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교소식 제 9 호 ♧
변화해가는 인도 땅
정 호 진(인도농업선교사, 생명살림의 농부목사, 우리의학연구가) 2002 년 12 월 9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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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저의 인도선교를 위해 기도와 사랑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도우시는 교회들과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전합니다.
지난 두달동안 무척 바쁜 날들을 보냈습니다 . 농촌선교 현장을 탐방하기도 했고, 제 선교사 파송예배로 인해 급히 한 달 동안 한국을 다녀와야 하기도 했으며, 돌아오자 마자 국제농촌교회연대 회의 참석(8일간)과 한국에서온 방문팀들을 연이어 맞이하느라 거의 제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간의 활동과 변화를 보고드립니다. 기쁘게 읽어주시고 위하는 마음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선교현장 탐방
지난 10월 2일부터 6일까지 타밀라두주에 있는 3개교구의 농민선교현장을 탐방했습니다. 제가 사역하고 있는 벨로르교구의 카삼농업선교센타는 남인도 4개주 21개교구전체를 위한 교육센타이자 시범농장과 연구소적인 역할을 하게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교구를 위한 교육을 이곳에서만 하려고 해서는 오고가는 비용이 너무나 많이 들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각교구에서 골라뽑은 핵심지도력들만을 대상으로 년간 4차례의 교육만을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그 외의 교육은 각 교구 차원에서 1년에 한차례씩 해나가기로 하고 각 교구마다 시범농장과 교육센타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을 선정하여 집중적인 개발을 해가기로 이곳 인도교회와 협의를 했습니다. 따라서 각교구마다 순회하며 비숍이 제시하는 농장 1-2곳 정도를 방문하여 현장조사를 하고 과연 그런 교육이 될만한 장소인지를 확인하고 협의를 하는 탐방이었습니다. 이곳 농장과 다른 21곳의 농장이 다 건설되어 지도력교육 4회(7-10일), 교구차원의 교육 21회(3-4일)를 매년 다 치러내자면 만만치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잘만 되면 그야말로 남인도 전역에 21개의 멋진 시범농장과 교육센타가 생기고 많은 지도력을 배출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획기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남인도교단 달릿선교국에서 보낸 공문에 따라 이곳 카삼농업선교센타 산카르(Samuel Sankar)원장과 제가 타밀라두주의 코임바토르교구와 띠루나벨리교구, 마두라이교구 세 곳을 방문하였습니다. 승용차 한 대를 대절하여 떠난 길이었는데 첫 번째 교구에 도착하는 데도 7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교구 사무실에서 잠시 휴식한 후 다시 현장까지 보통 3-5시간이 걸리고, 다시 다른 교구로 이동하는 데 7-8시간씩 걸리는 장거리 이동이었습니다. 마지막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14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거리로 따지면 훨씬 가까워야 하지만 인도의 도로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평균시속 40km를 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산악지역은 더 속도가 떨어집니다. 자동차대절료와 시간이 아까와 그렇게 4박 5일간 강행군을 하고난 뒤 며칠간은 몸살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지하수맥을 찾아주는 것은 기본이 되어버렸습니다. 시범농장이 되든 교육센타가 되든 어디나 넉넉한 물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분명 우기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없어 대부분의 지역이 농작물이 보이지 않거나 있더라도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보기엔 대단한 재앙이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해마다 겪어오는 이곳 농민들은 체념 때문인지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을 체득했음인지 별로 동요가 없어 보입니다. 하여간 아주 적극성을 보이는 교구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교구도 있었습니다. 두 교구에서는 아주 적합한 장소를 확인했지만 마두라이 교구에서는 적당한 곳이 없어 다음에 다시 가기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마두라이 교구를 갔을 때 저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코다이카날)가 세시간 거리에 있어서 학교의 허락을 얻어 아이들을 딘디갈 시내로 불러냈습니다.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하고 기다렸는데 오직 연결수단이 제 휴대폰뿐이었는데 카드가 그순간 다 되어 갈아넣지 못하고 애를 태웠습니다. 그 때 따라 비는 억수로 쏟아지고 정전이 되어버린 낯선 터미널에서 한밤중에 아이들을 어떻게 만나나 걱정이 되었지만 극적으로 만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학교로 보낸 후 처음으로 아이들과 한 방에서 지내며 긴애기 나누었고, 다음날은 멋진 식당에서 먹고 싶어하는 닭고기도 사먹인 후 다시 둘만 차태워 학교로 보냈습니다. 엄마 아빠 떨어져 지내면서도 힘들어하는 기색없이 학교생활을 기쁘게 해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선교사 파송예배
지난 10월 11일부터 11월 9일까지 한달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작년말쯤 이루어졌어야할 노회주관 제 선교사파송예배가 인도교회에서 보내야할 공식초청문서의 도착이 늦어져 거의 1년이 늦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파송예배는 10월 22일(화) 경남 남해 당항교회에서 제소속노회인 경남노회주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작년 가을 제가 소속한 농촌목회자협의회에서 나름대로 파송예배를 드려준 바도 있고 이미 올해 초부터 저의 인도선교사역이 진행되고 있기도 해서 저는 노회주관 파송예배를 생략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총회와 노회에서 공식파송예배를 드리기를 권고해서 불가피하게 다시 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회주관 파송예배를 드리고 나니 참 마음이 기뻤습니다. 다시한 번 해외선교사가 가져야할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다듬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치 오래동안 동거생활을 하면서도 공식적인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분들이 공식적으로 예식을 올리고 기뻐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로써 노회원님들과의 관계도 훨씬 좋아지고 관심도 더 많이 가져주시는 계기가 되었고, 인도선교사로서의 모든 공식절차가 다 마무리되었습니다.
한국방문동안 아직도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한 후원금 모집과 선교보고를 위해 전국 여러교회들을 방문했습니다. 서울의 경동교회와 광주 고백교회, 가나안교회, 장흥읍교회, 여수 정심원교회 등에서는 설교나 선교보고를 통해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 외 과천 한백교회, 군산 세광교회, 광주 무진교회, 대구 영지교회, 목포 디아코니아 자매회, 목포중앙교회, 기장농목정책협의회(충무), 인천여성의 전화, 기장 남신도회, 한신교회 의료선교팀, 여성민우회 풍물팀(단비), 거제도 장승포교회와 애광원 등을 방문하여 다양한 선교와 방문에 관한 협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 모교인 한신대학에서 5회에 걸쳐 1-2학년이 참여하는 채플에서 인도선교와 관련하여 젊은 시절에 아름다운 꿈(비젼)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설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꿈을 지니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그렇게 바쁘게 보내고서도 마지막 3박 4일간은 제 신앙수련을 위해 대구 트레스디아스에서 주관하는 위캔드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국내에 자주 갈 수 없는 신분인 선교사라는 입장 때문에 모집이 마감되었지만 특별한 배려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그에 관한 소식을 듣고 참여한 이들의 대부분이 기뻐하며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저도 언젠가는 꼭 참여해야지 했는데 선교사로 나와 생활하며 더욱 절실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3박 4일간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아! 서로 사랑하며 섬기고 나누는 삶이 이런 것이로구나를 다시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국제 농촌교회연대회의 참석
인도 첸나이에 있는 남인도교단 본부 건물에서 지난 11월 12일부터 19일까지 세계 10여개국에서 모여온 참여자들과 국제농촌교회연대회의(International Rural Church Ecumenical Association)의 제 2차 회의에 참여했습니다. 세계농업의 현황과 변화과정, 농촌교회들이 나아가야할 방향 등과 관련된 강연과 성서연구 등이 있었는데 한국의 김용복박사님도 오셔서 주제강연을 했고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의 농사경험과 인도로 오게된 배경,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에 관한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농촌교회나 농업관련자들이 모였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농업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참여자들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저와 같이 구체적인 현장과 전문성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주목받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세 곳으로 나누어 가지게 된 현장탐방에서는 제 사역지로 신청하여 참여한 이들이 전체의 70%나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인도문화를 접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저녁마다 이루어졌고, 낮시간 중 일부는 중요 유적지나 문화현장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들이 있어서 얻을 수 있는 소득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저의 초청으로 한국여성민우회 풍물팀(단비)이 18일 저녁 1시간 반 동안 본래 농민들의 농악으로부터 유래된 한국전통음악과 춤을 선보일 수 있었고 모두가 원더풀을 외치며 신명나게 한판 놀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그로 인해 인도교회관계자들과 연대회의 임원들이 제게 얼마나 많은 감사의 말을 전해왔는지 모릅니다. 한국문화는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고 신명을 불러일으키는데 빼어난 능력이 있는 것 같아 참 기뻤습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대로 인도문화와 한국문화가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지려 합니다.
여성민우회 풍물팀(단비) 순회공연
여성민우회 풍물팀(단비)이 인도로 가는 마음굿이란 주제로 11월 15일 저녁 첸나이 공항에 도착하여 26일 밤 떠날 때까지 다섯차례에 걸친 순회공연과 다양한 인도문화기행이 있었습니다.
15일 저녁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저는 24명의 단비팀을 맞이하기 위해 12인승 차 두 대를 대절하여 첸나이 공항으로 나갔습니다. 악기랑 짐들이 많을 것을 대비하여 카삼에서 제 조수 두명이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밤 11시가 되어 단비팀은 긴 비행과 입국심사를 끝내고 건강하고 활달한 모습을 드러내었건만 10시면 도착해야할 조수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단비식구들과 한참 차에다 짐을 싣고 있는데 11시 15분쯤 조수들로부터 공항이라며 전화가 왔는데 1-2분이면 도착해야할 친구들이 40여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 결국 인도식으로 내버려두고 숙소인 남인도교단본부를 향해 떠났습니다. 조수들로부터 다시 전화가 온 것은 밤 1시가 넘어서였고 그들은 공항에서 자고 다음날 카삼으로 바로 돌아가는 에피소드도 있었습니다.
16일에는 국제회의의 일정도 세곳으로 나누어 현장체험을 하는 날이어서 단비팀은 같은 차로 제 사역지인 카삼으로 떠났습니다. 가는동안 라지브간디의 기념공원도 돌아보고 인도사리로 유명한 칸치푸람에 들러 사리와 숄들을 깎으며 구입하느라 신이 나기도 했고, 맛있는 바나나와 과일들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카삼에 도착해서는 농민교육장으로 사용하는 곳을 둘러보고, 아직 수리가 덜 끝나 어수선한 상태였지만 제가 숙소로 쓰고 있는 샬롬하우스(평화의 집)에 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으로 잡혀있는 제 1차 공연준비를 해서 공연에 들어갔습니다. 이 공연에서는 인도 농민문화단체들과 학생팀에서 준비한 공연들이 있어서 한국문화와 인도문화가 번갈아가며 선을 보이고 흥을 돋군 마당놀이가 멋지게 이루어졌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국제회의 참여자들과 공연관계자들, 그리고 단비팀은 샬롬하우스 앞마당에서 뷔페식으로 멋진 인도음식을 먹었습니다. 수저가 없었지만 모두들 신나게 잘도 먹었습니다.
식사후 국제회의팀은 첸나이로 떠나고 단비팀은 평화의 집 2층을 모두 차지하고 한 단원의 생일파티를 겸해 밤늦게까지 신나는 2차를 벌였습니다. 그렇게 노래잘하고 신명나게 놀 줄아는 팀은 처음보았습니다. 저러다 모두 지치고 목이 쉬어 18일에 있는 진짜 중요한 공연은 어쩌려나 염려되었지만 그들은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17일에는 참새조가 맛있는 한국식 밥과 찌개와 김치, 김 멸치볶음 등 각종 한국음식들을 동원하여 걸지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카삼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두 곡의 특송도 잘 해내고 예배 마친 후에는 참석자 모두에게 볼펜과 사탕을 선물해 대단한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다시 농장으로 가서 푸른인도만들기 운동의 하나인 나무심기작업을 하였습니다. 다음에 다시 방문하여 자신이 심은 나무에서 과일을 따먹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라면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캇파디 기차역으로 갔습니다. 보다 깊은 인도를 보기 위해서는 인도인들이 타는 3등칸 기차를 타보아야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좌석이 하나도 없어 나이 드신 분들까지도 모두들 서서 가는 모습이더니 어느새 인도사람들과 사귀기도 하고 엉덩이로 비집고 들어가 어느틈엔가 모두들 인도인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 반 동안 타본 인도기차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18일에는 다시 차 두 대를 전세내어 첸나이 시내관광을 했습니다. 영국이 들어와 가장 먼저 세운 St. Mary교회를 돌아보았고, 영국식민지시절의 유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Fort Museum을 돌아보았습니다.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는 9시 40분이었는데 인도의 공무원들 업무시작시간이 10시부터 여서 어쩔 수 없이 밖에서 애기나누며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다시 역대 수상들을 기념하여 마리나 비치 근처에 만들어 둔 공원을 돌아보고, 이어 의심많던 예수님의 제자로 알려진 도마가 인도선교를 하다 숨어지내며 기도한 동굴과 기도처, 바위샘도 보고 그를 생각하며 기도도 했었습니다(리틀마운트). 그곳에서 3km쯤 떨어진 도마가 순교한 곳과 기념교회도 돌아보고 숙소로 돌아와 식사를 했지요. 오후엔 내친김에 첸나이 시내 쇼핑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저녁에는 가장 먼저 약속이 되었던 국제회의에서의 공연을 아주 성공적으로 잘 치루어냈습니다.
19일 현대자동차 인도공장에서 공연이 있던 날입니다. 공연은 오후였지만 새벽 일찍 방을 비워준 탓에 예정에 없던 아침 건강강좌도 하게 되었고, 본래 오후 한시에 오라고 했던 버스(현대제공)를 9시까지 불러서 첸나이에서 못다한 인도문화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리나 비치에서 말도 타고 바닷물에 발을 적시기도 했구요. 이어서 힌두템플을 둘러보며 안내인의 설명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았지만 어찌 그리도 인도인들은 신심이 강한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도에서는 흔치 않은 피자집을 찾아내 비싼 피자로 식사를 한 것도 잊혀지지 않겠죠. 이어 도착한 현대자동차 공장에서는 2000명이 넘는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넓은 마당에서 벌인 3차공연은 그야말로 큰 한마당이었습니다. 마당이 어찌나 넓은지 24명 단비팀이 왜소해 보일지경이었고 그것을 카바하느라 너무 열심히 뛴 탓에 잡색 한명은 급기야 제대로 걷지못하는 환자신세가 되어야 했습니다. 공연에 이어 식당에서 현대사장단과 함께 벌인 2차공연도 참 볼만했습니다. 간단한 선물나눔과 뒤따라온 두둑한 봉투도 예상못한 보너스였습니다. 3시간이 걸려 도착한 카삼 평화의 집에서 맞이한 달밝은 밤의 아름다운 모습도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20일 카삼에서 더 머물러주기르 바랬지만 더 많은 인도를 보고싶어하는 분들 때문에 다시 큰 버스를 대절하여 긴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거의 4시간이 걸려 인도인 수사출신 목사님과 한국인 수녀출신 목사님이 만들어가고 있는 영성수련공동체 참새둥우리에 도착했습니다. 카삼으로부터 방가라페트까지 가는 길은 3개주(타밀라두/안드라프라데시/카르나타카)를 거치느라 거의 6번을 멈추어서 통행세를 지불하기도 했습니다. 가던 길에 바위산에 여기저기 모여 앉아 먹었던 주먹밥맛은 꿀맛이었습니다. 주변 마을 사람들과 지역의 다른 공동체들에서 모여온 사람들과 함께 벌인 4차공연도 참 멋졌습니다. 인코가 지도한 인도 아이들의 춤도 참 인상적이어서 저녁을 먹은 후에는 모두가 그 춤을 따라 배우기도 했었죠. 비록 모두가 다 참여한 건 아니었지만 참새둥우리 한 마당에서 밝은 달을 보며 노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밤은 참 환상적이었습니다.
21일 참새들의 둥우리에서 독특한 명상기도회를 참여하고 맛있는 김치와 밥을 먹고 벵갈로로 떠났습니다. 밤사이에 코다이카날에서 13시간이나 걸려 먼저 도착해 있을 우리 아이들(한솔이와 아림이)을 만나려면 아침 7시까지 벵갈로 터미널에 도착했어야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것은 10시가 넘어서였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친구와 잘 지내다 전화를 해서 잘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사이 모두들 값싼 사리를 한 벌씩 사느라 정신 없기도 했습니다. 벵갈로에서는 자연생태공원으로 유명한 날바크 식물원을 걸어서 한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인도에서는 보기드문 청춘남녀들의 데이트하는 모습도 참 많았구요.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거닐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다른 곳도 보고싶었지만 차도 고장수리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고, 갈길도 멀어 포기하고 마이소르로 달렸습니다. 마이소르에 도착한 후 숙소를 잡고서는 인도음식을 거부하며 찾아간 중국식 식당에서 생일잔치를 겸해 흥에 겨웠던 것도 재미있었던 추억입니다.
22일 마이소르에서는 참 볼 것들이 많았습니다. 궁전으로 쓰던 멋진 호텔에서 기념촬영도 했고, 차문디힐에 오르며 시내를 내려다보는 것도 괜찮았습니다. 차문디힐의 힌두사원도 나름대로 특색을 지닌 것이었고 내려오는 길에 본 송아지 상도 근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이소르왕국의 궁전은 정말 웅장하고 화려했습니다. 가난한 인도에서 어디서 그 궁전을 지을 수 있는 비용이 나왔는지 참 의아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궁전을 지은 왕가와 왕을 착취했다고 욕하기보다 참 좋은 왕이었다고 높이는 인상이었습니다. 아마 영국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던 왕이어서 더욱 그런가 봅니다. 그 궁전에서 본 3차원 입체그림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디서 보든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놀라왔습니다. 우리에게 설명을 열심히 해주던 가이드덕분에 많이 이해할 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 가이드가 1시간 안내에 800루피를 요구해 실랑이를 하다 400루피를 주고 헤어졌습니다.
더 많은 볼거리도 있었지만 다음으로 기약하고 우띠로 향했습니다. 야생동물공원을 지나갔지만 이미 어두워지고 있어서 동물들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우띠는 해발 2300m나 되는 고지대여서 기온차도 심해 모두들 가는 동안 옷을 껴입기도 했고, 달빛에 비추이는 울창한 삼림도 장관이었습니다. 길을 가다 차를 세우고 내츄럴토일렛을 찾는 것도 이미 익숙해졌습니다. 산길을 가느라 워낙 더뎌서 우띠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넘었습니다. 그 때까지 저녁도 못먹고 숙소도 안잡힌 상태여서 모드들 불안해하는 눈치였습니다. 안내를 맡은 저는 가시방석이었구요. 따뜻한 아랫동네라면 한뎃잠도 나쁘지 않은데 우띠는 어림도 없었죠. 모두들 따뜻한 온수가 나오는 호텔을 그리워했습니다. 두곳의 호텔에서 방을 얻지 못하다 세 번째만에 겨우 안정된 잠자리를 구했고 그사이 맛있는 늦은 저녁도 먹었습니다. 밤이 되니 좋은 잠자리가 있어야한다는 사실이 그날처럼 절실해본 적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23일 우띠에서는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호숫가에서 쇼핑도 하고 붕붕도 타고 누구는 보트를 타려다 돈내고 표사기도 힘들어 포기하고 하여간 재미있었습니다. 우띠는 첸나이한국식당들이 필요로 하는 한식재료를 생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띠를 내려가며 만난 폭포에서 물장난을 하며 보낸 시간이나 전세버스 타이어를 갈아끼우는 동안 원숭이들에게 홍당무를 던져주며 즐거워하던 시간도 나름대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점심시간은 지나가는 데도 가도가도 적당한 식당이 나타나지 않는 시골길을 달리며 끼니때가 되면 먹어야한다는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하룻 사이에 잠자리와 먹거리로 고민하느라 체중이 많이 줄었던 느낌입니다. 결국 빵과 과일로 해결하고 다라푸람에서 있을 5차공연 시간에 맞춰가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다라푸람은 10여년 이상 문을 닫았던 병원을 새로 열기 위해 다른 곳의 병원장이었던 Dr. Mary(산카르 원장부인)가 새로 이사한 곳이기도 하고 간호대학과 간호학교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공연은 많은 청년 대학생들이 주된 관객이었습니다. 지역신문과 중앙TV방송에서도 취재가 있었고 대대적으로 보도되어서 그 후에 방문한 저를 보며 여러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습니다. 인도농민들이 연주한 북연주는 우리전통가락과 유사한 부분이 참 많고 서로 배우고 익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간호대학 식당에서 마련한 닭고기와 양고기 푸짐한 과일들은 채식이 중심인 그들의 식탁에서는 보기드문 우리들을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고, 우리가 다 먹을 때까지 모두가 봉사하며 손씻을 물을 부어주고 수건을 줄 때까지 섬기다가 우리의 식사가 끝난 후에야 먹기 시작하는 모습도 아주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모두들 지쳐 있어 학교에서 제공하는 숙소에 머물지 못하고 바깥의 다른 숙소를 찾아야했던 것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24일 목표지점인 퐁디세리까지는 8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가는 길에 있는 중요한 볼거리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트리치에서는 태국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탄주르에 있는 힌두사원에 들렀습니다. 그동안 여러 힌두사원을 보았지만 탄주르 사원은 그 규모도 컷지만 돌조각이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사원이었습니다. 보지 않았으면 섭섭했을 만큼 가치가 있는 곳이었지요. 사원 어디에나 있는 신발보관소를 잘 몰라 신발을 들고 들어가 제사가 진행중인 신전에서 쫒겨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출입구 근처에서 돈을 주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코끼리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간이 없어 그냥 지나치려했지만 왕궁도 보자고 해 가보았지만 이미 중요한 볼거리들은 문이 닫힌 상태라 볼 수가 없었습니다.
늦장을 부리다보니 결국 퐁디세리 오로빌공동체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가 다 되었을 때였습니다. 공동체 게스트하우스를 찾아헤매다 찾지못하고 다음날 다시 오기로 하고 대신 바닷가에 있는 멋진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기로 결정하고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거기도 밤 10시에 지배인이 가버리고 문지기만 지키고 있어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다른 호텔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제법 괜찮은 호텔이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밤늦게까지 이어졌던 뒷풀이팀의 뒷풀이도 즐거웠습니다.
25일 퐁디세리가 바닷가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 가운데 이른 아침 어시장을 둘러보고는 게와 새우를 사서 요리를 해먹고싶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참좋은 이벤트라는 생각을 하며 우루루 시장으로 몰려가 게와 새우를 잔뜩 샀습니다. 더운 차 안에서 상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우리는 퐁디세리 시내에 있는 오로빌공동체의 창시자인 오르빈도와 그의 영혼의 반려자였던 프랑스인 마더의 무덤이 있는 오르빈도 기념관을 둘러보고 자료를 사기도 했습니다. 다시 오로빌공동체로 들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식사주문과 동시에 게와 새우를 삶는 일이었습니다. 인포메이션센타에서 공동체관련 비디오도 보고 매장의 물건도 사면서 시간을 보내다 맛있는 게와 새우를 비롯해 주문한 식사로 포식을 했습니다. 그 후 공동체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명상센타를 보려고 했지만 낮휴식 시간이어서 입구만 보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되었습니다.
퐁디세리를 떠난 차는 첸나이 근처에 멈추어 아주 근사한 골드비치호텔을 예약해두고, 첸나이 시내에서 가장 멋있는 호텔에서 뷔페식사를 하며 남인도 대표적인 무용인 바라타나티얌을 관람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한무리는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이번 여정에 대한 소감도 나누며 인도에서의 마지막밤을 아주 근사하게 보냈습니다.
26일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첸나이쇼핑안도 나왔지만 모두들 마하발리푸람을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차는 해안을 따라 남으로 달렸습니다. 마하발리푸람에서는 하나의 바위로 조각한 다섯사원조각과 해안사원, 마히사스라 사원조각(등대), 아르주나의 고행 등 인도 드라비다 조각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 짐을 꾸리고 마지막 남은 시간을 활용하여 첸나이 시내에서 단체선물을 사고 시간에 쫒겨 저녁식사도 못한 채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참으로 변화무쌍했던 12일간의 여정을 끝내고 인도를 떠나는 단비팀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저는 제대로 정신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새로 오는 성공회팀을 맞이하기 위해 아림이와 함께 첸나이 공항에 쪼그리고 앉아 깊은 상념에 잠겼습니다.
성공회팀 방문기
대한 성공회에 소속한 두 교구의 일행이 한 팀이 되어(5명) 지난 11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인도를 방문했습니다. 제 사역지가 40만평이나 되는 넓은 땅인데 어떻게 하면 이 땅의 토질과 자연환경에 맞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생명농업의 산실로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 김제에서 전문적인 농업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는 분들을 알게되어 제 요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공회와 연계하여 지속적인 인도선교를 해나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몇 분이 더 합류하였습니다. 이팀이 오는 비행기에 아이들의 엄마도 함께 타고 오게 되어 내내 같은 일정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26일 첸나이공항 도착후 카삼까지 세시간 여에 걸쳐 버스로 달렸습니다. 처음으로 접해보는 인도의 곡예운전에 모두들 간담이 서늘해졌지요. 밤 한시가 넘었는데도 차를 파는 곳이 있어 몸도 풀고 마음도 풀었습니다. 카삼에 도착해 잠자리 배치해서 모기장도 치고 불편하지만 단잠을 잔 듯 합니다.
27일 40만평이나 되는 땅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직접 흙을 채취하여 토양조사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잘 느낌이 없지만 직접 걸어다녀보며 흙을 만져보면 이 땅이 얼마나 메마르고 곡식이 자라기 어려운 땅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전에 농사를 잘 짓던 땅들도 물이 부족해 황무지로 변해가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눈에 들어옵니다. 뿐만아니라 토양조사를 위해 삽으로 10여센티를 파보려고 해도 돌떵이처럼 굳어있어 힘이든다는 것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카삼을 방문한 팀치고 이처럼 제 농장 곳곳의 많은 땅을 발로 밟고 다니며 현장을 살핀 팀은 없을 것입니다. 하여간 다음날 아침 나온 토양조사의 결과는 대부분의 땅이 아래에 석회암층이 있어 땅이 딱딱해지고 알카리성을 띠고 있으며, 염분이 높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물을 심더라도 알카리성 토양에서 잘 자라는 작목을 선택해야하며, 염류를 낮출 수 있는 방안들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농사를 위한 가장 기초적인 데이타를 얻은 셈입니다.
28일 모두들 농장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인도의 모습을 좀 더 적나라하게 경험하기를 원해 차를 대절해서 캇파디와 벨로르 시내를 돌아보았습니다. 바자르에서 환전도 하고 벨로르 시내 점포들을 여기저기 다니며 물건도 사고 전화도 걸고 사탕수수주스도 마시며 즐거워 했습니다. 내친김에 군사적인 면에서 유명한 벨로르 성도 한바퀴 돌아 보았습니다. 나름대로 멋진 힌두사원도 있었고,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많고 중요한 유물들을 지닌 박물관을 볼 수 있었던 것도 큰 소득이었습니다. 성 안에는 경찰대학도 있었고, 마드라스대학의 한 분과도 있어서 대학생들을 만나 애기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성루에 올라앉아 바라본 시내와 성 안이 너무 대조작이라는데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다음부터 벨로르 성은 방문자들에게 필수적으로 보여주어야할 곳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29일 지속적인 협력과 과학적인 생명농업을 위해 타밀라두 농업대학을 돌아보기 위해 17인승 밴을 대절하여 콰이마투르로 향했습니다. 약간 늦게 출발한 점도 있긴 하지만 거의 왼종일을 이동하는데 다 보낸 하루였습니다. 가면서 본 남인도의 정경들이 참 아름다웠구요,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는 특색이 있었습니다. 크리쉬나기리 근처의 나름대로 멋진 식당에서 처음으로 인도식 식사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콰이마투르 비숍하우스에 도착해서 비숍과 환담을 나누기도 했고, 밤 12시가 가까웠는데도 우리의 농업대학 방문을 위해 교수에게 전화해서 일정을 잡아주는 모습을 보며 비숍의 위력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미리 자 본 경험이 있었기에 가지고 갔던 모기장은 참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30일 비숍이 따라붙여준 안내자의 안내로 농업대학에 가서 어거스틴교수를 만났습니다. 토요일이어서 다른 학과는 보여주기 어렵지만 토양학이 전공인 자기분야는 모두 안내할 수 있다며, 이론적인 설명과 기자재들 그리고 퇴비장과 실습농장 여기저기 보여주어서 참 좋았습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우리농장이 이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연구의 성과를 잘 활용하는 모델농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모았습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잠시 인터넷을 이용한 것도 가뭄의 단비같았습니다. 다시 다음 목적지인 다라푸람으로 향했고 두시간만에 도착하여 사무엘 산카르원장을 만났습니다. 워낙 긴 여정에 익숙해지다보니 인도에서 두시간 거리는 이웃집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원장의 안내에 따라 병원과 학교 이곳저곳을 돌아보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고, 극진히 차려준 저녁도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12월 1일 다음 목적지는 퐁디세리 오로빌 공동체였습니다. 가는 도중 트리치 근처에서 인도에서는 좀체로 보기드문 풍경인 유유히 흐르는 카베리 강가에서 솥을 걸고 불을 때서 끓여먹은 라면맛은 기가 막혔습니다. 강물에 몸을 담그고 즐긴 사람들도 있었지요. 다시 탄주르를 지나면서 멋진 돌조각으로 유명한 힌두사원을 보지 않을 수 없어 발걸음을 그리로 옮겼습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점점 늦어져 본래 목적지인 퐁디세리는 도착도 못하고 또다른 해안도시 쿠달루르에서 바닷가 호텔을 찾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우리생각엔 멋진 바닷가근처엔 아름다운 호텔 한 두 개쯤 있을거라고 기대했는데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바닷가 모래사장을 한참 걸어 파도를 맞은 것으로 만족하고 시내의 호텔로 들어가서 잠을 청했습니다.
2일 퐁디세리를 들어가려 했지만 주가 달라지게 되어 미리 허가를 받아놓지 않아서 먼길 돌아가야한다는 바람에 결국 방향을 마하발리푸람으로 틀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는 도중 제법 큰 재래시장이 열린 곳에서 구경도 하고 물건을 산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마하발리푸람에서는 역시 다섯 돌조각사원과 해안사원, 아르주나의 고행과 등대를 볼 수 있었고, 크리슈나의 버터볼도 구경했습니다. 다시 차를 열심히 달려 성 도마가 순교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교회를 돌아보며 그를 생각하고 또 오늘 우리의 선교를 염두에 두며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도마의 은신처를 가보려했지만 너무 어두워져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습니다. 마지막 저녁식사를 위해 공항근처에서 찾아낸 근사한 식당은 앞으로 단골을 삼아도 좋으리라고 모두 입을 모았습니다. 2-3분만에 도착한 첸나이 공항에서 부둥켜 안으며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성공회팀의 인도여정도 끝이 났습니다.
맺는 말
제 선교소식이 언제나 너무 길어 스피드시대에 사는 현대인들로서는 읽기가 힘이 드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휴지통으로 직행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잠시 틈을 내어 저장해 두었다가 다음에 읽으셔도 언젠가 인도를 오실 때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다녀가신 분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관심이 가실 것 같기도 하고, 다음에 오실분들이나 인도를 더 많이 알고싶은 분들을 위해서 핵심만을 뽑아 실었지만 워낙 길어졌습니다. 형식적인 보고만으로 끝내기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기도 하고, 인도의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자주 보낼 수 없다는 점도 길어지는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음부터는 짧게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생명누리
2002 년 12 월 8 일
카삼농업선교센타에서
정 호 진 드림
사진자료
1.현장방문(여성농민훈련원 수녀님들과)
2.국제 농촌교회연대회의
3.단비팀(첸나이 역대 수상 기념공원에서)
4.성공회팀(벨로르 성에서)
5.새로 개발한 지하수로 인해 모내기를 하고 있는 모습
6.인도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