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에서 만난 대륙인의 사랑을 그린 천커신 감독의 영화 ‘첨밀밀’
‘이 세상에 유통기한이 없는 것은 없을까’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 있다면 유통기한이 영원히 지나지 않을 수는 없을까.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년 후로 적어야지.’
영화에서는 사랑도, 통조림도 5월1일이면 유통기한이 만료된다. 그리고 영국은 홍콩에서 7월1일이면 유효기한 만료다. 1997년 7월1일이면 홍콩을 떠나는 영국은 홍콩인들에게 흡사 유통기한이 찍힌 통조림 같다. 유통기한이 만료되면 영국은 홍콩을 버리고 떠날 것이다. 그렇게 떠날 영국은 홍콩인들에게 애인이고, 자신을 돌보고 거두어주는 보스였다. 그런 영국이 이제 떠난다. 그것이 배신일지도 모른다. 애인이 떠나고, 보스인 백인에게 배신을 당한 뒤 새로운 둥지를 찾지 못하는 진청우와 린칭샤의 방황과 고통, 피로감은 당시 홍콩인 대다수의 느낌 그대로다.
하지만 그렇게 애인과 보스가 떠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진청우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조깅을 하면서 슬픔을 잊고 새출발을 하려 한다. 린칭샤는 백인 보스를 살해한 뒤 그동안 쓰고 다니던 금발 가발을 벗어던진다. 보스에게 배신당한 린칭샤 옆에는 구두를 신고 자면 다리가 붓는다면서 구두를 벗겨주고, “예쁜 여자는 구두가 깨끗해야 해” 하면서 정성껏 구두를 닦아주는 진청우가 있다. 애인과 보스가 떠난 뒤 새롭게 출발하는 두 사람은, 영국이 떠난 뒤 새롭게 출발하는 홍콩인 셈이다.
주룽 반도의 침사추이
‘중경삼림’ 첫 번째 이야기의 무대는 주룽 반도다. 주룽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 침사추이다. 침사추이를 가로지르는 나단 로드에 청킹맨션(重慶大厦)이 있다. 이곳이 영화의 주요 무대다. 청킹은 ‘重慶’을 광둥어로 읽은 것이다. ‘중경삼림’의 영어 제목은 ‘Chungking Express’이다. 영화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가 청킹맨션을 배경으로 진행되고, 두 번째 이야기의 배경이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Midnight Express)’라는 패스트 푸드점이라 두 공간을 합성해 제목을 만든 것이다.
나단 로드는 주룽에서 번화한 곳이자 가장 혼잡한 곳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이 거리만의 매력이다. 하얏트 호텔 등 최고급 호텔도 있지만 우리나라 여인숙쯤에 해당하는 싸구려 숙박시설도 즐비하다. 나단 로드 36번지 대로변에 높이 솟은 낡은 빌딩이 청킹맨션이다. 홍콩의 대표적인 저가 게스트하우스다. 4층부터 숙소이고 3층까지는 상가인데, 환전소와 도색잡지 가판대, 기념품 가게, ‘짝퉁’ 가게들이 널려 있다.
어둠침침한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으면 누군가 달려들어 칼을 들이대지 않을까 조마조마할 정도로 무섭고 위험해 보이는 건물이다. 청킹맨션은 방값이 싸서 돈을 벌기 위해 동남아나 아프리카, 인도, 네팔에서 온 사람들이 장기 체류하곤 한다. 그래서 인도 식당, 네팔 식당 등이 있다. 진청우는 범죄가 빈발하는 이곳 일대를 순찰하는 사복경찰이다. 린칭샤는 청킹맨션에서 마약 운반책 노릇을 할 인도 사람들을 구하고, 보스에게 매수되어 도망간 인도 사람들을 찾아 헤맨다. 그러면서 청킹맨션의 어지러운 광경이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현란하게 화면을 채운다.
청킹맨션이 있는 나단 로드에서 남쪽으로 홍콩 문화센터, 홍콩 예술박물관, 그리고 홍콩 섬으로 가는 스타페리 선착장까지 이어지는 길은 홍콩 최고의 산책로 가운데 하나다. 해변을 끼고 반대편 홍콩 섬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홍콩 상하이은행 빌딩, 중국은행 빌딩 등, 홍콩을 대표하는 멋진 건축물이 연출하는 세계 최고의 항구 풍경을 볼 수 있다. 특히 야경이 일품이다. 홍콩에서 환상적인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두 곳이다. 한 곳은 홍콩 섬에서 급경사를 오르는 재미있는 픽 트램을 타고 빅토리아피크로 가서 주룽 쪽을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룽 남쪽 침사추이 해변에서 홍콩 섬 쪽을 구경하는 것이다. 설이나 추석, 크리스마스, 연말에는 침사추이 해상에서 불꽃놀이를 하는데 불꽃놀이와 홍콩 빌딩의 조명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야경이 장관이다.
2004년에 침사추이 해변공원에 ‘스타의 거리’가 생겨 볼거리가 늘었다. 홍콩 유명 배우와 감독 73명의 사인과 핸드 프린팅이 길바닥 곳곳에 있다. 수많은 배우의 손바닥 도장에 자신의 손을 맞춰보다 보면 홍콩이 영화의 도시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필자가 좋아하는 장궈룽의 것은 없다. 장궈룽은 ‘스타의 거리’가 생기기 1년 전인 2003년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캘리포니아 드리밍’
‘중경삼림’ 두 번째 이야기는 줄거리보다도 영화 전편에 흐르는 ‘마마스 앤 파파스(Mamas & Papas)’의 명곡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이 인상적이다. 많은 영화 팬이 ‘중경삼림’하면 이 노래를 떠올린다. 노래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긴데다가 촬영감독인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가 현란하게 움직여서 ‘중경삼림’의 두 번째 이야기는 ‘캘리포니아 드리밍’의 뮤직비디오처럼 느껴질 정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