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의 발상지(오목대와 황산대첩) | 온고을이야기 | 2005/07/26 13:47 |
http://blog.naver.com/sensible77/120015651714 | |
오목대(梧木臺, 지방기념물 16호)는 경기전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거리에 낮으막하게 솟은 펑퍼짐한 언덕받이를 말한다. 남쪽으로 다소 길쭉이 뻗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타원형의 돈대로써 서남쪽의 언덕기슭이 벼랑을 이루고 있으며, 둘레에 토성의 흔적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荒山大捷)을 거두고 돌아가는 길에 잔치를 벌렸다는 곳으로, 1900년(광무 4)에 세운 고종 친필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비와 비각이 있다. 13세기 고종대 이래 연안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의 침공이, 14세기 후반 충정왕대 이후 극심해졌으며, 우왕대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다. 왜구들은 1376년 충청도 홍산에서 최영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했으나, 1380년(우왕 6) 8월 500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배를 정박시켜 놓고 육지로 올라와, 충청․전라․경상 3도의 연안지역에서 갖은 약탈을 다 자행하였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하여 왜적을 공략하도록 하였는데, 진포싸움에서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처음 사용하여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우고 대승을 거두었다. 배들이 모두 불타 퇴로가 막히자, 이 때 목숨을 건진 자들과 이미 상륙해 있던 자들이 합류하여 상주․영동․옥주 등지로 나가면서 약탈을 자행하여 지리산 일대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이에 이성계를 충청․전라․경상 3도 도순찰사에 임명하여 왜구 대토벌전에 나섰다. 이성계는 운봉에 있는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왜구의 수가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명 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갔으며, 왜구의 전사한 피로 강이 물들어 6,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노획한 말만도 1600여필이었다고 한다. 당시 왜구의 소년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가 날쌔고 용맹했는데, 이성계가 활을 쏘아 그 투구끈을 맞혀 투구가 떨어진 사이 이두란이 화살을 날려 이마를 맞혀 사살했다고 한다. 아무튼 왜구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황산대첩을 거둔 이성계는 귀경 길에 선조들이 살았던 전주에 들려 오목대에서 일가친지를 불러모아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여기에서 술이 거나해진 이성계가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다고 한다. 즉 자신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넌즈시 비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를 모를리 없는 종사관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홀로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시로 읊었다 한다. 정몽주가 읊었다는 시가 남고산성 만경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길 바위 머리 돌길 비끼어, 올라서니 이 마음 걷잡을 수 없네. 푸른 산은 은연히 부여국을 다짐했건만, 누런 잎은 백제성에 흩날리어라. 구월의 높은 바람은 나그네를 괴롭히는데, 한 평생 지닌 호기는 서생으로 그르쳤구나. 하늘가에 해는 저물어도 뜬 구름은 합해지는데, 고개를 돌려 속절없이 玉京만 바라보네(千仞崗頭石逕橫 登臨使我不勝情 靑山隱約夫餘國 黃葉繽紛百濟城 九月高風愁客子 百年豪氣誤書生 天涯日沒浮雲合 矯首無由望玉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