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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라벌고등학교79년졸업 원문보기 글쓴이: 정진호
깜부기의 노래
정곡 이양우
우리네 가난살이 한 때 메밀꽃 마른 대궁은 미처 영글지 못한 설움에 복받쳐 잡초 밭 앉아 우는 노고지리련가,
허기져 현기증을 유발한 긴 흉년은 지새운 밤 울다 지친 어린아이 보릿고개 설움의 孕胎로 깜부기가 되어 까맣게 기억으로 타들었구나,
건너 뜸 애달픈 소쩍새는 귀 먹고 눈 멀은 왕바위 고목에 홀로 앉아 지금도 그 옛 설움 못 다 지운 가난의 노래로 어머니 피를 토 하듯 가슴을 도려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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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부기’를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는 사람도 많다. 당연한 말이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보릿고개를 넘어보지 않은 이들은 ‘깜부기’를 먹을 이유도, 먹어볼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먹는 방법은 간단하다. 보리밭에서 잘 익은 ‘깜부기’를 대궁 채 꺾어 밭두렁으로 갖고 나와 그냥 입에 넣고 쭉 훑어 먹으면 된다. 여기에서 ‘잘 익은 깜부기’란 깜부기가 피어나 새카맣게 되면서 가장 통통할 때를 말한다.
보리깜부기(먹을 수 없는 것)
깜부기를 먹을 때는 기술 껏 먹어야 한다. 잘못 먹으면 우선 입술이 새카맣게 되고, 흰옷이면 옷을 검댕이로 만들 우려가 있다. ‘깜부기’ 주위에 보리수염이 있더라도 이때는 보들보들하기 때문에 그냥 두고, 입을 크게 벌린 뒤 호흡(呼吸)을 중지한 채 ‘깜부기’ 이삭 전체를 입속에 넣는다. 수염을 뜯으면 ‘깜부기’가 일그러져 파손(破損)되기도 하고, 파손되면 옷이나 손이 엉망이 된다.
입속에 넣은 뒤에는 입을 다물고, 이삭 전체에 침을 묻혀야 한다. ‘깜부기’가루가 날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가급적이면 호흡(呼吸)을 멈추거나 약하게 하면서 침을 골고루 묻힌 다음에는 입안에서 쭉 훑어내면 된다. 이때 입속에 있는 깜부기는 침과 믹스가 되는데, 이를 조금씩 삼키면 된다. 호흡을 크게 하면, 목이나 코로 마른 ‘깜부기’ 가루가 들어가 역시 엉망이 된다.
먹는 방법은 이렇다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맛이 어떠냐는 것일 것이다. 맛은 특별하지는 않다. 다소간 고소한 맛이 있기는 한데, 그것이 보리이삭에 핀 곰팡이의 일종(一種)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곰팡이 냄새가 동천을 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냄새가 많이 나는 부분은 뱉어내고, 나머지 부분만 혀끝으로 감식(鑑識)하여 골라 먹으면 된다.
‘보리깜부기’를 먹는 이유는 너무나 배가 고픈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먹을 것이 없을 때 먹기도 하고, 자주 먹다보면 ‘인’이 박혀서 먹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깜부기’ 맛을 제대로 알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깜부기’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깜부기’가 피어난 직후 통통할 때 먹어야 한다.
설익은 ‘깜부기’도 제 맛이 안 나지만, 날짜가 며칠 지나면 바람에 ‘깜부기’가 날아가기도 하고. 햇볕에 말라 거칠어지고 제 맛이 나지도 않는다. ‘보리깜부기’를 실제로 먹었는지, 그 시절 ‘깜부기’를 노래한 시인(詩人)의 깜부기 시(詩)를 증거물(證據物)로 소개한다.
보리깜부기
김순진
봄 가뭄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 삘기 찔레 대신 보리깜부기 먹으며 서로 손가락질 웃어대고 하늘엔 종달이 한 마리 안테나 펴고 중계방송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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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등하굣길에서 간식(間食 ; 점심도시락을 갖고 가지 않기 때문에 주식이기도 했다)으로 즐겨 뽑아 먹었던 깜부기, 사람 머리 위에 새치가 빳빳이 솟아 돋보이듯, 멀리서도 쉽게 찾아지던 그 깜부기를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파일까지 만들어 ‘외동이야기’의 ‘멍석’에까지 올리게 되었다.
‘깜부기’를 먹은 새까만 입, 친구들과 장난치느라 얼굴에 새까맣게 ‘깜부기’로 화장(化粧)을 하고서 허연 이를 드러내고 마주보고 웃던 옛 시절이 주마등(走馬燈)처럼 스쳐 지나간다. ‘깜부기’는 보리에 발병하는 바이러스성 질병(疾病)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것은 지난 1950년대 보릿고개 시절, 등하굣길 학동(學童)들의 멋진 간식이 되었다. 텁텁하면서도 약간은 고소한 맛이 있어 매일 같이 뜯어먹던 그 시절 ‘깜부기’의 맛이 아리듯 머물러 지워지지 않는다. 임인규의 ‘보리깜부기’를 음미한다.
보리깜부기
임인규 보리밭 보리깜부기 함진 애비 수염 검뎅이 순이 얼굴 낯 도깨비 히죽히죽 그래도 좋아! 보리 서리 설익은 보리알갱이 우걱우걱 한 볼때기 가득 오물오물 숯검뎅이 입술 매운 눈물 그렁그렁 보리밭 속 깊이 보리문둥이 얼라 간 빼 먹는다는데 놀란 토끼눈 폴짝 뛰던 검정고무신 흰나비 팔랑팔랑 무명 저고리 지천으로 펼쳐진 보리밭 보리깜부기 하나도 보이지 않고 추억 젖은 촉촉한 오빠 그리움 들린다, 청아한 순이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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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깜부기’를 과연 먹을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이외로 많은데, 구구한 설명보다는 실제적(實際的)인 체험을 권유해 드리고자 한다. 올해로 두 번째 개최하는 ‘김포 대명항 축제’에는 체험행사(體驗行事)로 ‘보리피리불기’와 ‘보리깜부기 까먹기’ 등의 보리밭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금년에는 5월 23일부터 3일간 개최되었는데, 보리깜부기를 먹어볼 의향(意向)이 있는 향우님들은 명년에 개최되는 이 행사에 참가해 보실 것을 권한다.
김포 대명항 축제
옛적 우리들의 선대(先代)들이 ‘보릿고개’에서 보리가 익기 전에 미리 돋아나는 ‘깜부기’로 허기진 배를 달래던 시절을 회상(回想)하게 하여 오늘의 풍족한 삶에 대한 감사(感謝)의 마음을 갖게 하고, 이를 거울삼아 더 부지런하게 생업(生業)에 종사하도록 하자는 취지가 이 프로그램의 목적인 듯하다.
김포 대명항 축제
요즘은 ‘깜부기면’이라는 국수가 등장하기도 했다. ‘깜부기면’은 ‘깜부기’로 만든 것이 아니고, 유탕처리하지 않은 꼬불거리는 모양의 국수로 종이컵에 뜨거운 물만 부어 바로 먹을 수 있는 제품인데, 오리농쌀의 함유량(含有量)을 90%까지 높여 국내에서 생산되는 쌀국수 제품 중 쌀 함유량이 가장 높다고 한다. ‘깜부기’라는 이름을 붙여 어린이들에게는 호기심을, 어른들에게는 옛적 향수(鄕首)를 불러일으켜 매상(買上)을 올려보자는 상술(商術)인 듯하다.
깜부기면
옛적에는 보리깜부기로 눈썹 화장(化粧)을 하기도 했었다. 뽕 따 갖고 오던 처녀들이 동네 머슴아들 어울려있는 정자나무 밑이나 두레꾼들이 어울려 쉬고 있는 논둑을 지나가게 되면 그곳을 지나기에 앞서 보리밭에 들어가 ‘보리깜부기’를 따다가 고인 냇물에 얼굴을 비추고 눈썹을 그렸다.
예전 우리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정경(情景)이었다. ‘보리깜부기’는 이처럼 시골처녀의 즉석 눈 화장품(化粧品)이 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 지방을 비롯하여 삼남지방에 ‘깜부기 미묵(眉墨)’을 노래한 동요(童謠)가 있기도 했었다. 당시의 동요를 소개한다.
비야 비야 오지마라 우리 엄마 빨래 걱정
비야 비야 오지마라 우리 아빠 물꼬 걱정
비야 비야 오지마라 우리 누나 눈썹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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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부기’얘기를 시작하기는 했는데, 신통한 추억(追憶)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어린 시절, 필자가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에 다니던 시절, 귀가(歸家) 길에 ‘보리깜부기’로 허기를 달래던 기억만 자꾸 떠오른다. 이월순의 ‘깜부기 봄피리’를 음미하면서 파일을 접는다.
깜부기 봄 피리
이월순
길가 파란 보리밭 봄바람에 술렁일 때 못난이 새까만 깜부기 함께 술렁인다.
주인에게 들킬세라 허리 꾸푸려 슥삭 깡충 까투리 기듯 들어간 아이 깜부기 몇 폭 뽑아들고 깡충 후다닥 뛰어나온다.
필통 열어 칼 펴들고 봄보리 깜부기 피리 배 갈라 침 발라 넣고, 살포시 힘주어 불어보는 깜부기 봄 피리
봄보리 깜부기 피리 소리에 파란 들녘 아지랑이 숨바꼭질하고 술렁이는 파란 보릿대 사이로 꾀꼬리 태양 빛 춤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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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깜부기 보릿대로 피리를 만드는 것은 ‘깜부기’가 다른 보리포기에 전염(傳染)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깜부기병’에 걸리지 않은 정상적(正常的)인 보릿대로 피리를 만들 경우 그 보릿대의 보리이삭은 결실(結實)을 하지 못하여 손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어린이들은 이토록 마음 씀씀이가 깊었고, 농사(農事)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출처 : 이용우 http://cafe.daum.net/woegongseoul
첫댓글 인생100년에 50이 조금넘은 저로서도 님의 글을보고 깜짝놀랬습니다. 저도 삼남지방의 농촌에서 학교다니며 배고픈시절을 보냈지만, 깜부기간식은 안먹어봤기에 보리깜부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귀한자료 고맙습니다. 풍요로운 이시대의 젊은이들이 꼭 한번쯤은 읽어야 될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