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사라진 기독교의 흔적 스며든 경교 문화 (석가의 글이 아니라 경교전파자의 글로 추정된다는 점과 함께) 근래 서서히 제기된 고대사회연구의 보기엔 5c-7c 사이 중국에 전해진 경교에 상당한 관심이 집중된다. (경교& 동방정교회) 그런데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7c경 우리나라에 전래될 당시의 글로 추정되는 내용의 발견이 그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중심사상 중에 하나인 예수 재림에 대한 예언이다. 그것이 왜 우리나라 고문서인 나마다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만약 이문서가 사실적 근거를 갖는다면 민족토속신앙과 융합된 근거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소문으로 나돌던 출처가 구례 화엄사로 보여진다. 비록 소실되었다지만 그 출처근거가 있는 - 何時爺蘇來 吾道無油之燈也 - 나마다경 38-8 (구례 화엄사)이 경전의 예언에 의해 곤란을 겪은 구례 화엄사측의 불경의 이 중요 부분을 소실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38-8이라는 기록기법은 누군가의 설정인 것 같지만 기록이 이미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는 것으로 보아 증거 인멸이 더욱 부각되게 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본 지면은 그것의 경로를 그 시대의 유물들과 함께 밝히는 것이고 또 혹 이 경전의 38-8 경이 어딘가에 의해 소실되었거나..또는 누군가 가지고 있을지라도 본 기록은 사학적 조명에 있어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 된다! 특히 경교의 전파당시 불교체제의 모방에 대한 논의는 여러 가능성을 추정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경교의 역사와 실태를 증언해주는 귀중한 사료인 〈대진경교유행중국비 大秦景敎流行中國碑〉에 의하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경교'라고 하게 된 것은 "그 공덕과 효용이 뛰어나게 밝기 때문"이었다. 635년에서 781년(덕종 건중 2)까지 경교의 역사가 이 비문에 수록되어 있다. 경교의 주요경전인 〈서청미시소경 序聽迷詩所經〉·〈세존포세론 世尊布世論〉 등에 의하면, 경교의 중심사상은 일신론적인 신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경교의 찬송문이나 예배서에 해당하는 〈존경 尊經〉과 〈경교삼위몽도찬 景敎三威蒙度讚〉은 엄격하지는 않지만 삼위일체의 교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여덟 편 경교문헌은 동방기독교가 唐代 중국에 들어와 남겨놓은 역사문헌으로 한어기독교상 초기의 자료라고 할 수 있으며, 당연히 중국 국내외학술계와종교계에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오늘날 일본, 중국 및 서방의 학자들이 열심히 노력하여 이들 문헌에 대한 鑑定, 考證, 補闕 등이 대체로 끝났으나 지금까지 完整한 注釋本간행이 없었다. 本 書는 이 방면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한어경교문헌의 기술유형에 대하여 평가·분석을 하였으며, 또한 한어경교문헌에 대해 자세한 주석을 가하였다. 본 서는 크게 양분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導論이고 후반부는 경교문헌에 대한 詮釋이다. 도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경교연구와 경교비문의 사상내용이며, 또 하나는 4편의 경교경문의 사상내용이다. 전자의 세부적인 내용으로는 ① 경교명칭의 유래 ② 경교의 성질 ③ 경교교리의 속성 ④ 경교이전의 동방기독교 ⑤ 경교의 이단문제를 들 수 있다. 경교비의 분석을 위하여 張星峼은 비문을 4부분으로 나누어 보고 있는데, 제1단은 기독교의 大義이고, 제2단은 역대 제왕 치세아래서의 경교의 유행이며, 제3단은 頌詞이고, 제4단은 諸僧 성명이 한자와 시리아문으로 병렬되어 있다고 하였다. 徐宗澤은 이를 더욱 상세하게 분류하여 23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에 의하면 경교는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정통기독교와 가까우며, 이단은 더더욱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후자의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경교비를 제외한 나머지 7편 경교문헌은{서청미시소경},{일신론},{선원지본경}, {지현안락경}은 經文이고 나머지는 頌文이다. {서청미시소경}의 전반부는 경교의 교리를 기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예수의 行傳을 기술하고 있다. 특별히 상제와 부모를 섬기는 외에 제왕을 숭배하고, 효도를 제창하였으며,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동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기존의 종교인 유교, 불교와 습합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일신론}에서는 한 사람에게 한 영혼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지간에는 유일신만이 존재하며, 만물구성의 우주론과 관련하여 천하만물이 地水火風과 神力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풍부한 신학과 철학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으며, 사람이 신체, 영혼, 神識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는데, 劉偉民은 이것을 思維 또는 思想으로 보고, 불교의 五蘊중의 하나인 識蘊과 결부시키고 있다. {선원지본경}은 道(妙道, 奧道)가 가지고 있는 뜻을 제시하였으며, 도는 만물을 능히 포용하며 만물의 心靈이라고 제창하였다. 그리하여 朱謙之는 이 經은 도교신도가 만든 것이고, {老子道德經}을 주석한 것이라고 까지 하였다. {지현안락경}은 불경의 체재를 모방하여 모두 문답체를 사용하고 있다 경교가 중국의 문화적 전통에 적응하려 했던 흔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교회의 명칭을 '경교'라 한 것이나, 성령을 '현풍'(玄風), 교당을 '사'(寺), 수도사를 '승'(僧), 사도를 '승가'(僧伽), 천부를 '천존'(天尊)으로 번역한 것은 중국 전통종교와의 연결성을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唐) 초기에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했던 경교는 당 말기에 이르러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약 400여 년 동안 거의 소멸되었다가 원(元) 때에 일시적으로 재흥하였다. 이때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라는 명칭 대신 '야리가온'(也里可溫)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복음을 섬기는 자'란 뜻을 지닌 몽골어 '아르카운'(Arkaun)을 음역한 것이었다. 당과 삼국, 특히 통일신라와의 밀접한 관계를 근거로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경교가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그리고 몽골과 고려의 교류를 통해 몽골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야리가온 신앙이 고려인들에게 전래되었을 가능성 또한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몇 가지 자료들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1956년 경주 불국사의 돌십자가 그리고 전라남도 해남의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는 동제 십자가, 발해 유적에서 나온 협시보살의 십자가상 그리고 마리아상과 비슷하다는 관음상, 구례 화엄사의 라마다경, 석굴암의 신장과 관음상 나한상 제석천상의 발견과등이 경교의 우리나라 전래 가능성을 부각시켰다.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고든이 이같은 가능성을 제일 먼저 제시했다. 영국의 사학자 골든여사 역시- 한일합방 무렵 한국에 4년간 머물면서 불교사찰을 관찰한 뒤 경교가 한국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즉 그는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의 신장과 관음상 나한상 제석천상 등에서 페르시아의 경교적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 그예이다.. 중국 최대의 ‘석조문고’라는 비림(碑林)은 말 그대로 비석으로 숲을 이룬 박물관인데, 여기에 역대 명필들의 글을 새긴 석비 1095기가 소장되어 있다. 그 중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2호실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다. 781년 세운 이 비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관련 유물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기독교의 전파상을 알려주는 보물이다.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됐다는 돌십자가와 발해 유적에서 나온 협시보살의 십자가상 등 국내 고대 기독교 관련 유물은 경교의 동방 전파와 관련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동전사 연구의 권위자인 골든 여사는 1917년 이 비의 모조품을 금강산 장안사 경내에 세우기도 했다 특별히 구례 화엄사에서 소실된 나마다경은 라마가경을 뜻하는 것으로 경교전래당시의 라마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글이 불교토착화 이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하(何)시(時)야(爺)소(蘇)래(來) 오(吾)도(道)무(無)유(油)지(之)등(燈)야(也) “하시야소래 오도무유지등야” 는 언젠가 예수 오시면 내가 깨달은 도는 기름 없는 등과 같다. 635년, 중국에 들어온 기독교의 한 종파 네스토리아니즘(Nestorianism;경교_景敎)는 당나라(唐) 태종(太宗)때 들어와 (페르시아로부터) 수도 장안(長安)을 중심지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교가 중국에 전래된 태종 정관 9년은 신라시대의 선덕 여왕 2년, 고구려 영류왕 18년, 백제의 우왕 36년에 해당한다. 그 당시 삼국에서는 당에 매년 사절을 보내었고 또 수많은 유학생들이 당으로 건너가 공부하였다. 일본에서는 738년 경교의 이밀(Millis)선교사가 건너간 일이 있었다. 이로 보아 선교사의 경교의 기독교문화가 신라 상류계층에 유행했던 것과 한 시대의 문화속에 스며든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1956년 경주에서는 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 십자가와 구리 십자가 및 마리아 모양의 경교의 몇 가지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는 경교의 신라 시대 전래를 입증하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이로써 기독교의 우리나라 전파 사실이 통일 신라 시대로 거슬로 올라가게 되었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경교에 대해 알아보자! 진시황릉∼병마용 세계 최대 박물관 설계 주목되는 것은 비 의 의장이나 내용에서 동서문명간 융합의 흔적들이다. 의장에서 보면, 비는 상부와 비신, 좌대로 구성된다. 상부는 용이 큰 여의주를 받쳐들고, 그 바로 밑에 십자가가 연꽃과 뜬구름 속에 새겨져 있다. 이것은 기독교(십자가)와 더불어 불교(여의주)와 도교(뜬구름)의 요소가 섞였음을 말해준다. 내용 면에서도 다른 종교와의 융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적지 않은 교리적 개념들이나 용어들을 불교나 유교, 도교에서 빌려다 쓰고 있다. 예컨대, 하느님을 건(乾), 종교를 법, 주교를 법주, 구원을 제도, 사원을 법당이라고 칭하는 식이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데 그 사역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다. 7C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졌다고 말하는 이가 있고 그 이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확실한 것은 통일 신라때 경교가 들어온 증거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우리나라의 토속종교라는 것은 억지이며 기독교는 외래종교라는 선입견은 틀린 것이다 현대에는 사람들이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 절로 들어간다. 그러나 절에 가면 꼭 이 말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당신은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 들어왔지 않습니까? 당신이 정심(淨心)의 자세로 수양할 때에도 당신 마음으로부터 늘 공허함을 주지만 그 공허함을 채워주기 위해 당신을 찾고 계시고 당신 또한 만나기를 갈구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그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정심(淨心) -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자성(自性) 청정의 마음) -참조-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 제임스 패커, '성령을 아는 지식', 홍성사, 2002 |
첫댓글 아주 흥미있는 글입니다. 앞으로 계속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공부할 사안입니다. 위의 글에서 통일 신라에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말은 부정확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미 북한에서는 2-3세기의 기독교 집단 거주지를 발견하였다고 말하고 있고 당태종때 중국에 선교사가 온것도 삼국시대입니다. 문제는 그 기독교가 어디로 숨어버렸는가?를 찾아내는 일이 어렵겠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경교가 네스토리우스파가 아니고 로마 카톨릭과 같다고 주장한 점들입니다. 실제로 로마 카톨릭은 네스토리우스가 주장하지도 않은 것을 주장했다고 선전해왔습니다. 마치 양성론을 주장한 것처럼 뒤집어 씌운 것입니다.
그런데 1895년 발견된 Bazaar Heraclides 는 네스토리우스가 쓴 듯한데, 그 주장과는 전혀 달리 네스토리우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인간의 인성이 하나로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나옵니다. 로마 종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기 위해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마르코 폴로 당시에 로마 카톨릭이 중국에 전도하려 했지만 이 경교 때문에 전도가 불가능하다고 진단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로마 카톨릭과 경교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은 마치 자기네들이 세계에 전도해왔고 자기네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을 강화하는데 로마 카톨릭이 아닌 경교에서도 구원이 있었다면
그들은 근거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교의 문제는 로마 카톨릭으로서는 중대한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당 나라 이후 송나라 시대에서는 경교가 어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송나라 시대에 대우 받았던 것은 분병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왕의 성씨인 송씨를 사용하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들의 집단 거주지가 카이펑(개봉)입니다. 아무튼 역사가 복원되면 많은 것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문헌들에 기독교가 어떻게 남아 있는가? 일 것입니다. 위의 글로 보면 " 현풍 할매 곰탕" 집도 성령 충만한 할매 곰탕집으로 설명되겠습니다.^^ㅎㅎ
홍성사의 책은 항상 주목할만하며 흥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