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秋史金正喜筆行書作品感想
강신교
이 작품은 간찰의 작은 서체이나 금석학을 바탕으로 한 추사체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重忍陳宇坤筆行書作品感想
重忍 陳宇坤(1896~1966)
중인 진우곤은 화가 진환(陳瓛 1913~1951)의 아버지이고, 유학, 한문학을 두루 섭렵한 예문가이며, 1946년 무장 중학교(현 영선중고)를 설립한 바 있다. 이 작품은 초서체로 글자와 글자 사이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연결되어 있으며 글자의 배열에도 돌출적인 변화를 주어 조형적 미를 느끼게 한다.
一勤天下無難事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百忍堂中有泰和 백번 참은 집에는 큰 화목함이 있다.
貞休堂文順吉筆行書作品感想
정휴당 문순길(1920~2007. 88세)
정휴당 문순길(김용옥 시인의 어머니)은 1920년 김제 출생으로 2007년도에 유명을 달리 했다. 장지는 익산 금마 성결교회 부활묘지이고, 유족으로는 수필가이고 시인인 김용옥으로 3남3년 중 넷째이다. 서울고교에서 서예교사로 16년간 재직했으며 1961년부터 국전에 입선하여 1981년 일본 도쿄 세계미술대전 특선, 한국현재미술대전에서 수상한 바 있다. 행서는 해서와 초서의 중간 형태인데 이 작품은 초서의 매끄러움과 빠른 필치로 써내려간 것이다.
學以精神通廣大 학문을 함으로써 정신이 트게 트이고
家從淸儉足平安 가정에서 청렴과 검소를 따르면 족히 편안 하리라
戊辰立秋貞休堂文順吉 무진입추 정휴당 문순길
如山權甲石筆行書作品感想
如山 權甲石 (1924~2008. 4 향년 85세)
여산 권갑석 선생은 전북 익산 출생으로 국전 초대 작가, 군산 교육장을 지냈으며, 80이 넘도록 ‘내 삶속에 서예는 한 몸이다.’고 하며 붓과 함께 서예교육자의 자화상을 남겼으며, 특히 독자성을 추구한 창작 서체인 ‘如山體’를 이루었다. 초서는 ‘草略한 寫法’이라는 뜻으로 문자를 빠르게 쓰기 위해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미학적인 이유에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여산 권갑석의 이 작품은 필선의 다양한 굵기의 변화가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빠른 붓의 움직임이 잘 느껴지는 작품이다.
문장 해석
이시는 서산대사 휴정스님의 悟道頌인 ‘踏雪野中去’로서,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좋아하신 시로 유명합니다. 근래 일각에서는 조선후기 문신인 ‘이양연’의 시라는 설도 있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辛巳淸和月爲陳錤豊先生淸玩如山權甲石
신사청화월위진기풍선생청완여산권갑석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감에
모름지기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라
또는 “어찌 어지러이 걸어갈 수 있으랴?”
오늘 나의 행적이
마침내는 뒷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
또는 “뒷사람 답습의 길잡이가 될 수도 있으려니…”
신사년 청화월 진기풍선생을 위해 씁니다. 감상해 주세요. 여산 권갑석.
원래 번역은 정답이 없기 때문에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겠구나!’라고 편하게 생각하며 접근해야 한다.
‘悟道頌’ 이란?
원래 고승들이 자신의 깨닳음을 터득한 내용이지 남에게 훈계의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부터 접근해야 한다.
이 글은 자신을 경계한 겸손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기구에서 ‘들판의 눈길’을 등장시켜서
승구에서는 ‘어지러이 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으며
전구에서는 ‘단순한 눈길’에서로부터 ‘행적’으로 반전을 하고
결구에서는 ‘뒷 사람의 이정표’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행적을 경계하고자’하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결구 부분에서
遂(이를 수. ~에 이르다. ~을 따르다)는 ‘답습하다‘,
作(지을 작. 짓다. 일어나다. 일으키다.)은 ‘미치다, 이르다’라는 의미로 볼 때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는 의미가 더 강한 점이 있다고 본다.
不遂는 ‘반드시 ~ 하지 말자’ 라는 의미인데 예를 든다면
勸君金屈卮 滿酌不遂辭 ‘님께 금술잔을 권하오니 넘치는 술잔을 사양치 마소‘라고 해석이 가능하다. ’不遂‘의 의미는 승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勸君金屈卮 滿酌不遂辭 花發多風雨 人生是別離
권군금굴치 만작불수사 화발다풍우 인생시별리
그대에게 이 잔을 권하니
잔이 넘친다고 사양하지 말게
꽃 필 때 비바람 많고
인생에 이별이 많으니.
-于武陵의 勸酒 중에서-
雪松崔圭祥筆行書作品感想
雪松 崔圭祥(1891~1956) 전북 김제 출생으로 초명은 규하, 자는 백심이다. 본관은 전주이며 석정 이정직, 석재 서병오에게서 사사하였고 전주 한묵회를 창립하여 전북 서단에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글씨는 각 서체에 두루 능하였으나 歐陽詢과 顏眞卿의 필체를 체득하여 개성이 넘치는 독특한 글씨로 당시를 풍미하였고 특히 전각에 뛰어나 한말 ‘근역서와징’을 지은 위창 吳世昌이후 전각의 일인자로 일컬어질 정도로 명성이 드높았다. 이 작품은 가늘고 굵은 획이 대비되게 구사된 작품이다.
<문장해석>
寄懷吳水楚山之外 기회오수초산지외
辛卯冬書于完山草堂 雪松散人 신묘동서우완산초당 설송산인
마음을 오나라 물 초나라 산 밖에 기탁한다.
신묘년 겨울 와산초당에서 설송산인이 쓰다.
園丁閔泳翊筆行書作品感想
園丁 閔泳翊(1860~1914)
본관은 驪興, 자는 遇鴻, 子相, 호는 芸梶, 園丁, 千尋竹齋(천심죽제) 등이 있다. 1875년(고종 12)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와 그의 아들이 죽은 뒤 양자로 입양되어, ‘竹洞宮 주인’이 되었다. 1877년(고종 14) 정시문과에 급제했고,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문물을 시찰하고 귀국 후 혜상공국총판, 이조참의, 이조참판, 금위대장, 협판군국사무 등을 역임했다. 고종 폐위 음모로 홍콩에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行書를 잘 썼고 墨蘭에 능하였다. ‘묵란’(간송미술관)과 ‘露根墨蘭’(삼성미술관 리움)이 대표적이며 다수의 사군자가 전하고 있다.
錦秋李南浩筆達摩圖
錦秋 李南浩(1908~2001)
화선지에 수묵담채(64 × 86cm)
금추 이남호는 경북생으로 1943~1944년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총후미술전에 특선하였으며, 1952년에는 심향, 오당과 함께 전주에서 3인전을 갖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다수의 개인전과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중국 북평대학 중국화과에서 수학한 작가이다. 그는 주로 전통 남화에 바탕을 두고 북화풍을 약간 가미한 듯한 한국적 인물 풍속화와 도사풍의 인물을 주로 그린다. 그는 書畫를 겸비한 화가로 평가되는데 이 그림에서도 중앙에 달마를, 좌우편에 畫題를 넣어 화면의 균형을 맞추었다.
菩提達磨 1
다른 표기 언어 : Bodhidharma , 菩提達磨
출생 : 미상
사망 : 미상
국적 : 인도
중국 선종(禪宗)의 개조(開祖)로 일컬어진다.
보리달마는 남인도 마드라스(지금의 첸나이) 근처 칸치푸람 출신으로 520년 중국 광저우[廣州]에 도착했다.
그해 10월에 선행으로 이름높았던 양(梁)나라 무제(武帝)와 만났는데, 보리달마는 선한 행위를 쌓음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고 해 황제를 당혹케 했다. 그뒤 보리달마는 뤄양으로 가서 사오린사[少林寺]의 동굴에서 매일 벽을 향해 앉아 9년 동안이나 좌선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오랜 기간 깊은 선정을 닦았음을 말해주는 설화일 뿐이라고 믿고 있다. 보리달마는 부처로부터는 28번째의 조사(祖師)로 여겨지고, 중국 선종(禪宗)에서는 초조(初祖)로 간주된다.
보리달마는 부처의 심적 가르침에 돌아가는 방법으로 선(禪)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일파를 선종이라고 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을 알기 위한 자료 중 가장 신뢰할 수 있고 가장 오래된 자료는 제자 담림(曇林)이 기술한 〈약변대승입도사행론서 略弁大乘入道四行論序〉이다.
담림은 이 글에서 스승 보리달마의 선법(禪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도에 들어가는 데에는 많은 방법이 있지만, 결국은 이(理)로부터 들어가는 것(理入)과 행(行)으로부터 들어가는 것(行入)의 2가지로 귀결된다. '이'에서 들어가는 것은 경전에 의해서 그 근본정신을 파악하고 무릇 살아 있는 것 모두의 평등한 본성을 믿어, 벽과 같이 스스로의 마음을 관(觀)해 자신과 상대가 둘이 아님을 깨닫고, 진실의 도리와 명합(冥合)해 차별 없이 적연무위(寂然無爲)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행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은 보원행(報怨行)·수연행(隨緣行)·무소구행(無所求行)·칭법행(稱法行)의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⓵ 우선 보원행이라고 하는 것은 현세 생활의 여러 가지 원망과 증오 및 고통과 번뇌는 모두 자신의 과거의 업보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보아 참고 받아들이면서 인간 본래의 도에 힘쓰는 것,
⓶ 2번째 수연행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은 인연에 따라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업보의 인연에 의한 것으로 인연이 다하면 모두 무(無)로 된다는 것에 관해, 순역(順逆)의 인연에 입각해서 도에 들어맞게 하는 것,
⓷ 3번째의 무소구행은 가치를 밖에서 추구하고 집착하는 것을 그치며 추구함을 없애는 데 철저하고자 하는 것,
⓸ 4번째의 칭법행은 일체 중생이 모두 본래 청정하다고 하는 이법(理法)을 믿고 이 이법에 맞도록 끊임없이 6바라밀(六波羅密)을 닦아나가되 이 6바라밀을 닦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얻을 바 없는 무소득(無所得)으로 철저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 설명은 매우 간명하면서도 곧고 적절하다. 끊임없이 수행하고 노력하면서도 수행과 노력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심오한 반야의 공관(空觀)에 투철한 것이요, 착실하고 구체적인 현실의 행동을 지시하고 있는 것은 부처 이래의 선법에 충실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이 이처럼 비교적 뚜렷한 반면 그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설화적이다.
그러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⓵ 어느 날 그는 선정 도중에 잠들어버린 것에 화가 나서 자신의 눈꺼풀을 잘라 내버렸다. 그런데 그 눈꺼풀이 땅에 떨어지자 자라기 시작하더니 최초의 차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선사(禪師)들이 선정 중에 깨어 있기 위해 차를 마시는 것에 대한 전통적인 근거를 제시해준다.
⓶ 달마대사는 인도 불교의 28대 교주였다고 해요~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 불교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전한 훌륭한 스님인데요, 원래는 아주 멋진 외모를 가진 인도 소왕국의 왕자였지만 출가한 뒤 자기의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왔다고 합니다.
어느 날 달마대사가 마을을 지나는데 커다란 뱀이 죽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더래요. 하지만 뱀이 죽은 곳이 집채만 한 바윗덩이가 맞물려 있는 바위틈이라 누구도 치울 엄두를 내지 못 한 거죠.
달마는 자신의 육신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뱀의 몸속으로 들어가 뱀의 몸을 이끌고 바위틈에서 나와 바다를 향해 기어갔데요.
먼 바다로 나가 뱀을 버리고 돌아왔을 때, 자신의 육신은 온데 간데 없고 아주 못생긴 산신의 몸뚱이 하나를 발견했더랍니다.
알고 보니 그 산신이 달마의 몸을 훔쳐 달아난 것이지요.
하는 수 없이 달마는 못생긴 산신의 몸을 걸칠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ㅎㅎ
그래서 항상 달마도의 아저씨는 험상궂은 모습이었나 봅니다.
꼭 전래동화 같지 않나요? ㅎㅎ
[출처] 달마도 - 달마대사 이야기|작성자 규방지기
菩提達磨 2
목차
1. 중국 육조시대의 승려.
1.1. 실존인물인가?
1. 중국 육조시대의 승려
그림 위 - 조선시대 화가 김명국의 달마도.
그림 아래 - 일본의 근대 우키요에 화가 다이소 요시토시가 그린 일본의 달마도.
산스크리트어: बोधिधर्म(Bodhidharma)
중국어: 菩提達磨(Pútídámó) 번역기를 쓰면 佛法(불법)으로 번역된다.
영어: dharma[1]
불교 선종禪宗의 창시자[2]
범어로는 보디다르마(Bodhidharma)이며 한자로는 보리달마(菩提達磨)라 옮기는데, 보통 칭하는 달마는 그 약칭이다. 남인도의 향지국의 셋째왕자라 하나 기록이 많지 않아 무얼 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527년, 중국으로 건너와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련(눕지도 않은 채 아홉 해 동안 벽을 마주 본채 좌선하였다는 말이다.)를 한 끝에 깨달음 얻었는데, 그는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한데, 오랜 수련을 통해서 이를 깨달을 수 있다는 주장을 세상에 펼쳤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이전의 경전 중심의 교종 불교에서 좌선 중심의 선종불교를 주장한 셈이다.
보통 불가의 그림 가운데는 달마도라 하여 달마대사의 모습을 그린 화상이 많은데, 그림 속 달마가 눈을 무섭게 부라리고 있는 이유는 수련을 하던 중 졸음을 이기지 못한 눈꺼풀이 내려 앉아 이를 막기 위해 아예 눈꺼풀을 잘라버렸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이다.[3].
달마도를 집에 걸어두면 좋은 기운을 받는다고도 한다. 그런데 진짜로 달마도 덕분에 도둑을 잡은 일이 있었다(!). 진짜로 도둑이 달마도를 걸려진 집을 털러 몰래 들어갔다가 그림 속 달마의 눈에서 불꽃이 나와 이를 본 도둑이 까무러쳤다나 뭐라나(…).
어떤 이야기를 따르면, 본래 달마는 매우 미남이었으나 길에 커다란 죽은 구렁이가 널브러져 있어 그것을 치우기 위해 잠시 유체이탈을 한 사이 자기 몸을 곤륜산 선인이 갈아타버려서 결국 몸을 바꾸고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는 그는 더 흉악한 몰골을 지녔는데, 넘치는 선기(仙氣)로 인하여 비록 생긴 것은 못났어도 멋있는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팔을 자른[4] 혜가(慧可)에게 가르침을 물려주었다.[5] 이 이야기는 이후 달마 밑으로 6대를 더 전승되다가 그 힘을 잃었다.
그는 몇 번이고 그를 질투하던 다른 승려나 귀족으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여유롭게 위기를 넘긴 일화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승려들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 소림권을 창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사실 역사적 신빙성은 떨어지는 이야기지만, 소림권이 달마를 기원으로 두고 있고 다른 많은 무술은 소림권을 기원으로 삼고 있어서 결국 중국 무술의 대부분은 달마를 기원으로 한다. 무협소설에서도 달마가 지었다는 역근경이 절세 무공으로 등장한다. 한마디로 권의 극에 달한 스님 그런데 이 스님은 본 출신지는 인도다.. 요가에 극에 달했거나 유혈사태를 일으키는 패왕의 핏줄을 이어받은듯 싶다(...)[6]
그는 양무제(소연)를 방문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풍토병으로 입적하였다. 설화에 따르면, 달마는 절을 중건하는 일에 정력과 국고의 재물을 쓰는 양 무제의 위선을 비판했더니 격노한 양 무제가 그를 비밀리에 독살했다고 한다. 그 배후에는 광통율사 같은 교종 계열의 승려도 있었다고 한다.
설화에서 전하는 무제와 달마가 나눈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제: "짐이 지금까지 천개의 절을 짓고 천개의 탑을 쌓고 2만여 스님들을 공양했는데 그 공덕의 크기는 얼마인가?"
달마: "아예 공덕이랄 것이 없소."
무제: "어째서 공덕이 없다 하는가?"
달마: "이러한 것들은 속세의 인과응보에 불과할 뿐 진정한 공덕이 아니오."
무제: "(이 놈 봐라…) 그러면 진정한 공덕이란 무엇인가?"
달마: "청정한 지혜로 오묘하고 원만하여 본체가 본래 비어 있어 고요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의 법으로 구하지 못합니다."
무제: "좋다. 불교의 성스러운 교리 가운데 첫째 가는 것이 무엇인가?"
달마: "전혀 성스러울 것이 없다니까요."
무제: "(열이 오를대로 오르며…) 내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달마: "알지 못합니다.(不識)"
해석에 따라서는 달마가 무제를 놀리거나 비판한 것은 아니며, 그저 진실만을 말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달마는 무려 다섯 번의 독살을 피하였으나 그를 향한 여섯 번째 독살 시도를 그는 익히 알았으면서도 이를 담담히 받아들여 죽었다. [7] 그의 시신은 웅이산(熊耳山)에 묻혔는데, 세해가 지난 뒤에 멀쩡하게 다시 살아나 부활하여 신발 한 켤레를 지팡이에 꿴 채 길을 떠났다고 한다.
이를 안 양 무제가 그를 쫒아 추격군을 파견했지만, 그를 뒤 쫒아 오는 병졸들을 본 달마는 갈대 잎 하나를 꺾더니 마치 수상 스키를 타듯 이것을 타고 강을 건너버렸다고 한다.(이 일화가 바로 일위도강의 고사다) 강을 건넌 그는 그대로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인도로 도로 떠나버렸다는 말이다. 이다음에 일어난 일을 전하는 기록이 없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양무제의 치세 때 풍토병으로 병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양무제가 몇 차례에 거듭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승려가 되려고 할 정도로 불교를 숭배하였는데[8] 이러한 강한 믿음에 한사코 동의하지 않은 것이 이유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9]
조금 다른 내용을 가진 설화로, 양무제가 달마에게 실망해서 단순히 그를 내보냈다가, 뒤늦게 의미를 깨닫고 사람을 시켜 달마를 다시 부르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모든 백성들을 보내서 간청한다 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신하의 말에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설에 따르면, 달마가 중국에 이미 왔을 때 달마는 이미 한 세기를 너끈히 살아낸 사람으로, 그는 이미 백 살을 훌쩍 넘은 나이였다고 전한다. 심지어는 그가 다섯 세기가 지날 때까지, 즉 500살까지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한 그 절반인 250살 까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로 비추어 보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가 달마가 오래 산 것은 사실인 듯하다.
독배를 들었다는 점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부활했다는 설에서는 예수가 연상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에는 달마대사가 좌선하는 얼굴을 그려 넣은 장식물 내지 장난감인 다루마가 있다.
1.1. 실존인물인가?
선불교가 중심이 되는 북방불교계에서는 그를 선종의 초조로서 고승으로 추존하고 있으나, 정작 달마대사에 대한 갖가지 기록들은 신화적인 허구성이 짙고 불확실한 게 많아 신뢰하기 어렵고, 선불교 자체의 역사적인 문제도 결부된다. 흔히 불교계에서는 선불교의 유래로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弗決疑經)>에 실린 염화시중[10]의 기록을 근거로 드는데…
…문제는 이거 위경이다. 딱 잘라 말하면 석가모니의 기록이라고 거짓말한 책이라는 거다.[11][12]
실제로 학계에서는 선불교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도가철학과 결합되어 형성된 불교적 사상의 한 갈래로 여기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의 어느 학계에서도 100% 인정되는 정설이다. 나아가 이러한 사상적 운동의 일부에 원효의 저술과 사상이 영향을 끼쳤다.[13] 그런데 이는 달마가 선불교를 전래했다는 기존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선불교의 창시 시기부터에 대한 기록에 문제가 있는데, 그 선불교를 가져와 중국에 소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당연히 문제의 소지가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달마라는 사람이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은 <낙양가람기>라는 책인데, 이 책에 실린 달마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서역에서 온 보리달마라는 사문이 있다. 페르시아 태생의 호인(胡人)이다. 멀리 변경지역에서 중국에 막 도착하여, 탑의 금반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광명이 구름을 뚫고 쏟아지며, 보탁이 바람에 울려 허공에 메아리치는 것을 보며 그는 성가를 읊조려 찬탄하고 분명한 신의 조화라고 말하며 그 덕을 칭송했다. 그는 나이가 150 세로 많은 나라를 돌아다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이토록 훌륭한 절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부처의 나라를 찾아도 이만한 곳은 아닐 테다라고 말하며 '나무나무(namunamu:歸依)'를 읊조리며 며칠이나 합장을 계속했다.(출처)
이는 그가 물질적인 공덕에 집착하는 양무제를 훈계하는 기록과는 전혀 다른 기록이다. 더욱이 달마대사가 9년간 면벽좌선했다는 소림사는 보리달마가 중국에 머무르던 당시에 그러한 절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연구결과가 중국에서 발표되었다. 달마라는 승려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우리가 아는 달마는 뒷날에 많이 윤색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점은 정설이다.
보리달마에 대한 많은 기록은 없지만 그의 행적을 규명하고자 함은 여러 사람의 관심 대상이었다. 이 단락은 사료가 부족하지만 가능한 그의 행적을 추정하고자 한다. 두 가지 대립되는 설은 실크로드를 통해 왔다는 설과 남인도로부터 바닷길을 통해 왔다는 설이 있다. 최초의 관련 문헌인 ‘냑양가람기’에 따르면 보리달마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향했다. 반면, ‘이입사행론’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서쪽의 남인도 사람으로, 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입사행론’은 보리달마의 어록을 담고 있는 책이며 보리달마의 제자인 담림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입사행론 둔황본’이 발견되면서 주목받았는데, 원효가 저술한 ‘금강삼매경’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어서 어떤 책이 먼저 저술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14]
캄베 츠토무(神部 勉)에 따르면 당나라 시기의 문서에 인도 왕국의 이름이 香至(향지)로 기술되었는데, 香至는 당시에 Kang-zhi로 발음되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캄베 츠토무는 인도의 타밀나두(Tamil-Nadu)주에 있는 옛 왕국의 수도 Kanchipuram을 보리달마의 출신지로 추정하고 있다.[15] 첨언하면 이 지역은 인도의 크리슈나 강 이남 지역이다. 크리슈나 강 이남 지역은 과거에 대중부 계열의 부파불교가 성행했던 지역으로 소품반야경이 처음 유포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16] 소품반야경은 초기 대승불교에 있어 반야 사상의 시초가 되는 경전으로 선불교의 소의경전인 금강경도 반야부 계열의 경전이다
각주 ⟹
[1] 영국 기준으로 다-머 또는 더-머로 발음된다.
[2] 중국에서 활동한 사람을 기준으로 하면 1대이다
선종의 계보 ⇒ 초조 : 달마, 제2조 : 혜가, 제3조 : 제4조 : 제5조 : 홍인, 제6조 : 혜능(638~713 남종선), 신수(606~706 북종선)
[3] 그리고 그가 잘라서 내어 버린 눈꺼풀이 차(茶)나무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때문에 차를 마시면 잠이 깬다고 한다
[4] 혜가가 그의 제자가 되기를 갈망했지만 달마는 자신 앞에 쌓인 눈이 붉게 변할 때까지 받아주지 않겠다고 한다.(안 받아주겠다는 소리다.) 그래서.. 팔을 잘랐다. 상처에서 흐른 피가 하얀 눈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때 달마가 혜가를 향하여 무엇인가를 던지자, 혜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잡으려 했으나 이미 팔을 잘라낸 뒤였다. 다만 '없는 팔로 무엇인가를 잡으려는 행위'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뒤 잘렸던 그의 팔이 도로 붙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거의 모든 전승에서 혜가는 외팔이로 묘사된다.
[5] 혜가는 선종의 제2조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6] 실제로 소림권이 인도의 요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7] 색이 변하는 것, 독이 퍼져오는 것 등 때마다 세번씩 나누어 마셨다고 한다.
[8] 당시 양무제는 오랜 정치에 지쳐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9] 어느 종교건, 자신의 잔혹한 행동에 대한 합리화로 종교를 내세우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보자
[10] 염화미소, 흔히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마음과 마음이 맞으면 구차한 말이나 글이 없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
[11] 사실 우리가 아는 현대 한국 선불교도 달마의 직계는 아니다. 한국 선불교는 선불교 중에서도 중국 남방불교 중 임제종파의 직계학맥을 잇고 있다. 이는 조계종 홈페이지에도 나오는 얘기다.
[12] 다만 참조 링크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토속신앙과 섞인 불경이라는 의미다. 현지화된 불경인 셈. 정리하자면, 현지화 되면서 달마라는 가상의 인물이 생긴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13] 실제로 원효의 사상과 선불교사상은 유사점이 많고(달마가 선불교를 가져왔다는 시기는 650년으로 원효의 주 활동기보다 조금 앞서지만, 선불교가 많이 퍼진 때는 원효가 살았던 때보다 뒷날이다.), 원효의 저술들은 중국 불교계에서도 탑 베스트셀러였다.특히 법장과 징관 등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14] (관련링크1,관련링크2,관련링크3)
[15] pdf Bodhidharma/Birthplace_sources#Origins_and_place_of_birth
[16] 시즈타니 마사오,스구로 신죠, "대승불교 새로운 민중불교의 탄생", 187-189
[17] 해외 이름을 직역하면 달마 스타.
달마대사 그림은 왜 인기가 많았을까?
〈달마도〉 김명국, 17세기, 종이에 수묵, 83.0x57.0cm, 국립중앙박물관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불교가 전해진 과정을 보면 스님을 포함해 많은 사람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인도를 오갔다. 손오공으로 유명한 삼장법사도 불법을 구하러 중국에서 인도로 간 분이다. 그런데 삼장법사보다 훨씬 앞서서 인도 불교를 전파하려고 중국에 온 스님 중에 달마대사라는 분이 있었다. 달마대사는 원래 인도 남부에 있던 팔라바라는 왕국의 왕자였는데 중국에 건너 와서 새로운 불교를 전파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새로운 불교란 '선종'을 말한다. 이전까지의 불교가 왕이나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던 것과 달리, 선종은 사람이면 누구나 본래 타고난 마음을 잘 터득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불교다. 달마대사의 이런 가르침은 귀족 종교를 쳐다보기만 하던 보통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으면서 널리 전파됐다. 달마대사는 그래서 중국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손꼽히게 됐다. 또 유명한 만큼 여러 가지 일화도 많이 생겨났다.
그런 일화 중 하나로 '달마대사가 신발을 품에 안고 인도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활동한 때는 삼국 시대 무렵이었다. 당시 중국의 북쪽에는 북위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곳에 송운이라는 관리가 있었는데, 인도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파미르 고원을 넘게 되었다. 험한 산길을 가던 그는 그곳에서 짚신 한 짝을 가슴에 품고 걸어오는 스님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이상하게 여겨 스님의 얼굴을 자세히 봤는데, 중국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달마대사인 것이다.
송운이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대사님,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서쪽으로 가는 걸세."라고 대답했다. 달마대사가 서쪽으로 간다고 한 것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고국에 돌아가면 자네 임금은 벌써 돌아가셨을 걸세."라고 말했는데, 송운이 북위에 돌아와 보니 달마대사의 말대로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임금이 황제가 돼 있었다.
송운은 황제에게 가서 달마대사를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왕은 "무슨 얘기를 하느냐. 달마대사는 죽어서 이미 장례를 치렀다."라며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송운이 계속해서 겪은 일을 말하자 황제는 반신반의하면서 대사의 무덤을 조사해 보라고 시켰다. 그래서 무덤을 파 보았더니 달마대사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었고,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달마대사의 신비로운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누군가가 꾸며낸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역사 속의 인물이 위대한 업적을 남기면, 사람들은 그 인물이 신비로운 능력을 가졌다고 믿으며 존경심을 더 키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인물의 초상을 그림으로 그려 오래 기억하고자 했다. 달마대사의 그림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 많이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달마대사 그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얼굴이다. 달마대사는 원래 인도 남쪽 지방 출신인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⓵ 눈이 움푹 들어가고
⓶ 코가 갈고리처럼 생겼다.
⓷ 또 눈썹은 매우 짙고 수염도 수북하게 많았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보통 그러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⓸ 귀에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
⓹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는 특징도 있다.
⓺ 무엇이든 꿰뚫어보려는 듯 눈매는 아주 매섭고, 눈은 아주 커다랗다.
⓻ 두 손은 가지런히 가슴 위에 모아져 있는 게 독특한 모습이다.
이런 외모적인 특징 이외에도 화가 입장에서는 달마대사를 그리는 데에 염두에 두어야할 점이 있었다.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달마대사였던 만큼 그림에 그 느낌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옛 화가들이 달마대사를 그릴 때에는 좀 색다른 방식으로 그렸다. 꼼꼼하게 그리는 대신 먹을 듬뿍 찍어 '휙' 하고 재빨리 그렸다.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그리는 것이 그림에 강한 힘을 느끼게 하면서 '일체의 허식을 버리라'는 달마대사의 정신과도 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달마대사를 잘 그렸던 사람으로 김명국이란 화가가 있다. 그가 그린 〈달마도〉를 보면 달마대사가 실제로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명화의 힘인데, 바로 김명국의 〈달마도〉가 그렇다. 그가 그린 달마대사는 순식간에 그려졌지만 위에서 말한 특징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얼마나 빨리 그렸는지 붓질을 몇 번 했는지 그림에서 세어 볼 수 있을 정도다. 김명국은 그림처럼 성격도 매우 호탕하고 거침이 없었다고 한다. 또 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술을 마신 뒤에 그린 그림일수록 더 볼만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은 여러 차례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면서 그림을 잘 그리는 화원도 함께 보냈다. 김명국 역시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에서 '김명국을 꼭 다시 보내 달라'고 부탁해 왔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선종이 널리 퍼져 있어서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를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가 일본에 갔을 때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그림 요청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는 힘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딘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친근한 느낌이 든다. 아마도 그래서 더 인기가 높았는지도 모른다. 일본 사람들이 김명국의 달마도를 많이 찾았던 이유에는 개인적인 취향도 있었겠지만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교훈을 얻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뛰어난 학식이나 힘든 수행 과정이 없더라도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달마 그림을 통해서 늘 되새기고자 한 것이다.
옛 그림 가운데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나 위인들의 그림을 많이 그리고 또 많이 감상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명국이 그린 달마대사 그림이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더 인기였던 건 우리가 유교 사회인데 반해 일본은 불교 사회였기 때문이다. 유교 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선 달마대사 대신에 유명한 문인이나 지식인들의 그림을 많이 걸어 놓고 감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