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 센 총리가 주도해 발생했던 "캄보디아 1997년 쿠테타"는 현재의 캄보디아 집권세력에게 사실상 결정적 승리를 안겨다 중 사건인 동시에, 1991년 이후 국제사회가 캄보디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지원했던 모든 노력을 무시한 폭거였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가능케해주는 자료는 별로 없는 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콩넷"(Mekong Network)에 기고한 브루스 샤프의 아티클은 이 사건에 대한 개괄적 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본 게시물은 그의 "메콩넷" 기고문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완역한 것이다. 원래의 기고문은 1997년에 최초 작성된 후 1998년에 개정된 것이다. |
작은 푸줏간 : 훈센과 캄보디아인민당
Butchers on a Smaller Scale: Hun Sen and the Cambodian People's Party
기고 : 브루스 샤프 (Bruce Sharp)
1997년 7월 7일 "캄보디아인민당"(CPP)의 지도자 훈 센(Hun Sen) 제2총리는 잔혹한 유혈쿠테타를 일으켜, 제1총리였던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iddh) 왕자의 세력을 쓸어버렸다. 이틀동안의 싸움에서만 최소 58명 이상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했다. 또한 라나릿 왕자의 푼신펙당(FUNCINFEC) 계열 군사력은 궤멸당했다.
(사진: Bert Hoak) 쿠테타 직후 훈센 측 병력이 장악한 프놈펜(뽀쩬똥) 국제공항의 모습.
이 쿠테타가 발발하기 전 수주일 동안은 낙관주의가 대세였다. 크메르루즈(Khmer Rouge) 반군의 지도자 폴 포트(Pol Pot)가 이미 체포됐다는 소문도 있었고, 정부가 이들을 재판에 회부하려 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크메르루즈는 스스로의 폭력과 내분으로 모든 힘을 소진하면서 패배했다.
하지만 캄보디아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들 크메르루즈 살인자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크메르루즈들은 일종의 경품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1980년대를 통해 노로돔 라나릿 왕자의 병력들은 크메르루즈와 동맹관계에 있었고, 이제 다시 그들을 자신들의 세력 안으로 규합하고자 하는듯 보였다. 훈 센은 라니릿 왕자의 세력이 힘을 응축하는 데 대해 두려움을 가졌고, 크메르루즈 세력이 그와 결합하기 전에 분쇄시키기로 마음먹었다.
훈 센은 쿠테타 며칠 전부터 크메르루즈는 살인자들이고 캄보디아 정치에 참여해선 안된다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는 내용적으로 매우 칭찬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이 전직 크메르루즈 군인 출신인 훈 센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우스꽝스런 일이었다. 그가 크메르루즈를 배신한 것도 단지 자신에게 조여들어오는 숙청을 피하기 위한 이유에서였을 뿐이다. 만일 그 숙청이 훈 센 개인에게로 향해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크메르루즈의 학살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을 터였다.
라나릿 왕자를 권력에서 축출한지 며칠 후부터 훈 센 휘하 병력들은 푼신펙당 계열 패잔병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일부 사망자들은 명백하게 고문을 당한 후 살해되었다. 라나릿 왕자 계열 병력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넥 분 처이(Nhiek Bun Chhay: [역주] 현재 부총리)의 경호원 4인은 눈알이 빠진 상태로 살해됐다. 넥 분 처이는 가까스로 도망쳤다.
내무부장관을 역임했던 호 속(Ho Sok)은 훈 센 병력에게 체포되어 있는 동안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라나릿 왕자의 정보 담당 전문가였던 짜우 삼벗(Chau Sambath)의 죽음에 대해서는, CPP측은 "도망치려해서 사살됐다"고 주장했고, 또다른 이들은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푼신펙당 피해자들에 관한 기록영상 및 후일담 등은 "ABC Australia"가 제작한 다음의 다큐멘타리 동영상을 참조하라. 얼굴을 가린 한 남자는 당시 훈센 측 병력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쳐, 자신의 부인을 살해한 과정을 증언하기도 한다. ☞ 바로가기 "http://www.youtube.com/watch?v=TlmF6TDrDGQ" |
한편 유엔(UN)은 쿠테타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고문을 당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구타를 당하거나 물고문을 받았고, 일부는 벤치 등으로 손가락에 고통을 받기도 했다. 어떤 경우엔 가로×세로 6피트×20피트 크기의 폐쇄된 공간에 30명이 구금되기도 했다.
크메르루즈 집권기를 연상시키는 분위기 하에서, CPP는 푼신펙 당원들을 살해했다는 보고들을 부인했다. CPP는 그들을 "재교육"시키기 위해 보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프놈펜의 각국 대사관들에 공문을 보내, 왕당파(푼신펙당) 당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서 훈 센 측 병력들은 프놈펜 전역에서 전리품을 약탈하며 승리를 자축했다. 심지어는 병원들도 이들의 손길을 피하 수 없었다. 병사들이 약품과 모포는 물론이고 침대까지도 약탈해가버리는 바람에, 병원에는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물품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프놈펜의 "유엔 인권사무소"는 살해 및 고문에 관한 보고서도 발표했다. 그러자 훈 센은 유엔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면서 해당 직원들의 교체를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CPP가 "폴 포트(Pol Pot)-이엥 사리(Ieng Sary) 파벌"로부터 억압당했던 전직 고위 크메르루즈 당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됐다는 점에 대해 보고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을 신뢰하는 이들은, 유엔이 후원한 1993년 제1차 총선거에서 훈 센 측이 패배를 한 상태에서 그나마 제2총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내전 발발 위협을 했기 때문이란 점을 지적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Alan Knight의 글 "Hun Sen and Democracy"를 참조하라.)
이러한 점에 대해 판단이 망설여지는 이들은 이 쿠테타보다 몇달 앞서 발생한 "KNP 집회 수류탄 투척사건"을 다시금 상기해야만 할 것이다. 이 사건으로 18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했다. 수류탄 투척사건 직후, 훈 센은 야당 지도자인 삼 랑시(Sam Rainsy) 씨에 대해 시위를 주동했고 구속돼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공격으로 삼 랑시 씨의 경호원들도 사망했다. 훈 센은 피해자들에 대한 비판을 멈춘 후에는, 크메르루즈가 이 사건을 저질렀다고 했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훈 센의 발언은 옳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들여다보면 크메르루즈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1998년 제2차 총선거는 훈 센이 합법성의 토대를 제공받기 위해 의도한 것이다. 하지만 이 총선은 일종의 어릿광대 놀음이었다. (이 선거의 공정성에 관한 사항에 대해서는 "휴먼라이츠워치 1998년 캄보디아 인권상황 보고서"를 참조하라.) 국제사회는 캄보디아에 대한 인내심을 모두 소진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캄보디아 문제에서 자신들의 손을 씻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선거에 대해 국제적 업저버들은 앞을 다퉈 "합법적"이라고 선언하면서, 심지어는 그 투표결과 집계가 끝나기도 전에 자신들의 입장발표를 서두르고 있다.
유엔이 1993년 총선에 대한 감독에 실패하고 1997년 쿠테타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국제사회가 단순하게 한쪽의 승리를 선언함으로써 회피하고자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수십년간의 전쟁과 폭력이 발생한 후에야 크메르루즈는 사라졌다. 크메르루즈는 무자비하면서 어리석은 정파였다. 하지만 훈 센은 무자비하면서 영리한 인물이다. <솔트레이크 트리뷴>(Salt Lake Tribune) 지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 캄보디아 출신 학자인 스테펜 헤더(Stephen Heder)는 훈 센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평가했다.
그는 유능한 정치적 행정가인 동시에 무자비한 정치적 범죄자이다. |
확실히, 캄보디아인의 관점이 더 나아 보인다.
글쓴이 : 브루스 샤프 (Bruce Sharp)
브루스 샤프는 온라인 사이트 "메콩넷"(Mekong Network: http://www.mekong.net)의 창립자이다. "메콩넷"은 최초 버어마 민주화를 지원하기 위한 영어권 사이트로 출발했지만, 현재는 메콩강 유역 각국에 대한 정보도 함께 전달하고 있다.
브루스 샤프는 현재 미국 시카고의 오래된 집에서 아내와 두 자녀, 그리고 3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의 네트워크 관리자인 동시에, 여가를 활용해 "메콩넷" 사이트를 관리하고 있다.
브루스 샤프는 사진작가이기도 한데, 그의 작품들은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시카고의 <선 타임스>(Sun-Times) 및 <리더스>(Reader) 등에 게재되었다. 그가 캄보디아에서 촬영한 작품들은 사학자 데이빗 챈들러(David Chandler)가 저술한 폴 포트(Pol Pot) 전기 <브라더 넘버 원>(Brother Number One)과 리차드 룬(Richard Lunn)의 책 <영년에서 벗어나기>(Leaving Year Zero)에도 삽입되었다.
샤프는 작가로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 지를 비롯한 여러 신문과 저널들에 기고하기도 했다.
샤프는 1987년 "일리노이 캄보디아인 연합회"(Cambodian Association of Illinois) 및 "동남아시아 센터"(Southeast Asia Center)를 위해 난민들에 대한 상담을 해주기 시작하면서 캄보디아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현재 이와 관련된 몇편의 장편 및 단편 소설들을 집필중이다.
연락처 : cambodia@aol.com
브루스 샤프의 자화상 사진. (1983년 시카고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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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내용은 2010년 7월 5일에 추가되었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해당 항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
1997년 캄보디아 쿠테타
1997 clashes in Cambodia
1997년 캄보디아 무력충돌 사건
1997 clashes in Cambodia |
일시 |
1997년 7월 5일 ~ 1997-8월 |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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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프놈펜을 중심. 하지만 삼로웅(Samrong), 시소폰(Sisophon), 빠일른(Pailin), 오스맛(O'Smach)에서도 충돌이 있었다. |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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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센 제2총리 측이 승리하여 노로돔 라나릿 제1총리를 권력에서 축출했다. | |
교전 정파들 |
훈센의 CPP,
베트남(주1) |
노로돔 라나릿의 푼신펙당 |
크메르루즈
(주로 북부 지방에서 참전)(주2) |
지휘관 |
훈 센 |
노로돔 라나릿
넥 분 처이
세레이 꼬살
(Serei Kosal)
- 밧덤벙 도에서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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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자 및 실종 |
알려진 바 없음 |
푼신펙 측 인사 약 40명이 사살당함.(주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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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캄보디아 무력충돌 사건"(1997 clashes in Cambodia)은 --- 특히 훈센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더욱 --- "1997년 캄보디아 쿠테타"(1997 coup in Cambodia)라고도 부른다. 이 충돌의 결과로 공동 제2총리였던 훈 센(Hun Sen)이 제1총리였던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iddh) 왕자를 권력에서 축출시킬 수 있었다. 이 충돌과정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이 살해되기도 했다.
1. 사건의 배경
1992년 3월 16일, 아카시 야스시(Yasushi Akashi, 明石 康) 우엔사무총장 특별대표와 호주 출신의 존 샌더슨(John Sanderson) 중장이 이끄는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의 지원 하에, 캄보디아는 평화정착과정을 시작했다. 이는 1991년에 조인된 <파리평화협정>에 따른 후속 과정이었고, 1993년에는 최초의 총선거도 실시됐다.
하지만 크메르루즈(Khmer Rouge) 반군들은 단 한차례도 무장해제 작업에 동참한 적도 없는 상태에서, 전국의 10-15% 면적의 지역에서 6% 정도의 인구를 관할하면서, 일부 국민들이 이 총선거에 참여하는 일을 방해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3년 5월 유권자의 약 90%에 달하는 400만명이 투표에 참가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이 선거에서 노로돔 라나릿 왕자가 이끈 왕당파 "푼신펙당"(FUNCINPEC Party)이 45.5%를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고, 과거 공산당이었던 훈센의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제2당, 그리고 손 산(Son Sann)이 이끈 중도 공화파 "불교 자유민주당"(BLDP)이 제3당이 되었다.
"푼신팩당"은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권력을 포기하길 바라지 않는 훈센의 CPP와 연립정부 구성 협상을 벌여야만 했다.(주4) 결국 협상을 통해 노로돔 라나릿 총재는 제1총리를 맡고 훈센은 제2총리를 맡기로 하여 "캄보디아 왕국 정부"(RCG)가 구성되었다. |
2. 정파간 싸움
1997년 연립여당 내에서 노로돔 라나릿 왕자를 지지하는 푼신펙 지지자들과 훈센의 CPP 지지자들 사이에 파벌싸움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 사건에 대해 언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실력자 훈센이 일으킨 유혈 쿠테타"(bloody coup by strongman Hun Sen)로 보도했고, 일부 학자들 역시 그와 같이 표현했다.(주5) 하지만 이 사건의 원인 및 전개과정에 대한 심도있고 중립적인 연구는 행해지지 않았다.(주6)
당시 드물게도 양측 당사자 모두로부터 증거들을 수집하려 했던 사람은 캄보디아주재 호주대사 토니 케빈(Tony Kevin)(주7)이었고, 언론인 배리 웨인(Barry Wain)은 "이 사건의 정황은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훈센의 군대가...... 라나릿 왕자 측의 군대를 프놈펜에서 격파했다"(주8)고 적었다. 토마스 함마버그(Thomas Hammarberg) 캄보디아 주재 유엔 인권특별대표는 1997년 10월 유엔 총회에서 보고하는 가운데, 7월 5-6일 사이에 발생한 사건은 "쿠테타"(coup d'état)였음을 분명하게 표명했다.(주9)
이후 이 폭력사태에 대한 원인으로서, 1993년의 권력분점 협정에 따라 생성된 "2중 권력"(dual power)이 CPP로 하여금 권력구조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허용했다는 점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에 따라 공식적 집권당 중 하나였던 "푼신펙당"은 야당인 "삼랑시당"(SRP)과 연합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주10)
이후 경쟁을 시작한 양측은 평화정착 과정에서 이탈해있던 크메르루즈 반군 세력을 서로 자파로 영입하려 한다며 상호 비난을 해댔다. 훈센은 라나릿 왕자 측이 프놈펜에 잠입해 들어온 크메르루즈와 손잡고 권력을 독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서 비난해댔다. 하지만 훈센 측이야말로 실제로 많은 수의 전직 크메르루즈 출신들이 포진해있었다.(주11) 그러나 왕당파 병력이 프놈펜에서 패퇴한 후 북부지방으로 후퇴하여, 1997년 8월까지 이어진 훈센 측 군대의 공격에 저항하고 있을 때는, 실제로 푼신펙-크메르루즈 연합 병력이 일부 존재하기도 했다.(주12)
훈센이 정권을 장악하자, 라나릿 왕자는 파리로 망명을 떠났다. 일부 푼신펙당 간부들은 강제로 축국조치 당해 망명을 떠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살됐다. 웅 후옷(Ung Huot)의 경우엔 새로운 제1총리로 지명되기도 했다.
푼신펙당 지도자들은 1998년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다시금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이 선거에서는 CPP가 41%를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고, 푼신펙당은 32%를 획득하여 제2당, 그리고 13%를 획득한 삼랑시당(SRP)이 제3당이 되었다. 여러 해외 업저버들은 이 선거가 정치적 폭력과 위협, 그리고 언론 접촉기회 부족 등에서 심각한 결함을 지닌 선거였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CPP와 푼신펙당은 CPP를 우세한 지위로 하는 새로운 연립정권을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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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카페에서 늘 구멍이 난 것 같아 찝찝했던 부분인데, 오늘에야 제대로 된 게시물로 교체합니다...
1997년 쿠테타를 글만 무성했지 그 배경과 전개과정이 없어 답답했는데, 비판적 시각으로 잘 정리된 기고입니다. 한국 교수님이 쓴 글하고는 품격이 다릅니다.
답답했던 것들이 확 뚤리는 기분입니다. 카페지기의 능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추가내용] 2010-5-7 위키피디아 영문판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이 쿠테타의 성격에 대해 생각을 해보더라도, 오늘날의 훈센이란 독재자가 출현하게 된 데는, 아무래도 노로돔 라나릿 왕자 역시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네요.. 힘 좀 있을 때, 제대로 해서 민주세력들을 좀 제대로 이끌었다면 캄보디아가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텐데.. 이거 당시에 같이 해먹어버렸으니 말이죠...
삼랑시 총재가 오죽 했으면 뛰쳐나왔겠냔 말이죠..
이 쿠테타 나기 바로 반년 전쯤에
무 서쿠 여사랑 푼신펙 탈당해서 만든게
오늘날의 삼랑시당이란 말이죠...
역시 왕족 출신들의 한계일런지...
참...
캄보디아 관련 모 대형 사이트 운영자는
훈센 씨를 "경제발전의 지도자 운운"..
아직도 뭐 이따위 표현을 했던데
참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나오더군요...
그러고도 어디 가서는
캄보디아 전문가라고 자칭할거란 말이죠..
G20 의장국 한국인들이
동남아 관련 사이트와 언론에서들 하는 행태들 보면
참 한심해서 논평할 마음조차 안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