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배경
크메르 로으 족은 로따나끼리 도와 몬돌끼리 도에서는 인구의 다수를 점하고 있고, 끄라쩨(Kratié) 도와 스떵 뜨라잉 도에서도 상당한 인구를 차지하고 있다. 1969년에 이들의 총 인구는 9만명으로 추산됐다. 1971년의 통계들은 4만명에서 10만명까지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1987년의 통계는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대략 10만명쯤 될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크메르 로으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진 임시 마을에 거주하는데, 이러한 마을들은 수백명의 인구밖에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부락들에서는 지역의 연장자나 촌장이 통솔한다.
크메르 로으 인들은 다양한 작물을 경작한다. 하지만 주 경작작물은 화전(火田)을 이용한 밭벼의 농사이다. 이들의 식단을 보면 사냥과 어업, 그리고 채소의 경작을 통해 영양을 보충하고 있다. 주거형태는 대형의 공동생활형 주택부터 소형의 단독세대형까지 다양한 편이다. 대개 이러한 주택은 밭에서 가까운 곳이나 대나무로 만든 틀 위에다 짓는다.
식민지 시절의 프랑스 정부는 크메르 로으에 대해선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군 사령관은 이들을 매우 훌륭한 전초부대적 인적 자원으로만 여겨, 많은 수의 크메르 로으들을 채용해 프랑스군을 위해 일하도록 했다. 현재도 많은 크메르 로으 인들이 캄보디아 군대에 입대하여 이러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960년대 캄보디아 정부는 군대의 책임 하에 로따나끼리 도, 스떵 뜨라잉 도, 몬돌끼리 도, 꺼 꽁(Koh Kong) 도에서 광범위한 민사활동을 펼쳤다. 이 계획의 목적은 크메르 로으 인들을 교육시키고, 크메르어도 가르쳐 캄보디아 주류사회에 동화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이주 및 재정착과 같은 노력도 일부 벌어졌었고, 공무원이 크메르 로으의 개별 마을로 가 상주하면서 주민들에게 크메르식 관습을 가르치기도 했다. 일부 마을에는 학교도 지었고, 각 마을마다 정부의 상주대표를 두어 크메르 로으 인들이 저지대 크메르인들의 삶의 방식을 습득토록 독려하기도 했다. 공무원들은 크메르 로으에 대해 할당량을 부과하고 그에 대한 처벌을 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에 5천명의 크메르 로으 인들이 정부정책에 반발해 폭동을 일으켜 자결과 독립을 요구했다. 당시 국영언론의 보도를 보면, 정부에 충성스러웠던 마을 대표들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크메르족에 대한 크메르 로으 인들의 분노로 인해, 이들은 더 이상 캄보디아 군대에 협력하지 않았고, 캄보디아 군대는 지역의 불안정을 억압하기에 바빴다. 이러한 크메르 로으 인들의 불만을 눈여겨 본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공산당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입당시키기 시작했다. 1970년 캄보디아 정부군은 로따나끼리와 몬돌끼리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 지역에서는 크메르 공산당 반군이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 군대가 "캄푸치아 혁명군"(Revolutionary Army of Kampuchea)으로 베트남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훗날의 크메르루즈가 바로 이들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피억압 부족 해방을 위한 통일전선"(Front Uni pour la Libération des Races Opprimés: FULRO)이란 조직이 베트남 남부 산악지대의 부족들을 통합하고, 캄보디아의 크메르 로으 족과 짬 족을 입당시켰다는 증거들이 남아 있다.
1980년대 초에는 정권을 상실한 크메르루즈의 선동대가 북동부 지방으로 침투해 중앙정부에 대해 투쟁하도록 선동했다. 1981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정부에서 북동부 4개도의 도지사들이 크메르 로으 인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모두 "브로우 족"(Brao) 사람들로 몬돌끼리 도, 로따나끼리 도, 스떵 뜨라잉 도, 쁘레아 위히어(Preah Vihear [프레아 비헤아르]) 도를 담당했다.
1984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의 국가당원대회는 "소수민족 정책"이란 주제로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소수민족들 역시 캄보디아 국가통합의 주요한 부분이며, 집단화사업에 적극 동참하도록 독려받아야만 한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소수민족들을 현대 캄보디아 사회로 동참시키려는 것이었다. 또한 이 회의는 문맹을 퇴치하고, 소수민족의 언어가 존중받아야 하며, 각 부족들은 각기 고유한 언어로 말하고 기록하며 교육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고 결의했다.
2. 크메르 로으 계열 소수민족들
캄보디아 내의 주요한 크메르 로으 부족들로는 꾸이 족(Kuy), 므농 족(Mnong), 스띠엉 족(Stieng), 브로우 족(Brao), 땀뿌안 족(Tampuan), 뻬아 족(Pear), 자라이 족(Jarai), 라데 족(Rade)이 있다. 마지막 두 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몬크메르어군에 속하는 집단이다.
1980년대 후반에 16만명 정도의 꾸이 족이 캄보디아의 껌뽕 톰(Kampong Thom) 도, 쁘레아 위히어 도, 스떵 뜨라잉 도 및 인접한 태국 지역에 살고 있었다. 1978년의 한 보고에 따르면, 당시 캄보디아 내에만 7만명 정도의 꾸이 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꾸이 족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주류적 문화에 동화되었다. 대부분 불교도이고 논농사에 종사한다. 또한 이들은 대장간 일에 능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 끄릉족 마을 중심에 서 있는 마을회당 ☜ 확대사진보기
브로우 족과 끄릉 족(Kreung), 그리고 까웻 족(Kavet)은 캄보디아의 로따나끼리 도 및 인접국 라오스에 살고 있다. 이들 세 부족의 언어는 동일한 언어의 방언이기 때문에 다르면서도 상호 이해가능한 정도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들은 모계사회를 특징으로 하는 상호 유사한 문화를 갖고 있다. 1962년 라오스에 살고 있는 브로우 족만 9천명 정도로 조사되었다. 1984년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브로우 족 인구는 1만명에서 1만5천명 정도로 추산된다. 1920년대에 3천명 정도의 브로우 족이 라오스에서 캄보디아로 이주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브로우 족은 마을 중앙의 회관 건물을 중심으로 커다란 마을을 형성하고 거주한다. 이들은 주로 밭농사를 짓고 약간의 도자기도 생산한다. 가족구조 면에서 아마도 이들이 양변친족체계(bilateral kinship system)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역자 주) 양변친족체계(bilateral kinship system): 가족을 구성하는 원리에서 부계나 모계와 같이 혈통에 근거하지 않는 사회적 체계를 가리킴. 반면 혈통집단의 원리가 작용하면 ‘공계혈통체계’(cognatic descent system)란 말을 사용한다고 함. (출처: 필리핀어배우기 http://cafe.daum.net/tagalog/3kvz/26) |
1998년의 인구조사에서 땀뿌안 족은 약 2만5천명이었다. 이들은 몬크메르어군에 속하며 애니미즘(정령신앙)을 신봉한다. 이들은 모계사회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초에 캄보디아 및 베트남에 살고 있는 므농 족의 수는 2만3천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캄보디아의 므농 족은 몬돌끼리 도, 끄라쩨(Kratié [크라티에]) 도, 껌뽕 짜암(Kampong Cham) 도에 살고 있다. 이들의 마을은 길고 커다린 몇 채의 건물로 구성되는데, 각 건물 안에는 다시 핵심 단독가구들이 거주하는 작은 공간들이 나뉘어져 있다. 므농 족은 밭농사를 짓는데, 일부는 채소와 과일 및 여타 수익작물을 부업으로 다양하게 재배하고 있다. 일부 분파는 옷감을 직조하기도 하며, 최소 2개의 분파는 모계중심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결혼은 대부분 일부일처제이고, 언제나 처가쪽에 살림을 꾸민다. 또한 제사나 잔치 때 잡을 수 있는 소를 얼마나 많이 기르고 있느냐에 따라 부의 척도가 되는데, 이는 사회적 인정을 받는 수단도 되고 있다. 과거에는 노예(종)도 소유했지만, 당시에도 노예는 자유를 얻어 해방될 수 있는 존재였다.
스띠엉 족은 므농 족과 밀접한 친연성을 갖고 있다. 이들 양 부족은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지역에 걸쳐 살고 있으며, 이들의 언어 역시 몬크메르어군의 동일한 분파 언어군에 속한다. 1978년에 캄보디아 내의 스띠엉 족 인구는 약 2만명이었다. 스띠엉 족은 밭농사를 짓는다. 이들의 사회는 가부장중심제로, 결혼 후에도 지참금을 지불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가쪽에 살림을 차리는 것이 통례이다. 이 부족은 정치적으로 매우 느슨한 조직을 갖고 있고, 각 부락마다 독자적인 장로들과 재판관행을 갖고 있다.
통틀어 1만명이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소수 부족들이 캄보디아 및 태국 동남부에 살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뻬아 어군족을 형성한다. 뻬아 족의 주력 인구는 밧덤벙(Battambang [바탐방]) 도, 뽀우삿(Pursat) 도, 껌뽕 톰 도에 살고 있다. 한편 뻬아 어군족 가운데 쫑 족(Chong)은 태국 및 밧덤벙 도에 살고 있고, 사옷 족(Saoch)은 껌뽀웃([캄폿] Kampot) 도에, 삼레 족(Samre)은 시엠립 도에, 수오이 족(Suoi)은 껌뽕 츠낭(Kampong Chhnang) 도에 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들이 크메르 민족이 캄보디아에 들어오기 전부터 살았던 사람들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뻬아 어군족의 대부분은 밭농사를 짓고, 약간의 사냥과 채집으로 보충을 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토테미즘적 기원을 갖는 씨족사회를 형성하며, 각 씨족은 가부장적 전통에서 비롯된 종가에 사는 종친의 장이 통솔한다. 결혼은 조혼의 풍속을 갖고 있고, 약간의 결혼지참금만 지불한다. 살림은 첫 아이의 출생 때까지 처가에서 살거나, 아니면 사옷 족처럼 시가에서 시작하기도 한다. 이들 사회에서 촌장은 최고의 정치적 지도자이기도 하다. 사옷 족은 잘로회의를 두고 있는데, 전통적 관습법을 위반한 경우 이들이 재판을 담당한다. 뻬아 계통 지역에서 날씨에 관한 조정을 하는 두 명의 역술인은 매우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 사옷 족의 종교는 화장을 하는 크메르인들의 장례절차와 달리 매장을 한다.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인 자라이 족과 라데 족은 베트남 내의 가장 큰 소수민족을 형성하고 있다. 이 두 부족은 점차로 캄보디아 북동부 지방으로 이주해왔고, 문화적 유사성도 많이 공유하고 있다. 자라이 족의 총 인구는 20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고, 라데 족은 12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1978년 인구통계를 보면, 당시 캄보디아 내에는 자라이 족 1만명과 라데 족 1만5천명 정도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거주지는 길다란 큰 주택을 지은 후 그 안에서 모계중심으로 연관된 핵심가구들이 공간을 나눠 살고 있다. 보통 한 부락에는 이러한 대형주택이 20-60채 정도가 서 있다. 라데 족과 자라이 족은 주로 밭벼 농사를 짓는데, 옥수수와 같은 보조작물도 재배한다. 이들은 족외혼적인 모계혈통체계를 갖고 있다. 모계를 중심으로 동족이나 친척들과는 결혼하지 않는다. 혼담도 여성 쪽에서 먼저 건네며, 살림도 처가에 차린다. 각 부락마다 고유한 정치적 위계질서를 갖고 있으며, 지배가문들이 과두적 지배체제를 행사한다. 과거에는 "불과 물의 왕"으로 불린 점술가가 단일 부락을 넘어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다. 라데 족과 자라이 족은 "피억압 부족 해방을 위한 통일전선"(FULRO) 운동에 밀접하게 관여했고, 이 조직의 지도자들 역시 대부분 이 두 부족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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