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트 광장의 시청사 건물 야경.
이른 아침, 북해 연안에서 몰려온 안개가 한 겹씩 베일을 벗으면서 중세의 역사문화도시 브뤼헤(Bruges, 2000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의 아름다운 자태가 햇볕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에게는 ‘브뤼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부르흐와 부르그의 중간발음(불어에서의 R발음처럼)을 내야 하는 곳. 많은 사람들로부터 '천정 없는 박물관', '서유럽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곳. 600여 년 시간을 거슬러오르듯 오래된 골목을 빠져나온 마차가 하나 둘 마르크트(Markt) 광장에 도착하면, 거기서 내린 시간의 여행자들이 총총 걸음을 옮겨 종소리 그윽하게 울려퍼지는 종탑(Belfort)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366계단의 끝자락에 매달린 47개의 종을 만나러 가는 아침의 여행자들. 종탑이 문을 여는 순간, 가장 먼저 종루에 오르려는 사람들로 이 가파른 계단은 늘 붐비고, 아침마다 가쁜 숨소리로 가득하다.
종탑에서 바라본 브뤼헤 중세도시 전경(위). 종탑과 종루 야경(아래).
왜 모두들 그렇게 숨가쁘게 올라왔는지는 종탑의 종루에 올라서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 곳은 사방에 펼쳐진 부르흐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이며, 중세도시의 그윽한 향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둥그렇게 수로가 감싸고 있는 브뤼헤 도심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세로로 세워놓은 달걀처럼 생겼는데, 그 노른자위에 마르크트 광장과 종탑이 자리해 있다. 종루에 올라 브뤼헤 도심을 내려다보면 북서쪽으로 어스름하게 풍차의 언덕이 보이고, 남쪽으로는 살바토르(St Salvatorskathedraal) 성당과 비헤인호프(Begijnhof)가, 서북쪽으로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고풍스러운 중세 건축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개가 걷히면 도심을 타원형으로 감싸 흐르는 운하의 물길도 선연하게 다가온다.
마르크트 광장의 밤(위 왼쪽)과 낮(위오른쪽). 광장에 정거중인 마차(아래).
47개의 종을 거느린 브뤼헤의 종탑(13~15세기)은 벨지움의 다른 종탑 29개와 함께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높이는 88미터, 종의 무게를 다 합치면 무려 27톤에 이른다고 한다. 이 종들을 움직이는 오르골(Orgel, 자명금)도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종루 아래층에 오르골이 보관된 방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사실상 브뤼헤에 와서 종탑을 오르지 않고는 브뤼헤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만큼 이 곳은 브뤼헤의 상징이고 자랑이다. 종탑 바로 옆에 자리한 시청 건물과 마르크트 광장을 빙 둘러싼 플랑드르의 전형적인 중세풍 건물도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특히 저녁 무렵 마르크트에서 바라보는 종탑과 주변의 야경은 낭만적이고, 때때로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광장에서 열린 연주회(위). 종탑을 오르다 만날 수 있는 오르골(아래).
시청과 종탑 사이로 난 골목을 따라가면 고색창연한 옛 시청 건물(1376~1420)을 만날 수 있다. 이 곳은 벨지움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관공서 건물로, 2층의 고딕홀(Gothic Hall)은 이제 너무나 유명한 명소로 자리잡았다. 본래 고딕홀은 옛 시청사의 회의실이었는데, 꽃이 핀듯한 천장의 화려한 장식과 금빛으로 반짝이는 벽화, 은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기품있는 옛빛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종탑 남쪽에 위치한 살바토르 성당(12~16세기)의 내부도 고딕홀의 천장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지만, 화려함 대신 위엄과 웅장함을 갖추고 있다. 다만 창에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 성상화는 브뤼헤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평가된다.
옛 시청 건물의 화려한 고딕홀 천장(위). 광장에 모인 학생들(아래).
살바토르 성당에서 좀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비헤인호프(1245)가 자리해 있다. 비헤인호프는 일종의 수도원 보호소로서, 주로 과부(전사한 군인의 부녀자들)나 보호자가 없거나 순결을 맹세한 소녀들, 수녀들이 주로 살던 ‘여자들만의 마을’을 가리킨다. 본래 비헤인(Begijn)은 ‘순결한 여성’ 즉 미혼여성과 종교적 신념을 지켜가는 수녀를 가리키는 말이며, 호프(Hof)는 뜰, 공원 혹은 안식처를 뜻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비헤인호프는 순결한 여성들만이 사는 평화의 마을인 셈이다. 과거 비헤인호프의 여성들은 성처럼 둘러쌓인 수도원 안에서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으며, 자수공예나 레이스 짜기, 타피스트리 등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비헤인호프가 일반에 개방되기 시작한 것은 세계 1,2차대전 안팎이며, 지금도 겐트에 남은 비헤인호프는 아침 6시 30분에 문을 열어 저녁 10시면 문을 닫아 건다.
브뤼에는 도심 곳곳으로 수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이런 비헤인호프는 수도원의 교회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벨지움의 플랑드르 지역에는 모두 12곳의 비헤인호프가 존재했고, 이들 비헤인호프는 1998년 12월 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비헤인호프는 수로가 빙 둘러싸고 있다. 도심으로 흘러드는 수로와 외곽으로 빠지는 수로가 이 곳의 호수(일명 사랑의 호수)에서 교차한다. 브뤼헤의 수로는 본 줄기가 둥그렇게 도심을 둘러싼 모양이며, 도심을 관통하는 수로가 다시 남북쪽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이 도심을 가로지르는 수로는 중간중간 지류가 뻗어 복잡한 미로를 이루는데, 곳곳에 유람선 선착장이 자리해 있다.
종탑 남쪽의 살바토르 성당 내부(위)와 외관(아래).
브뤼헤를 여행하는 방법 3가지(도보, 자전거, 보트)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이 바로 보트나 유람선을 타고 수로를 따라 여행하는 것이다. 브뤼헤를 일러 '서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부르는 것도 도심 곳곳에 미로처럼 뻗어 있는 수로 때문이다. 이 수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오래된 풍차도 만날 수도 있다. 이 곳의 풍차는 네덜란드 풍차와는 그 모양이 약간 다른데, 본래 풍차의 원조가 플랑드르 지역이라고 한다. 물론 아주 오래 전에는 플랑드르가 네덜란드에 병합돼 있었지만, 플랑드르 사람들은 지금도 네덜란드가 풍차의 나라라고 떠들어대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전형적인 중세 플랑드로 가옥의 모습(위). 풍차의 원조라 불리는 브뤼헤의 풍차(아래).
브뤼헤에는 유난히 박물관이 많다. 옛날 다이아몬드 가공 중심지답게 시내 남쪽에는 다이아몬드 박물관이 자리해 있으며, 마르크트 광장 인근에는 초콜릿의 역사와 제조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초콜릿 박물관이 있다. 맥주 제조의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는 개인 소유 맥주박물관(Family brewery De Halve Maan), 중세시대의 카펫에서부터 다양한 생활도구를 전시한 포트리(Potterie) 박물관, 시청사 고딕홀 박물관, 가구와 도자기, 타피스트리, 레이스 등을 전시한 그루터스(Gruuthuse Brugesmuseum) 박물관, 중세 화가의 그림을 만날 수 있는 레이디 박물관(Church of Our Lady Brugesmuseum)을 비롯해 다양한 소규모 전문박물관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브뤼헤는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으며, 중세도시의 모습을 띠고 있다.
브뤼헤는 도시 전체가 ‘역사도시’로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종루와 종탑은 1999년에, 비헤인호프는 1998년에 각각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는 브뤼헤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밖에도 벨지움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목록은 브뤼셀 빅토르 호르타 저택(아르누보 건물, 2000년 지정), 몽스 슈엔네스 광산(2000년 지정), 투르네의 노트르담 대성당(2000년 지정), 브뤼셀의 그랑플라스(1998년 지정) 등이 있다. 경상도만한 작은 나라에 모두 7개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관 벽의 그림(위)과 비헤인호프 앞 마차 정거장의 조각품(아래).
어떤 사람은 브뤼헤를 가리켜 ‘천정 없는 미술관(혹은 박물관)’이라고 했다.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도시 전체가 미술관이고 박물관이라는 얘기다. 사실 대외 무역이 성행했던 중세의 브뤼헤는 벨지움에서 가장 잘 살았던 도시였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브뤼헤는 가난하고 낙후된 도시로, 발전이나 개발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오늘날에는 브뤼헤를 벨지움 최고의 관광지로 만들어 주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지나자 중세도시의 원형을 보러 오는 관광객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기 시작했다. 움츠렸던 도시는 다시 활력을 되찾았고, 숨죽여 흐르던 수로는 사람들에게 여유와 낭만을 선물해 주었다. 브뤼헤 시민들은 당당하게 이 곳이 서유럽의 문화수도라고 말한다. 이 곳을 여행한 사람들도 말한다. 브뤼헤는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 글/사진: 이용한 http://blog.daum.net/bink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