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의 사람

1994년 2월 18일 오후 전달사항이 있으니 교무실로 급히 오라는 연락을 받고 마지막 수업을 마친 나로서는 숨돌릴 사이도 없이 교직원회의에 참석을 하였다. 교장선생님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씀하시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명일 전문대학 수험생들의 면접이 있으니 불가피하게 중 고교는 휴교합니다. 학생들을 등교시키지 마시고 다만 선생님 중에서 교감 및 주임선생님 그리고 방송 및 보이스카웃 담당 교사만 출근하셔서 수험생들을 도와주시면 되겠습니다. 특히 보이스카웃 담당교사는 대원들을 오전9시까지 집합시켜서 수험생들을 안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직원 조회는 간단히 끝이 났다. 나는 보이스카웃 대원들에게 그 사항을 다급히 전달하려니 이미 담임들의 종례가 끝난 반도 있고 해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보이스카웃 반장을 찾아 신신 당부하는 것으로 내일을 기약해야 했다. 며칠 전 졸업식 날 보이스카웃 대원들은 차가운 바람에 시달리며 내빈 및 차량 안내를 위해 오전 내내 봉사를 하였다. 추위에 움츠리며 고생한 대원들에게 점심식사는 물론 누구 한사람 봉사했다며 격려해 주는 이가 없었다. 그저 보이스카웃은 어떤 행사이든 투입해 당연히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부서로 인식되었다. 대원들은 수업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아 내키지 않은 자세로 마지못해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의 무능력 탓인지 모르겠지만 행사가 끝난 후에 식사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나는 공연히 대원들에게 미안해야 했고 식사까지 거르면서 봉사한 대원들은 담당교사인 나의 눈치만 살피다가 씁쓸히 돌아서야 했다. 그 고생한 대원들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누누이 가슴앓이를 해야했다. 그런 이유로 교사들은 서로 보이스카웃을 맡지 않으려 애를 썼고 마지못해 맡은 교사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행사는 어느 것이든 항상 대원들의 자비로 이루어졌고 보이스카웃은 그저 봉사라는 하나의 큰 명제로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었다. 다음날 나는 오전 9시에 출근하였다. 보이스카웃 대원들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전문대학 수험생들은 긴장된 얼굴로 밀려드는데 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 시간에 도착한 대원은 보이스카웃 반장 한사람뿐이었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운동장에서 한가롭게 농구를 하고 있던 학생들을 모아 궁여지책으로 수험생들의 교실 및 화장실 등의 안내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10시가 되어 전문대학 면접은 시작되었다. 학교를 순시하던 교장선생님이 수험생들을 안내하는 학생들이 보이스카웃이 아닌 일반학생인 것이 확인이 되자 가뜩이나 죄인이 되어 움츠리고 있던 나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던지 원인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호통을 치시다가 수험생들의 눈치도 있고 해서인지 교무실로 들어가시더니 책임소재를 물으시는 것이었다. 나는 교사생활 10여 년을 하면서 다혈질의 교장선생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미 각오한 바였지만 막상 심하게 질책을 받고 보니 제자인 보이스카웃 대원들이 야속해지기까지 했다. 다른 한편 철부지 중학생들이 뭘 알겠나 싶었다. 보이스카웃 반장으로부터 지시도 제대로 못 받았을 터이고 일반 학생들은 다들 집에서 쉬라는데 보이스카웃이라고 해서 누구하나 알아주지 않는 행사에 참가해 봉사한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가 포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라며 나는 대원들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책임소재를 묻는 교장 선생님의 진의를 알고 있던 터라 나는 단호히 담당교사인 내가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노라 했다. 그제 서야 언성을 낮추며 마지못해 등을 돌려 교장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책임의 여부는 차후이고 지금 당장 급한 건 수험생들의 안내였으므로 보이스카웃 반장과 함께 분주히 면접실 및 화장실 등을 안내했다. 담당교사로서 얼마든지 책임지고 고통을 감수할 수 있었지만 보이스카웃 반장의 괴로운 표정은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아리게 여울진다. 차가운 복도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반장의 얼굴은 멍든 것처럼 퍼래 보였고 살갗이 돋아 오르고 있었다. 3시간 이상을 추운 곳에서 긴장하고 누구든 서 있어 보라. 그것이 얼마나 곤욕스러운 일인가. 그때 교무실 안에서는 교감선생님과 주임교사들은 난로 가에 둘러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한가롭게 나머지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벽 하나 사이를 두고 희비의 곡절은 지나가고 점심시간이 다가왔어도 누구 한사람 식사하러 가자고 제의하는 이 없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해 조직의 장으로부터 질타 받은 교사에겐 다 식은 커피는커녕 위로의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자신도 혹시나 눈밖에 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신변 보호자들의 작태를 나는 눈여겨 보아야 했다. 이 학원이 진정 예수를 따라가자 라는 표어 아래 민족의 학교라 하여 3.1절이나 광복절 전교생이 모여 만세를 부른다는 것이 위선은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양의 탈을 쓴 자들의 회칠한 무덤 속 모사가 넘실대는 삭막한 분위기를 내 스스로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어쩔 것이냐, 떠날 수 없다면 굴욕을 참고 수치스러움을 감수 하는 수밖엔, 끝내 사표를 던질 것인가를 고심한 나로서는 몰골이 참담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중 교장 선생님은 점심을 드신 후 전문대학의 학생처장님과 함께 수험생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계면 적어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내게로 다가와 어깨를 의식적으로 치면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 중학교는 보이스카웃 담당교사까지 수험생들을 위해 점심까지 거르면서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며 아부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치욕의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나고 그 후 나는 보이스카웃 대원들의 활동사항을 더듬어 보았다. 봉사라는 커다란 명제 아래 행사 때마다 뒷전에서 궂은일은 도맡아 해야했고 월요일 애국 조회 때는 단복을 입고 전체학생들 뒤에 정열 해 서 있어야 했다. 토요일은 자연보호라는 명목으로 산이나 들로 가서 널부러진 쓰레기들을 찾아내어 줏었다. 추우나 더우나 졸업식 등 중요 행사 때는 내빈들의 안내 및 차량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불평 한마디 없이 봉사해야만 윗분들은 진정한 보이스카웃으로 인정했다. 그리했어도 보이스카웃 대원들은 내 앞에서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잘하면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겼고 누구 하나 칭찬하는 이 없었다. 만의 하나라도 차질이 생기면 책임소재를 물어 책망을 받아야 하는 부담스러운 부서가 보이스카우트였다. 교사들은 서로 안 맡으려고 애를 쓰는 실정이었다. 때론 교육청 장학사가 급하게 전화를 해 행사에 동원하라고 할 때에는 경비문제가 항상 뒤따르기에 차마 거절 할 수도 없어 곤욕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보이스카웃 대원들 중 어느 대원은 초등학교 때 어찌나 행사에 시달렸던지 중학생이 되면 요령만 늘어 담당교사의 눈치만 살피면서 되도록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하려 하지 않았다. 선발과정에서도 항상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의 일로 기억한다. 철의 삼각지 견학이라는 공문을 받고 대원들을 위해 신청을 하였다. 공문을 보니 경비에 대한 내역이 없었다. 이번만큼은 보이스카웃 대원들을 위해 혜택을 주는 것이려니 하고 견학 날만을 기다렸는데 하루 전날 전화를 받아보니 얼마의 소요경비를 지참하고 집합 장소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이렇듯 항변을 했다. 도대체 보이스카웃은 뭐 하는 단체냐. 움직일 때마다 자비를 들여야 하고 혜택이라고는 전혀 없이 희생만 강요하는 집단이냐 며 언성을 높였다. 공문을 보낸 그곳에서도 할말이 없는 듯 전화를 끊어버려 대원들의 철의 삼각지 견학은 애석하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전문대학 수험생들 안내의 과실로 인하여 교장선생님께 심한 책망을 받았던 것이다. 그 날도 보이스카웃 대원들은 학교 전체가 휴교로 급우들은 등교하지 않는데 진종일 수험생들의 안내를 위해 등교 할 생각을 하니 어린 마음에 선듯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리라 나는 이해가 되었다, 며칠 전 졸업식 날도 보이스카웃 대원들은 힘겹게 임무를 마친 후 담당교사의 주머니에서 겨우 컵라면 값을 받아내 늦은점심을 대신하고 쓸쓸히 귀가했던 것이다. 요즈음 학생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를 까맣게 잊고 계신 교장선생님은 그저 담당교사에게 지시만 하면 해결되는 줄 알고 있었다. 보이스카웃 담당교사인 나는 얼마나 애를 태워야 했는가. 그 날 교장 선생님의 책임 추궁으로 하여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고 단호하게 말을 한 나로서는 책임을 회피 할 수가 없었다. 수험생들의 면접실 안내를 혼이 나간 듯 이행하고 난 후 조직에 대한 허탈감과 제자에 대한 배신감에 사로 잡혀 교직을 떠나야 하겠다는 마음의 각오까지 해야했다. 두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10여 년 간 정들었던 교직을 그만두려 했을 때 그 고뇌로 하여 몇 날을 불면의 밤을 지새웠는지 경험해 보지 아니한 사람은 고통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교사인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실패한 교사로서 쓸쓸히 남아 징검다리를 건너듯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고 있다. 다만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그 날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엔, 다른 대안이 내겐 없었다. 이 순간 대학시절에 본 영화 부메랑의 한 장면이 불현듯 떠오른다. 경찰관을 살해하고 감옥에 갇혀 사형수가 된 아들을 면회한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비수같은 시선으로 던진 한마디『별 도리 없다, 정신을 차리는 수밖엔』그리고 그는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 뜨거운 생명을 건다. 나 역시 오늘도 제자들 앞에 그렇게 마지막 목숨으로 서 있기를 원하며 결의에 찬 눈빛을 보낸다. 너희들이 나를 배신한다고 해도 나는 차마 너희를 버릴 수 없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