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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낭백수좌 조엄이야기
* 이 글은 한국불교사 과제물로 제출했던 레포트입니다. 각주 부분은 삭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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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초파일 방학이 있어 주말까지 넉넉하게 시간이 있던 5월 둘째주, 필자는 출가본사인 부산의 범어사를 찾았다. 필자는 범어사 강원에서 사미시절을 보냈으므로 어른스님들로부터 이런저런 범어사관련 설화를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조사의 스승인 명학 동지스님과의 인과응보 이야기와 금정산의 女山神 고당 할매의 전설 등이었다. 한국불교사 과제물로 조선중기 英祖때 극심했던 범어사의 부역과 조세를 탕감해준 조엄(趙曮)을 기념한 사적비(事蹟碑)인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曮革祛寺幣永世不忘壇)과 그와 관련된 하마비(下馬碑)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불망단비(不忘壇碑)를 조사한 후 다른 비명(碑銘)은 없을까하여 碑林 등을 살펴보았으나 의외로 천년고찰인 범어사에 일제침략기 이전의 비명(碑銘)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대웅전 앞의 탑이나 석등, 일주문은 조선시대를 비롯해 신라까지 연대가 올라가지만 비명만은 연고를 알수는 없지만 대부분 일제침략기에 세운 것들이었다.
본문
조엄(趙曮)은 낭백수좌(朗白首座)의 후신으로써 한양의 명문가인 풍양(豊壤) 조씨 상경(趙商絅 1681~1746)의 아들로 태어나 전생의 서원을 펼친 인물이다. 먼저 그와 관련된 인연담을 살펴보고 불망단비(不忘壇碑)를 주석하고 조엄이라는 인물에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세간에 낭백수좌(朗白首座) 또는 만행수좌(萬行首座)로 알려진 스님은 본래 범어사(梵魚寺)의 낙안선사(樂安禪師)를 부르는 別稱이다. 禪師나 首座라는 호칭으로 볼 때 주로 禪을 닦으며 수행해 나가셨던 스님으로 보인다. 禪師는 어린나이에 범어사에 入山出家하여 곧은 뜻과 信心을 가지고 修行精進하다가 三輪淸淨의 無住相布施의 큰 願力을 남은 일생의 수행으로 삼아 닦아나가길 서원하고 생의 마지막까지 실천하시다가 자신의 육신마져 호랑이에게 보시하며 생을 마감하신 스님이다.
朝鮮時代에는 불교가 고려시대의 國敎로써 위용과는 정반대로 숭유억불정책(崇儒排佛政策)으로 받은 박해(迫害)는 언설로 모두 형언할 수 없으며 특히 樂安禪師가 梵魚寺에서 修行에 精進하던 때인 조선 中期에 이르러 불교계의 핍박은 더욱 심해졌다. 스님들의 신분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천민의 대우를 받고 불교를 핍박하기 위하여 사찰에 부여된 부역(賦役)의 종류만해도 종이, 붓, 노끈, 짚신, 지게제작 등을 비롯하여 수 백가지에 달하였다. 철마다 낭백스님이 계시던 梵魚寺에 부여된 부역의 종류만도 36종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 무렵의 스님들은 자신들의 공부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일생을 朝廷및 지방관청에서 부과한 부역에 從事하기에 바빴다.
樂安禪師는 당시의 이러한 사정을 뼈아프게 느끼면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스님들이 이러한 賦役을 면하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布施行을 통해 모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보살피며, 來生에 다시 태어나면 朝廷의 고위 관리가 되어 관리의 특권으로 梵魚寺 스님들의 賦役을 혁파하리라.’ 하고 그날부터 호랑이에게 육신마저 보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無住相布施의 큰 願行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樂安禪師는 이러한 심원한 원력을 품고 당시 동래(東萊)로 들어오고 나가는 길목인 지금의 부산 금정구청(釜山 金井區廳)이 있는 기찰(機察)에 가서, 반송(盤松) 밑에 우물을 파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食水를 제공하고, 피로한 사람은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가도록 하였다. 또한 지금의 기장(機張)으로 넘어가는 칼치재(刀魚嶺)에다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짚신을 삼아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짚신을 施主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낫들(東萊溫川)에서는 밭을 일구어 수박과 오이 등을 심어 오가는 사람들의 기갈(飢渴)을 면하도록 수박과 오이를 布施하였다. 이와 같이 禪師는 일생을 난행고행의 無住相布施를 행하였다.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안 선사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마저 布施하기로 결심하고 梵魚寺 뒷산의 성지약수터 밀림 속으로 들어가 三日三夜를 露宿하면서 헤매다 결국은 굶주린 호랑이에게 육신을 보시하고 흔적없이 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禪師는 열반하시기 전에 대중들이 선사가 환생한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세 가지의 證明할 일을 남겨놓기로 했다. 첫째는 還生하여서 朝廷의 高位官吏가 되어 梵魚寺를 찾아올 때는 모든 官吏가 다 一柱門 앞에서 말에 내리지만, 자신은 魚山橋 앞에서 내릴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쓰던 방문을 封해 두었다가 스님 스스로가 문을 열 것이며, 셋째로는 寺刹의 어려움을 물어서 해결할 것을 약속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禪師가 쓰던 방문에 “開門者是閉門人(이 문을 닫는 자가
樂安禪師가 돌아가시고 수 십년이 흐른 어느 날,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부임(赴任)해온 조엄(趙曮 1719-1777, 朝鮮 英祖 때의 文臣)公이 梵魚寺에 參拜하러 온다는 전갈을 받고 당시의 상례대로 寺刹의 모든 大衆들이 魚山橋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기다렸다. 그러나 동래부사 조엄 공은 一柱門까지 말을 타고 올라가는 常例를 깨고 魚山橋 앞에 와서 말에서 내려(下馬碑의 위치가 지금의 자리에게 있게된 연유, 기록과 현 위치와는 차이가 난다.) 대웅전에 올라 부처님께 參拜를 드리고 경내를 자세히 둘러본 뒤, 예전에 樂安禪師가 쓰던 방문 앞에 가서 몇십 년의 세월 속에 얼룩져 있었던 “開門者是閉門人”이란 禪師의 유묵(遺墨)을 떼어내고 방문을 스스로 열었다 한다. 그리고는 사찰의 고충을 묻고 36종의 賦役을 혁파(革罷)해 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 경상감사(慶尙監司)에게 공문을 올려 施行케 하였다고 하는 인연담이 범어사에 전해 온다.
이상과 같이 범어사에서 내려오는 인연담의 증좌(證左)가 되는 것이 지금 범어사 어산교에서 매표소를 지나 도로 위 산 길로 500m쯤 내려가면 다섯 개의 碑石이 있는데, 그 중에 가운데있는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曮革祛寺弊永世不忘壇)’ 이란 壇碑가 바로 그것이다. 이 壇碑는 朝鮮 純祖 8년(1908) 8월에 趙曮公의 後孫인 조중려(趙重呂)가 범어사의 要請에 의하여 써준 碑文으로서, 경상감사 조엄公이 절의 弊端을 제거하여 준 것에대한 은공(恩功)을 길이 잊지 못한다는 뜻의 壇碑이다. 碑文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公은 乾隆 丁丑(朝鮮 英祖 33年(1757년)) 가을(七月)에 東萊府使로 赴任하여 境內에 있는 절들이 모두 山城防衛를 위하여 조잔(彫殘) 하였으므로, 먼저 府中의 여러 弊端을 제거하고, 三年 後 己卯年에 慶尙監司로 赴任하여 東萊府 내에 있는 각 寺刹의 義僧番債와 梵魚寺에서 납부하는 左手營紙倉錢報鑄司(좌수영지창전보주사)를 革罷한 뒤, 무릇 修營의 責役을 영구히 一切減制 하도록 하였다. 이미 쇠잔한 寺刹을 구하고 百姓을 救恤한 餘澤이 가난한 僧侶들에게도 미쳤다. 그 성한 德을 날이 갈수록 잊지 못하여 따로 壇을 설하고 길이 頌祝하는 뜻을 표한다.’
민간신앙으로 조엄公의 不忘壇碑에는 비석 옆에 있는 석담(昔譚)의 우물로 일년에 두 차례(음력 2월, 10월)씩 公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내며, 밤 기도를 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주요 업적으로는 동래 충렬사(忠烈祠)에 윤공단(尹公壇)을 세운 것, 범어사의 부역을 없앤 일, 무역대금으로 쓰이던 목면(木綿, 무명)대신 돈으로 지급하게 한 일, 3개 조창(漕倉)을 증설하여 조운(漕運)의 폐단을 개혁한 일, 고구마와 감자를 전래한 일과 일본의 문물을 들여온 일 등이 있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1770년(영조 46) 평안도 감찰사로 나아갔으나 정언 송취행(正言 宋聚行)의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혐의가 풀려 다시 대사간,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그러나 1776년에는 홍국영(洪國榮)의 무고를 받아 평안북도 위원(渭原)으로 유배되었다가 아들 조진관(趙鎭寬)의 직소(直訴)로 죽음을 면하고 김해로 옮겼다가 이듬해 병사하였다. 그 후 후손들의 노력으로 신원(伸冤)되고 1814년(순조 14) 좌찬성(左贊成)에 추종되었다.
英祖를 보좌하여 산업 발전과 재정의 충실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던 그의 시호는 문익공(文翼公)이며, 저서로는 『해사일기(海槎日記)』‧『해행총재(海行摠載)』‧『풍양조씨세록(豊壤趙氏世錄)』등이 있으며, 그의 장손인 조만영(趙萬永, 1776~1846년)은 신정왕후의 아버지이다. 신정왕후는 24대 임금 헌종을 낳은 분으로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의 부인이며 흔히 조대비라 불린다. 그의 집안은 외척으로 19세기 최고의 세도가문으로 자리한다.
나가는 글
이번 조사를 통해 낭백수좌(朗白首座)와 그 후신으로써 조엄이 전생의 서원을 펼친 인연담과 불망단비(不忘壇碑)를 주석하고 더불어 조엄이라는 인물에대해 알아보았다. 낭백스님의 보시를 통한 보살행과 생을 바꿔가며 조엄이라는 몸을 받아 펼친 또 다른 재가인으로써 보살행은 승속의 경계를 벗어난 원력의 보살행이 아닐수 없으며 불법을 수호하기위한 호법행이기도하다. 더불어 조선 초부터 시작된 숭유억불정책으로 핍박받으며 살아갔던 조선조의 스님들의 실상에대해서도 여러모로 알게 되었다. 조선 중기에는 낭백스님뿐만 아니라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통해 불교의 위상을 올리려했던 보우(普雨)스님과 숙종 재위시 파계사(把溪寺)의 도승(道僧)인 영원(靈源)스님의 인연설화와같이 뜻있는 스님들이 불교를 보호하고자 목숨을 바쳐가며 호법행을 해왔던 것도 더불어 살펴보게 되었다. 호법을 위해 혼신을 바쳤던 과거의 역대 조사 스님들과 무명의 스님들, 또 이 시대를 살아가며 불법의 보호를 위해 치열한 구법행을 하시는 스님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갈음한다.
[범어사 일주문 앞 하마비] - 조엄공이 이 자리에서 말을 내렸다.
[범어사 어산교] - 어산교의 옛 형태는 홍예교(虹霓橋) 형태였다고 한다.
가운데 있는 것이 조엄공의 불망단비이다.
[조엄공의 불망단비]
[조엄공의 영정]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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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낭백수좌와 조엄이야기를 드래그 복사해 모셔 갑니다. 감사합니다. 돌이켜 보건대 벌써 70에 가까운 나이에 20대 젊은 시절에 범어사 강원에 사미과 반장 사집과 이수 하던 그시절에 떠오릅니다. 그날 배운거를 그날 외우면서 경전을 외우던 때가 기억납니다. 저는 평생을 내전 학문과 외전 학문을 정진하면서 그저 학문정진에 평생을 보냈습니다. 60이 넘으면 학문정진도 체력전이기 때문에 55세에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행정학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하고 만 6년만에 2020년도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불교의 사활은 젊은층 청소년포교를 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것을 각인하고 청소년의 사회복지프로그램 참여가 우울감 및 정서불안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동국대학교 서울본교에서 2020년도 8월 가을학기에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취득이 너무나 어려워 몇번이나 그만 두려고 하였으나 쌍계사 은사스님과 석왕사에서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복사하면서 꼭 박사학위까지 공부하라던 은사스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학문정진 했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서울에서 저의 불미했던 소식을 듣고 몇일을 공양을 안드시고 입술이 퉁퉁붓고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너무나 가슴과 마음이 아파서 제가 너무나 은사스님께 불효상좌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박사학위 논문을 은사스님께 올리고 은해사 승가대학원에서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던 무비큰스님께 올리면서 그저 공부에만 전념하다보니 분한신고도 제대로 못하고 했지만 승려생활에 50여년 하면서 단한번이라도 수행자의 본분에서 벗어난 일을 한적이 없습니다. 강령하시기를 기원하면서 이만 가름합니다.
다음생에는 대승학인의 인연을 맺기를 사무치게 간절히 빌고 빌면서 기원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