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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정(籠巖亭)에서 바라본 밀양댐 전경]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한다.잊어버린 것은 언젠가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번 잃어버린 것은 되찾지 못한다. 그런 상실감은 마음 저 깊은 곳으로 갈앉아 진흙처럼 켜켜이 쌓인다. 사람에게 가장 큰 상실감은 고향을 잃어버린 것일 것이다. 물론 혈육을 잃어버리는 것도 엄청난 상실감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런데 그건 어쩌면 한 개인사에 국한될 것이다.
자신이 고향을 등지거나 떠났을 땐 언젠가는 돌아간다는 희망이라도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그 고향 땅이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면 돌아갈 고향은 없는 것이다.그럴 때 수몰된 그 땅에 대한 그리움이나 상실감은 말로 형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개인의 상실감을 넘어 공동체의 상실감이 되는 것이다.밀양댐이 바로 그런 곳이다.
밀양댐이 들어서면서 덕달,사희동,죽촌,고점 4개 부락이 물에 잠겼다.1991년 11월 6일 착공하여 2001년 12월 준공을 본 밀양댐은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밀양강 지류 고례천을 가로막은 밀양댐은 총저수량 73.6백만m³,유역면적 95.4km², 댐높이 89m,댐길이 535m,발전시설량 1,300kw이다. 밀양댐 건설은 밀양,양산,창녕지역에 년간 79,0백만 m²의 용수를 공급하고, 홍수조절과 수력 에너지개발에 주목적이 있다.
옛 농암대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는 수몰지역 네 부락의 주민 267명을 위로하기 위해 망향비가 세워져 있다. 밀양댐을 한바퀴 둘러보는 유람객들은 풍광 좋은 이곳에서 가슴 아픈 사연의 망향비를 읽고 사진을 몇 장 담고 휑하니 가버린다. 오늘 나는 밀양댐을 다시 찾았다.농암정에 올라 밀양호 주변을 찬찬히 살펴본다.
산과 마을과 강을 내려다보는 내 기억은 마지막으로 백패킹한 10년 전,단장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91년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양댐이 들어서는 것으로 확정되기 전부터 나는 매년 농암대와 인근 산에 발을 들여놓았다.그리고 1998년 여름, 친구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았다. 물에 잠기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풍경을 가슴에 담아두기 위해...당시는 디카가 일반화되기 전이라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배내골 하류 고점에서 단장천 물길따라 농암대를 거쳐 고례리에 있는 댐 수문까지 걸었다. 마침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그날 풍경마저 을씨년스러워 마음이 무거웠다.당시 네 부락 주민들은 모두 평리 모래밭 땀으로 소개되어 건물의 잔해만 나딩굴고 있었고 천변으로는 흙먼지 풀풀나는 도로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백패킹 들머리 고점에서 단장천을 따라 들어가면 몇 채의 인가가 있었는데 이들도 머지 않은 날에 없어질 형편이었다.공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곧 담수가 시작될 거라 했다.
고산준령의 영남알프스. 천화현(穿火峴)이라던 배내고개를 기점으로 서쪽 능동산과 재악산에서 남쪽 향로산을 거쳐 향로봉으로 물결치는 묏부리와 동쪽 배내봉에서 간월산,산불산,영축산,염수봉으로 남진하는 산자락 고샅을 적시는 배내골은 예부터 냇가에 돌배나무가 즐비하다 하여 배내골(梨川里)이라 부른다. 칠십 리 긴 계곡을 적시는 배내골 계류는 울산시 울주군에서 발원하여 양산을 거쳐 지금은 물에 잠겨 볼 수 없는 밀양 단장면 농암대로 흘러간다. 이 계곡을 울산 땅에서는 울산 배내,양산을 거치며 양산 배내, 밀양 땅을 거치며 밀양 배내라고 부른다. 풍수지리에서는 行舟形(바다에 떠 있는 배)의 지세를 갖추었다고도 하며 배내골이란 어휘에서 풍기듯 어머니 뱃속(자궁)처럼 포근한 땅이라고도 한다.
수려한 산세와 빼어난 계곡미가 아름다워 천혜의 자연경관이라고는 하지만 돌이켜보면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거친 오지 중의 오지였다. 거친 땅에서 억센 삶을 살고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류를 따라 흐르는 물줄기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길손들에겐 눈에 보이는 풍광에 매료되기 일쑤이지만, 풍광 너머 그곳에 등을 기대고 살았던 사람들은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살았다.배내골 사람들은 도회지의 많은 무리 속에서 살기에 어딘가 모가 나서 그곳 삶을 등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마을을 이룬 곳이라 할 수 있다.
멀리는 조선 때 왕조의 폭정을 피해 많은 유생들이 은둔하였고. 6.25 전후로는 빨치산이 지리, 덕유를 거쳐 이곳에서 광범위하게 활동을 하였다. 신불평원은 빨치산 남부군사령부였으며 배내골 장선리에는 교육도당이 들어서 있었다.지금도 장선리에 가면 그 아픈 상처가 지워지지 않고 있다.그리고 천주교인들은 이곳을 성지라 하여 순례를 자주 하는데 천주교 탄압 당시 많은 신도들이 여기서 은거하며 질그릇을 구워 통도사 신평장이나 표충사 단장장에 내다팔아 의식주를 해결하였던 흔적들이 도처에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울산 배내와 양산 배내를 이어주는 길은 배내천따라 울퉁불퉁 비포장도로에 지나지 않았다. 이 비포장도로가 밀양댐이 들어설 즈음 포장도로로 단장이 되었으니 얼마나 후미진 벽촌이었으랴.영남알프스 높은 묏부리와 북쪽 배내고개, 남쪽 배태고개가 수문장처럼 에워싼 배내골은 두 고개가 아니면 들어가는 길이 없었다.이런 한갓지기 이를 데 없는 배내골은 밀양댐이 생기면서 배태고개 아래 고점에서 북서쪽으로 흐르는 단장천 따라 산허리를 깎아내 우회도로를 만든 것이다.
[수몰된 농암대 맞은편 바위 벼랑에 조성된 농암정-수몰지역민을 위한 망향비가 서 있다.08/5/22]
오늘은 단장천을 따라 물속에 잠긴 농암대를 만나러 간다.10여년 전,배내천과 단장천이 만나는 고점으로 들어가려면 원동으로 해서 배태고개를 넘어가는 길 뿐이었다.언양에서 배내골 북쪽 배내고개를 넘어 이천,백련,장선리,선리,대리를 거쳐 들어오는 길도 있었지만 백련에서 장선리까지는 비포장이라 노선버스도 없었고 승용차로는 어림도 없었다.하지만 요즘은 굳이 배태고개를 넘지 않고 양산 어곡에서 에덴밸리를 넘어 하양대를 거쳐 고점으로 내려서는 도로가 열려 우회하는 수고를 덜어준다.
70년대 중엽부터 나는 원동에서 배내골 장선리까지 하루에 1~2회 있는 노선 버스를 타고 배내골 인근의 산과 계곡을 찾아다녔다.원동 영포에서 고점까지는 비포장도로이어서 버스가 험준한 배태고개를 오를 땐 승객들이 미리 하차하여 고개에서 기다리곤 했다.그뿐이랴.배내골 장선리 막차를 놓치면 원동에서 부산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 원동의 단골기사한테 전화를 넣어 택시를 부르던 그 시절을 회상하니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밀양댐 상류 고점의 단장천-좌측 산허리로 밀양댐 순환도로가 열렸다.08/5/22]
에덴밸리에서 내려오는 도로가에는 펜션들이 즐비하다.그곳의 오폐수가 식수로 쓰이는 밀양댐으로 흘러들 텐데 어찌하여 허가를 해주었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이곳 사람들이 귀점이라 부르는 고점에 다다르자 삼거리가 나온다.직진하면 밀양댐 순환도로,좌회전하면 배태고개를 넘어 원동,우회전하면 고점다리를 거쳐 배내골로 들어가는 길이다.나는 고점다리로 간다.고점다리 아래로 배내천의 물길이 흐르고 건너편 산자락엔 성불암이란 암자가 아직도 있었다.들머리 민가는 사라지고 말았다.
[수몰 전 밀양댐 상류-향로봉이 수즙은 듯 귀를 세우고 있다.]
[배내천(양산 배내)과 단장천(밀양 배내)이 나뉘는 고점교.08/5/22]
[단장천 들머리의 청류와 암반-여기서부터 물길 따라 거닐었다.]
성불암에 차를 주차시키고 시멘트도로를 따라 들어가니 수자원보호를 위해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나온다.그곳에서 바라보는 단장천은 짐작 못한 건 아니지만 너무 변하여 그 옛날 명경지수가 흐르던 곳인지 의아심이 들 지경이었다.댐의 수위가 낮아진 탓에 훤히 드러난 호반의 시커먼 흙과 검푸른 물,물이 빠진 바위에는 메마른 진흙이 달라붙어 보기 흉했다.예전엔 가슴이 뛰놀고 번잡한 머리가 펑 뚫리는 듯한 청량감을 주던 풍광이었는데...더 이상 나갈 수 없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성불암 지나 단장천 첫 굽이 풍경-호반은 검은 색조를 띄고 물은 검푸르다.08/5/22]
성불암 보살이 차를 빼라는 성화에 나는 그만 고점다리를 거쳐 밀양댐 순환도로로 접어들었다.밀양댐이 내려다보일 만한 곳에 이르면 차를 멈추고 디카를 들이댄다.나는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 옛사진을 길잡이 삼아 물길을 거슬러 오른다.첫 굽이를 돌면 지금은 수몰된 덕달마을과 농암대 사이를 가르는 산줄기가 가로막고, 천변에는 기이한 형상의 바위가 출현한다.붉은 색조를 띈 암반 위로 맑디 맑은 물이 때로는 세차게 흐르다 바위를 만나면 소용돌이 치면서 숨을 죽이듯 유유하게 흐른다.한여름이면 뙤약볕에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흐르는 물에 얼굴을 들이대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여름철 폭우가 내리고 난 뒤에는 물길이 너무 빠르고 깊어 감히 건널 수가 없었다.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수량은 차츰 줄어들고 있었으니 그것이 댐을 만들기 위한 단초를 제공했던가.
[댐공사를 하면서 천변엔 도로를 내고 산자락에도 도로공사가 시작되었다.]
[황톳길 너머 개울 한복판에 양산바위와 밀양바위가 보이고...]
[한몸처럼 얼싸안고 있는 양산바위(좌)와 밀양바위(우)]
천변 오른쪽 황토길을 밟고 커다란 바위를 돌면 두 바위가 흡사 한몸처럼 부둥켜안고 있는 양산바위,밀양바위와 만난다.배내천의 물길은 단장천에 제살을 섞지만 그 물길은 본디 하나.사람들이 부르기 좋아 단장천이란 이름으로 일컫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이 두 바위를 양산과 밀양 사람들의 화합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부른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붉으스름하면서도 매끈한 암반,산빛 어린 푸른 물]
[암반 위로 흐르는 맑은 물은 여울져 굽이치고]
[양산바위,밀양바위 지나서 돌아본 단장천]
[오른편 바위 앞쪽 물속에 양산바위와 밀양바위가 있었는데...08/5/22]
밀양댐 순환도로를 따르다 산모롱이를 벗어날 즈음 조망터가 나온다.차에서 내려 거기서 호안까지 비스듬히 내려가는 시멘트도로를 따라 가본다,댐 보수를 위해 샛길을 만든 것일 것이다.그곳에서 처음 내 눈에 들어온 풍경은 내 가슴속에 들어 있던 예전의 풍경을 삽시간에 뒤집어놓는다.사진 오른편 바위가 있는 곳 부근에 양산바위와 밀양바위가 있었을 것이고,그 주변엔 매끈한 암반 위로 섬섬옥수 같은 물길이 유장하게 흘렀을 텐데...지금은 갇힌 물 위로 검푸른 산색이 어려 있다.흘러가는 물을 연상하다 꼼짝없이 정지된 물을 보니,뭔가 처연한 생각이 들었다.이제 단장천이란 이름은 바뀌어야겠다.흐르지 않는 물은 물의 본성을 잃어버리는 것 아닌가.내가 걷고 만졌던 풍경의 대부분은 사라져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당황스러웠다.
그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물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더니 물속에서 고개를 내민 바위에 내려앉는다.예전에는 쉬리,꺽지,버들치,메기를 비롯하여 1급수에 사는 어종을 물론 수달도 볼 수 있었는데,지금 저 물속은 어떤지 참으로 궁금했다.그리고 정들었던 바위는 다 어디로 갔을까.밀양댐 공사로 수몰되기 전 이 일대의 자연석은 밀양시 삼문동 밀양강변을 따라 약 2km 길이로 조성된 한국암각화공원으로 옮겨져 선사시대의 거석문화유물인 선돌형식으로 배치하였다 한다.그곳에 가면 양산바위와 밀양바위를 볼 수 있을까?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자유로울까? 저 외로운 물새.08/5/22]
[호반으로 내려가며 당겨본 밀양댐-건너편 산허리로 농암정~고점간 순환도로가 보이고..08/5/22]
[가까이 당겨본 호반의 바위군 08/5/22]
[저 능선을 타고 향로봉으로 올랐는데...08/5/22]
["배수" 가는 길-왼쪽 천변의 풍광이 빼어났다.]
여기서 농암대 못미쳐 배수 가는 길 양안에는 농짝같은 암장이 치솟아 멋진 풍치를 자랑했다.특히 왼쪽 천변으로 기다란 농짝을 엎어놓은 듯 눈부시게 빛나는 바위와 그 아래 계류는 수심이 깊어 천렵을 하기에 그만이었고,물놀이를 한 뒤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너른 반석에 누워 한나절 보내기엔 최적의 피서지였다.
[천변 오른쪽으로 배수 가는 길이 열렸다.농암대를 상징하는 농짝같은 바위가 눈길을 끈다.]
[배수 가는 천변 풍경-농짝같은 바위가 반쯤 물에 잠긴 모습을 상상해보라!]
[호반까지 내려와 바라본 풍경-저 멀리 농암정 쉼터가 보인다.]
나는 다시 차를 몰아 두번째 조망터에 다다랐다.가드레일을 넘어 흙길을 따라 호반 바투 아래까지 내려갔다.이제 댐의 양안(兩岸)은 서서히 폭이 넓어진다.물길이 오른편으로 휘어지기 전 건너편 천변에는 물에 반쯤 잠긴 암장이 고개를 내민다.
[농암대 가기 전 호반의 폭이 넓은 지점에서]
[순환도로에서 바라본 건너편 호반과 산세-예전 이 근처에 민가가 있었는데 배수라는 곳이다.]
[댐이 들어서면서 예전에 보지 못한 절경이 연출된다.]
다시 도로로 올라와 농암정으로 간다.도로가 급격하게 꺾이는 모롱이에 차를 세우고 농암정이 있는 쉼터와 건너편 물속에 반쯤 잠긴 농암대를 조망한다.댐 왼쪽 호안은 가파른 절벽이 띠를 이루고 있고 오른편 호안도 가파른 산줄기가 쏟아질 듯 물 위로 내려온다.그렇지만 예전에는 산자락 아래에는 넓은 평지가 형성돼 있어 집과 논,밭이 있어 농사를 짓기도 했다.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가뭇하다.이름하여 배수큰골짝이라는 곳으로 단장천이 휘돌아나가면서 물길이 가장 빠른 지점이었다.배수큰골짝(梨川大谷)은 수리덤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양산 배내(梨水)와 맞닿은 큰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인 지명이다.
배수(梨川)를 지나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농암대가 나온다. 단장천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던 곳이다.오른쪽 암벽이 농암대이며 왼쪽 천길 벼랑은 수리덤(鷲崖)이라 하는 농암대 암장으로 현재 농암정이 있는 아랫 부분이다.이 바윗길은 지난 88년 창원 현대중공업산악회가 5개의 루트를 개척하였으나 지금은 수몰되어 아련한 향수를 자아낸다.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천변에 숲이 무성하여 피서를 즐기는 인파로 붐볐던 곳이다.천막을 치고 물놀이를 하기도 하고 천렵을 하며 여름의 폭염을 다스리던 풍경이 아스라히 스쳐지나간다.
[단장천 최고의 절경,농암대(우)와 암벽훈련장이었던 농암대 암장]
[바위꾼들이 즐겨찼던 농암대 암장,수리덤의 헌걸찬 모습-88년 바윗길이 개척되었다]
[20년 전 농암대 건너편 수리덤 풍경-농암정이 저 바위 벼랑 위에 세워졌다.]
[농암정 아래 암벽훈련장-높이 50미터,폭 80미터에 달했다.]
[농암정에서 굽어본 농암대-가운데 돌출된 곳이 농암대인데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당겨본 농암대-반쯤 물에 잠겼다.]
[두 개의 기둥처럼 서 있는 벼랑과 숲 위로 솟은 4개의 바위가 농암대-절반은 물에 잠겼다.]
[숲속에 싸인 농암대-점필재 김종직의 장구지소(丈屨之所)인 유람터였다.]
[점필재를 기려 바위에 새긴 농암대 글씨]
마침내 농암대(籠巖臺)에 다다랐다.밀양댐 수몰지역인 고례천(古禮川) 상류 부근, 즉 사희동(四熙洞) 상류 부근 1km구간의 계곡을 농암대(籠巖臺)라 한다. 계곡 양편에 화강암 바위가 농(籠)과 같이 겹쳐 쌓여진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지금은 농암대 마주 보는 곳에 농암정을 세우고 수몰지역에 대한 사연이 적힌 비가 세워져 있는 쉼터가 있어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 가기도한다.
천길 벼랑이 깎아 세운듯 하고 그 밑에는 수정 같이 맑은 물에 은어 떼가 뛰노는 수석이 빼어난 경승지로서, 조선시대 사림파의 거두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유람했던 곳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九曲飛流激怒雷(구곡비류격노뢰)
落紅無數逐波來(낙홍무수축파래)
半生不識桃源路(반생불식도원로)
今日應遭造物猜(금일응조조물시)
아홉구비 폭포마다 성난 우뢰 부딪치고 낙화는 가이없이 물결 따라 쓸려가네 반생토록 몰랐어라 도원길이 어디멘지 오늘에야 만났거늘 조화옹이 시기하네.
점필재는 조선 전기 문신으로 자는 효관·계온, 호는 점필재. 본관은 선산(善山)이다.고려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풍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문장과 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하였다.절의를 중요시하여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유호인(兪好仁) 등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를 배출시켜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사림학자들이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중국 고사를 인용하여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구실삼아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 등이 1449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一善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이 있다. 530여년 전인 1472년 지리산을 유람한 뒤 쓴 유두류록(遊頭流錄)은 지리산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사후에 복관되었다.
[농암정 하단,수리덤이라는 일컫는 농암대 암장-암벽훈련장으로 쓰였다.]
[농암대(籠巖臺)와 수리덤(鷲崖) 주변을 그린 산수화]
[농암정 가기 전 도로에서 돌아본 밀양댐 상류]
[농암정과 망향비]
[농암정 편액]
[농암정에서 건너다본 향로봉]
[맨 뒤 염수봉(좌)에서 에덴밸리 뒷산(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보인다.]
[댐공사 현장-마지막 백패킹은 저 물길을 따라 걸어갔다.]
마침내 농암정 쉼터에 올라섰다. 이곳에서는 저 아래 농암대가 빤히 내려다보이고 밀양댐의 전모가 눈에 들어온다. 농암대 건너편 암벽훈련장이 있던 수리덤, 그 위 덩덩걸 능선과 농암웃치미(籠巖山上) 사이에 조성된 농암정 쉼터는 이 일대를 조망하는데 최고의 전망대 노릇을 하고 있다.
물에 잠긴 단장천을 따르던 내 여정은 여기서 끝이 났다. 그렇지만 내 마음 속을 줄기차게 적시며 흐르던 그 물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수몰지역 4개 부락민은 평리 모래밭마을로 이주하였으며 실향민의 아픔과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본문에 있는 사진들은 수자원공사 밀양댐관리단,동영상과 다음파이에 들어 있는 20여년 전 옛 사진은 주로 재부고례향우회와 고례초등학교 동문 카페에서 빌어온 것들이다. 이 자리를 빌려 그 분들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 너그러이 양해를 바라며 농암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끝으로 밀양대학교 신문에 실렸던 이광남의 <밀양댐>이란 시를 소개한다.
밀양댐
고례 초등학교 정문 앞 지나면 자동차도 사람도 소도 개울물에 발 담그고 한참 더 가야 사회동 버스종점이다. 오른쪽 언덕빼기에는 대추나무 울 삼아 끝 동네 덕달 마을 옹기종기 보이고 뒷길 돌담 타고 당산나무 돌아서 산길 돌길 밭도랑 논도랑 건너고 가면 물, 돌, 바위가 기막히게 아우러진 농암대다. 영남알프스라는 재약산,능동산,간월산,신불산 골짝 물 흘러내리는 배냇골도 바로 지척이다. 우리들의 사랑스런 아들 사랑스런 딸들이 두고두고 살아갈 물 좋고 인심 좋은 고례땅 댐이 들어선다고 날 벼락 떨어져 집 허물고 길 깔아뭉개 물막이 공사 요란하더니 마을도 성황당도 물레방앗간도 뒷동산도 수몰되어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냉혹한 벅수로 변해 그림 같은 고향땅 추억 속 놀이터 아름다운 사람들 모두 모두 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구나.
[밀양댐 전경 @한국수자원공사 밀양댐관리단]
[수몰 전 농암대 주변 풍경↑]
[수몰지역 추억의 사진첩↓]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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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찌뽀 사진이 너무아름답구나. 덕달은 내아버지의 고향인데 아버지도 떠나시고 고향도 없어지고 그곳을 지날때마다 어린시절 방학때면 찾아가서 물고기 잡고 사희동에서 닭서리 수박서리 하던기억이 아련히 떠오르곤해 스글픈 생각도 들고 찾아가볼 고향이 없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