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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부도전(浮屠殿)의 백파율사비
지방유형문화재 122호(·86.9.9)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
선운사 부도전
탑은 본래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무덤의 역할을 했다. 탑에다 사리를 보관하다보니 비용도 많이 들어가고, 땅도 많이 차지하고, 많은 공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형태의 불교적 의미가 담겨있는 작은 탑을 만들어 스님들의 사리를 보관하게 되었다. 그러니 부도전은 절의 공동묘지인 것이다.
선운사의 부도전에는 ‘화엄종주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波大律師 大機大用之碑)가 있다. 이 비문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직접 찬하고(짓고) 직접 쓰신 것이다. 전면은 해서체이며, 뒷면은 자유분방하지만 간결하고 깨끗하다.
비문은 추사가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써 놓았고, 돌아가신지 1년 후에 세웠다(1858년). 그 3년이란 세월 동안 끝의 한 줄이 마모되어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문은 현재 선운사의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있고, 그 자리에 가비(假碑)를 세워놓았다.
화엄종주 백파대율사비문(華嚴宗主白坡大律師碑文)
-華嚴宗主白坡大律師(화엄종주 백파 대율사의) -大機大用碑文(대 법의 신묘함과 큰 작용을 일으킨 비문). 大機는 ‘大法의 妙機’로 ‘깨달은 데서 얻어진 큰 진리’ ‘자유자재한 마음의 작용’ 大用은 큰 작용을 일으킴을 말함. 大機大用은 機用이라고도 함.
菜根譚에 大機趣란 말이 나온다. 해설에 깨닫는 데서 얻어지는 큰 진리. 자유자재한 마음의 작용이라 되어있다. 大機를 다시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1) 천하의 정권. 政事. 2) 중대한 契機. 3)[[불]] 大乘의 가르침을 들을만한 資質 또는, 그 資質을 갖춘 사람이란 뜻이었다.
大用은 국어사전에 1) 크게 쓰이는 것. 2) 큰 벼슬에 등용되는 것이라 쓰여 있다. 大機는 마음의 淸淨함을 大用은 마음의 광명을 말하기도 하는데, 본 碑文에서는 마음의 淸淨함과 광명이 함께 베풀어짐으로 해설하는 게 옳을 것이란 생각이다.
-我東近無律師一宗(근래 우리 나라에 율사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건만)
-惟白坡可以當之(오직 白波만이 이에 해당함으로)
-故以律師書之(율사라고 적노라)
-大機大用是白坡(대기대용은 백파가)
-八十年籍手着力處(80평생을 힘들어 일군 것으로)
-或有以機用殺活(혹자는 機用殺活이 )
-支難穿鑿是大不然(난해하고 억지스런 면이 있다고 하나) (穿鑿:(1)후벼서 구멍을 뚫는 것.(2)꼬치꼬치 따져서 알려고 하는 것. (3)공연한 억측으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 (穿:뚫을 천. 鑿:뚫을 착. 쌀슬을 착. 새길 목. 구멍 조)
-凡大治凡夫者(무릇 범부를 다스림에는)
-無處非殺活機用(살활기용이 아닌 것이 없고)
-雖大藏八萬(비록 팔만대장경이라 할지라도). (雖:비록 수. 짐승 이름 유)
-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일 법도 이에서 벗어난 것이 없거늘)
-特人不知此義(사람들이 이 뜻을 알지 못하여)
-妄以殺活機用爲白坡狗執着相者(망령되이 백파가 살활기용의 상에 고집스레 집착한다고 함이로다.)
-是皆蜉蝣撼樹也(이는 모두 하루살이가 나무를 흔드는 격이니). (是:이 시. 皆: 다 개. 蜉:하루살이 부. 蝣:하루살이 유. 撼:흔들 감)
-是烏足以知白坡也(어찌 족히 백파를 안다 하겠는가)
-昔與白坡頗有往復辨難者(내가 예전에 백파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적 논쟁을 한바 있었는데). (昔:예 석. 섞일 착. 頗:자못 파. 치우칠 파. 與:더불 여.)
-卽與世人所妄議者大異(곧, 세상 사람들이 망령되이 논의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
-此個處惟坡與吾知之(이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일 뿐). (此:이 차. 惟:오직 유)
-雖萬般苦口設人皆不解悟者(온갖 말로서 입이 닳도록 설명한다 하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어떻게 다시 대사를 일으켜 세워 서로 마주보며 한번 웃어볼 수 있으리)
-今作白坡碑文字(이제 백파의 비문을 쓰면서)
-若不大書特書於大機大用一句(대기대용이라는 큰 한 구절을 크고 뚜렷하게 적지 않는다면)
-不足爲白坡碑也(백파의 비로써는 부족하다 할 것이다)
-書示雪竇白巖諸門徒果老記付(설두. 백암 등의 門徒들에게 이를 써주면서 果老는 다음과 같이덧붙이노라)(果老:추사의 별호로서 ‘과천에 사는 노인이란 뜻. 竇:구멍 두. 도랑 독)
-貧無卓錐(가난하여 송곳 꽂을 자리도 없으나)
-氣壓須彌(기상은 수미산을 누를 만하네)
-事親如事佛(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 듯하니)
-家風最眞實(가풍은 참으로 진실하도다)
-厥名兮亘璇(아, 그 이름 亘璇이여) (厥:그 궐. 오랑케이름 궐. 兮:어조사 혜)
-不可說轉轉(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요)
-玩堂學士 金正喜 撰 幷書(완당학사 김정희가 짓고 쓰다)
-崇禎 紀元 後 四 戊午 五月 日 立(숭정 기원 후 네 번의 戊午년(1858) 5월 일 세우다.
(이상의 비문 해석과, 부록으로 첨부한 白波와 추사와의 관계에 대한 해설은 이 고장 향토사학가이신 오광석 선생이 쓴 ‘선운사 白坡律師碑에 대하여’에서 약간만 필자가 알기 쉽게 고치고 낱말풀이를 하였을 뿐 대부분 그대로 옮긴 것이다.)(이명철)
선운사의 강주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석 했다.
白波⑴ 大律師碑帖
我東에 近無律師一宗이러니 惟白坡可以當之라 故 로 以律師로 書之하노라 大機大用은 是白坡八十年藉手着力處니 惑有以機用殺活로 支難穿鑿이나 是大不然하니 凡對治凡夫者는 無處非殺活機用이니 雖大藏八萬이라도 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어늘 特人이 不知此義하고 妄以殺活機用으로 爲白破拘執着相者하니 是皆蜉蝣撼樹也라 是烏足以知白破也리오 昔與白破로 頗有往復辨難者하니 卽與世人取妄議者로 大異라 此個處惟破與吾知之하니 雖萬般苦口設人이라도 皆不解悟者어늘 安得再起師來하야 相對一笑也리오 今作白破碑面字에 若不大書特書於大機大用一句면 不足爲白破碑也라 書示雪竇白巖諸門徒하노라 果老 - 記付호대 貧無卓錐나 氣壓須彌라 事親을 如事佛하니 家風이 最眞實이라 闕名兮亘璇이여 不可說轉轉일새
阮堂學士金正喜撰 幷書
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 立
1)白坡 : 白坡亘璇,AD.1767-1852)스님이다. 朝鮮 後期의 스님, 禪門을 中興시킨 이. 實號는 歸山. 別號는
歸山. 別號는 無垢子. 俗姓은 全州李씨. 茂長(全北 高敞)에서 AD.1767년(英祖 43)4월 11일에 태어남.
AD.1778년(正祖 3) 12세에 高敞 兜率山 禪雲寺의 詩憲和尙을 恩師로 蓮谷和尙을 戒師로 득도함. 平北 楚
山 龍門庵에서 安居하다가 心地가 열리다. AD.18521790년(正祖 14) 3월 智異山 靈源庵으로 가서 當時 敎
界에서 華嚴의 大家였던 雪坡尙彦和尙(AD.1707-1791)에게 西來宗旨를 배우고 尙彦和尙이 入寂하기 전
해에 尙彦和尙에게 具足戒를 받았다. 26세에 長城 白羊山 雲門庵에서 開堂했는데, 學人이 항상 100여 명
에 이르렀다. 靈龜山의 龜庵寺에서 雪峰巨木의 法을 이어 받고 白坡堂이라는 堂號도 받았다. 이 때 龜庵
寺의 名稱을 따 實號를 龜山이라 함. 龜庵寺에서 禪講法會를 여니 八道의 雲水衲子들이 모여들어서 ‘禪門
中興의 宗主’가 되었다. AD.1852년(哲宗 3년) 4월 24일 求禮 華嚴寺에서 나이 86세, 法臘75년으로 入寂하
다. 雪竇有炯은 「白坡大師行狀」을 짓고 雪乳處明의 法弟子 映湖鼎鎬(字는 石顚․詩號는 漢永)는 「白坡
大師略傳」을 지어 그의 生涯와 思想을 널리 소개하려 애썼다 저서 : [禪門結社文] ․ [禪門手鏡] ․ [法寶壇
經要解] ․ [五宗綱要私記] ․ [禪門坫頌記] ․ [金剛經八解鏡] ․ [禪要記] ․ [作法龜鑑] 등이 있다.
(2)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 : ①‘華嚴’은 華嚴學을 말하고 ‘宗主’는 우두
머리를 뜻하니, 華嚴學에 精通한 敎學의 大家라는 말이다. ②白坡는 亘璇스
님의 法號이고, ‘大律師’는 戒律을 잘 지킨 스님이라는 뜻이다. 즉 海東의 끊
어졌던 戒脈을 白坡스님께서 다시 일으키셨으므로 ‘大律師’라고 한 것 같다
. ‘大機大用’의 ‘機’는 본래 주어진 기량을 말하는 것이고, ‘用’은 주어진 기량
의 활용을 말한다. 즉 ‘機’와 ‘用’을 완벽하게 運用하여 學人을 잘 提接해 주
는 훌륭한 禪師라는 말이다.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은 白坡스님께
서는 戒定慧 三學, 즉 敎· 禪· 律을 완벽하게 갖추신 최고의 스님이라고 極
讚한 말이다. ‘華嚴宗主’는 敎(慧學)을 말하고. ‘大律師’는 律(戒學)을 말하고,
‘大機大用’은 禪(定學)을 말한다.
3) 貧無卓錐 : 『祖堂集 19권 香嚴和尙章』에 「香嚴」이 便造偈對曰 去年엔 未是貧이요 去年엔 無卓錐之地터니 今年錐亦無로다」라고 보인다.
백파대율사 華嚴學(敎)의 宗主으뜸)이신 白坡大律師(律)께서 大機大用하신(禪<禪師로서 큰 활동을 자유자재하게 보여주신>)내용에 대한 碑文
우리나라에 근세에는 律師의 一宗이 없었는데, 오직 白坡스님만 이에 해당하기에 律師라고 썼으며 大機大用(大禪師가 大機<본래 주어진 기량>와 大用<본래 주어진 기량의 활용>을 잘 운영하여 學人을 敎化해 주는 것)은 바로 白坡스님께서 80년 동안 藉手着力하신(수많은 方便으로써 學人을 敎化하시려고 온 힘을 쓰신)곳이다. 혹자는 機 ․ 用 ․ 殺 ․ 活로써 支難穿鑿한 바가(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억지로 이치에 닿지 아니한 점이) 있다고 하나,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대저 凡夫를 對治함(대응하여 번뇌의 迷妄을 끊어 줌)에는 殺․活․機․用이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八萬大藏經 이라 할지라도 一法도 殺․活․機․用에서 벗어난 것이 없는데, 다만 사람들이 이 뜻을 알지 못하고서, 함부로 白坡스님이 殺․活․機․用의 相에 구속되어 執着한다고 하니, 이는 모두 하루살이가 나무를 흔드는 격이라. 이 어찌 족히 白坡스님을 잘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 白坡스님과 더불어 자못 往復하(書信을 주고 받으)며 辯難(意見을 주장하여 論爭)한 적이 있었으니, 곧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왈가왈부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것은 오직 白坡스님과 나만이 아는 것으로서 아무리 여러 가지 말로써 입이 마르도록 설명해 준다 해도 사람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 어찌하여야 다시 白坡스님을 일으켜 와(다시 살아나시게 하여), 서로 마주 보고 한번 웃을 수 있으리요.
지금 白坡]스님의 碑面 글자를 쓰면서 만약에 大機大用의 一句로써 大書特書하지 않는다면 족히 白坡스님의 碑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에 雪竇有炯 등 여러 門徒들에게 써서 보이는 바이다.
果老(秋史의 別號)가 기록하여 덧붙이기를
「가난해서 송곳 꽂을 땅도 없으나 氣運은 須彌山을 누를만 하네. 어버이 섬김을 부처님 섬기듯 하니, 정말로 진실한 家風이라네. 그 이름 亘璇이여!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리」
阮堂學士 金正喜 짓고 아울러 씀
崇禎(明 毅宗의 年號) 紀元(AD1628)年 後 넷 째 戊午年(哲宗 九년 AD1858年)5月 某日 세우다.
★부기
❶內容中 「我東에 近無律師一宗이러니...」를 혹은 我東에 近無律師나 一宗에...로 懸吐함
❷內容中 [苦口說人이라도 皆不解悟者어늘...]을 혹은 人皆不解하니 悟者로 懸吐함
❸內容中 [果老記付]가 ꊉ阮堂全集券七雜箸 [作白坡碑字(書以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 書贈其門徒]에는 [贊曰]로 ② 東師列傳第四梵海覺岸 AD1820~1996 編次) 白坡講師傳에는 [書之曰]로 ③朝鮮佛敎痛史 上篇(李能和居士AD1870~1948)에는 銘曰로 되어 있음.
자구를 해석함은 해설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추사가 왜 이런 비문을 썼는가에 대하여 알고 해설하는 것은 자못 어려운 점이 있지 않을까 해서 추사와 백파, 백파와 초의선사, 추사와 초의와에 얽힌 삼각관계를 별첨 부록으로 첨부한다.(이명철)
부록
추사 김정희와 백파대사와의 관계
추사 김정희(1786-1856)와 백파대사와의 관계는 해남 대흥사의 초의(1786-1866)선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백파(1767-1852)선사는 고창에서 태어나 지리산 영원사의 雪坡(1707-1791)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으며 50세 때엔 ‘禪文手鏡’을 지어 불교계에 일대 논쟁을 일으키게 한다. 백파의 선사상은 禪宗의 8대조인 馬祖(709-788)에서 본격적으로 제창되어 11대조 임제(?-867)에 이르러 크게 일어난 祖師禪 우위사상에 입각한 정통성 확립이었다. 백파는 임제선사가 확실한 계념규정없이 제시한 이른바 임제삼구에 모든 敎․禪의 요지가 포함되었다고 보면서 이 임제삼구의 내용에 따라 선은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마음의 청정함을 대기(大機), 마음의 광명을 대용(大用)이라 하고 그 청정함과 광명이 함께 베풀어짐을 기용제시(機用濟施)라 생각했으니 이 역시 임제선사의 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면서 백파스님은 조사선에서는 大機大用이 베풀어지면서 세상의 실상과 허상,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함께 작용하는 殺活자재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백파의 禪文手鏡에 맞서 반박논리를 편 것은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였다. 초의선사는 불교는 물론 유학과 도교까지 섭렵하였고 그 시대 정약용, 신위, 추사 등과 교류하고 지냈으며 차 문화를 일으켜 ‘동다송’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특히 추사와는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냈으며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차를 배웠고 초의가 보내주는 차를 가장 좋아했으며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구하는 편지를 자주 하기도 하였다. 제주도 귀양길에도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났으며 그때 이광사의 ‘大雄寶殿’ 현판글씨를 보고 형편없다고 떼어버리게 하고 자기글씨를 달게 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친밀하였다.
초의선사는 敎와 선은 다른 것이 아니며 祖師禪이 如來禪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입각처가 禪이면 祖師禪이고 敎면 如來禪으로 된다면서 “깨달으면 敎가 禪이 되고 未洽하면 禪이 敎가 된다.”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이리하여 초의는 禪을 넷으로 나누어 祖師禪과 如來禪, 格外禪과 義理禪으로 구분한 ‘선문사변만어’를 펴냈다.
이런 논쟁의 와중에 초의와 절친한 벗이자 불교에 박식함이 있는 추사 김정희가 끼어들어 白波와 불꽃튀는 논쟁을 벌인 것이다.
추사와 白波의 여러 번에 걸친 往復書翰 논쟁은 그 당시 유명하였다. 특히 秋史는 白波의 論旨가 잘못되었다면서 15가지로 일일이 論證한 ‘白波妄證 十五條’에서 오만 방자한 말투로 白波와 그 門徒들을 힐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白波와 秋史와 草衣의 論爭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白波禪師는 禪文手鏡 이후에도 수많은 著書를 남기고 지리산 화엄사에서 세수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秋史와 白波의 관계는 이렇게 치열한 論爭을 벌인 관계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추사가 69세(1855년)에 쓴 白波碑文을 보면 공손함과 스님에 대한 尊敬이 극에 다달은 내용으로 완연히 다른 감정을 보여준다.
틀림없이 추사가 9년여 동안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의 모난 성격의 傲慢함과 방자함이 인격적인 수양을 가져왔다고 보며 白波를 보는 관점도 달라졌으리라 본다.
추사가 白波碑文을 쓴 시기는 인생의 逆境을 이겨내고 秋史體로서 絶頂을 이룬 미적 감각이 나타난 시점인 他界하기 1년 전의 글씨로서 추사체로 대표적으로 손꼽힐 수 있다고 본다. 비석의 앞면에는 엄격함과 방정함이 느껴지는 楷書體로 힘차며, 뒷면에는 변화무쌍하고 마치 불균형 속에 조화를 이루듯 자유분방하고 활기찬 추사체의 行書가 멋들어지게 쓰였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858년이었다. 따라서 ‘숭정 기원후 사 무오 오월 일립’이라는 글씨는 추사의 글씨가 아니며 완당학사 김정희라는 글씨도 누군가에 의해 새로 쓰여졌다고 보여진다.(유홍준 교수에 의하면 금석학자 故 청명 임창순 선생으로부터 들었다며 “비문의 마지막 줄에 쓰인 글씨도 또한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不’자던가 다른 사람이 추사체와 비슷하게 쓴다고 썼으며 행간의 수사도 다르게 나타났다.”라고 표현하였다.)
추사가 비문을 써 놓은 지 3년 뒤에야 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비문의 마지막 줄이 찢어지거나 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다른 사람이 추사체와 비슷하게 모방하여 썼을 것으로 본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누구나 알 듯이 추사체로 상징되는 한말 글씨의 명인이다. 또한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을 기반으로 하였던 금속학자이며 실사구시를 제창한 경제학자이기도 하고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김정희는 경주 김씨 집안에서 정조 10년인 1786년에 태어났다. 병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노경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뒤에 큰아버지 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어 경주 김씨는 훈척가문이 되었으니, 그의 가문은 그가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세도가였다.
추사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들어갈 기회를 가졌고, 이 때 중국의 유수한 학자들과 사귈 수 있게 된다. 특히 당대 제일의 학자였던 옹방강(翁方綱)과 깊이 사귀게 되었으며 귀국후에도 서신왕래가 잦았다. 옹방강의 호가 완원이어서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강했던 추사는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지어서 썼으며, 이외에도 예당(禮堂), 시암(時菴), 과파(果坡), 노과(老果)등등 수 백개의 아호를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재질은 청나라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이 경술문장이 바다건너 동쪽에서 제일이라고 찬사를 하였고 이들로부터 고증학의 세계와 실사구시론을 배웠다. 그러나 젊은 시절 중국의 문물과 사람을 지나치게 숭상하여 우리나라를 「답답하고 촌스런 나라」로 여기기도 하였다.
진흥왕의 북한순수비의 발견과 금석학에 대한 책자를 내는 등 병조판서의 자리에도 오르는 등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달렸으나 그의 아버지가 옥사의 배후조종자로 연루됨에 따라 그도 관직에서 밀렸다가 순조의 배려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9년에 걸친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이 이어졌다.
추사는 제주도, 북청 등에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대략 그 기간이 13년이었다고 하며, 귀양살이 하는 동안 허송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과 서도(書道)를 대성시키는 수련의 시간으로 삼 아 일세를 대표 할만한, 대학자로 서예가로 이름을 남겼다.
추사 개인으로서 가고 싶어 하는 중국엘 못가는 심정과 모든 희망이 무너지는 귀양살이에서 우리가 오늘날 추사체라고 부르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가 완성되었으니 아픈 마음속에서 잉태한 위대한 예술이 오늘날 돋보여진다.
그는 글씨와 그림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니 글씨나 그림이 법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이르면 자연히 우러나온다고 하였다.
1851년에 다시 영의정이었던 친구 권돈인의 일에 연루되어 이번에는 북청에 2년간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에 그는 파란 많았던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절을 오가며 여생을 보내다가 71세인 1856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과 이곳 등성이 넘어 앵무봉에 있는 화엄사에는 추사의 필치가 찾는 이를 맞이해 준다.(오광석)
선문수경 [禪文手鏡]
요약
조선 후기의 승려 긍선(亘璇)이 5종(宗)의 강요(綱要)와 어구(語句)를 임제(臨濟)의 3구(句)에 대비하여 설명하고 도표를 만든 선서(禪書).
구분 목판본, 선서(禪書)
저자 긍선(亘璇)
시대 조선 후기
본문
목판본. 1책. 긍선은 임제의 3구로써 일대의 선교(禪敎)를 3분(分)하고, 제1구를 얻으면 불조(佛祖)를 스승으로 삼을 수 있고, 제2구를 얻으면 인천(人天)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으나, 제3구로서는 자기 한 사람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제1은 조사선(祖師禪:인도의 선보다 달마선이 뛰어나다고 하여 여래선(如來禪)이라는 말이 생겼으며, 그 중에서 특히 질적으로 높은 것을 조사선이라 부른다. 이 명칭은 당나라 후기에 나타났지만, 기초를 만든 것은 하택 신회(荷澤神會)와 마조 도일(馬祖道一) 계통의 선사들이다.), 제2는 여래선(如來禪: 당(唐)나라 화엄종(華嚴宗)의 승려 종밀(宗密)이 세운 5종선(외도 ․범부 ․소승 ․대승․최상승) 중의 최상승선(最上乘禪).
본문
정확히는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라고 한다. 《능가경(楞伽經)》에 나오는 이 말을 종밀은 부처의 경지에 머물며 중생을 위하여 묘법(妙法)의 일을 행하는 것이므로,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 달마(達磨)가 전한 최상승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달마의 선을 가리켜, 문자 이해에 치우친 나머지 이(理)에 떨어져 달마가 전한 참다운 선(禪)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비난하였는데, 여기서 조사선(祖師禪)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당나라 이후에는 이 두 말이 함께 쓰였는데, 조사선은 달마의 정전(正傳)인 석가의 마음을 마음으로 아는 참된 선을 말하고, 여래선은 《능가경》 《반야경(般若經)》 등의 여래의 교설에 따라 깨닫는 선을 가리킨다.), 제3은 의리선(義理禪)을 말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는 육조대사(六祖大師) 이후의 오가종풍(五家宗風)을 규정하여 임제종(臨濟宗)은 조사선이고, 위앙종( 仰宗) ․법안종(法眼宗) ․조동종(曹洞宗)의 3종은 여래선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며, 의리선이란 변계망정( 計妄情)에 불과하다고 공격하였다. 이러한 논의는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켜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 의순(意恂)의 《사변만어(四辨漫語)》이다.
白坡律師碑文을 해설하려면 우선 백파와 추사와의 관계와 草衣선사와의 관계를 알아야한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858년이었다. 따라서 ‘崇禎 紀元後 四 戊午 五月 日立’이란 글씨는 추사의 글씨가 아니며 玩堂學士 金正喜라는 글씨도 누군가에 의해 새로 쓰여졌다고 보여진다. 유홍준 교수에 의하면 얼마 전에 타계한 금석학자이자 한학자인 청명 임창순 선생으로부터 들었다며 “비문의 마지막 줄에 글씨도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세히 관찰해본 결과 ‘不’자라던가 다른 사람이 추사체와 비슷하게 쓴다고 썼으며 행간의 구사도 다르게 나타났다.”라고 표현하였다.
마지막 줄의 글씨는 앞의 일곱 줄의 글씨와 행간의 간격이나 조형성에서 확연히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추사의 글씨는 빽빽한가 하면 시원하게 트이고 자간 간격이 자유자재롭고 운필 또한 힘차면서도 활달하고 변화무쌍한 독창적인 추사체의 맛을 가지고 있으나 마지막 줄은 어떠한 법첩을 놓고 임서한 것처럼 틀에 짜여진 느낌의 답답함과 자간의 간격도 답답하리 만치 빽빽하기만 하다. ‘不’자와 ‘可’자 등의 가로획을 보아도 추사는 날카로운 골기가 잡혀있는 반면 마지막 줄의 글씨는 부드러우면서도 살 찐 듯한 느낌을 받는다.
추사가 비문을 써놓은 지 3년 뒤에야 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이 추사체와 비슷하게 모방하여 썼을 것으로 본다.(이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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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비문에 선운사에 관한 조선 후기의 역사와 문화 등이 약간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잘 읽어 내것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