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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道歌- 제9강 (降龍鉢解虎錫 ~) 2006년 3월 15일
반갑습니다. 3월 15일 염화실 인터넷 법문 방송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증도가 降龍鉢解虎錫(항룡발해호석) 兩鈷金環鳴歷歷(양고금환명역력)-55 이라고 하는 곳부터 할 차례입니다.
스님들이 사용하는 밥그릇이 발우이고, 또 어디 다닐 때 의례히 짚고 다니게 돼 있는, 그런 육환장 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은 육환장 짚고 다니는 분들을 보기가 어려운데,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는 그것이 걸어 다니지도 않고, 차를 타고 다니니까 차에 넣을 수도 없고, 여러 가지 거추장스러워서 그래서 짚지를 않는가 본데, 오늘은 발우와 육환장이야기가 처음부터 시작이 됩니다.
降龍鉢(항룡발) 발우는 그냥 발우가 아니고, 용을 항복받은 발우다. 물론 발우라고 하는 밥을 담아 먹는 발우지요.
이 발우도 부처님 당시 때는 하나를 가지고, 다 썼습니다.
하나에 밥도 담고 반찬도 담고 그랬지요.
지금도 태국 같은 그 남방불교에는 탁발을 나가는데 발우가 아주 커요. 우리나라 발우보다도 아주 큰데, 거기에 밥도 담고 반찬도 담고 그렇게 탁발을 그렇게 합니다.
이쪽에서는 또 이쪽의 그 생활습관에 맞추어서 변형을 좀 해서 발우를 네 개를 사용하지요.
그래서 물 담는 그릇. 또 반찬 담는 그릇. 국 담는 그릇. 밥 담는 그릇. 이렇게 네 개를 펼쳐놓고, 그렇게 공양을 합니다. 그런데 그 발우라고 하는 것이 단순하게, 여기의 말씀은 공양을 하는데만 사용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제 아주 부처님의 깨달음의 법, 또는 불법을 전하는 하나의 방편으로도 쓰였다. 이런 의미가 있어요.
용을 항복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그 보통 불자님들이 잘 아시는 소위 그 삼가섭이 있지요?
뭐 우르빌라 가섭. 나디가섭. 가야가섭. 그렇게 삼가섭이 있는데 마하가섭이라고 하는 제1조 마하가섭하고는 관계가 없는 三迦葉(삼가섭)이 있습니다.
그 삼가섭이 본래는 火龍外道(화룡외도). 불을 섬기는 외도였다. 그래요. 본래는 어떤 기록에는 보면, 그 부처님께 출가를 했다가 다시 화룡외도를 섬기게 됐다. 그런데 부처님이 발우를 가지고 불을 뿜는 용을 발우에다가 잡아넣어서, 꼼짝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부처님께 돌아오게 됐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발우가 부처님의 법력을 과시하기도 하는 그런 법을 펴는 뭐 방편으로도 쓰이는 도구다. 이런 의미지요.
이 발우를 應量器(응양기) 라 그렇게도 해요. [양에 맞는 그릇] 이런 뜻인데, 그 워낙 크다 보니까 많이 자시는 분은 많이 담을 수도 있고, 적게 먹는 사람들은 적게 담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이제 아예 그릇이 크니까, 자유자재로 그렇게 쓸 수 있다. 그래서 應量器다. 자기 양만큼 덜어 먹는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제 사찰에서는 음식을 받으면 절대 남기지 않도록 되어 있고, 그 먹을 만치만 자기가 덜어서 먹도록 그렇게 되어 있지요.
뭐 요즘 소위 뷔페라고 하는 것이, 우리 스님들 발우공양이 뷔페의 원조라고 말할 수가 있어요.
3000년 전부터 우리는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그리고 이제 解虎錫(해호석)이라고 해서, 호랑이의 싸움을 말린 석장. 주장자. 이 錫 은 석장 이라고 해서 주장자라고 하는 그런 뜻인데, 옛날에 스님들이 짚고 다니던 그런 주장자입니다.
이것도 僧稠(승조) 스님 이라고 하는 그이가 두 마리의 호랑이가 아주 치열하게 싸우는데 이 주장자로써, 말하자면 호랑이두 마리의 싸움을 말렸다. 그것이 法力(법력)이라는 것이지요.
法力으로써 호랑이의 싸움까지 말린 그런 연유가 있는 주장자다.
발우도 그런 연유를 가지고 있는 발우고, 주장자도 그렇게 뭐 모양내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연유가 깊은, 또 법력이 담겨 있는 주장자다. 그런 뜻입니다. 그 주장자를 두고 말할 것 같으면, 兩鈷金環鳴歷歷(양고금환명역력) 이라고 그랬어요.
주장자 생김새가 어떻게 생겼는고 하니까, 중앙에는 浮屠(부도)처럼 그렇게 올라와있고, 그 윗부분에 양쪽으로 두 고리가 있는데 그 고리는 다리미 鈷(고)자인데, 금강저모양의 어떤 그 다리미를 이렇게 만들고 거기에 다시 고리 세 개씩, 한 쪽에 세 개씩 그렇게 걸었습니다.
그래 두 다리미를 만들고 한 다리미에 고리 세 개를 걸어서, 결국은 六環杖(육환장). 여섯 고리의 주장자. 이런 뜻이지요.
그래서 兩鈷에 여섯 고리가 세 고리씩, 쩌렁쩌렁 歷歷(역력)하게 울린다. 이런 뜻인데, 그것이 다 상징하는 것이 있지요. 두 金剛杵(금강저) 제가 다리미라고 그렇게 했는데, 金剛杵라는 뜻도 돼요.
금강저 모양의 양쪽 두 개는, 眞諦(진제). 俗諦(속제). 出世間(출세간)의 어떤 이치와 世間(세간)의 이치.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진제와 속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眞諦와 俗諦가 양쪽에 균형 잡혀서 어떤 조화를 이루는 것. 그러니까 주장자 하나로서 결국은 불교를 다 표현하고 있다. 이런 그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장자를 짚고 다니므로 해서, 불교의 가르침을 한 순간도 잊지 말라 하는 그런 의미이지요.
그 중에서도 특히 兩鈷(양고) 라고 하는 그 양쪽으로 금강저 두 개가 있는 것은, 진제와 속제. 유와 무. 左(좌)와 右(우) 남과 여. 있음과 없음. 有와 空(공) 이런 모든 상대적인 관계를 두 금강저가 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이 양쪽에 있음으로 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요.
그래서 속제. 세속적인 것에 너무 떨어져도 그것은 치우친 것이고, 출세간적인 것에 너무 떨어져도 그것도 역시 치우친 것입니다. 출세간에 있으면서 세간을, 말하자면 다 수용하고 또 세간에 있으면서 출세간적인 것도 다 수용하는 것.
남과 여의 관계도 이제 그렇고, 안팎의 관계도 그렇고, 좌우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뭐 오른손은 그, 말하자면 쓰는 용도가 물론 있지요. 그렇지만 바쁘면 오른손도 왼손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이고, 또 왼손이 쓰이는 용도가 있습니다마는, 또 뭐 경우에 따라서는 왼손도 오른손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이고요.
남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남자하는 일이 있고, 여자 하는 일이 대체적으로 나누어져있지만, 그래도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엇바꾸어가면서 얼마든지 그 균형과 조화를 이뤄 가면서,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는 것.
이것이 세상사이고 또 그러한 이치를 우리가 알고 제대로 사는 것. 이것이 중도적인 삶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兩鈷(양고) 라고 하는 것은 中道(중도)를 표현하는 것이지요. 중도란 어디에 치우치지 않는 것.
상반된 두 가지 입장을 잘 조화롭게 우리가 균형 잡아서 살아갈 줄 아는 것. 이걸 의미하는 것이고, 세 고리씩, 세 고리씩 그것은 육바라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이란 뭐 두 말할 나위 없이, 그 우리 불교인들의 일상생활에 실천해야할 덕목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이 육바라밀 그 속에는 참선도 들어있고 온갖 것이 다 들어있지요.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육바라밀을 통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불자들의 삶의 한 모습일 뿐입니다. 사는데 이 육바라밀의 덕목을 실천 하면서 산다. 그러면서 이제 진제와 속제의 그 균형을 잡아가면서, 남자와 여자의 균형을 잡고, 있음과 없음의 균형을 잡고, 무상과 실상의 균형을 잡고, 그런 조화를 잘 이해하면서 거기에 그 물 흐르듯이, 아주 순리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이상적인 삶! 이것을 육환장 하나에 다 담고 있는 것이지요.
참 그 멋지지요.
이 불교에는 뭐 무슨 할을 한번 하는데도 그 불교적인 그런 어떤 깨달음의 의미가 그 할 속에 다 담겨있고요.
손가락을 한 번 세우는데도 역시 불교의 오묘한 이치가 다 담겨있고, 뭐 연꽃 한 송이만 가지고 우리가 보더라도, 거기도 역시 불교적인 그런 의미가 다 담겨있고, 스님들이 짚고 다니는 육환장. 이거 하나 만으로도 그 불교의 의미가 잘 담겨져 있는데, 특히 그 兩鈷(양고) 라고 하는 것은 두 금강저라고 하는 것이 아주 참 의미심장하고, 거기에 또 우리가 그 상반된 두 가지를 조화롭게 잘 엮어가면서, 이 육바라밀을 실천하면서 살아간다 하는 것! 이겁니다.
그 이런 것을 보더라도 이 육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얻어 내자고하는 그런 수단과 목적이 아니라, 바로 삶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은 바로, 불법을 전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가 됩니다. 완전한 불법을 전하는 것이다.
뭐 깃발에다 경전을 새겨서 바람에 펄럭이게 하는, 그런 나라도 있지요. 그것 보다는 육환장을 이렇게 짚고 소리를 냄으로 해서, 거기에 진제와 속제! 그래서 중도가 되는 것! 그리고 육바라밀을 그렇게 상징하는 그런 육환장이 훨씬 의미가 들어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입니다.
그래서 不是標形虛事持(불시표형허사지)라 이런 것. 발우나 육환장 이것이 형상을 표하는 헛되게 가지는 그런 일이, 헛된 일로 가지는 것이 아니다. 모양만, 다시 말해서 뭐 폼 잡자고 가지고 다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슨 “스님임네” 하고 이렇게 모양 갖추기 위해서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如來寶杖親蹤跡(여래보장친종적)이로다-56 여래의 보배! 그 주장자이고 그것은 부처님이 친히, 몸소, 말하자면 자취를 보이신, 본보기를 보이신 그런 일이다.
여래의 보배 주장자를 친히 본받음이다. 친히 蹤跡을 보였다.
그것은 결국은 부처님의 삶은 중도와 육바라밀의 삶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지요.
여기의 이야기는 중도와 육바라밀의 삶을 불교적 삶이다.
그것은 주장자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뜻입니다.
참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고, 주장자 하나가 멋지지요.
이 시대는 좀 그런 주장자를 짚고 다니고 하기는 좀 번거롭기는 한데, 최소한도 이런 것을 잘 만들어 가지고 사는 방에다 이렇게 세워 놓기도 하고, 마루에다 이렇게 걸어 놓기도 하는 그런 정도는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不求眞不斷妄(불구진부단망) 了知二法空無相(요지이법공무상)이라-57 眞도 구하지 아니하고, 진리도 구하지 아니하고, 망상도 끊지 않는다.
저 앞에 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1 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지요? 망상을 제 하지도 아니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아니한다.
여기 不求眞 이라고 하는 말은 똑 같지요. 不斷妄 이라고 하는 것도 不除妄. 제할 除(제)자나, 끊을 斷(단)자나 똑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앞뒤로 그저 말만 바꿔놨지요.
不除妄想不求眞 不求眞不斷妄. 똑 같은 뜻이지요.
了知二法空無相(요지이법공무상)이라 그러니까 끊지 않고 제하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고 제거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 調和(조화)지요. 그것이 中道(중도)입니다.
그 육환장 이야기를 했는데, 양쪽으로 두 금강저가 늘어뜨려져 있고, 거기서 여섯 개의 고리가 나있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 두 금강저라고 하는 것이, 眞도 되고 妄도 되고요.
그 다음 진제가 되고 속제가 되고, 남자가 되고 여자가 되고, 좌가 되고 우가 되고, 안이 되고 밖이 되고, 그런 이 세상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상대적 관계를 그렇게 두 금강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조화가 바로 중도인 것이고, 이상적인 삶인 것이고, 큰 도가 되는 것이고, 지극한 도가 되는 것이고, 證道(증도)할 때 도를 깨달은 것! 바로 그 경지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래서 了知二法空無相(요지이법공무상)이라 이 二法. 眞과妄. 또 상대적인 모든 것. 그 두 가지 법을 了知 하는 것이 공하여 무상함 이다. 무상함을 알았다. 요지 했다 그래요.
二法이 공하여 형상이 없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진제. 속제. 진과 망. 좌 우 이렇게 하지만 고정된 그런 형상은 없지요. 두 가지 법이 공하여 형상이 없는 줄을 분명히 알았도다. 了知 분명히 알았도다. 형상이 없으면서 또 두 기지가 또 각자의 역할을 하고,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또 분명히 나눠져서 독립된 존재로서 또,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중도적인 삶입니다.
뭐 남자네 하고 또는 여자네 하고, 그렇게 고정된 고집을 부리거나, 고정된 어떤 그 위치를 취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상이 되어 버리지요. 無相(무상)이 아니라 상이 되어버립니다.
본래 없는데, 없는데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이 착각을 해가지고 그렇게 고집을 세우는 것이지요.
그 그러면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화가 깨지는 것이지요. 그 중도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본래 중도로 존재하는데, 그 존재 원리에 맞게 살아라 하는 것이 불교지요.
二法이, 상대적인 두 가지 법이 공하여 고정된 형상이 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無相無空無不空(무상무공무불공)이여 卽時如來眞實相(즉시여래진실상)이라-58 이랬지요.
고정된 상도 없고 또 공한 것도 아니고, 또 공하지 아니함도 아니다. 그래 이제 어떤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본 사람은 이렇게 표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이 그 우리 상식으로는 안 맞는 것 같지만, 이것이 맞는 말입니다. 相도 없고 空도 없고...
뭐 상이 없으면 공이라야 된다고, 이렇게 우리가 봐야 되겠지요. 또 공이 없으면 분명히 상이라고 봐야 된다. 이렇게 생각 하겠지만, 그게 아니지요.
상이 없으면서 공도 없고, 또 공하지 아니함도 없다. 이것이 불교적 논리이고 중도를 설명하는, 다시 말해 진리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어요. 이런 것을 우리가 익숙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 그것이 여래의 진실상이다. 중도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중도가 여래예요. 여래가 중도이고...
그래 이 세상은 뭐 중도의 이치에서, 중도에서 벗어난 게 아무것도 없다. 이러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면 곧 여래에서 벗어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여래이고, 여래는 바로 중도의 원리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서 이렇게 길이 엇갈려 가지고, 그 존재의 원리대로 살지를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다시 그렇게 이런 이치를 깨달은 분들이 우리에게 일러 줬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알고 본래로 그렇게 존재하는 원리대로 돌아가서 살자! 이것이지요.
그래서 여래의 진실상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여래의 참모습 이라고 그래 버렸습니다.
뭐 달리 다른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뭐 상도 없고 공도 없고, 공하지 아니함도 없다. 이것이 중도지요.
이것은 무엇이 그러냐?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렇고 육신이 그렇고 마음이 그렇고, 우리 인간의 일체 감정이 그렇고, 일체가 다 그렇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相이라고 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없지 아니하다고도 할 수 없고, 無相無空無不空(무상무공무불공). 그 중도를 아주 잘 설명한 간단한 말이고, 또 이것은 곧 여래를 말한 것이고, 여래는 진리를 말한 것이고, 여래니 진리니 중도니 하는 것은 곧 모든 존재의 존재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無相無空無不空. 모든 것이 그렇게 존재해요. 지금 제가 말하는 말소리가 그렇고, 또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컴퓨터가 그렇고, 내 육신이 그렇고, 내 마음이 그렇고, 마음을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 온갖 좋고 나쁜 감정이 그렇고, 미운감정들, 좋은 감정들, 일체 감정들이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전부 그 원리로 존재한다. 그래 이것을 그대로 우리가 마음에 수용을 하며는, 바로 깨달은 사람이지요.
그 영가 스님 같은 경우는 깨닫고 나니까, 전부 이렇게 존재하니 그 존재원리대로 우리에게 일러 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心鏡明鑑無碍(심경명감무애)하야 마음의 거울은 밝고, 또 밝으니까 비치는 것이 걸림이 없으니, 廓然瑩徹周沙界(확연영철주사계)로다-59 확연히 환하게 이 말이지요. 환연하게 瑩徹. 빛나고 빛이 사무쳐서 사계에 두루 하더라. 확연히 밝게 사무쳐서 사계에 두루 하더라.
모래수와 같이 많고 많은,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이 많고많은 세계에 두루 하더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이제 영가 스님 같이 깨달으신 분의, 마음상태지요. 마음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心鏡明. 마음의 거울은 환하게 밝고, 밝으니까 뭐 비추는데 어디에도 못 비출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해가 뜨면 어떻습니까? 빛이 있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밝지마는, 빛이 없는 곳까지도 환하게 밝지요.
방에 뭐 빛은 안 들어왔어도, 문을 통해서 환하지 않습니까? 그 빛이 들어온 것이지요.
그것이 뭡니까? 瑩徹(영철)이지요. 환하게 瑩徹! 밝게 사무쳐서 사계에 두루 한다.
그렇듯이 마음이 어디에 이르러가는, 집중하는 곳만 밝은 것이 아니고, 마음이 어디에 집중하지 않더라도, 모든 존재의 실상을 환하게, 이치를 환하게 꿰뚫어 알고 있다. 이것이지요. 그러니까 마음을 써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안 써도 저절로 그렇게 알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한 것을 이렇게, 그러한 영가스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요.
그래서, 萬象森羅影現中(만상삼라영현중)이요 一顆圓光非內外(일과원광비내외)로다-60
어떤 데는, 一顆圓明非內外(일과원명비내외)라. 이렇게 써진데도 있는데 光(광)자가 더 좋지요.
萬象森羅. 森羅萬象이라고도 하고, 萬象森羅 라고도 하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것이 影現中이라. 그림자. 그 가운데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가운데에 그림자로 나타난다.
우리는 전부 하나하나 그저 걸리지요. 우리 안목에는 전부 그대로 실재하는 거예요.
그 전부 눈을 찔러오고, 귀를 찔러오고, 일체가 걸리고, 그 뭐 마음에 드는 것은 금방 좋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싫고 일일이 다 걸립니다. 그림자가 아니에요.
이 영가 스님의 입장에 있어서는 우리마음 가운데, 中자는 體中(체중)이라 해도 좋고, 心中(심중)이라 해도 좋고 그런데, 그 내 마음 가운데 그림자처럼 나타나있다.
모든 존재가, 세상에 일어난 사건들 까지도 그림자로 타나나 있다.
얼마나 가볍겠습니까? 얼마나 쉽겠습니까? 살아가는데...
그림자인데요. 그거 뭐... 그림자 이렇게 드리우면 거기 지나가는데 하나도... 예를 들어서 아주 창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더라도, 그 그림자 앞을 지나가고 그림자를 지나가는데 뭐 창에 찔립니까? 뭐 어쩝니까? 전혀 창하고 관계없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또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그 사건들. 또 내 주변에 내가 앓고 있는 그런 일체 인생사들. 이런 것들이 그렇게 그림자처럼 나타나 보인다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가볍고요.
세상사가 전부 그림자이고, 그렇다면 나도 또한 그림자일 수밖에 없지요.
그림자가 그림자를 만났으니 어떻게 보면 허황한 것 같지만, 참 그, 그 때야말로 비로소 사는 맛이 있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집착하고 걸려가지고, 처처에 걸리지요.
곳곳에 일마다 걸리고, 일마다 가슴앓이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그럴 수 있었던 것은, 一顆圓光(일과원광)이 非內外(비내외)로다 한 덩어리 아주 원만한 광명이 있는데, 그것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밖에 있는 것도 아니요. 內外가 아니다 이것이지요.
몸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제 이것을 마음을, 그 뭐 아예 한 물건이라 하든지 아예 쉽게 우리가 마음이라고 해버리지요. 마음이 맞지요. 또...
능엄경에서 이제 부처님과 아난존자가 七處傳心(칠처전심) 이야기를 하지요?
일곱 곳에서 마음을 밝혀내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아란존자가 탁발하러 갔다가 마등가 여에게 유혹을 당해 가지고서 잘못될 뻔했는데, 부처님이 그것을 아시고 문수보살을 시켜서 능엄주를 가져가서 주문을 외워서, 구제해 오지요. 그러면서 부처님이 따지고 묻습니다.
“넌 도대체 어떻게 왜 출가를 했으며, 출가를 한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이렇게 하니까,
“나는 부처님의 그 훌륭한 모습을 보고, 너무 그 훌륭한 모습에 감동이 되어서 출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을 봤다니 무엇이 봤느냐?” 이래요. 그렇게 질문을 하니까 아난존자가 있다가,
“눈이 보고 마음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래 네가 대답 잘 했다.” 이러면서 “눈이 봤다고 하자. 과연 눈이 보는 거냐?”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따져 들어가게 되지요. 그래서 나중에 “마음이 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됐는데,
“그럼 마음이 어디에 있는데 보느냐? 보았다고 하느냐?” 하니까 “안에 있습니다.” 그래요. 얼른 생각에 몸 안에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지요.
그래 안에 있다고 하니까 그걸 또 꼬투리를 잡고 부처님이 하나하나 분석해냅니다. 그 분석해 내는데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음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또 “밖에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곱 곳에 있다고 이렇게 하나하나 지적해 가다가 결국은 일곱 곳에도 있지 아니한 것으로 그렇게 이야기가 돼서, 뭐 어디에 있다 라고도 말할 수도 없고, 어디에 없다 라고도 말할 수도 없는, 그런 이론이 전개되는 내용 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非內外.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그러면서 안과 바깥을 다 포함 하고 있지요.
그런 아주 신기한 물건이 우리에게 있고, 그 신기함이, 신비하고도 신기한 그것이 참 나이고, 나의 주이공이고 나의 참 생명입니다. 그 외의 것은 뭐 일체 것이, 일체 것이 다 그야말로 萬象森羅影現中(만상삼라영현중)이지요. 그 마음 가운데 一顆圓光(일과원광)가운데, 그림자처럼 스쳐가고, 나타났다가 스쳐가는 그런 일들이다.
참 이, 짧은 글인데도 아주 그 의미심장하고요. 선사들의 이런 그 마음먹고 지은 詩(시)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의미심장하고, 많은 뜻이 그렇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은 참, 읽을수록 그 맛이 우러나고, 또 제가 이해한 만치 설명을 드리지마는, 또 이해를 얼마나 했겠으며 설명을 또 얼마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자꾸 읽고,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듣고, 내 어떤 인생경험을 거기서 투여를 해서, 거기서 또 이제 각자 자기만의 그 맛과 향을 거기서 느끼고, 맛보아야 되지 않을까? 뭐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豁達空撥因果(활달공발인과) 茫茫蕩蕩招殃禍(망망탕탕초앙화)라-61 그랬어요.
여기까지 설명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럼 뭐 인과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뭐 萬象森羅(만상삼라)가 影現中(영현중)이라. 마음 가운데 그림자처럼 나타난 것이다. 그랬고, 無相無空無不空(무상무공무불공)이다. 모든 존재가 無相無空無不空이다. 相도 없고 空도 없고 空하지 아니함도 없다. 그것이 여래이고, 여래의 진실상이고. 그것이 중도이고, 그것이 도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놓으니까, 그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그 현상은 전부 연기로 되어 있고, 인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인과도 없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이는 것이지요.
그 늘 중도 이야기를 할 때, 어디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래 인과가 없다고만 이렇게 무시해서도 그것도 안 되고, 또 꼭 그것이 있다고만 그렇게 고집해도, 인과를 초월한 그 중도의 경지를 우리가 모르는 것이지요.
그 있음과 없음의 중도적 이치를, 참 어떻게 우리가 마음속에 잘 정리하고, 또 그것을 내 어떤 견해로, 내 인생의 어떤 안목으로 그렇게 정리를 해 둘까? 하는 것. 참 대단히 중요한 문제거든요.
여기 영가스님은, 豁達空撥因果(활달공발인과) 활달하게 텅 비어 가지고 없다고 해서 인과를 무시한다.
撥자는 쓸어버릴 발 자인데, 인과를 쓸어버린다. 무시해 버린다. 이 말입니다.
활달히 공하다고 해가지고서 인과를 무시해 버려서, 인과를 무시 해버리며는, 豁達空撥因果 하며는, 茫茫蕩蕩招殃禍(망망탕탕초앙화)라 망망하고 탕탕해서, 그러니까 아득하고 아주 텅 비어서 앙화를 초래한다. 이 말입니다.
인과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렇다고 크게 인과에만 매달릴 것은 아니로되, 또 인과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이야기지요.
인과를 없다고 무시해 버리고 하며는, 茫茫하고 蕩蕩해서殃禍를 불러들인다. 그럼 뭐 걷잡을 수 없는 것이지요.
자기가 지어놓은 인과가 어디 가서 어떻게 돌아오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재앙을 만나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棄有著空(기유착공)도 病亦然(병역연)이니 還如避溺而投火(환여피익이투화)라-62
인과가 있다 없다 하는 것. 이것도 有를 버리고, 있음을 버리고 없는데 집착하면 그 병이 보통이 아니에요.
또 없는 것을 버리고 있는 데만 집착하여도 그것도 보통 병이 아니고요.
글쎄요. 이런 이야기 익숙하지 않고, 사유가 미쳐 이르지 못한 분들은, 그 참 알쏭달쏭 하게 들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것이 이러한 가르침이 아주 제대로 된 가르침이고, 전혀 방편이 없고 그대로 직설로 그 이치를 설명한 것입니다. 정말 卽說呪曰(즉설주왈)이지요.
그러니까 인과문제라든지, 존재의 문제라든지 이것을 유를 버리고, 공을 집착할 것 같으면 그 병도 또한 똑같다.
또 공을 버리고 유에 집착해도 역시 그것도 똑같은 병이다. 예컨대 還如避溺而投火(환여피익이투화)라 그랬어요.
도리어 물 속에 빠지는 것을 피해서,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그러니까 물 속에 빠지는 것도 문제고요. 불 속에 타는 것도 문제입니다.
다 죽는 것이지요. 치우치면 죽는 것입니다. 치우치면 재앙 이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경전이나 조사스님 어록이 끊임없이 中道(중도). 中道 中道를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 겁니다.
본래 이치가 그렇게 치우치지 않도록, 치우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치우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람들도 본래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데, 뭐 이것저것 살아오면서 그 누적된 그런 경험과 지식과 쓰잘데 없는, 자기의 그 아집과 이런 것들이, 또 어디서 뭐 어디 한 마디 딱 들었거나, 자기가 어떤 비정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자기의 어떤 관점을 이루어요.
그것이 자기의 잣대에만 들이대는 틀이 되어 버린다고요. 그래서 어디 가도 그저 그런 줄로 아는 것입니다. 어디 가도 그런 줄로 아는 거라...
그런 것은 아니지요. 상황 따라서 늘 변하게 마련인 것이고, 예를 들어서 뭐 물이 끓고 하는 문제도, 그 고산지대에는 가면 백도가 안 되어도 끓지 않습니까?
예컨대 그런 거와 같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사물들은, 어디에도 그렇게 우리가 치우쳐서 생각할 일이 아니다. 또 그렇게 고정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그 실상을 그 有와 無가 그것이 共存(공존)하고 있다고 하는 그 實相(실상)을 바로 보라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유와 무. 있음과 없음에 조화를 이루어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 인과 문제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눈앞에 있는 일체 현상들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 소중한 인생을 살면서 물에 빠져도 안 되고, 불에 타도 안 되겠지요.
우리가 어디에도 치우치는 것은,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참, 명확하지요? 대단한 가르침입니다.
이 영가 스님의 이런 가르침은요. 정말 아주 훌륭한 가르침이지요.
우리가 본래 치우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치우치기를 좋아하게 돼있으니, 치우치고 사니 제발 치우치지 말고 中道의 원리로 살라. 그것이 여래이고, 그것이 도이고, 그것이 말하자면 불교의 이상이다. 이상적인 삶이다. 뭐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 증도가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기록: 수경심. 정리: 대원성.
첫댓글 스님의 은혜가 하늘 같습니다. 미륵골님 ! 감사합니다._()()()_
큰스님! 감사 합니다. 미륵골님 고맙 습니다. 어제 우리 현진이 학교 가느라 못들었는데 ......감사히 듣고 있습니다.
바루는 용을 항복받는 바루며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방편으로 쓰였다.주장자 중앙에는 부도처럼 올라와 있고 윗부분 양쪽에 2개의 고리가 있으며 한쪽에 3개의 고리를 걸어서 6개 고리의 주장자가 되는데 이것을 육환장이라 한다.兩鈷(진제 속제,유 무,남 여)는 중도를 표현한 것이고 육바라밀을 실천하면서 살라는
뜻이다.바루나 육환장이 형상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여래의 보배 주장자로 부처님이 몸소 자취를 보이신 바다.부처님의 삶은 중도와 육바라밀의 삶이고 그것은 주장자 하나에 다 표현되어 있다.두가지 법이 空하여 고정된 형상이 없는 줄을 분명히 알았다.고정된 相도 없고 空한것도 아니고 空하지 아니함도 아니다.
(진리,중도).이것이 여래의 진실상이다.마음의 거울은 밝고 비치는 것이 걸림이 없으니 확연하게 빛이 사무쳐서 沙界에 두루하다.삼라만상이 내 마음 가운데 그림자처럼 나타난다.한덩어리(마음)의 원만한 光明이 있는데 그것은 內外에 있는게 아니다.활발하게 텅비었다고 해서 因果를 무시하면 아득해서 殃禍를 초래한다.
因果,있다 없다하는것(존재의 문제),有를 버리고 空에 집착하는것,空을 버리고 有에 집착하는것도 똑같은 병이다.도리어 물 속에 빠지는 것을 피해서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_()()()_ 들을수록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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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와 육바라밀의 삶이 불교적 삶이다...여래의 진실한 모습...고맙습니다. _()()()_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어디에도 치우쳐서 생각할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고정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실상(유.무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보라는 것이다...큰스님 감사합니다._()()()_미륵골님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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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_()()()_
감사합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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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절도 놓칠 수 없는 말씀들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_()()()_
萬象森羅影現中 一顆圓光非內外
了知二法空無相
여래가 중도이고 이 세상은 중도의 이치(존재의 이치)에서 벗어난게 없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여래다
치우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치우쳐서 산다. 물에 빠지고 불에 타는 삶을 살것인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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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萬象森羅影現中(만상삼라영현중)이요 一顆圓光非內外(일과원광비내외)로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 가운데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한 덩어리 아주 원만한 광명이 있는데, 그것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요, 밖에 있는 것도 아니요. 內外가 아니다... _()()()_
中道...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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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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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還如避溺而投火(환여피익이투화)라
도리어 물 속에 빠지는 것을 피해서,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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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