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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제2 방편품(方便品)
안녕하십니까? 3월 21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법우님들 모두 부처님의 가호아래 부처님 지혜로 매일매일 행복한 나날이 되실 줄 믿습니다. 더구나 또 이렇게 염화실 방송국이 개설 되어서 실시간에 부처님 말씀을 나누는 이런 시간이 또 있어서 더욱 더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이나 가정에 좋은 활력소가 되고, 또 어떤 지혜의 빛이 되리라고 하는 그런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을 대하고 모두 그렇게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법화경 49쪽 어제 이어서 “사리불이 법을 청하다.” 하는 그 대목이 되겠습니다. 이 대목이 부처님께서 당신이 깨달으신 지혜를 한껏 추켜 세우고 또 극찬을 하지요. 지극히 찬탄하는 그런 이야기가 쭉 이어지고 “그만두자” 내가 이렇게 깨달음의 도리를 지극히 찬탄을 했지만 그래도 누가 알아 듣겠나? 이야기를 할 듯 하다가 그만 두는 형식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도달한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큰 깨달음의 경지는 아무나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삼승법(三乘法)을 설하게 된 이유가 지난 시간에 밝혀졌지요. 그러니 그런 말씀을 듣고 사리불이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제도 사리불이 그 뛰어난 인격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사리불이 법을 청하지 못하면은 누구도 법을 청할 수 없는 그런 입장이 되고 말기 때문에 사리불은 상수제자로서 짐이 상당히 무겁습니다.
한 가정에서 책임 맡은 사람의 짐이 무겁고 여러 형제가 있으면은 맏이가 짐이 또한 무겁듯이,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또한 사리불 같은 이런 상수 제자의 짐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사리불이 그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서 법을 청하게 되는 내용이지요.
3. 사리불이 법을 청하다.
그 때 대중 가운데에 성문으로서 번뇌가 없어진 아라한인 아야교진여 등 일천 이백 명과 처음으로 성문. 벽지불의 마음을 낸 비구. 비구니.우바새 우바이가 있다가 모두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각한 것은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에 아야교진여 라고 하는 이름이 나왔지요. 교진여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최초의 승려가 된 오비구(五比丘)! 부처님과 함께 출가한 오 비구중의 한 분인데 늘 오 비구의 대표가 되지요.
사실 이분들은 스스로 출가 할 마음이 있어서 출가한 것이 아니고 싣달 태자가 출가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부왕이 가서 보호하고 지키고, 또 어떤 문제가 발생 하면은 연락을 취하고 이런 등등의 보호의 임무를 띠고 부왕의 명령에 의해서 사실 출가한 것입니다.
그래도 소질이 상당히 있고 수행자로서의 어떤 취미가 남달랐던 그런 아마 성실한 사람들을 다섯 명 뽑아 가지고, 싣달 태자를 보호하고 지키라고 하는 그런 뜻에서 보냈을 줄로 그렇게 우리가 압니다. 그래서 싣달 태자와 조금도 다름없이 공부를 아주 열심히 잘 했지요.
정말 낙이 있겠습니까 만은 동거동락을 해가면서 6년 고행을 시종일관 같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싣달 태자는 생각한 바가 있어서 이렇게 고행만으로 서는 도저히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이것을 생각 하시고는 니련산하 라고 하는 맑은 물이 흐르는 강에 내려가서 목욕을 하고 목녀(牧女)! 젖소를 키우는 그 아가씨에게 그야말로 아주 좋은 우유로 만든 음식을 받아 먹고 정신을 차리고 기력을 차려서 회복하지요.
그래서 다시 올바른 선정에 드는데 그것이 부다가야 지금은 큰 탑이 기념으로 세워져 있지 만은 보리수 아래서 명상에 들지요. 진정한 명상에 들어서 큰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데 이 오 비구들은 싣달태자를 6년 고행 끝에 견디다 못해 타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이 오 비구들은 녹야원으로 가게 되지요.
싣달 태자는 보리수 아래서 정진을 끝내고 비로소 큰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성취하고 3.7(21)일 동안 그 깨달음의 경지를 누리고 점검하고 그것을 스스로 어떤 감동에 젖기도 하고 다시 검토도 하고 그런 과정을 하면서 이 사람들을 찾아가지요.
교진여등 오 비구가 간 곳을 알아 가지고 찾아가는데 최초의 바로 설법지인 베나레스 녹야원에 가지요. 녹야원에서 이들을 수소문 끝에 만나게 되는데 처음에 그 광경을 그렇게 들 그리고 있지요.
이 오비구들이 같이 앉아서 정진을 하다가 멀리서 싣달 태자가 오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타락한 사람이 뉘우치고 아마 우리를 찾아 오는가 보다, 우리에게 오더라도 우리는 본 척 만 척 하자. 우리는 끝까지 지조를 지키고 고행을 하고 있고 저분은 우유 죽을 먹고 이렇게 목욕도 해가면서 타락한 사람이니까 절대 환영하지 말고 본 척만 척 하자.”
이렇게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싣달 태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 어떤 광휘(光輝)와 어떤 법력(法力)과 덕화(德華)에 저절로 감화가 되어서 자리에서 일어나고,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이 경건한 그런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하는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지지요.
그래서 첫 설법이
“그대들과 함께 내가 왕궁에서 6년 전 호화호식 하면서 쾌락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는가? 그러다가 수행을 위해서 6년 전에 수행의 길을 나서서 피나는 고행을 우리가 하지 않았는가? 극과 극의 삶을 살았다. 쾌락의 삶을 살았고 또 고행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쾌락의 삶도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아니고 고행의 삶도 또한 진정한 삶은 아니다. 나는 그대들과 헤어진 이후 보리수 밑에서 7일간 바로 선정에 들어가서 비로소 깨달았는데 중도의 이치를 깨달았노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말씀이 “나는 중도(中道)를 깨달았노라” 하는 그런 중도 대선언이다. 이런 말씀을 전하고 있지요. 어떤 경전이 최초로 그 자리에서 설해졌겠는가? 이것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어서 결론이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이라고, 그 경전이 경전 이름도 초전법륜! 맨 처음 법륜을 굴린 경전이다. 이름이 돼 있어서 초전법륜경을 모두 최초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이라고 이렇게 인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중도(中道) 대선언으로서 이루어져 있다. 그랬습니다. 그들을 여러 가지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에 깨닫고 나서 그래도 가장 인연 깊었던 6년간 고행을 같이 했던 그분들을 제도하는 것이 도리상 맞는 일이긴 합니다. 그런데 그 의리 때문에 그들을 먼저 가서 우정 그 먼 길, 지금의 250킬로나 되는데 일주일이 걸렸다고 하지요. 그 당시 걸음으로 그런 길을 우정 찾아가서 그렇게 했겠는가?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6년간 정말 피나는 고행을 하고 함께 한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저렇게 떠났으니, 내가 이렇게 우유 죽을 먹고 목욕을 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돌아가서 정상적인 사유의 길을 택한 것을 저 사람들은 오해한 것이다. 그 오해를 풀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다 생각해서 그 사람들을 찾아 갔던 것이고 또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는 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바로 중도적인 삶이다 하는 것입니다. 고행의 삶도 옳지 않다 그러면 그 전의 쾌락의 삶은 옳았느냐? 쾌락의 삶도 물론 옳지 않다. 물론 중간 삶이라고 하는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는지 모르지 만은 이것은 중도적인 삶이 인간으로서 가장 바람직 하고 정상적인 삶이다. 그래서 그 중도를 나는 깨달았노라. 인간의 삶은 중도적인 삶이고 또 모든 존재는 중도적의 원리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어제 모든 존재의 원리를 공성으로 보는 거나 연기로 보는 거나 결국은 중도로 보는 것이나 그것을 해석해 들어가면 결국 같은 말입니다. 같은 말이고 같은 뜻인데 그 표현 방법이 어떤 방향에서 표현 하느냐? 어느쪽부터 우리가 이해해 들어가느냐에 서 공(空)이다 무(無)다 연기(緣起)다 중도(中道)다 이렇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달리 다른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의 산이 있는데 이것이 남쪽 방향에서 올라 가느냐? 북쪽 방향에서 올라 가느냐? 서쪽 방향에서 올라 가느냐? 동쪽 방향에서 올라 가느냐에 따라서 그 표현이 다를 뿐이지, 똑 같은 산을 정복 하고자 하는 그런 등산이면은 한결같이 똑 같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은 틀림없습니다.
공이라고 하는 말이나 연기라고 하는 말이나. 중도라고 하는 말이나 다 같은 거예요. 그래서 중도를 최초로 선언하게 된 것이고 중도라는 말속에는 공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연기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부 공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연기의 법칙으로 존재하는 것이다.그렇게 이야기가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독특 하다면 독특하게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그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제일 먼저 그들을 찾아갔다. 그렇게 이제 이야기를 합시다. 상당히 뭐라고 할까요 수긍이 가는 그런 표현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번뇌가 없어진 아라한(阿羅漢) 이런 표현을 했어요. 그리고 법화경 서두에도 보면은 큰스님 일만 이천 명과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라한이다 라고 하고 더 이상 번뇌가 없어졌다 라고 제일 앞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 늘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자격은 어떠한가? 그들은 어떤 자격을 갖추었는가? 첫째 번뇌가 없어진 사람이다 이것입니다. 뭐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어떤 재능이 있는가? 무엇을 아느냐? 이런 이야기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도 불교의 독특한 그런 시각인데 우리 불자들이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헤르만 햇세가 쓴 싣달타에도 보면은 수행하다가 중간에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취직을 하는 그런 과정이 나오지요.
“그래 그대는 무엇을 할 줄 압니까?”
이렇게 가게 주인이 싣달타 있는데 물었습니다.
“ 저는 참을 줄 알고 단식을 할 줄 압니다.” 그랬습니다.
장사 하는데 뭐 점원이 돼 가지고 무슨 참을 줄 알고 인내할 줄 알고 단식할 줄 아는 것이 무슨 필요한 재능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렇게 대답을 하고 또 그것을 가게 주인은 잘 소화하고 이해를 하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여기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들의 제일 조건은 번뇌가 없어진 사람이다 그랬습니다. 참 정말 의미 심장 한 것인데 이런 너무 간단하고 당연히 있을법한 그런 이야기고 스치고 지나가 버리면은 지나가버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여기서 또 그런 입장으로 분석해 본다면 눈이 번쩍 뜨이고 참으로 이들이야 말로 진정 부처님을 모실만 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답니다. 아라한 그러면서 교진여를 그렇게 표현을 하지요. 그래서 우리 불교에서 번뇌라는 이야기가 참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까? 불교를 공부할 때면 의례히 번뇌를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 번뇌에 대해서 오늘 자세히 말씀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흔히 그냥 무명번뇌 이런 식으로 몰아 부쳐 버리고 간혹 조금 부연 설명 하면은 탐진치(貪塵痴) 삼독(三毒)을 번뇌(煩惱)라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물론 탐진치가 가장 중요한 근본 번뇌입니다. 탐욕! 그 다음에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 그 다음에 거기서 두개를 더하면 ‘만(慢)’ 교만한 마음, 어떤 입장으로든지 그 교만한 마음을 누구든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든 사람은 나이 들었다고 교만하고 젊은 사람은 나이든 사람을 우습게 봅니다. 그것은 젊은이의 교만이지요. 그리고 그 나름대로 다 생각해 보면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고 누구나 다 교만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네 번째 교만심(嬌慢心)!
그 다음의 ‘의’라고 해서 의심할 의(疑) 입니다. 의심하는 그 번뇌도 대단한 번뇌라는 거죠.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의심 이것이 참 어떨 땐 정말 불필요한 것이고 어이없는 그런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심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가장 무거운 다섯 가지 번뇌 중에 다섯번째 들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 어떤 사람이 농사꾼이 도끼를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옆집에서 빌려간 줄로 오해를 하고 옆집 사람에게 물어 보니까 자기는 빌려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자기는 빌려 가놓고 자기 기억은 분명치 않지만은 과거에는 빌렸을 수 도 있지요. 분명치는 않지만 빌려갔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일기 시작하면서 아! 아니야 틀림없이 빌려 갔을 거야 아니야 꼭 빌려갔어, 그렇게 이제 생각이 들고 그 다음 그 사람을 보니까 틀림없이 저 사람이 빌려가 놓고는 빌려가지 않았다고 거짓말 하는 것 같이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아무리 봐도 도둑놈 같은 것입니다. 말하는 것도 그렇고 음성도 그렇고 행동 하나하나가 어떻게 걸어가는 것이 이상하게 멀리 서 지켜보면은 꼭 도둑놈 같이 여겨지는 거예요.
일체 행동과 말씨와 하는 짓 그리고 지나온 일들까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전부 틀림없이 저 사람이 내 도끼를 몰래 가져가 놓고는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하는 사람같이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일체 말씨가 그러고 보니까 어저께 한 이야기도 그저께 한 이야기도 그 그저께 한 이야기와 그 그저께 한 행동까지도 그만 그렇게 여겨지기 시작하더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 밭에 가서 일을 하려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다가 자기가 거기서 빠트린 도끼를 찾았다는 것이죠. 그와 같이 그야말로 참 어처구니 없는 그런 의심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교만 못지않게 사람이 터무니없이 의심 하는 것이 참 큰 번뇌이죠. 그러니까 탐욕 진심 치심(어리석음) 그리고 교만 그 다음 의심까지 이것을 오둔사(五鈍使) 라고 아주 무거운 번뇌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악견(惡見) 해서 여섯 종류 까지를 이것을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 할 때가있습니다. 악견은 좋지않은 견해라는 뜻이죠. 그런데 좋지 아니한 견해를 다섯 가지로 또 이야기 하는데 악견에 다섯 가지를 새로 들면은 오리사(五利使) 그렇게 됩니다. 다섯 가지의 아주 날카로운 번뇌다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이제 신견(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 교리적인 용어로 그렇게 부르는데, 신견이라고 하는 것이 뭔가 소위 여섯번째 가는 번뇌니까 우리가 한번 들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번뇌번뇌 하는데 도대체 구체적으로 번뇌가 무엇 무엇이 있는가? 이것이 우리들 자신을 아는 일이고 자신을 살피는 일이고 우리는 번뇌 입장으로 보면은 번뇌가 가당치 않고 상당하지요.
물론 부처님으로서의 능력과 어떤 지혜와 자비의 입장으로 보면은 또 번뇌의 천 배 만 배에 해당하는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내용이 감춰져 있습니다 만은, 이렇게 또 부정적인 시각으로 우리들을 살펴보고 우리 자신을 파악해 볼 때는 또 그런 면도 없지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 오리사(五利使) 중에서 신견(身見) 이라고 하는 것은 몸 신(身)자 견해라는 견(見)자입니다. 이것을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물에 대한 견해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물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견해가 말하자면 신견인데 여섯번 째 해당되는 번뇌라는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소유물! 나와 나의 것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소견이 또 큰 번뇌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변견(邊見) 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극단적인 그런 사고를 변견 이라고 합니다. 뭐 아주 없다 아주 있다 항상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조금만 공부해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이런 말을 아마 들었을 거예요. 그렇습니다. 모든 존재는 중도적으로 존재하고 중도의 공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아니 존재원리를 무엇이라고 말 하는가? 그것은 중도 원리고 중도의 공식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불교에서 보는 존재원리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중도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보는데, 그렇게 중도적으로 모든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중도적으로 봐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으로 보는 것이죠. ‘분명히 있다’ 그렇게 보거나. ‘분명히 없다’ 라고 이렇게 보거나 그렇게 보는 것을 변견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사견(邪見) 하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삿된 견해지요. 잘못된 견해! 불교 안에 들어와서 불교를 믿는다고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이 삿된 견해에 빠지는 예들이 참 많은데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되고 잘 살펴야 됩니다.
불교 안에 들어와서 스스로 불교의 소견이라고 부처님의 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 문제지요. 아예 그런 소견이 아니면은 뭐 불교를 떠 올리지 않고 그런 소견을 가지고 있으면은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 만은, 자기 생각이 이것이 불교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예들이 많지요. 뭐 불교를 믿으면서 기독교적으로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또 무당 형식으로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그런 신자들이 사실 많습니다. 내가 뭐 일일이 구체적으로 열거 하기가 참 곤란해서 그렇지 기독교적으로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아주 많아요. 그 신앙 형태는 우리가 분석해 보면 똑 같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그런 불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사견이지요. 이제 우리가 불자로서 꼭 우선하는 일은 참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일입니다. 이런 시간에 우리가 함께 하면서 정말 부처님이 만들어 놓고 깨달은 분들이 만들어 놓은 그 좋은 교과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공부하는 일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공부를 하지 않고 자기 안목대로 자기 나름대로 불교는 이런 것이다 라고 설정해 놓고 들어와요. 그런 어떤 선입견 없이 들어오면 참 좋겠는데 자기 선입견을 딱 가지고 들어 와서는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그 선입견을 버리지 않고, 불교는 이런 것이야 하고 그렇게 시종일관 그렇게 믿고 들어갑니다. 언제나 겸허하게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를 비우면서 늘 새롭게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이 참으로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이런 것이 큰 번뇌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냥 세밀하게 살피지 않고 그냥 번뇌 이렇게 해버리니까 모르고 지내지요.
그 다음에 견치견(見取見) 이라고 하는 번뇌가 또 있는데 이것은 나쁜 견해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바르지 않는 견해인데도 불구하고 바르지 않다고 인정을 하지 않고 옳다고 인정 하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견치견 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개금치견(戒禁取見)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외도들의 계율이지요. 전혀 얼토당토 않는 그런 계율을 또 불교의 계율처럼 그렇게 여기는 예가 있습니다. 개금치견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따라 다닙니다, 탑에 어린아이가 똥을 쌌는데 개가 와 가지고 그 똥을 먹었다는 거죠. 그래서 그 개는 탑을 깨끗이 청소를 했고 정말 똥을 청소를 했으니까 얼마나 좋은 청소를 했습니까? 그래서 그 성스러운 탑을 그렇게 깨끗이 청소를 잘 했기 때문에 개가 죽어서 그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났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외도들이 탑에 있는 어떤 어린아이들이 싸놓은 똥을 먹는다는 것이지요. 개가 먹고 천상에 태어났다는 그것만 취하는그런 계율이 있어요. 인도에는 별의별 그런 종교와 별의별 주장과 별의별 사상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또 올바른 소견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개금치견 이라고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를 오둔사(五鈍使)라 하고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이것을 오리사(五利使) 이렇게 부릅니다. 그것이 열 가지 큰 근본 번뇌(根本煩惱)라고 합니다. 그래서 근본 번뇌가 있으면 근본 번뇌를 따라다니는 번뇌가 또 있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따라 다니는 번뇌를 수번뇌 라고 이렇게 부릅니다. 그래서 근본 번뇌(根本煩惱)가 있고 수번뇌(隨煩惱)가 있습니다. 덮어놓고 번뇌 하면은 번뇌로 끝나는데 꼭 오늘 이 시간 이후로 기억해 두세요. 아! 번뇌에도 근본 번뇌가 있고 따라 다니는 수번뇌가 있어. 근본 번뇌는 오둔사와 오리사가 있다.
그 다음에 수번뇌는 스무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은 혹 지말번뇌(枝末煩惱)라 이렇게도 표현하는데, 방일(放逸)은 노는 것 해태(懈怠)는 게으름 불신(不信)은 믿지 않는 것 혼침(婚浸)은 잠을 많이 자는 것도 그것도 번뇌입니다. 이런 저런 잡생각이 막 들고 일어나는 것 그냥 우유부단하고 생각이 아주 산란하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요. 그것이 도거의 번뇌라 이렇게 합니다.
또 무참(無慙) 무괴(無乖) 현재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고 또 과거의 잘못도 뉘우칠 줄 모르고 이것이 무참(無慙) 무괴(無乖)의 번뇌라고 합니다. 또 분(憤)내는 것 또 ‘부(覆)’라고 해서 자기의 잘못을 덮어버리는 것 그리고 남에게 절대 안 보이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요. 분심(憤心)도 가지고 있고 그런 것이 다 번뇌예요.
‘간’ 아낄 간 너무 인색한 거지요. 질(嫉) 질투 아주 생각이 복잡한 것, 뇌(惱), 또 해(害) 해로움을 끼치려는 마음, 꼭 사람들을 해 꼬지 하려고 하는 그런 피해를 주려고 하는 그런 것으로서 아주 재미있어 하고 취미 비슷하게 갖는 그런 사람들도 또 즐거워 하고 적지가 않지요.
그리고 너무 한(恨)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이것도 큰 번뇌입니다. 우리 민족은 한의 민족이다. 이런 표현들을 하는데 그것은 참 좋지 않은 것입니다. 불교적으로 보면은 한이라고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인데 번뇌 속에 들어있습니다. 꼭 끊어야 할 번뇌 속에 한이 들어 있어요. 어떻게 빨리빨리 털어버리고 어떤 희망적이고 밝고 새로운 어떤 삶을 개척을 해야지 그 한을 안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런 삶은 참 곤란한 삶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첨(諂) 아첨 하는 것, 광(狂)은 거짓이고, 교(攪)는 이제 교만과 아울러서 아주 뭐라고 할까 교태부리는 것들 그것도 번뇌에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혼침은 잠자는 것이고, 여기서 수면(睡眠) 하는 것은 말하자 면은 역시 잠인데 정상적으로 잠자는 것 외에 자꾸 조는 것 이런 것들, 그 다음에 뉘우칠 회(悔)자 회 이것도 어떤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좋지만 어떤 회한(悔恨) 한과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열 아홉 개가 되네요. 수번뇌가 열 아홉 가지가 있다 그래서 유식(唯識)이나 구사론(俱舍論) 같은 데서는 이런 것들을 아주 자세하게 분석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번뇌들이 다한 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라 다닐 자격이 있고 부처님의 그런 시봉을 할 자격이 있고 부처님의 천 이백 대중 가운데 들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아야교진여를 소개하면서 또 저 앞에서 대표적인 성문들을 소개하면서 이들은 번뇌가 없는 사람들이야, 뭐 어디서 박사 학위를 받았어 이렇게 표현하고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번뇌가 없는 사람 들이야 이렇게 표현했다고 하는 것이 상당히 돋보이지요.
지금 세존께서 무슨 까닭으로 은근하게 방편을 찬탄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의 얻은 법은 매우 깊어서 이해하기 어려우며, 말씀하시는 취지도 알기 어려워서 모든 성문이나 벽지불로서는 따를 수 없다고 하시는가?
부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그러니까 사리불이 그것을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해탈(解脫)의 이치는 우리들도 그 법을 얻어서 열반에 이르는데, 이제 그 말씀하신 진정한 뜻을 알 수 없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해탈은 우리도 번뇌가 다 사라져서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무엇이 더 이상 있다고 이렇게 부처님이 또 난데없이 그렇게 매우 깊고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고 믿기 어렵다. 너희들에게 이야기 해봐야 이해를 못 할 것이다 그만두자! 이야기 이제 그만두자! 느닷없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느냐 이것이죠.
수 십년을 부처님을 따라 다니면서 정말 하느라고 인생 다 바쳐서 공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와서 그런 태산준령 같은 그런 경지가 또 남아 있다고 이렇게 표현을 하니까, 참으로 평생 따라 다니면서 공부한 성문대중 들은 놀랍고 또 의혹심도 일어날 수 밖에 없지요.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하더라도 해결하고 넘어 가야지 그냥 있을 수는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리불이 대표가 되어서 이것을 부처님께 여쭙게 되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오늘은 교진여 이야기 하고 번뇌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느라고 본문 진도는 많이 나가지 못했습니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아누모다미! _()_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전부 공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연기의 법칙으로 존재하는 것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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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들이 다한 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라 다닐 자격이 있고, 부처님의 그런 시봉을 할 자격이 있고, 부처님의 천 이백 대중 가운데 들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스님! 감사드립니다. _()()()_
五鈍使 ( 貪, 嗔, 癡, 慢, 疑 ) 五利使 ( 身見, 邊見, 邪見, 見取見, 戒禁取見 ) 10가지 근본煩惱가 다한 아라한들이 부처님을 따라 다닐 자격이 있고....._()()()_ 진여혜님 고맙습니다..
근본번뇌. 오둔사 .오리사. 수번뇌. 지말번뇌...큰스님으로 부터 너무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습니다._()()()_ 보명님도 오고 계시겠지요..
근본번뇌. 오둔사. 오리사. 수번뇌. 지말번뇌....큰스님! 감사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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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번뇌 수번뇌.......큰스님 감사드립니다..._()()()_
인간의 삶은 중도적인 삶이고, 또 모든 존재는 중도적인 원리로 존재하고 있다...._()_
번뇌를 다한사람들이 부처님을 따라 다니 자격이 있고 부처님을 시봉할 자격이 있고 부처님의 천 이백 대중 가운데 들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나무관세음보살.. _()()()_
중도적인 삶이 인간으로서 가장 바람직 하고 정상적인 삶이다. 그래서 그 중도를 나는 깨달았노라! 인간의 삶은 중도적인 삶이고, 또 모든 존재는 중도적의 원리로 존재하고 있다.....감사합니다..._()()()_
"쾌락의 삶도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아니고 고행의 삶도 또한 진정한 삶은 아니다. 나는 그대들과 헤어진 이후 보리수 밑에서 7일간 바로 선정에 들어가서 비로소 깨달았는데 중도의 이치를 깨달았노라.” ... _()()()_
중도적인 삶이 인간으로서 가장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삶이다..._()()()_
좋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_()()()_
인간의 삶은 중도적인 삶이고 또 모든 존재는 중도적의 원리로 존재하고 있다... _()()()_
그 중도를 나는 깨달았노라. 인간의 삶은 중도적인 삶이고 또 모든 존재는 중도적의 원리로 존재하고 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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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_()()()_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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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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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최초의 말씀이 ; 나는 중도를 깨달았다.
근본 번뇌(五鈍使) =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 (五利使) =신견(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 ====>지말법회(隨번뇌)=20 隨煩惱 = (放逸), (懈怠), (不信), (婚浸), (無慙), (無乖),,(無慙), (無乖), (憤), (覆), (아낄 간), (嫉), (惱), (害), (恨), (諂), (狂), (攪), (睡眠), (悔)
번뇌... 탐진치만 번뇌가 아니군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초전법륜경--"나는 중도를 깨달았다"
-베나레스 녹야원에서 5 비구를 상대로 한 최초 설법
--中道大宣言
空=緣起=中道
다섯 가지 무거운 번뇌 五鈍使
;탐 진 치 +교만심 慢 +의심 疑
惡見=다섯 가지 날카로운 번뇌 五利社
;身見
;邊見
;邪見
;見取見--나쁜 견해를 옳다고 생각하는 것
;戒禁取見--외도의 계율을 불교의 계율로 생각하는 것
五鈍使+五利使
=10 근본 번뇌
隨煩惱=支末煩惱
;放逸
;懈怠
;불신
;혼침
;도거
;無慙--현재의 잘못을 뉘우 치지 않음
;無乖--과거 잘못을 뉘우치지 않음
;憤
;覆--자기의 잘못을 덮는 것
;간--인색한 것
;嫉
;惱
;害
;恨
;諂
;狂
;攪
;수면
;悔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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