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설교에서 사라진 단어, 지옥
때문에 사람들은 지옥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특별히 긍정적 사고와, 인간 상호간의 인본주의적 사랑과, 서로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어버린 현 시대에 와서는 강단에서조차 지옥이 선포되지 않고 있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죄악이 늘어나고 죄인들이 많이 있는데도 말이다. 성경은 죄인들이 마땅히 처해야 할 곳이 지옥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옥을 들을 때 사람들이 어떠한 마음을 갖든지 이 진리는 강단에서 선포되어야만 한다. 사실 지옥은 그분의 주된 설교 주제 중 하나였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지옥을 말씀하셨고(마 5:22,29,30), 열두 사도들을 파송하시면서 지옥을 말씀하셨으며(마 10:28), 회개하지 않는 도시에 대해서 지옥으로 저주하셨고(마 11:23), 반석 위에 세워지는 교회를 말씀하시면서도 지옥을 언급하셨다(마 16:18). 위선자들의 처할 곳도 지옥이다(마 23:15,33).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말할 때 사용된 소재도 지옥이고(눅 12:5), 실족시키는 자들에 대한 경고로 지옥을 언급하신 것은 수시로 하셨던 일이다(마 18:9, 막 9:43,45,47). 그래도 지옥을 믿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당시에 실제로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던 부자를 예를 들어서 그 지옥의 실상을 자세히 제시하기도 하셨다.
지옥에 대한 설교 주제는 고전적인 주제다. 역사상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모든 설교자들은 지옥을 설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강단에서 지옥이 사라져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설교자들 스스로가 지옥에 대해 믿지 않거나, 믿더라도 무감각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배불러 있고, 너무나 부유하게 되어 있고, 너무나 세상의 일들과 연루되어 있기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경고는 뒷전으로 물리친 채, 자기 자신과 그들의 회중들에게 다가오는 진노의 불길을 보지 못하고, 한없이 사랑과 웃음의 축제만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지옥이라는 말은 비유가 되어버렸거나, 아니면 단테의 신곡 같은 신화에서나 나오는 말쯤으로 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이 “고통스러운 진리”는 전파되어야 한다. 현대 강단에서 이 지옥에 관한 진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고 더 많이 전파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악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회중가운데 구원받은 사람이 적은 교회일수록 이 진리는 강하게 전파되어야 한다. 부흥회나 수련회 때 일 년에 한 번 정도 설교해서는 안 된다. 한꺼번에 모두 구원받으면 좋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아무리 훌륭한 지옥 설교일지라도, 두어 달 연속으로 지옥을 설교해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필자의 경우는 두 달 연속으로 지옥에 관한 설교를 듣고야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회중이 많을 때 설교자는 지옥에 관한 설교를 자주해야 하며, 초청 시간을 통해서라도 해야 한다.
지옥에 관한 메시지는 아무래도 구원받지 않은 회중들을 위해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구원받은 회중들이 많은 교회라도 지옥에 관한 설교는 해야 한다. 죄에 대한 두려움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보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훨씬 더 심하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지옥에 가지 않지만, 지옥의 실체와 그 두려움에 대해서는 더 잘 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지옥 가지 말라는 설교는 하지 않아도 지옥 자체의 두려움에 대해 전할 때,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더욱 찬양하고 감사하게 될 것이며, 구원받지 못한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열정을 지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라도 죄인들을 지옥으로 던져 버릴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회오리바람 앞의 먼지와 같이 날려 버리시며,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 앞의 마른 검불과도 같이 태워 버리십니다... 지옥의 불길은 이미 여러분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으며, 지옥의 용광로는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여러분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참한 세계, 끝없이 타오르고 있는 유황 불못은 지금 여러분의 발밑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지옥은 입을 크게 벌리고 있고...”
물론 현대인들은 이러한 설교를 싫어한다. 이처럼 무서운 설교로 누가 교회에 남아 있겠냐고 한다. 따라서 교회에 사람이 더 모이고 머물게 하기 위한 “교회성장” 프로그램은 지옥을 배제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육신적이고 감각적인 필요만을 채워주게 되는 것이다.
전도를 한다는 사람들도 지옥에 대한 메시지를 생략한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옥이라는 말을 하여 거부감을 주지 않겠다는 이유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 좋아하며, 예수 믿을 때에 얻는 축복들만을 강조한다. 죄를 말한다 하더라도 간략하게만 말하고, 사랑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만 얼버무리듯 한다. 어디를 봐도 심판과 지옥은 찾아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영리”라는 전도지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연약함은 말하고 있지만, 죄로 인한 형벌로서의 지옥은 제시되지 않는다. 그 외에 교회안내지로 전락해 버린 다른 전도지들은 이루 말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러한 전도지들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보다 못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다음으로 핵심이어야 한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마귀들도 하나님을 믿고 떨기 때문이다(약 2:19).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도 구원과는 상관없으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그분의 역사적 존재나 그분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정도로는 구원과 관계없다.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인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피도 신뢰할 수 없다. 자신의 죄인됨을 느끼지 않고는 구원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고, 죄인이 지옥에서 형벌 받는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는 하늘에 대한 소망도 갖지 못한다. 지옥의 형벌이 없는데 왜 죄의 용서가 필요하며, 어찌 하늘을 소망할 수 있겠는가?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의 교리에 따르면, 죄인은 죽어서 소멸해 버린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구원을 받아야 하며, 왜 그토록 힘들게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이단 종파들을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색하게 되었으니, 기성 교회들 또한 말로만 지옥을 인정하지 실제로는 지옥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때에 이 땅에 교회들은 많고, 교인들은 늘어나고, 큰 교회들은 더욱 커지고 있지만, 지옥이 없는 종교 속에서 그들은 한없이 교회 놀이만 하다가 어느덧 가까이 다가와 자기들을 휘감는 지옥의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상과 죄를 미워해야 하는 것처럼, 하늘을 사모한다면 지옥에 대해서도 경고를 해야 할 것이다.
부정적인 진리가 없이 긍정적인 진리만 있는 종교는 사탄의 종교다. 그렇다. 지옥에 대한 진리는 부정적인 진리일 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진리”이다. 하지만 이 진리를 전파하여 경고하지 않는 기독교는 결국 마귀와 그의 천사들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 버릴 사탄의 종교일 뿐이다. 김기준 / 킹제임스성경신학대학 교수 |
출처: 마지막 때의 진리(眞理) 원문보기 글쓴이: 아이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