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교를 다닐 때 아시아 개발은행(AID) 차관으로 학교를 새로 짓고 한 학급당 인원을 당시 보통 60 명에서 서구식으로 40 명을 뽑은 공립종합고교(실업계 인문계 같이 있었던 학교. 기계과 5, 화공과 2, 농업과 1, 인문과 1 학급)의 인문계를 다녔다. 그래서 한학급뿐이다 보니 3년 간 40 명 급우가 한 번도 바뀌지 않고 고스란히 같이 졸업했다. 예민한 청소년기 3년을 같이 지냈으니 자연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는데 대개가 고운정이었다. 그런데 각기 개성이 강하다 보니 민문연 활동에 동참하는 친구는 없다.
더러더러 고교동창 사이트에 민문연 활동을 알린다. 고명하신 친구들이 이런 것도 있으니 한 번 돌아다 보아 주시라고....
아래 글은 그 고교 동창회 사이트에 올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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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5년간 당한 고통을 대대로 대대로 잊지말고 또 잊지말자고 유태인들은 지금도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고 또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몇 십 배의 고통을 당하고도
이를 잊어버리라고 했는데도 잊지 않는 못된 놈이라고
험악질하는 것이 모든 분야의 오늘날 현실이다
= 나라를 판 것은 역적인데 그 역적을 욕하지 않는 것 또한 역적이다. = 심산 김창숙 =
중앙대 노동은 교수 강의를 듣고 알게 된 왜색 노래들.
일본음계는 5음계인데 이에 근거하여 작곡된 노래들은 해방 이후 까지 상당기간동안 일본곡조라 보면 틀림없다.
서양음계는 7음계이다. 음계에는 12음계, 22음계도 있다고 한다. 우리음악은 즉흥적이고 즉흥적인 것은 창의성이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모짜르트의 자장가와 우리 자장가를 비교하면 모짜르트는 공연하기 위한 자장가지만, 우리 어머니들이 실제로 아기를 재우던 "자장~자장~자장~자자앙~ 우리 애기 잘도오~잔다아~"하는 가락은 자연스레 아기가 잠들게 하는 자장가라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그전까지는 일본곡조 투성이였는데 7차 음악 교육과정에 우리 음악이 54%가량 들어왔는데 그나마 이것은 다행이라 한다.
쌔쌔쌔~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가는 저 기러기~~
똑똑똑, 누구십니까? 손님입니다. 들어오세요~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께 새집다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등 우리 전래동요라고 아는 것들~
학교종이 땡땡땡, 송아지, 떳다 떳다 비행기, 고향의 봄 등등 우리가 배운 초등교과서 대부분, 애잔하고 슬픈 곡조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이미자는 왜색이 아니라고 하는데 틀림없는 왜색이다.), 정광태의 독도는 우리땅, 조용필의 노래 중 상당수, 라나에로스포의 서글픈 사랑 등등 대중가요에서 김수철, 서태지 이전의 뽕짝(2/4박자, 3/4박자의 트롯트, 쿵짝~쿵짝~쿵짝짝 쿵짝 등으로 상두드리고 노래부르기 딱좋은 곡들), 엔카 등은 대개는 일본곡조라 보면 된다. 엔카는 1920년대 일본의 자유주의가 꽃피던 시절의 자유음악에서 나온 곡조음계로 이것이 우리 정서와 잘 맞았고 그래서 크게 유행했다.
오가며 그집앞을 지나노라면~~애잔한 바이올린으로 흐르는 현재명, 홍난파, 조두남 등의 가곡 역시 거개가 일본곡조이다.
우리가 고교시절 그렇게 많이 불렀던 "선구자"도 작사자(윤해영), 작곡자(조두남) 모두 친일음악가로 만주일본군영을 찾아다니며 위문공연을 주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이다.
우리가 군대에서 불렀던 수 많은 군가들도 일본군가를 우리 말로 바꾼 것이 대부분이다.
해방전 황수복이라는 여가수는 요즘으로 치면 가요대상 1위를 하고도 친일공연을 하기 싫어 은퇴를 했다. 그런 여가수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애국가는 불가리아의 민요이다.
안익태가 작곡한 곡이 애국가가 아니라 불가리아 민요라는 것이다. 이를 안익태가 작곡한 것인양 했는데.... 불가리아 민요이것에 대한 논란이 있어 불가리아 학자와 우리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불가리아에 가서 직접 그런 민요를 들어보니 사실.... 인터넷 시대 이전에는 이런 것이 밝혀지기가 어려웠겠지만, 인터넷시대가 되니 이런 비교가 쉽게 이뤄진 것이 그나마 밝혀지게 된 계기라 한다.
그런데 안익태가 작곡한 만주환상곡은 일제가 세운 만주제국을 찬양한 환상곡으로 그가 이를 공연하면서 일제를 찬양한 친일음악인데, 해방후 안익태는 "대한민국"이라는 환상곡을 재작곡하면서 여기에 만주환상곡의 5악장 중 2악장이 그대로 들어가게 한 것 "한국환상곡"으로 둔갑하여 애국자인 양 한 것이다.
서양음악 중 그래도 대표적인 음악은 독일음악이고 그 독일이 자랑하는 국민음악가는 "바그너"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유태인을 학살한 것이 독일이라는 이유로 바그너의 음악을 아예 가르지지도 않고 연주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만약 한문연구를 위해서 꼭 바그너 음악을 연주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연주 장소와 일시를 정하여 의회의 승인을 요청하면 의회에서 심사하여 가부를 승인해준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것을 보고 노동은 교수는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국은 민족을 배신하고 적에게 동포를 팔아넘긴 행위를 정신적으로라도 자정하는 자정능력을 잃어버렸다"라고 탄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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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퍼지는 벚꽃심기도 또한 같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것은 일본에서 봤을 때 조선은 일본의 한 섬으로 여기로 통치하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조선 8도를 13도로, 각 도를 시군으로 , 시군을 읍면으로, 읍면을 리동을 개편한 통치조직이다. 이를 완료하고 나서 후에 조선총독 사이토가 전국적으로 벚꽃을 대대적으로 보급했는데 해방후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긋한 일제시대가 꼴도 보기싫어 가고 없는 일본놈을 조지지는 못하고 그놈들이 심은 벚꽃나무를 대대적을 베어 넘김으로써 분한 감정을 달랬다. 그전에는 각 마을에는 복숭아와 매실나무가 많았지 벚꽃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벚꽃의 원산지가 우리 것이라 해도 우리를 괴롭힌 왜놈들의 꽃이고 보기만해도 싫었던 그놈들이 오죽했으랴?
그런데 박정희 전대통령이 진해 군항제에 가서 벚꽃이 좋다고 한 말이 계기가 되어 일본에서 벚나무 묘목 131만 2천그루를 보급받아 대대적으로 심은 것이 지금처럼 벚꽃이 다시 퍼지게된 계기가 되었다. 일본총독이 해방후 물러나면서 벚꽃이 한반도에 다시 넘치게 하겠다는 말이 실현된 것이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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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찌가 유태인을 학살한 것은 300만명인데 유태인들이 말하기를 600만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 숫자가 이미 그정도이면 많고 적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나찌 말기 5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죽었고 우리는 36년동안 400만명이 일제에 의해 죽었다.
그고통은 우리가 훨씬 더 지난하고 힘들었다는 얘기다.
무슨 얘기인가?
우리가 학교 다닐 때 한반에 70명씩(내가 대영중학교 3학년 때 3학년 3반은 74명이었다.) 인 시절, 선생님이 제일 앞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손바닥을 때리면 누가 제일 아픈가? 처음 맞는 사람은 한번 맞으면 그것으로 잊어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아픔은 없다. 그러나 69명의 학생이 다 맞기까지 마지막을 기다리는 70번 째 학생은 69번을 아프고 나서야 자기가 실제로 매를 맞는다.
비유가 적당한지 모르겠는데 우리의 역사는 이 70번째에 해당하는 학생처럼 36년동안 끝없는 고통을 당한 역사인 것이다.
그런데 단 5년간 당한 고통을 대대로 대대로 잊지말고 또 잊지말자고 유태인들은 지금도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고 또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몇십배의 고통을 당하고도 이를 잊어버리라고 했는데도 잊지 않는 못된 놈이라고 험악질하는 것이 모든 분야의 오늘날 현실이다. 오히려 친일배신자들을 연구하는 사람들, 그 연구를 배포, 홍보, 교훈으로 삼자고 하는 사람들을 사갈보듯 하는 것이 그간의 사실이었다. 고통과 고난을 잊고 교훈을 삼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또 겪을 우려가 있다.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