원 자세한 보려면
http://blog.naver.com/jinsun2191/20190538418
최부자집의 중시조격인 최진립장군을 모신 서원으로
서원으로써는 드물게 무인을 향사하고 있다.
용산서원은
숙종 37년 임금이 친히 '숭렬사우(崇烈祠宇)'로
사액하여 사액사당으로 출발했다.
당시 무신으로 사액사당을 받은 곳은
이순신과 김시민장군뿐일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곧이어 최진립장군을 모신 <숭렬사>는
영남 사림들의 뜻을 모아 <용산서원>으로 승격했다.
"무인으로서 향사된 경우가 지극히 희귀합니다.
'숭명배청',
명을 숭상하고 청을 배척하는 시대논리는
최진립의 일생과 맞아떨어졌습니다."
- 정순우 대학원장(한국학 중앙연구원)
<충의당>
내남면 이조리, 경주최씨 정무공파 종가.최진립이 살던 종가다.
최진립(崔震立, 1568~1636년)은 무반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종가에 보관되고 있는 최진립의 일대기 <잠아선조실기)>에는 그의 화려한 무공들이
기록되어 있다.
"공이 밤에 수십 명의 집안사람과 함께 문을 막고
불을 놓으니 적이 타 죽고 뛰쳐나오는 자 쏘아죽이고
조총, 창칼을 뺏어 관에 바쳤다."
- 최채량(75세, 최진립 14대 종손)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당시 경주로 들어가기 위해 이조리에 쳐들어온
왜구를 최진립은 밤에 급습하여 화공으로 물리친다.
이후 동생 최계종과 경주 인근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운다.
그 공으로 무관직 병절교위 부장(교지)에 제수되 관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정식으로 무과에 급제한다.
그후 서생포 전투, 도산 전투, 화왕산 회맹 등 영남 인근의 각종 전투에서 동생과 함께
큰 공을 세운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최진립의 공을 높이 치하했다.
"임금(선조)은 최진립을 따로 불러
술과 활과 화살을 상주고 여도만호 겸
선전관에 임명하였다."
- <정무공실기>중에서
최진립은 경흥부사, 공조참판,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수사 등을 거친다.
1636년 청의 침입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당시 공주영장이었던 최진립은
충청감사 정세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정을 서두른다.
"임금께서 포위당하고 계신데 늙은 신하가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내 비록 늙어서 장수가 되기는 부적당하나
능히 갈 수는 있소이다."
- <연려실기술>중에서
예순 아홉의 최진립은 임금이 계신 남한산성을 향해 군사를 몰아갔다.
그러나 전투는 중과부적이었다. 경기도 용인 험천전투. 조선군대는 청나라 철기병에게 패퇴했다.
모든 장수들이 퇴각했지만 최진립은 끝까지 항전을 결심한다.
"너희는 나를 따라 죽을 필요가 없다.
난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싸우다 죽을터이니 너희는 그렇게 알라"
- <연려실기술>중에서
이미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1636년 12월 27일.
정무공 최진립은 그렇게 장렬히 순국했다.
이듬해 인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병조판서에 증직하고 정려각을 내렸다.
두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최진립에게 인조는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했다.
"국왕은 전 참판 최진립의 영에 고하노니
공은 동국의 인걸이라.
굳센 지조 내 공경하여 성심으로 제주를 보내니
죽지 않은 영혼 흠향 할지어다."
- '인조의 사액제문'중에서
<최진립 신도비>는 그의 추모 사업이 얼마나 거국적이었는지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높이 3미터에, 비를 받들고 있는 거북조각의 크기는 웬만한 무덤크기다.
거북 곳곳에 섬세한 조각은 조선후기 석조예술의 백미를 보여준다.
이 거대한 석조들은 울산 치술령에서 옮겨왔다. 더 의미있는 것은 신도비의 구성이다.
신도비의 발문은 노론 조명겸(趙明謙)이, 비문은 남인 조경(趙絅)이,
비의 음기는 서인 윤심지가 썼다.
서원의 현판은 당대 최고 서예가인 옥동(玉洞) 이서가 썼고, 서원기는 실학자 이익(李瀷)이 써서,
당쟁의 시대에 당파를 뛰어넘은 추모 열기를 보여준다.
비장한 최후와 북벌론의 대두로 최진립은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르고 경주 최씨 정무공파는 명문가의 기틀을 닦게 된다. 1647년에 청백리로 뽑힐 만큼 청렴한 관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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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서원에 모셔진 최진립의 위패. 최진립이 사용하던 검.
최부자, 그들은 어떻게 부자가 됐을까?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충신집안이 어떻게 조선 최고의 부자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을까?
<한국학 중앙연구원>에는 최근 발견된 최씨 집안의 고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400여 년간에 최씨 가문에서 작성된 각종 문서들은 말로만 듣던 최부자집의 부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것은 최씨 가문의 재산이 기록되어있는 1620년 '최진립 분재기'다.
30년 차이를 두고 있는1651년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 분재기'를 비교하면,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의 재산에서 노비보다 토지증식에 집중되었음을 보여준다.
"동량 같은 경우는 노비 8명을 분재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문서를 보면, 약 한 세대뒤인 30년후에 재산상속을 보여주는 것인데,
노비 8명이 40명으로 늘어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안승준 전문위원(한국학 중앙연구원)
전쟁후의 혼란기.
울산농소(蔚山濃所). 그의 땅은 이미 울산에까지 이르렀다.
형산강 유역의 경주 내남 이조리 들판. 경주의 대표적 평야지대다.
최부자집이 터를 잡은 형상강 상류지역은 전쟁이후 버려진 농토와 습지들이 널려 있었다.
양난 이후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농토개간을 독려했고
최부자집은 이런 정책에 힘입어 이조리들을 경작지로 확보했다.
그리고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법 대신 모판에 모를 심어 이앙하는 '이앙법(모내기법)'을
도입한다. '물꼬싸움'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앙법엔 물이 필수적이다. 물이 모자라면 옮겨 심은 모들이 말라버린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수리시설이 확보되지 않으면 이를 절대적으로 금지시켰다.
이조리들에는 수백년전 인공적으로 형성된 수리시설이 있다.
최부자집은 형산강 하류의 수리시설을 이어 중상류에도 농업용수를 확보한다.
1960년대까지만해도 최부자집이 '나무목으로 만든 인공수로'가 수백년을 이어 사용되고 있었다.
이양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은 1/10로 줄었고 모판에서 모를 키우는 동안,
논에서 보리를 키우는 이모작이 가능해지면서 생산력은 크게 증가되었다.
최부자집의 실학적 가풍은 또 다른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남대 도서관 <문파문고>.
최부자집이 조상 대대로 보관해온 7천여 권의 유명인사의 고서와 수십 권의 필첩을 기증해 특별히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이 필첩들은 그 양이나 연대로 봐서 조선 최고 필첩으로 부를 만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정무공 최진립이 아들 최동량에게 쓴 편지가 한 통 있다. 집안 살림을 맡아 하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최진립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며느리의 옷을 지어주려하니 치수를 재어 적어보내라는 시아버지의 자상한 모습이 나타나 있기도 하다. 그런데 뒤이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뒤 큰 논은 종들에게 나눠 짓게 하라."
무슨 뜻일까? 이 말 속에 최부자집의 또 다른 농업경영법이 들어있다.
"성과급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과가 난 것은 노비가 나눠가진다,
요즘 '논내기'라고 말하는 것으로, 생산력 증대의 한 수단으로써 최씨 가문의 농업경영의 한 방법
이었습니다."
- 안승준 전문위원
그것은 경영 성과에 따라 종들과 이윤을 나눠가지는 방식으로 이는 노동의욕과 생산성을 높이는 자율적인 농업생산법이었다. 이것은 최부자집이 '마름'을 두지 않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당시 '마름'은 소작인들의 관리권을 쥔 사람으로, 소작인들에게 횡포를 부려 소작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최부자집은 중간관리인 '마름'을 배제하고 그 이윤을 소작인에게 돌려주었다.
"소작인중에 사정이 어려운 집이 있으면,
혹 병자가 있거나 혹은 부녀자만 있으면,
문중에서 의논을 하여 세를 많이 깍아주는것을
어릴 때 보았습니다."
- 최재량(14대 종손)
마름을 두지 않은 것은 소작료 인하와 더불어 부수적인 효과를 주었다. 지주와 소작인의 직접적 만남은 소작인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게 했고 지주의 신뢰를 받게 했다.
매년 음력 12월 27일밤. 정무공 최진립장군의 기제사를 지낸다.
이조리 정무공파 최부자집에서 이뤄지는 제사는 일 년중 가장 큰 행사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최부자집의 인간적인 가풍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최씨 집안을 조선에서 일약 명문가 반열에 올린 최진립.
나라에서는 최진립을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로 지정했다.
역대 국왕들은 네 번이나 사액제문을 보냈고 후손들은 수백 년째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 제사의 백미는 최진립의 제사를 끝내면서 다시 시작된다.
제사가 끝나면 그 제사상을 그대로 들고 나가 마루로 옮긴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제사가 이뤄진다.
놀랍게도 그것은 최진립을 모신 두 명의 종을 위한 제사다.
종을 위한 제사. 종손은 최진립과 두 종이 만나도록 촛불을 밝혀 이어준다.
옥동과 기별.
옥동은 임란때 최진립을 왜구의 칼날에서 구해내었고,
기별은 예순 아홉에 전쟁에 나간 최진립을 끝까지 따랐다.
"이미 주인이 충신의 길을 가기로 하였는데
어찌 충노가 그 뒤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 <동경지>중에서
기별은 최진립과 함께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죽어간다.
"함께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조상과 다름없이 생각해서 함께 제사를 지냅니다.
주변에서 어떻게 양반가에서 종의 제사를 같이
지내냐고 말이 많았지만
우리들은 정무공과 일신(一身)이라 생각하면서
수백 년 동안 함께 제사지내오고 있습니다."
- 최재량 14대 종손
'충노불망비(忠奴不忘碑)'
주인을 위해 목숨을 던진 종을 위해 세상의 비난과 손가락질에도 굴하지 않고
종에게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양반가. 그것이 경주 최부자집안이 사람 대하는 기본자세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의 시작은 '아껴쓰기'
최부자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부자집 며느리는 시집오면 3년간 무명옷만 입어야 했다.
옷을 덧대어 깁고 또 기워 입어서 치마 하나를 솥에 넣어 삶으면 서말치 가마솥이
가득찰 정도였다고 한다.
만석꾼 며느리도 보통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 이었다.
최부자집은 7대 최부자 최연경때 경주 중심 교동으로 이사를 한다.
흔히 경주 최부자 하면 교동 최부자를 말하는데 이는 정무공 최진립이 아닌,
세째 아들 동량의 후손들이다.
18세기 후반의 <경주읍내도>.
경주부윤과 향교가 인접하게 됨으로써
최부자집은 경주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향교옆에 집을 짓는 것에 유림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향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최부자집의 처마를 보면 의외로 낮다. 마지막 설득 수단으로 집터를 낮춘 것이다.
집터를 한 자 이상 깍아냄으로써 유림의 반발을 막을 수 있었다.
이즈음 최부자집은 경주 사마소를 통해 진사와 생원을 대거 배출해 지역사회의 중심이 된다.
'벼슬은 진사와 생원 이상 하지 마라!'
경주 최부자집의 또 하나의 가훈이었다. 당시 경주는 남인과 노론의 당쟁이 치열했다.
그러나 최부자집은 무반가였기 때문에 당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경주 전체의 사림가, 관가와의 유대 뿐만 아니라,
촌락민들을 함께 아우르는 역할을 서원을 통해
꾸준히 해왔고,
또 많은 선행들을 통해 범민들로부터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잡아 그들의 가문의 위치를
점차 상승시키게 합니다."
- 정순우 대학원장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덕망있는 부자.
왜 최부자만이 이런 명망을 가져올까?
어디에도 최부자집의 선행의 동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이들은 이런 훌륭한 부자가 되었을까?
1650년경의 최부자집 재산내역 문서. 그 의문을 풀기 이해 최부자집의 고문서를
분석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비보다는 토지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매입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과 범위는 굉장히 방대합니다. '매득(買得)'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후 신분제의 혼란속에 양반과 농민들로부터 땅을 헐값에 매입해 재산을 늘리는 게 당시 전반적인 풍조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회문제에 부딪힌다. '도적 백 여명' '도적패에 의한 피해상황 수사보고서' 최씨 문중의 문서에는 백여 명의 도적떼가
침입한 기록이 있다.
최진립의 손자 최국선때 '명화적'이란 도적떼를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도적들의 소행이 특이했다. 문서들을 불태우고 찢어버린다.
'열파(裂破)'
충격적인 기록들은 이어진다.불시에 들이닥친 도적들은 칼로 얼굴을 긋고 허벅지를 찌르나 죽이지는 않았다. 살해 목적이 아니라 괴롭히고 위협하는 정도였다.
'칼로 온 몸에 상처'
불을 밝히고 공공연히 약탈을 한다는 뜻의 '명화적(明火賊)' 전쟁후 몰락하여 먹고 살 길이 없는
최하위계층이었다. 이들의 행위는 일종의 절망이었고, 격렬한 사회적 저항이었다.
참혹한 일을 겪은 3대 최부자 최국선은 합법적인 부의 축적이라고 해서 모두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국선에게 대전환의 계기였다.
"슬기롭고 효과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명화적'이 자기 이웃이고, 자기의 노비들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원한을 가지고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방향,
가난에서 구제한다든지,
농업경영에 있어서 소작인들과 이익을
더 효과적으로 나누는 방식 등,
이런 방향으로 원한관계를 긍정적 방향으로 바꾼,
타 가문들과 비교가 되는,
역사적으로 교훈이 되는,
대단히 귀중하고 훌륭한 재산운영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 안승준
경주 최부자집의 진정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뜻하지 않은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그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
이때부터 최부자집은 하층민들과 철저히 나누는 상생의 길을 걷게 된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역사의 뼈저린 경험에서 교훈을 얻게 된 최부자집. 다른 양반들이 권위와 힘으로 이웃들을 장악했다면 최부자집은 이웃들과 신뢰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게 된다. 이미 400년전에 최부자집은 상생의 길을 통해 부를 유지하는 지혜를 가진다. 그런 경주 최부자집에 최대 위기가 닥친다.
그러나 바로 이때 수백 년을 이어온 최부자집의 저력이 드러난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 11대 최부자 최현식과 아들 최준은 집밖 출입을 끊고 매일 아침 북쪽을 향해 곡을 했다. 최현식(1854~1928)은 집안 살림을 아들 최준에게 넘겨주고 은거한다.
당시 최준(1884~1970)의 나이는 20대 중반, 망국한을 참기에는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그는 집안살림에 몰두하는 듯 했다. 그러나 최준의 전혀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일본고등경찰 비밀문건인 <요사>.
구한말부터 1920년대까지 시국사건을 정리한 귀중한 자료다.
1915년에 조직된 비밀독립투쟁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여기에 뜻밖에도 최준의 이름이 있다. 이 단체 조직원으로서 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경주군 대표 최준'
'최준 자금 제공(崔浚亦其出資)'
최준은 당시 영남지역 독립군들과 더불어
'조선국권회복단 및 대한광복회'
주요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1917년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10월 출소되었다. <독립기념관>에는 최준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문서가 있다. 1921년 태평양회의 독립청원서. 워싱턴에 보내는 조선 인민의 탄원서로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내용과 함께 각계 각층 사람들의 서명을 담았다. 최준은 역시 경주대표로 참여했다. 그리고 조선 독립 투쟁사에 큰 획을 긋는 만남이 이루어진다.
백산 안희제(1885~1943, 독립투사)와의 만남.
백범 김구와 함께 양맥인 백산 안희제는 다각적인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안희제가 1918년 최준을 찾아온다. 그는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중요성을 최준에게 설명하며, 이 회사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데 동참하자고 제의한다.
최준은 안희제의 뜻을 받아들이고 백산상회의 사장을 만난다. 백산상회는 조선 최고의 무역회사로 성장한다. 최준의 장손인 최염(75세)은 최준의 소중한 문서를 내놓았다.
최준앞으로 온 '대차대조표'였다.
무역업체로 위장한 <백산상회>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다.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느라 <백산상회>는 늘 적자에 허덕였다.
"백산상회 운영을 통해서 상해 임시정부로
자금을 보내게 되는데 그 방법은 늘 결산 적자로
처리해 감시를 피할 수 있었고
지속적으로 상해 임정에 자금을 보내게 됩니다."
- 이동인 책임연구원(독립운동사연구소)
<br>
▲ 백산상회의 대차 대조표
일본 경찰들도 백산상회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그 감시망을 뚫고 임정에 자금을 전달해야 했다.
"증인 등은 국권회복을 위해 백산상회를 설립하고
상해 임정에 거액의 자금을 보내지 않았는가?"
좁혀오는 일본의 감시망속에서도 최준은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구선생의 지령을 받고 왔다, 김좌진장군의
심부름을 왔다,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확실한 지 아닌 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아니라면 일경에 구속될 수 있는 것이니 위험했습니다..."
- 최 염
최준의 두 동생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특히 둘째 동생인 최완은 <대동청년당>을 거쳐 1920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재무위원과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다.
그러나 최준은 뼈아픈 고통을 겪어야 했다. 최준에게 글씨를 배우고 싶다며 드나들던 일본경찰. 그러나 진짜 속셈은 따로 있었다. 최준의 글씨체를 모방해 최완을 체포하기 위한 수작이었다.
부친이 위급하다는 위조된 편지에 속아 귀국하다가 체포된 최완은 고문끝에 35세의 짧은 생애로 순국한다. 동생의 죽음과 일경의 끊임없는 회유와 탄압. 그리고 기약없는 조국광복. 이 모든 살얼음판을 참으며 최준은 인고의 삶을 견뎠다.
1945년 마침내 광복.
그리고 백범 김구를 통해 최준의 진면목이 알려진다.
"어떤 사람이 와서 "김구선생님께서
할아버지(최준)를 만났으면 하십니다" 하자,
할아버지께서 "아, 만나야지요.
그러나 그 어른은 요즘 너무 만날 분이 많아서
면회가 잘 안 된다던데" 하니까,
"아니, 김구선생님이
최준선생님을 꼭 만나고 싶어 하셔서
제가 모시러 왔습니다.
저랑 같이 가십시다." 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올라가시는 걸 봤습니다."
- 최 염
1946년 김구의 경교장.
"동지가 보내준 자금은 조국독립을 위해서
소중하게 썼습니다."
김구는 최준에게 임정의 자금 조달 인명 기록장을 보여준다.
최준은 안희제를 통해 보내준 자금이 한 푼의 오차도 없이 임정에 송금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3년전 일경의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백산에 대한 존경으로 백산의 고향 의령을 향해
최준은 절을 했다.
"백산, 나를 용서하게. 백산..."
부자가 나라 위해 돈을 내놓은 것이 무슨 자랑이냐며 공적이 알려지길 꺼렸던 최준.
그가 국민훈장애족장을 받은 것은 지난 1990년이었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쌓은 부는 당연히 조국광복을 위해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최준의 후손들이다.
해방 이후 최준은 또 한 번 큰 결심을 한다.
400년간 이어온 부를 영원히 보존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영원한 부자로 남는 법-기쁘게 버려라!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최부자집의 선산이 있는 곳이다. 최부자집의 역대 조상이 모셔진 이 땅을
기증받은 대학이 개인에게 땅을 팔면서 최부자집의 묘역이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다.
"여기 우리 선대 세 분의 묘소가 계신데
지금 이 묘들을 철거해야 한다고 하니까
우리 후손으로서는 뭐라고 송구한 마음을
전할 길이 없습니다."
- 최 염
12대 400년을 이어온 최부자집이 선산을 떠나야 하는 현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수많은 동지들과 동생들이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지켜본 최준.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위해 반드시 해방된 나라를 튼튼히 만들기로 결심한다.
최준은 그의 재산이 의미있게 쓰일 방법을 고심한다.
그리고 전재산을 육영사업에 쓰기로 결심한다. 교육사업에 쓰는 게 만석꾼의 재산을 영원히 보존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최준은 선산과 만석지기 토지와 살고 있던 집까지 모조리 학교사업에 희사한다.
지금의 영남대 의대가 있는 곳. 원래 이곳은 대구대가 있는 장소다. 대학 설립을 결심한 최준은
경북의 유력 인사들을 설득하고 도민들의 뜻을 모아 사립대학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1947년. 마침내 대구대학이 설립되었다. 최준은 재단이사장이 되어 육영사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1961년 5. 16 군사정변이후 '대학설치령'이 강화되면서 대구대학은 심각한 운영난에 봉착한다. 최준은 고심했다. 그리고 당시 최고 부자였던 이병철에게 아무런 댓가를 받지않고 넘겨준다.
"(할아버지께서) 너가 처신을 잘 못하면 오해를 받는다.
어렵더라도 너 스스로 개척해서 살아라. 절대 명심해라."
- 최 염
그러나 이병철은 곧 대학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되고 1967년 대구대와 청구대가 합병하더니 영남대가 개교한다. 그리고 대학 운영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박정희 일가로 넘어간다.
독립투사 최준이 세운 학교가 최고 권력자 박정희에게 넘어간 현실.
제 1장 총칙 - '교주 박정희 선생'
최준은 나라가 더 발전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일언하고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1990년 10월 마지막 최부자 최준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해방이 되었으니 일경의 감시도 없고 전재산을 희사했으니 도둑이 들 일도 없으니
대문을 활짝 열어두라는 말을 남긴 최준.
최준의 죽음과 함께 12대 400년 경주 최부자집은 역사가 되었다.
희사.
댓가를 바라지 않고 기쁘게 버렸다는 뜻인데 전재산은 물론 살림집까지 희사한 선대와
만석꾼 대신 연금 25만원의 독립유공자자손인 게 더 자랑스럽다는 후손.
이것이 바로 경주 최부자의 본 모습 아닐까! 이제 경주 최부자는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현실은 제2, 제3의 최부자를 필요로 하는 때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은 만석꾼 최부자집이 아니라
상생의 길로 현명한 삶을 이어온 진정한 부자이야기였다.
<br>
▲ 영남대학교의 전신 대구대학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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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
http://news.donga.com/3/all/20130307/53516814/1
경주 최부잣집, 말로만 듣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서 공개
“노비가 가련해 빚 탕감한다”… 가문서 빈민구제 기구 운영
“이
몸이 이 고장에 흘러 들어와 땅 없이 빌어먹다가 서원에서 살게 해주어 서원의 종이 되었습니다.… 서원의 별고(別庫·별도의 창고)에서
장리(長利·통상 연 5할의 이자) 벼 1석을 받아먹고 원금 1석은 그해 서원에 납부했으나 나머지 7두 5승은 아직 납부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유를 헤아리신 뒤 빚을 깎아주시기 바랍니다.”
1710년 경주 용산서원에서 일하던 노비가 원장에게 올린 청원서의 일부다.
용산서원은 경주 최씨 정무공 최진립 종가가 중시조인 최진립의 위패를 모셔놓고 직접 운영한 서원이다. 원장은 이 청원에 “형세가 대단히 가련하므로
빚을 탕감해준다”고 결정했다. 이 서원은 일종의 조사위원회인 ‘사핵소(査핵所)’를 구성해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는 사유가 타당하면 빚을
탕감해줬다. 국가기관이 아닌 서원에서 제도적으로 빈민 구제책을 실시한 셈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큰집인 경주 최씨 정무공 종가에서
조선 중기부터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면목을 보여주는 고문헌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최부잣집은 ‘만석 이상의
재산은 쌓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같은 가훈을 계승해온 대표적인 가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최근
정무공 종가의 고문헌 3000여 점을 기탁 받아 분석한 결과
△노비나 소작인의 빚 탕감 청원에 답하는 문서
△병자호란에서 전사한 충노(忠奴)를
표창해 달라는 요청서
△노비 반란을 겪은 뒤 타협책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문서 등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발전사 연구에 귀중한 고문헌 수십
점을 찾았다. 한중연은 4월 27일 용산서원에서 학술대회를 열어 이 같은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이날 서원 인근에 기념관 ‘충의관’도 열어 주요
유물 60여 점을 상설 전시한다.
○
노비에 땅 줘 생계 돕고 충노에 제사도
병자호란이 터지자 최진립은 인조가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향하다 전사했다. 곁에 있던 두 종은 시신을 안고 울면서 적이 칼로 내리쳐도 피하지 않고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이 종가는 지금도 음력 12월
27일 최진립의 기일(忌日)이면 노비 2명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노비에게 제사를 지낸 것은 전무후무한
전통이다.
경주의 유림 34명이 경상감사에게 표창을 요청한 상서(上書·1812년)는 구전으로만 전하던 가풍의 기원을 확인해준다.
“두 종이 만약 목숨을 구하고자 했다면 수풀 사이에 숨어 잠시 피가 그치길 기다리다 정신을 차리고 살아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으니 집안에서는 충노이고 국가에서는 충신 아니겠습니까.”
1702년 서원 소유의 노비에게 논밭을 지급해 생계를 마련해준 문서
‘용산서원 당중완의(堂中完議)’도 있다. “노비들이 모두 한 뼘의 땅이 없어 살아갈 방도가 어렵다. 만약 돌보아 구휼할 길이 없다면 장차 흩어질
우려가 있기에 논밭을 주어 소작하게 하여 노비를 보존하게 할 일이다.”
○ 노사갈등→타협→노사화합으로
발전
이런 최씨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조선 중기에 노비·소작인과 지주 사이의 갈등, 즉
‘노사갈등’을 겪은 뒤 타협책으로 화합의 길을 마련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번에 발굴된 ‘최국선외(外)
서실입안(0失立案)’(1665년)에는 노사갈등 상황이 드러난다. 최진립의 셋째아들 최동량이 죽은 뒤 상중에 명화적(明火賊·밤에 횃불을 들고
약탈하는 도적) 100여 명이 쳐들어와 물건과 재산증명서 등을 훔치고 아들 최국선 형제 2명을 칼로 찌른 사건이었다. 최국선은 당시 상황과
빼앗긴 물건 목록을 적어 경주부윤의 공증을 받았다.
안승준 한중연 책임연구원은 “최씨 가문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타협한 끝에
상생의 길을 마련했고 그 산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 경주 최씨 정무공 최진립 종가 ::
신라 학자 최치원이 시조인
경주 최씨 가문 중 조선 중기 무신이던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을 중시조로 하는 종가. 경주 최부잣집의 큰집이다. 최부잣집은 최진립의
셋째아들 최동량의 장남 최국선이 부를 축적하면서 얻은 이름이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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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3.
경주 최부자집은 박정희에게 어떻게 몰락했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723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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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는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원칙을 세우고 소작인에게 8할을 받던
소작료를 1600년대부터 절반만 받는 등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최근 재평가받고 있다. 해방 직후에는 독립운동가인 고 최준
선생이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를 설립했으나, 박정희 정권 때 자신의 의사에 반해 영남대로 넘어갔다. 경북 경주 교동의 최씨 고택도, 경주와
울산의 선산도 영남대 소유다. 1월29일 교동 고택 사랑채 안에서 종손 최염(80)씨가 “박근혜 당선인이 대통령이 되는 만큼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영남대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토요판] 커버스토리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은
박정희의 영남대에
어떻게 무너졌나
▶부동산 투기를 하고, 동네 빵집에 진출하고, 권력 앞에 비겁하고, 시류에 영합하는
부자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서라벌’에 정의로운 부자가 살았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300년 넘게 민중의 사랑을 받던 경주 최부자는
일제에 저항하고 해방 뒤 대학에 전 재산을 기부했다가 박정희 정권과의 악연으로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은 남의 땅에서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최부잣집의 기구한 사연을 들어보시죠.
|
경주 최씨 종친회 최염 회장이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을 찾았다. 경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전 재산을 사실상 강탈, 선산 조상님들까지
나가라니…″
1970년 서울 무교동의 한 주점. 당시 서른일곱이던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생 두 명과
회포를 풀러 평소 다니던 단골집에 온 터였다. 셋은 학교생활을 추억하며 왁자지껄 술을 마셨다. 그러던 중 최씨의 무슨 말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 친구 둘의 안색이 굳어졌다. 차례로 화장실에 간다면서 자리를 떴다. 최씨는 그래도 남은 술을 다 먹고 가겠다며 혼자 남았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 경찰관이 들어왔다.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하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죠?
“친구들이 물었죠. 너희 가족 전 재산을 넣은 대구대학교를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에게 넘겼는데, 그
이병철이 박정희한테 상납을 했으니까 굉장한 보상을 받았을 거 아니냐? 나는 이병철한테 돈 한 푼 받은 거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그럴 분
아니라고.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말했죠. 박정희, 이병철이 정경유착해서 남의 것 빼앗고 나라 팔아먹은 사람들 아니냐….”
신고한 사람이 종업원이었는지 친구들이었는지 아직도 그는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마친 뒤
유신체제를 준비하고 있던 시절,
종로의 술집 종업원들을 정보과 형사들이 모아두고 수상한 사람은 즉각 신고하라고 교육하던 시절이었다.
-경찰에 끌려가서는요?
“구둣발로 차이고 실신하고… 밤새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서를 보니까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쓰여
있더라고요. 내가 종업원들한테 ‘이북 가면 대접받는데 왜 여기서 술심부름이나 하고 있냐’고 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내가 이북에 갔다 왔다고
조서에 써 있었습니다. 완력으로 지장을 찍었어요. 80일 구치소에 있다가 1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여섯가지 가훈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마지막 ‘경주 최부자’ 고 최준 선생의 손자 최염(80)씨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인 경주 최부자의 정신을 유일하게 이어온 종손이자,
일제와 군부독재 시대 경주 최부자의 도전과 핍박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사무실에서 지난 1월14일과 22일 두차례 인터뷰를 했다.
-경주 최부자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할아버지(최준)는 생전에 어른들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13대조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어른이 중시조입니다. 공조참판에 기용됐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병자호란 때 종과 수하를 데리고 경기도 용인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습니다.
우리 가문이 모두 13대까지 이어져왔는데 흔히 ‘9대(에 걸쳐) 진사, 12대 만석꾼’이라고 합니다. 다만 정무공은 청백리로 살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부자가 된 건 언제지요?
“11대조인 최국선(1631~81) 할아버지 때부터입니다.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어요. 당시 지주는
소작인에게 소작을 주고 8할을 거둬가던 시절이었는데, 소작인들은 섣달이 되면 양식이 없어 장리를 썼어요. 장리는 양식을 빌려 두 배로 갚는
고리채였지요. 한번은 명화적(조선시대 횃불을 들고 약탈하던 강도집단)이 국선 할아버지 댁에 쳐들어왔습니다. 할아버지네 소작농과 그 자식들도
들어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패거리가 양식은 안 가져가고 장리의 증표인 채권서류만 가져간 거예요. 이튿날 친척과 가복들은 ‘우리 덕분에
먹고살았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배은망덕한 소작놈들을 경주 부윤에 일러 처벌해야 한다고 어르신에게 일렀죠. 한참 말이 없던 국선 어르신은 드디어
입을 열었답니다. ‘그만둬라. 남은 채권 문서도 모두 돌려주어라. 그리고 앞으로 소작료도 5할만 받도록 하겠다.’”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열린 소작노동자대회에서 나온 요구사항이 ‘소작료를 5할로 낮춰달라’는 것이었으니,
최국선의 결정은 자그마치 300년을 앞선 ‘진보적인’ 조처였다. 최부자를 연구하는 학계에서도 사회적 나눔이 오히려 부를 불러온다는 선순환의
사례로 이 사건을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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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의 종손 최염(80)씨가 29일 울산 울주군 선산에서 가문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염씨의 할아버지 고 최준 선생은 이 땅을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에 기부했고, 박정희 일가로 넘어간 영남대는 이 땅을 민간에 팔아, 최씨는 묘를
이장해야 할 처지에 놓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백리
안에 굶어죽는 자 없게 하라’
소작농에 파격적인 소작료
임시정부땐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
해방 뒤 할아버지 최준은
전 재산을
기부해 대구대를 세워
삼성 이병철에게 무상양도했다
“최고 대학 만들겠다”던
이병철은 약속을 저버렸다
대구대를 박정희에게 헌납했고
박정희는
영남대로 바꾸면서
최씨 집안의 고택·논·선산이
동시에 영남대 소유로 넘어갔다
-어떻게 부를 쌓았습니까?
“이앙법을 빨리 도입해 소출량을 늘렸어요. 땅도 많이 사들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보가 잘 유통되지 않던
시대잖아요. 경주 일대에서 논 매물이 나오면 소작농들은 경쟁하듯이 달려와 최부잣집에 알렸어요. 소작농들은 자신의 지주가 최부자에게 땅을 팔면
소출의 절반을 가져갈 수 있었으니까요. 어르신들은 그렇게 논을 사들여 만석꾼이 됐습니다.”
경주 최부잣집은 조선 중기부터 경주 지역에서 존경받는 유력 가문이 되어간다. 특히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등 최씨 집안의 육훈은 정경유착을 멀리하면서도
서당을 짓는 등 교육사업에 매진하고 농업과 잠업 등 실용에 집중하는 가풍을 만들어왔다.
마지막 최부자로 꼽히는
최준(1884~1970)은 독립운동가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을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다. 경북 경주시 교동의 최부잣집은 구한말 의병과 일제 때 독립운동가의 은신처가 되었다. 최익현,
신돌석, 박상진, 최시형, 손병희 등 이 집을 거쳐 간 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월29일 최염씨와 함께 경주의 최부잣집 교동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을 방문했다. 최씨는 서울에서
살지만, 이곳에 세간살이를 두고 가끔 묵는다. 최준이 묵던 사랑채 안에 들어가니 최준의 아호인 ‘문파’가 걸려 있었다.
-지금 이 집은 가문의 소유가 아니지요?
“네. 학교법인 영남학원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1967년 영남대에 넘어갔지만 식솔을 내쫓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1959년 상경했고, 10년 전까지 어머니가 사셨지요.”
-어렸을 적 집안을 드나들던 독립운동 인사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가요?
“어렸을 적 최준 할아버지와 바로 이 방(사랑채)에서 함께 잤습니다. 워낙 드나드는 과객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돈을 달라고 온 사람들인데, 아무나 줄 수는 없었죠. 진짜로 임시정부에서 보낸 사람인지 확인해야 했으니까요. 일제의 첩자에게 쉽게 돈을
줬다가는 당신도 잡혀가실 터이니까요. 할아버지는 사랑채에서 열흘 보름 동안 과객과 술을 먹으며 이 사람이 진짜인지 따져봤습니다. 내가 아랫목에서
잠을 잘 때 할아버지가 과객과 나누는 통음소리와 담배연기가 흘러들어왔습니다.”
-
할아버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
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1827~98) 선생이 우리 집에 한참 숨어 살았습니다. 홍길동이나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줬답니다. 부잣집 맏아들로 컸던 할아버지는 그때 독립정신을 깨우쳤습니다. 동학 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도
경찰을 피해 자주 오셔서 오래 묵고 갔습니다. 독립운동하신 분들로 울타리가 쳐진 셈이었어요. 사촌누나 남편이 박상진(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결혼을 해보니, 장인도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고 처삼촌은 김응섭(임시정부 법무장관. 해방 뒤 김구와 남북협상파에
속했다)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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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잣집 육훈
①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② 만석 이상의 재산은 쌓지 마라
③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④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⑥ 시집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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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독립운동 자금을 댄 ‘마지막 경주 최부자’ 고 최준 선생이 증손주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최염씨 제공 |
할아버지 최준이 대구대를 세운 이유
최준은 임시정부에 자금을 댔다. 조선국권회복단과 광복회에 참여하고 경주 광명리에서 우편마차를 습격해 탈취한
자금을 관리하는 등 위험한 일에도 나섰지만, 동아일보·경성방직과 대구은행 등의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등 민족자본을 키우는 데도 힘썼다. 짧은
옥고도 치렀다. 하지만 일제는 경주의 거부를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해방 뒤 할아버지 최준은 민립대학인 대구대학교를 설립한다.
-대구대를 설립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1910년 손병희 선생이 교주로 있는 천도교가 보성전문(고려대의 전신)을 운영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3.1운동에 나서기 전 손 선생이 할아버지를 찾아와 보성전문을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할아버지는 안희제와 백산무역을 준비하고 있었고, 전
재산을 담보로 내놓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보성전문을 인수할 여력이 없다며 인촌 김성수를 추천했지요. 이 일은 할아버지에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는데, 해방 이후 대구대 설립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집안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할아버지는 경주 최부자의 정신을 길이 남기는 길이라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대지주가 재산을 불리던
시대는 지났고, 후손이 재산을 팔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재산을 기부하면서 할아버지는 나에게 의견을 물어보셨어요.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사회
환원을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할아버지와 지역 유지들은 경북종합대학기성회를 발족했고, 대구대학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1952년 한국전쟁 때는
서울에서 피난 온 교수들이 교편을 잡으면서 계림학숙을 만드셨습니다. 계림학숙은 대구대로 들어갔고요. 최씨 집안의 고택, 논, 선산도 다
대구대학으로 넘겼습니다.”
대구대학은 그런대로 운영되어 갔다. 평지풍파가 몰아친 건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였다. 최염씨는
박정희 일가와 ‘악연’이 시작된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때 할아버지가 대구대 이사장이었고, 심계원(현재의 감사원)을 다니던 나는 4·19혁명 이후 할아버지를
모시러 대구대 사무주임으로 내려와 있었습니다. 갑자기 문희석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장관실에
들어가니까 군복을 입은 대령이 권총을 차고 거수경례를 합디다. 문 장관은 우리에게 ‘대구대 학장 사표를 받아라. 60살 이상 학장, 총장은
사표를 받기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이화여대 김활란, 중앙대 임영신도 사표를 냈다며 (관련 문서로 보이는) 서류뭉치를
가리키면서 말입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떻게 사표를 받냐’고 할아버지가 대꾸하니까 ‘우리가 결정했으니까 당연히 해야 합니다’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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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반, 과객이 끊이지 않던 경주 교동고택의 풍경. 최염씨
제공 |
-자유당 때 부흥부(1955년 설치된 중앙행정기관) 장관을 했던 신현확이 대구대 이사로 있었지요?
“신현확이 대구대에서 교수도 해서 학교를 잘 압니다. 당시 삼성이 시멘트산업을 시작하려고 신현확을
영입했습니다. 신현확은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 대학을 운영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당시 삼성그룹의 총수였던 이병철에게 제안했고, 이병철은
‘굿아이디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한테 찾아와 ‘정말 좋은 학교를 만들려 하니까 할아버지에게 여쭤달라’고 했습니다.”
1964년 이병철 삼성그룹 대표는 차남 이창희와 함께 경주를 찾아와서 최준과 최염을 만난다. 최준은
대구대 운영권을 흔쾌히 삼성에 ‘구두로’ 넘긴다.
“경주 사랑방으로 찾아왔습니다. ‘한수 이남 최고의 대학을 만들겠다’며 대구대를 운영하고 싶다고
할아버지에게 말하더군요. 할아버지는 손병희 선생이 아무 대가없이 보성전문을 맡아달라고 했던 것처럼, 자신도 이병철에게 흔쾌히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할아버지는 ‘자네가 잘 하고 못 하고 내가 봐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이사로 남아 있어야겠네’ 하셨고, 이병철도 ‘당연한
말씀이다, 손자도 이사를 하셔라’고 했습니다.(최준은 손자 최염의 이사직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당시 이병철은 물론이고 제일모직 사장과 상무
등이 여러 번 찾아와 금전적 보상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손병희도 돈 한 푼 받지 않고 김성수에게 보성전문을 넘겼다. 대학에는
주인이 없는 것이다. 상거래처럼 계약서를 써선 안 된다’고 거부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대구대에 계속 애정을 보이셨습니다. 삼성이 대학 운영에
미온적인 것 같으니까, 한번은 이병철을 찾아가서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가보인 ‘단계연’(단계석으로 만든 벼루와 오동나무로 만든 벼루집)을 선물로
줬습니다. 그날 밤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제 편안하게 자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성은 대구대 운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66년 삼성 소유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진다. 곤경에 처한 삼성은 박정희 정권과 긴밀한 협의 속에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한다고 발표했고 이어 대구대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대구지역의 또다른 사립대인 청구대는 이미 대학운영권이 박정희 정권의 주요 인사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7년 12월
박정희 정권은 대구대와 청구대를 합병해 영남대를 출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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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염씨의 셋째 할아버지 최완(최준의 동생)은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재무부 위원을 맡았다. 최완이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인데, 오래된 탓에 누구인지 가리지 못했다. 최염씨
제공 |
영남대 부정입학 사태로
박근혜는 이사직
물러났지만
2009년 사분위 결정으로
박근혜 측근 이사들이 들어와
박정희리더십, 새마을정책…
낯 뜨거운 이름들이 우후죽순
게다가 영남대 재단에선
최씨 집안이 기부한 선산 두 곳을
민간업체에 팔아넘겼다
업체는
조상묘들을 옮기라면서
이장 촉구문까지 내다걸었다
‘교주
박정희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
-할아버지는 삼성과 정권 사이에서 대구대의 운명이 논의되는 걸 몰랐나요?
“전혀 몰랐습니다. 청구대와 대구대의 합병 이사회 통보를 받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여든이
넘었는데, 이병철 사무실에 쫓아가 소란을 피우니까, 신현확이 달려왔습니다. ‘이가보다 박가가 학교를 훨씬 크게 만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하면서 노여움을 풀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이병철한테 돈 받고 팔았는가? 왜 제멋대로 박가한테 주느냐’고 진노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영남대 통합에 반대하신 거네요.
“시간이 되어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서울 반도호텔 924B호로 옮겼습니다. 대구대와 청구대 각각의 이사회를
마치고 양쪽의 이사들이 모여 최종 통합을 의결하는 자리였습니다. 대구대 이사회 때에 삼성 이사들은 할아버지를 초청 안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사회에서 ‘이병철을 불러와야 회의가 되지, 안 불러오면 안 된다’고 고함을 지르셨어요. 끝까지 반대하다가 박차고 나오셨습니다. 이사회 자리에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됐습니다’ 하니까 비로소 안건이 처리가 됩디다. 알고보니 문교부 법무관이었습니다. 사립대 합병하는데 왜
문교부 법무관이 앉아있습니까?”
이로 인해 경주 최부자의 모든 재산은 영남대로 넘어갔다. 경주 교동고택도, 조상들이 묻힌 선산도 최부자의
역사가 깃든 유물은 영남대 소유다. 대구대와 청구대의 통합으로 만들어진 영남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퇴임 후 뒷자리로 봐둔 곳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통합 작업은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 이병철 삼성 회장의 큰아들 이맹희의 회고록을 보면, 이후락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 삼성에게 대구대를
넘기라고 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숨지자,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 현 대통령 당선인은 이듬해인 1980년
29살의 나이로 영남대 이사장에 추대된다. 학내 구성원들의 반발로 박 당선인은 이내 이사장직에서 사퇴하고 이사로 남지만, 1981년 대학정관
제1조에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해 교육을 실시한다’는 조항이 들어가 논란을 부른다.
-박정희 정권이 대구대를 강탈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형식적인 논리로 봤을 때 불법으로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서류상으로 합법을 만들어놓고 강탈한 거지요. 학교를 아무한테나 줘도 된다고 맡긴 게 아닙니다. 이병철이
‘한수 이남의 제일 가는 대학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는데, 3년 만에 대학을 넘겼으니 약속을 어긴 것이지요. 맨처음 이병철도 잘 해보려고 했던
거는 내가 믿습니다. 하지만 지역의 경쟁대학인 청구대를 이미 가져간 박정희 쪽에 밉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고, 아무리 잘 해봤자 자기
대학이 아니라는 생각도 났을 테고…”
-대구대가 영남대로 넘어간 뒤에는 어떻게 사셨나요?
“나는 해운회사 등에서 일했습니다. 내가 정관계의 사람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본이 있는 친구들이 동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최 부자 재산이 남은 건 없지만, 사업 덕분에 곤궁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영남대와 연락은 없었나요?
“1988년 영남대가 울주군 두동면의 선산(330만㎡·10만평)을 판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당시 조일문
재단이사장한테 달려가서 경주 최씨가 기부한 땅이면 선량하게 관리할 의무도 있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헐값인 평당 760원에 판다길래 두 배 쳐줄
테니 나와 계약하자고 해도 안 된다고 합디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민간에 팔았습니다. 그때가 박근혜와 측근들이 재단이사로 재직하던 때입니다.
7대 조모가 계시는 경주시 구정동의 4만3000㎡도 온천지구로 고시돼 100억원 이상의 시세가 됐는데도, 단돈 4억원에 차아무개씨에게
매도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1970년입니다. 박정희와 이병철한테 당한 수모를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풀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잘 되도록 도우라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지금으로 치면 농협조합장(당시 금융조합장)을 하셨는데, 마음이 좋은 분이셨습니다. 사람들 부탁을 다
들어주고 그랬죠. 6·25동란 직후에 인민군에 협력했다면서 보도연맹 가입자를 처형했는데, 사람들이 유력가문의 아들인 아버지한테 상의를 많이
했고, 중간에 가서 부탁을 해서 수십 명을 살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집안 재산을 관리할 수 없다고 보신 거 같아요. 저를 주로 데리고
다녔죠. ”
-자제분들도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으셨나요?
“2남1녀인데요. 첫째가 공부를 잘 했습니다. 나는 중어중문학과를 가길 원했는데 법대를 갔지요. 사법고시
보는 걸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년째 아슬아슬하게 낙방합디다. 아내가 몰래 유명한 법사를 찾아갔대요. 법사가 이르기를 ‘증조할아버지가
잡고 계셔서 안 되는 거다’고 했다더군요. 법사가 써준 부적을 할아버지 무덤에 묻으니까 이듬해 합격했습니다.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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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29일 최염씨가 경북 경주 교동 최씨고택(중요민속문화재 27호)을 찾아온 대학생들에게 집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최준 선생이 대구대에 기부한 이 고택은 최부자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터전으로, 현재는 영남대가 소유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실질적인 운영 권한은 아직도 박근혜
‘박근혜 체제’의 영남대는 순탄치 않았다. 부정입학 등 재단비리가 적발돼 1988년 사립대학으로선 초유의
국정감사를 받게 되고, 박근혜 당선인은 이사직에서마저 물러난다. 2009년까지 영남대는 교육부가 파견한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되면서 박정희-박근혜
쪽의 인사들은 형사처벌을 받는 등 학교경영 일선에서 손을 뗀다. 일부 영남대 교수들은 임시이사들과 직선총장이 이끌던 이 기간을 정치적으로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로 꼽는다. 이 기간 최염씨도 재경영남대동창회장을 맡으면서 학교를 도왔다.
-이사로 복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까? 임시이사 체제에선 가능했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항상 대학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사를 할 생각은 앞으로도 없습니다. 대신
동창회장으로 열심히 뛰었습니다. 유창우 총장 시절 국책공과대학에 선정되고 영남대학술진흥재단으로 일하면서 5년 동안 400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박근혜가 다시 나타나리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2009년 영남대의 임시이사 체제가 끝나면서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전직 이사에게 정이사 추천권을 부여했다.
박근혜 당선인은 당시 7명의 이사 가운데 4명을 추천했다.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 법률지원 특보단장을 맡은 강신욱 전 대법관 등 모두
측근이나 친박계로 분류되는 이들이었다. 그뒤 영남대는 ‘박정희의 대학’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의 최측근인 최외출 교수가
대외협력부총장으로 학교경영 일선에 나서고, 박정희리더십연구원, 박정희새마을정책대학원 등이 설립된다.
-영남대가 박정희의 대학으로 생각하시나요?
“지금 실질적인 운영 권한은 박근혜 당선인이 행사한다고 봅니다. (1988년 11월3일
<조선일보> 기사를 보여주며) 당시 박근혜는 영남대를 떠나면서 ‘차제에 학교 일에서 완전히 손떼겠다’고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2009년 이사 추천권을 행사했어요. 과거 했던 말과 다르지요. 대통령에 당선된 만큼 영남대가 정치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손을 떼야 합니다.”
-어떤 방식이 있을까요?
“먼저 박근혜의 측근으로 분류된 이사들이 사퇴해야 됩니다.”
지난 1월29일 최염씨는 조상 묘 3위가 있는 울산 울주군의 선산에 찾아가 절을 올렸다. 최씨 집안의
땅도 영남대의 땅도 아니다. 영남대가 민간에 팔았기 때문이다. 최염씨의 7대 조모의 산소가 있는 경북 경주 구정동의 선산도 팔았다. 두 산을
소유한 민간업체는 묘소를 이장하길 원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까지 묘지 이장 촉구문이 붙어 있었다. 보기 흉해 인척들이 뽑아 버렸다”고
말했다.
경주 최부자의 종손 최염씨도 이제 여든이다. 산 오르는 데 힘이 부쳐 애먼 길을 헤매고 말았다. 7대조
할아버지 최언경 어른은 이날 찾아뵙지 못했다. 내려오는 길에 그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집안 땅에 자신을 모시지 않아서
할아버지께서 화나셨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