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장막에 거할 자(시 15:1-5)
오늘 생각하게 될 시편 15편은 비록 짧지마는 매우 훌륭한 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 가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시편에서는 “주의 성전”이란 말을 쓰지 않고 “주의 장막”이란 말을 쓴 것을 보면 아직 성전을 건축하지 아니했을 때 쓴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성산”이란 말을 쓴 것으로 보아서 다윗이 법궤를 옮겨 놓은 후에 쓰여진 것 같아 보입니다. 시편 24편 3-6절과 이사야 33장 14-16절의 내용과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세상적인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며 하나님과 주야로 교제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5-17절에 보면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여기서 말하는 장막은 하늘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 하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주께서 인정하시고 특별하고 영원한 은총으로써 면류관을 씌우실 자들이 누구입니까? 이 영예와 이 축복을 받는 것은 혈통에 의해서 이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신 사람이 주의 장막에 유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의 마음과 생활에 따라 그들의 분깃이 정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은 것이나 같은 질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밤중에 기도하고 찬미했더니 뜻밖에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고 고랑이 풀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간수가 잠을 자다가 놀라서 깨어 보니 이렇게 되었단 말입니다. 간수 생각에는 죄수가 다 도망한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옆에 차고 있던 검을 빼서 자살하려 했습니다. 이 때 바울이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도망가지 아니하고 다 여기에 있다” 이 말을 들은 간수는 다시 한 번 놀라서 등불을 켜 가지고 와 보니 정말 죄수들이 다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 때 간수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무릎을 꿇고 하는 말이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장막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성산에 올라갈 수 있습니까?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늘 가는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하며 그의 성령으로부터 지시 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이 장막에 거할 것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교회의 진정 살아 있는 일원으로 간구될 것입니까? 누가 이 장막의 뜰에 거하는 영적인 제사장들 가운데 용납이 될 것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장막과는 상관도 없고 이 장막을 차지할 아무런 권한이 없는 사람들이 이 장막이 자기들의 것인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의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결심과 함께 성경은 우리의 가는 길을 인도하며 양심은 우리의 충실한 권고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 시민의 자격은 어떠합니까? 본문 2절을 같이 보십시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생활을 바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직하게 행하며”라는 말은 “정직하게 걸으며”라고 직역할 수 있는 말인데 이 말은 일반적으로 하나 하나의 행동을 말한다기 보다 그 생활의 경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생활의 경향, 노선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정직하게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올바로 걸어가야 합니다.
욥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욥기 1:1절을 보세요.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루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적해서 마귀에게 말씀하실 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실만 하게 우리가 살고 있습니까?
욥은 아무리 이유 모를 고통과 환난을 당해서도 하나님을 향한 길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그의 아내와 그의 친구들이 욥에게 그런 하나님은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어도 끝내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는 마귀의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잃기 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더욱 커지고 깊어지고 높아지고 분명해졌습니다. 욥기 42:5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고 했습니다.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야고보서 1:12절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을 인내로써 잘 이김으로 우리의 정직히 행함을 증명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17:1절에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게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것은 곧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성경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정직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노아도 그랬습니다. 창세기 6:9절과 2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어떻게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비결은 오직 하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정직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면 자연히 의로워집니다. 우리 스스로 바르게 살려면 힘도 들뿐 아니라 결국은 바로 살 수가 없습니다.
특별한 기술이 없이도 직선을 그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직선으로 된 자를 대고 그 자에 따라 그으면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나 혼자 바로 살고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로 산다고 하여도 절대적으로 바로 살 수는 없습니다. 비교적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나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치는 못합니다. 그러면 완전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정직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바르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따라 살면 틀림없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합시다.
그 다음 “공의를 실천하며” 했습니다. 주님의 장막에 거할 자는 공의를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가서 6:8절에 보면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스바냐 3:5절에도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시면서 “사모하기를 주리고 목마른 자와 같이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보통으로는 누구나 의를 행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목마를 때 물을 찾는 것처럼, 시장 할 때 먹을 것을 구하는 것처럼 간절히 공의를 행하기를 원합니까? 그런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익보다도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의 장막에 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마음에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도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 진실치 못함으로 인해서 당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큽니까? 오늘의 사회에 만연한 불신 풍조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 마음에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고 거짓되게 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는 세상,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하고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하는 부부, 사원이 사장을 믿지 못하고 사장이 사원을 믿을 수 없는 회사, 정부가 국민을 믿을 수 없고 국민이 정부를 믿을 수 없는 사회, 문자 그대로 불행한 사회입니다. 이 나라가 저 나라를 믿지 못하는 세상, 정말 불안한 세상입니다. 진실이 없을 때 불신이 생기게 되고, 불신이 있을 때 자연히 불안해지고, 불안이 있을 때 개인 사이에는 싸움이, 정부와 국민 사이에는 감시와 반란이 일어나며,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안정과 번영을 가져오려면 제일 급선무가 서로 믿을 수 있는 사회를 조성해야 합니다. 정부는 국민 앞에 마음의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미봉책이란 얼마 가지 아니합니다.
진실은 통합니다. 진실하면 오해가 있어도 그 오해는 시간이 가면서 해소됩니다.
그 다음 3절에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했습니다. 주님의 장막에 거할 사람, 하늘 나라의 시민될 사람은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혀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하는 말을 하는 도구인데 그것으로 사람을 해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혀를 바로 사용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3:9-11절을 보세요.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혀는 모든 지체 중에서 가장 편리한 지체이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지체입니다. 이 혀로 자신을 영화롭게도 하고 자신을 욕되게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청년 때 하나님의 사명을 받으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하였습니다. 자신의 혀가 범한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혀가 범하는 죄가 얼마나 많습니까? 잠언 26:9절에 보면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의 손에 가시를 들었으니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가까이하다가는 가시나무로 후려쳐 몸이 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잠언 26:20절에는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고 했습니다. 말쟁이 노릇해서 가는 곳마다 다툼 일으키지 마십시다. 이간 붙이고 다투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잠언 10:19절에 보면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하였습니다. 잠언 6:2절에는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혀로 참소치 아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했습니다. 행악하는 것이나 훼방하는 것이나 결국은 참소하는 데 대한 설명입니다. 벗이 누구입니까? 칼빈 선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듣는 사람이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듣고 계시는 여러분은 다 친구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벗에게 행악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 변치 않아야 합니다. 잠언 17:17절에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고 했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포섭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친구에게 아첨하거나 의뢰하지 말고 희생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친구의 허물을 길러 주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충고해야 합니다.
잠언 27:5-6절에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에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성된 말은 귀에는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 27:9)는 성경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려면 배신하지 말고 끝까지 신용을 지켜야 합니다. 어떤 친구는 처음 사귈 때는 너무 좋게 ㅈ내다가 얼마 후 마지막에는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나아야 합니다. 사귀면 사귈수록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래야 합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했습니다. 여기 ‘망령된 자’는 예레미야 2:13절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사 32:6)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망령된 자는 선택과 행실에서 망령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며 지혜를 찾고 선을 좇는 사람은 그런 사람을 멸시합니다. 망령되게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진수와 그들의 낙을 무가치 한 것으로 여깁니다.
히브리서 11:24-25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했습니다. 주의 장막에 머무를 사람은 세상적으로 여유 있게 살며 그 심령이 망령된 길을 걷는 사람을 오히려 멸시하며 불쌍히 여기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대합니다.” 그들이 흥하면 기뻐하고,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가슴 아파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속적인 이익보다는 항상 선한 양심을 택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떠한 일을 하기로 약속했다면 나중에 손해가 되고 세상 물질의 손해를 본다고 해도 절대로 변심하지 아니합니다. 말하자면 의리를 지키는 생활입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이익 때문에 의리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부당한 일을 해서 그의 재산을 늘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5절에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안전하고 흠없는 자가 되도록 보존하며 유혹이 그를 정복지 못할 것입니다. 환난이 압도하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