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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 연 혁
년 대 |
연 혁 |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
○昌寧國 건국(念尙道士 BC57)
○신라의 古陀耶郡(AD 80년경)을 古昌郡(경덕왕 757년)으로 변경 |
고려시대 |
○태조13년(930)고창군을 安東府로 승격
○경종(980년) 永嘉郡 → 성종14년(995) 吉州 → 명종27년(1197)
安東都護府 → 신종7년(1204) 安東大都護府 → 충렬왕34년
(1308) 福州牧 → 공민왕10년(1361) 安東大都護府 |
조선시대 |
○세조 鎭 → 선조9년(1576) 縣 → 선조14년(1581) 府 → 영조52년
(1776) 縣 → 정조9년(1785) 府
○고종32년(1895) 安東觀察府 → 고종33년(1896) 安東郡 |
일제시대 |
○1914.3.1 禮安郡으로 병합(19개면)
○1931. 4. 1 安東面을 安東邑으로 승격(1邑 15面 218洞) |
대한민국 |
○1963.1.1 安東邑을 安東市로 승격(군에서 분리 15개면)
○1973.7.1 豊山面이 豊山邑으로 승격(1邑 14面)
○1974.7.1 안동댐 건설로 月谷面 폐지
○1993.11.6 임하댐 건설로 臨河面 思義1․2里 폐지, 臨東面
知禮1․2里, 水谷2里 폐지
○1995.1.1 안동시와 안동군 통합 안동시로 발족(1邑 14面 18洞 3出場所)
○1997.7.1 행정동 통합(1邑 13面 13洞 3出場所)
○1998.12.1 행정동 통합(1邑 13面 10洞 3出場所)
○2005.9.1 행정동 통합(1邑 13面 10洞 3出場所) 法尙洞 폐지 및
江南洞 신설 |
○ 명칭유래
- 안동이란 명칭은 후삼국시대 안동의 성주였던 삼태사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이 곳 병산 전투에서 견훤을 물리치고 고려가 삼국을 통일 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여 고려 태조 13년(930)에 古昌郡을 대동의 안전을 보장하는 곳이란 뜻의 安於大東 의 安東으로 개칭하면서 처음으로 사용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豊山邑 |
○연 혁
- 신라시대 하지현(下枝縣)
- 고려시대 풍산현(豊山縣)
- 1914. 4. 1 西先面․西後面 일부를 병합 豊山面으로 개칭
- 1973. 7. 1 豊山邑으로 승격(대통령령 제6543호)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으로 安東市 豊山邑으로 개칭
○명칭유래
-풍성할 豊자에 뫼山자를 쓴 것으로 이지역을 싸고있는 산모양이
굽을 曲자와 콩 豆자를 합친것과 같아 이 두글자를 합하여
풍자가 되고, 뫼산자를 붙여서 豊山이라 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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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郊里 |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리,하리의 일부와 풍북면의
우안동 일부, 풍서면의 소산동 일부를 병합하여 安郊里라 함. |
上里里 |
- 풍산읍 소재지의 위쪽에 있다하여 웃마, 또는 上里里라 부름. |
下里里 |
- 풍산읍 소재지의 아래쪽에 있다하여 下里里라 함. |
麻厓里 |
- 고려말기에 眞成李氏의 先祖 李子修 判前儀松安君가 마을을
개척하여 지형이 중국의 망천(輞川)지방과 같다하여 처음
에는 輞川이라 칭하였으나 강변에 바위를 쪼아 만든 부처가
있어 마애로 바꾸어 부름. |
水 里 |
- 700년전 공(孔)씨가 마을을 설립하였으며 마을이 중장혈이라
하여 대나무 마디마다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전하여 오며 낙동강물이
마을 앞을 돌아 흘러 수동이라 불렀다 함. |
檜谷里 |
- 옛날부터 제일이라 불리워 오다가 조선시대때 동구밖 거리에
큰 회나무가 있다고 하여 회곡이라 부르게 되었음. |
桂坪理 |
- 서기 1700년경 들마을이라고 하여 불과 3세대가 살고 있었으나
갑술년 장마로 침수되어 산 기슭으로 옮겼다고 하여 산기슭
뒤편에는 계수나무가 큰 것이 있어 계수나무 이름을 따가
앞에는 넓은 들이 있어 계평동이라 불리어 오게 되었다고 함. |
幕谷里 |
-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에는 두곡이라 불리었으며 그후 촌명
변경은 장군 출막이란 막안에서 장군이 나왔다 하여 막실(幕室)
이라 칭하였으며 명인이 많이 출생하였다 하여 그 뜻을 막실로
불리우고 있음. |
壽谷里 |
- 1280년경 안동권씨가 마을을 개척하여 300여년 동안 기거후
이어서 풍산김씨가 100여년 살다가 떠난 후 해주오씨 11대조
소암공이 서울에서 낙향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며 마을사람들이
장수한다고 하여 더할증 목숨수자를 써서 증수하고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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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 里 |
- 고려초 이고장에 모운사(暮雲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부처집이라고도 하였으며 모운곡(暮雲谷)이라 불러오다가
모노골, 모놋골 또는 노곡으로부르다가 노리로 변경되었슴. |
竹田里 |
- 1620년경 성함을 알수 없는 분이 산 좋고 물 맑은 곳을 찾아
헤매던 끝에 학대에 이르러 대나무가 우거진 곳을 찾아 집터를
닦아 집을 지었는데 집 주위에 대나무가 돋아나 대나무를
매년 캐고 또 캐었으나 돌부리에서 계속 돋아나고 주변 일대가
대나무로 우거져 밭을 이루었다 하여 대밭이라 하였으나 한자로
표하기 위하여 대목(죽) 밭전 자를써 죽전동이라 칭함. |
晩雲里 |
- 선비 송여원이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옥과 같아
사람살기에는 적당하지 않으나 천옥을 닮은 지세를 피하고
사람이 모여살기 위해서는 거침없이 떠다니는 구름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만운으로 명명했다고 함. |
西薇里 |
- 1600년경 이름을 알수 없는 한(韓)씨 성을 가진 사람이 다름다와
정착하게 되었으며 서쪽 지역에 고사리가 많다고 하여 서미곡
(西微谷)이라 칭하여 왔음. |
新陽里 |
- 400여년전 성촌, 당곡, 창촌(城村, 糖谷, 倉村)마을 통칭하여
신양이라 불렀다 함. |
玄厓里 |
- 고려 말엽 노씨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다가 노씨의 외손인
황씨들이 이 마을을 이었으며 황씨의 외손인 안동김씨 북애공
(北厓公)이 이마을에 정착하여 개척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이마을의 본래 이름은 감애(甘厓)라 하였으며 일제시대때
와룡면 감애동과 이름이 같다하여 玄厓라고 개칭하게 되었음. |
五美里 |
- 오미동의 예전이름은 오릉동이며 고려초에 우리조상이 경주로부터 풍산읍 석응촌에 옮겨 살고 오릉동에 별장을 두었더니 그후 대대로 고려에 벼슬을 하게 되어 송도로 옮겼다가 이조초에 송도 시족을 강제로 한양에 옮김에 직장공(稙長公)휘자순(諱字純)이 햔양 장의동(서울 청운동)에 전거 하셨더니 그백씨 병판공(兵判公)휘자량(諱字良)이 방번방석의 화에 돌아가심에 이에 연루되어 화를 피하여 오릉동에 거주하시다가 돌아가셨으며 손(孫) 진상공 휘미손(諱微孫)과 증손(曾孫) 허백당공(諱楊震)은 부자모두 영남외임을 여러고울 다니 셨으므로 오릉동에 왕래가 자주셨으면 허백당공(諱儀貞)이 인종대왕의 절의로 벼슬을 버리시고 오릉동에 은거 하심에 오릉동은 오묘동으로 고치였으니 그후 장암공의 曾孫 八兄弟분이 모두 진사를 하시고 그중 5형제 분이 문과 급제를 하시니 인조대왕께서 국조고전에 의하사 그 부친 유언당공(諱大賢)을 이조참판으로 증직하시고 오묘동을 오미동이라 고치라 하시다 오미동이란 이름은 성은으로 얻음.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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槐亭里 |
- 괴정 마을 유래는 고려 말 신우의 4세손 신시행(상장공)이 장주에서 안동시 풍북면 정사동에 이거하여 북쪽 (현 풍북초등학교 윗산)에 송림수주를 심어 숲이 우거진 후 그곳에서 풍북 고을의 대사를 송하에서 토론 의결하였다고 하여 북송정이라 하였으며 괴정이란 동명이 생긴것은 이 송림 신성목이라 하여 송자를 괴자로 고치고 북송정이란 정자를 따서 괴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梅谷里 |
- 서기 1680년경 (조선숙종조) 영양남씨 륭달이라는 선비가 일직면에서 거주하다가 산세가 좋고 양지바른 당시의 늪으로 된 이곳을 정착지로 결정하고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샛터라 칭하였으며 서쪽골짜기마을로 매화낙지의 명당이 있다고하여 매곡이라 부름. |
素山里 |
- 고려초 말기(1360년대) 안동김씨 삼근이라는 선비가 개척하여 금산 마을이라 부르다가 1645년 청음 (김상헌) 선생께서 소산 마을이라 개칭하였음.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臥龍面 |
○연 혁
- 조선시대 숙종때 安東府 府東을 東先面․東後面으로 개편
- 1896. 8. 4 安東郡 東先面․北先面으로 개편
- 1914. 3. 1 府郡面 폐합에 따라 北先面 14個洞, 東後面․ 府內面 일부를 병합하여 臥龍面으로 개칭
- 1931. 4. 1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13개동으로 개편
- 1974. 7. 1 안동댐 건설로 禮安面․月谷面 일부 편입
- 1983. 2. 15 中佳邱․西枝․山野洞 일부를 安東市에 편입
- 1987. 1. 1 西峴洞 일부를 北後面에 편입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으로 安東市 臥龍面
○명칭유래
- 臥龍이라는 지명은 柏潬 具鳳令(1526~1586) 선생이 당시 水多山으로 불리던 산을 그 생긴 형상이 누워있는 龍의 모습과 같다하여 臥龍山이라 하였으며 府郡面 폐합시 산의 이름을 따서 臥龍面이라 불리어지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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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佳邱里 |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흥(南興), 장사리, 가장리(佳庄里), 석랑골(石郞谷), 세곡(細谷), 무학(舞鶴)과 부내면의 율세리 일부를 병합하여 가구들이 중앙이 되므로 中佳邱洞(里)라 칭함 |
佳邱里 |
- 500여년 전 安善孫, 安季孫 형제가 밤실(栗里)을 개척한 뒤 후손인 동고(東皐) 安霽 공이 마을 동쪽에 조산(造山)이 있어 그 산이 매우 아름답다라고 하여 아름다울 가(佳)자와 언덕 구(邱)자를 붙여 佳邱라 칭하였음 |
山野里 |
- 와룡산 기슭의 산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남산곡(南山谷)이라 하였다가 조선 중엽부터 산골 또는 산동(山洞)이라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물야동, 산동과 동후면의 구접리, 우곡리를 병합하여 산동과 물야의 이름을 따서 山野洞(里)라 칭함 |
周溪里 |
-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과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선생을 모신 주계서원(周溪書院)의 周溪에서 유래된 명칭임 |
佳野里 |
- 산골에서 보기 드문 넓고 아름다운 들이라 하여 佳野洞(里)라 칭함 |
池內里 |
- 마을이 큰 못(池)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못안 또는 池內라고 칭함 |
台里 |
- 태리는 옛날 도대(道坮)라는 마을로 면소재지 였으나 현재는 없어 지고, 영가지(泳嘉誌)에는 台伊洞村이라 부르는데 촌(村)백성이 아주 많이 살았으며 도대의 대(坮)字가 변하여 태골, 태촌(台村), 태이동촌, 태곡(台谷)이라 불리우다 台洞(里)라 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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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枝里 |
- 이 마을은 직장(直長) 이한(李漢 1499~ ?)공이 주촌에서 이 곳으로 이거한 후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서간서당(西澗書堂)을 건립하였는데 서간서당의 이름을 따서 서갓, 서간, 서가촌, 서가현촌 이라 불리우다가 西枝洞(里) 로 칭함 |
伊下里 |
- 이 마을은 천동촌(泉洞村) 또는 속명으로 이화어(伊火於)로 불렀으나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마을의 이름이 군자가 사는 곳으로는 합당치 못하다하여 이계(伊溪)로 고쳤다가 이후 이우리(伊友里), 익우촌(益友村) 등으로 칭하였는데 이우리 아래쪽에 있다하여 伊下洞(里)라 칭함 |
伊上里 |
- 이 마을은 천동촌(泉洞村) 또는 속명으로 이화어(伊火於)로 불렀으나 안동부사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 마을의 이름이 군자가 사는 곳으로는 합당치 못하다하여 이계(伊溪)로 고쳤다가 이후 이우리(伊友里), 익우촌(益友村) 등으로 칭하였는데 이우리 윗쪽에 있다하여 伊上洞(里)라 칭함 |
周下里 |
-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인 들로 형성되었다고 하여 주촌(周村)이라 불렀으나 나중에는 이로촌(二老村)으러 부르다가 오랜 세월동안 마을이 두루 평안하다고 하여 周下洞(里) 라 칭함 |
甘厓里 |
- 전민(田民)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였으며 감메촌이라 표기하다가 구한말 北先面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가마형국이므로 가마골, 가마촌(加麻村), 부곡(釜谷), 감이촌(甘爾村)으로 부르다가 감애(甘厓)로 칭함 |
西峴里 |
- 서티재 밑에 있다고 서티, 西峴村 또는 西峴이라 칭함 |
道谷里 |
- 일제 강점기 당시 이 곳에 돌그릇 공장이 있어 속명으로 도질(陶質), 돗질, 도질질(都叱質)로 부르다가 道谷洞(里)라 칭함 |
浙江里 |
-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곳을 중국의 절강성(浙江省)과 같다하여 浙江 또는 浙江村이라 칭함 |
加流里 |
- 낙동강이 동네를 감싸며 돌아 나가는 경치가 수려하여 가흘리(佳屹里), 가크리, 갈쿠리라 부르다가 가류(佳流, 加流)로 칭함 |
羅所里 |
- 마을 지형이 소라 같이 생겼다 하여 나소곡(羅所谷), 나별(羅別). 나소(羅所)라칭함 |
烏川里 |
-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물이 맑을때 물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 하여 烏川 이라 하였는데 까마귀 오(烏)자를 이두식으로 표현하면 외(烏)와 통해 오천을 외내 또는 군자리(君子里) 라고도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北後面 |
○연 혁
- 조선시대 숙종때 安東府 府北을 北先面․北後面으로 개편
- 1896. 8. 4 安東郡 北後面으로 개칭(14개동리)
- 1914. 3. 1 府郡面 폐합에 따라 北先面, 榮州郡 辰穴面 일부를 병합하여 11개동으로 개편(마사, 소부, 동음등 3개리 폐지)
- 1987. 1. 1 臥龍面 西峴2里 편입(12개리)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으로 安東市 北後面으로 개칭
○명칭유래
- 고려말과 조선초에 安東府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부북 (付北)이라 하였으나 숙종 때 북선면(北先面)과 갈라지면서 北後面이라 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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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峴里 |
- 臥龍面 西峴2洞으로 1986년 北後面으로 편입되어 大峴洞으로 改名하였다. |
道津里 |
- 약 350년전에 정부운(鄭浮雲)이란 선비가 이마을에 정착하기 위하여 큰 황무지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칼로 베어내고 논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칼을 사용하여 풀을 베고 농을 만들었다고 해서 칼도(刀)자에 논답(沓)자를 써서 도답촌이라 불렀다. 또는 마을 앞에 앞에 내가 흐른다고 해서 도나리라 했다. 한자표기로 나루 진(津)자를 써서 도진(道津)이라 한다 |
道村里 |
- 자연경관이 가히 도(道)를 닦을 만한 좋은 곳이라 하여 도(道)자를 붙이고 거기에 맑게 흐르는 시내(溪)를 합하여 도계촌(道溪村)이라 이름 붙였다. |
斗山里 |
- 두산리를 에워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두메 또는 두산이라고 부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두산리라 이름하였다. 조선 중엽인 1610년 김동암(金東岩)이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이 지역의 생김새가 말을 엎어놓은 모양과 같다하야 말산이라 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斗山洞이라 하였다. |
勿閑里 |
- 물이 부족함이 없이 많다고 해서 무란기로 부르다가 후에 마을에서 나는 물이 너무 차다고 하여 한천(寒泉), 물한이라 불렀다. |
石塔里 |
- 석탑사 앞에 자역석을 가지고 쌓아올린 탑이 있다고 해서 석탑(石塔)리라 불여졌다 |
薪田里 |
- 주위에 참나무 숲이 많이 우거저 있다고 하여 섶나무 신(新) 자를 써서 신전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동음리를 병합하여 薪田里라 하였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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蓮谷里 |
- 약 300여년 전인 1700년경에 한 선비가 마을을 개척할 당시 큰 못이 있고 주위에 우거진 숲이 있어 늪실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蓮谷洞이 되었다. |
梧山里 |
- 약 360년 전 남복수(南復壽)란 사람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이 마을 뒷산에 오동나무가 무성하였다고 한다. 그 오동나무에는 가지마다 까치들이 집을 지어 까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에 의하여 남복수(南復壽)는 자신의 호(號)를 오음(梧陰)이라 짓고 마을 이름을 오상(梧峠)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瓮泉里 |
- 북서쪽으로 병풍같이 두른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마치 단지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옹전(瓮田)이라 불렸다. 그후 마을을 가로지르는 옥계천이 맑고 깨끗하여 옥천(玉川)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는 마을에 물맛이 좋기로 이름난 샘이 있어 옹기옹(瓮) 자에 샘 천(泉) 자를 써서 瓮泉이라 이름하였다. |
月田里 |
- 동서마가 위치한 곳에 반월처럼 생긴 동산이 있으며 그 동산을 중심으로 반월처럼 생긴 계단식 밭을 경작한다고 해서 달밭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서 추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月田이라 하였다. |
場基里 |
- 장이 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장이 열리지 않는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옹천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場基洞이라 하였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西後面 |
○연 혁
- 조선시대 安東府의 서쪽에 위치하여 부서면(府西面)으로 칭함
- 1896. 8. 4 부서면(府西面)에서 서후면(西後面)으로 개칭
- 1914. 3. 1 부․군․면 폐합, 서선면의 토탄리와 북후면의 소부동, 도진동의 일부를 병합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으로 安東市 西後面으로 개칭
○명칭유래
- 安東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府西面이라 칭하였다가
숙종때에 西先面과 西後面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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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坪里 |
- 광평이란 지명은 지명은 천등산 자락에 넓고 평평한 바위가 많아 너븐들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넓은 광(廣)자에 평평할 평(坪) 자를 서서 廣坪里라 하였음 |
苧田里 |
- 옛날 한양 조씨 후손들이 이곳에 살면서 마을 주위에 모시를 심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급하였으므로 모시를 많이 짜내는 고장이라 해서 모시밭, 苧田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함 |
台庄里 |
- 고려 공민완 6년 궁중에서 이 곳에 台를 묻었다하여 옛 태무지로 불리다가 1914년경 행정 구역 개편시 태장(台庄)이라 개칭하여 안동시 서후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현재 1리와 2리로 분리되어 있다. |
二松川里 |
- 마을을 가로지르는 한천이 2개라고 해서 두시내, 두서천이라 하다가 변하여 이송천으로 되었다. 자연마을은 미라골, 아래기, 까치개, 양지편, 주누골, 대장골, 제비원, 돈친골, 황사물, 웅골, 본마, 양지골, 거나리, 도촌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내가 둘이 있어서 두시내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二松川里로 되었다. |
金溪里 |
-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속명은 금음지 또는 금계라 한다.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옛날에 칭하기를 천년 패하지 않는 땅이라고 했다. 사복정 배상지가 여기에 살았느데 백중당이 있다. 용재 이종준, 판서 권예도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 김성일이 임하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여염집이 가득하고 한 줄기 냇물이 중간을 가로질렀는데 70을 넘은 늙은이가 집을 잇대어 사니 온 고을에서 일컬어 노인촌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금지라 불렀으나 학봉 선생이 이곳으로 옮겨와 검재로 고치고 한자로 金溪라 적었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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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谷里 |
- 천등산 줄기인 상산이 뻗어 내려 이룬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산이 마치 성을 이룬 듯 하여서 城谷이라 불렀다. |
耳開里 |
- 연산군때 권차룡이란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상산(商山)의 용소(龍沼)에서 용마(龍馬)가 나와 이 곳에 와서 귀를 열었다고 하여 귀여리라 하였고 음이 변하여 궬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耳開里라 한다. |
校里 |
- 교리라는 지명은 안동의 옛 지명인 복주 때에 이 지역에 향교가 있었다고 해서 향교골 또는 행겟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坪村里와 大石洞을 병합하여 校里라 하였다. |
鳴里 |
- 상산(上山)은 일명 상산(商山)이라고도 하는데 서후면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천등산에서 굽이쳐 서후면 城谷里로 뻗어 내린 두 봉우리가 수려하다. 전설에 의하면 이 상산에서 위용이 대단한 용마(龍馬)가 태어났는데 이개리(耳開里)에서 귀를 열고 이 곳에 와서 울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말우리 또는 馬鳴洞라 했으나 지금은 鳴里로 부른다. |
大豆西里 |
- 신라 때 큰 사찰인 도솔사가 있어서 한도솔, 한두실이라 하였으나 음이 변하여 대도솔, 대두실이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개목산성을 쌓고 이곳에 所를 두었다고 대두소라 하였다. 그후 음이 대두서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梧桐亭을 병합하여 대두서리라 하였다. |
者品里 |
- 舊韓末 본 마을에 학림송이란 사람이 16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정 6품의 벼슬을 제수 받은 후 공(公)의 덕망과 인품이 이웃 마을에 까지 널리 알려져 이때부터 이 마을은 재곡의 품(品)을 받은 선비가 사는 마을이라 재품(才品)이라 하였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인재가 많이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재(才)’ 자를 ‘자(者)’로 바꾸어 자품(者品)으로 개칭하였음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豊川面 |
○연 혁
- 삼국시대 하지현(下枝縣)에 속함
- 고려시대 풍산현(豊山縣)에 속함
- 조선후기에는 豊山面과 분리하여 豊南面과 豊西面으로 분리
- 1934. 4. 1 풍남면과 풍서면 소산리를 병합하여 豊川面으로 개칭
- 1976. 4. 1 낙동강 남쪽에 위치한 5개리의 주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漁潭出張所 설치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에 따라 安東市 豊川面으로 개칭
○명칭유래
- 풍천면이라는 지명은 풍남면과 풍서면의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풍성할 풍(豊) 字에 낙동강을 끼고 있어서 내 천(川)字를 조합하여 豊川이라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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葛田里 |
- 본래부터 풍산현 지역으로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서 산천을 뒤덮고 있었으므로 갈밭, 갈전(葛田), 가을전(加乙田)으로 불림. 갈전은 갈밭의 한자표기이며, 가을전이란 지명은 여자못과 갈대밭에 새들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더할 가(加) 새 을(乙) 밭 전(田)자를 써서 가을 전이라 했음 |
道陽里 |
- 동리가 양지바른 분지가 되어 되양골 또는 도양골이라 함.중종때 관찰사 김연이 살면서 도왕동으로 고침.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자방동, 상좌동, 구담동의 일부와 예천군 위라면의 산합동 일부를 병합하여 道陽洞으로 바뀜. |
九潭里 |
- 못이 아홉 개라서 구담이라고 하기도 하고,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는 강에 위쪽 아래쪽에 아홉 개의 소(潭)가 있어서 구담이라고 함 |
廣德里 |
- 넓은 둔덕이 있어 廣德이라고 부름 |
箕山里 |
- 마을 뒷산이 마치 곡식을 까부는데 사용하는 도구의 하나인 키이(箕)를 쏙 빼어 닮았다고 해서 기산이라고 함 |
申城里 |
- 동네의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그 한복판에 열십(十)자 로 큰 길이 나 있어 그 모양이 아홉 번째 간지인 원숭이를 뜻하는 납 신(申)자와 같이 생겼기에 납성계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申城里가 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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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湖里 |
- 을곡천(乙曲川)이 굽이쳐 내려가는 곳이라 굽이고, 변하여 구미, 귀미, 구미리(龜尾里)라고 하고 또 남쪽의 산등성이가 거북의 등과 같다하여 구로동(龜老洞)이라고도 했음 |
錦溪里 |
- 마을을 굽어 흐르는 계곡이 마치 비단과 같이 아릅답다고 해서 錦溪洞(里)라 칭함 |
魚潭里 |
- 풍수지리학적으로 자라형국에 속하여 못이 있어야 마을이 흥한다고 해서 어담이라 불렀다고 함 |
仁今里 |
- 하인금(인금1리)은 음지를 더한다는 뜻으로 익음(益陰)이라고 하고 월애(인금2리)는 동네가 반달같이 생겼다하여 월애(月涯)라고 일컫게 되었다고도 함 |
屛山里 |
- 마을앞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병산이라고 함 |
河回里 |
- 낙동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태를 이루면서 마을을 감싸도는 데서 유래 |
佳谷里 |
- 안동 권씨(權氏)의 집성마을인 이곳을 지곡이라 부르는데는 성씨와 관련이 있다함. 권(權)은 가지가 많아야 번성한다는 뜻에서 가지라는 뜻이 담긴 지(枝)자를 써서 지곡이라 함. 훗날 지(枝)자를 가(佳)로 바꾸게 되는데 이는 마을 앞으로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풍산들 너머로 아침해가 솟아오르는 장관이 아름답다고 해서 아름다울 가(佳)자로 바꾸어 가일 또는 가곡이라 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一直面 |
○연 혁
- 신라시대 일성현
- 조선시대 一直縣
- 1899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元東面․元西面으로 분리
- 1914. 4. 1 부군면 폐합에 따라 元東面과 元西面을 병합하여
一直面으로 개칭(12개리)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으로 安東市 一直面으로 개칭
○지명유래
- 一直이란 명칭은 본시 신라때부터 불리어져 왔으며, 고려말 공민왕이 정평공(靖平公) 손홍량공(孫洪亮公)의 충성을 치하하며 그대는 진실로 一直한 사람이다 라고 말한 찬사가 전해져 오면서 一直으로 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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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尾里 |
- 山이 둘러있고 물이 껴안은 듯 하고 거북과 뱀이 모인 듯 하여 龜尾라 하기도 하고, 마을앞을 흐르는 尾川이 洞里의 西北에서 구비치며 흐름을 꾸니 구비라 하던 것이 음이 변하여 龜尾가 되었다 고도 함 |
九川里 |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냇물이 구(九)자 형태로 흐른다고 하여 九川으로 명명함 |
望湖里 |
- 高麗末에 侍郞벼슬을 지낸 蘇氏의 一門이 살아 앞에 펼쳐진 들과 湖水를 바라보는 마을이라 望湖里이고 蘇氏의 湖水가 있어 蘇湖里라 했다 |
院 里 |
- 옛날에 雲山驛의 客舍인 院이 있었다고 院谷, 원골, 院洞이라 한다 |
光淵里 |
- 本來 安東府의 一直縣 地域으로 高揚縣監이 살던터가 있으므로 고양터 또는 괭이터라 하였는데, 마을에 火災가 자주나므로, 앞들에다 못을 파고는 뒤의 香爐峰의불길을 끈다는 뜻으로 光淵으로 이름을 삼았다 |
明津里 |
- 약350年前 陜川李氏 李福老(初溪郡守)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물가를 바라볼수 있다하여 望津이라 하였다 하며 1899年 본시 安東府의 一直縣의 地域으로 1914년 行政區域 폐합에 따라 明洞과 德洞과 光淵洞, 坪八洞의 각 一部와 義城郡의 丹村面 望津洞의 一部를 倂合하여 明洞과 望津의 글자를 따서 明津里라 불리워짐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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坪八里 |
- 本是부터 安東郡의 一直面의 地域으로써, 옛날에 星邑이 있었으므로 별마을 星谷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坪八村이 되었는데 1914年 行政區域 廢合에 따라 薪田谷, 桂谷, 劍舞谷, 丹堂谷, 沙器店을 병합하여 坪八里라 하였다 |
龍角里 |
- 1882년 固城李氏가 처음 입주하였으며 뒷산의 모형이 龍의 뿔과 같이 생겼다하여 龍角里라 부름 |
菊谷里 |
- 약 200년전 하국곡에서 申貴敦이란 이조참판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周邊의 山勢가 국화꽃을 닮았다 하여 菊谷이란 이름이 주어졌으나, 국싯골로도 불리어진다. |
造塔里 |
- 統一新羅時代 縣 소재지로서 高昌郡 南단의 표시로 七層塼塔을 세웠다하여 造塔이라 하였음. |
松里里 |
- 高麗末 忠烈王代 一直孫氏 始祖 靖平公 孫洪亮의 출생 성장한곳으로서 송림이 무성하였으므로 松里, 松谷, 솔마골이라 부름. |
遠湖里 |
- 마을이 산으로 쌓여있어 물이 멀다하여 멈물, 또는 머무리로 변하여 遠湖라고 부르게 되었다 함. |
雲山里 |
- 마을에 굴처럼 생긴 고개가 있으므로 굴터, 구르터, 굴터로 부르다가 漢字로 雲山으로 表記하였음.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南後面 |
○연 혁
- 조선시대 : 숙종때 安東府 府南을 南後面․南先面으로 개편
- 1896. 8. 4 安東郡 南後面으로 개칭(15個洞)
- 1914. 3. 1 府郡面 폐합에 따라 南先面․豊縣內面 일부를
병합하여 10개동으로 개편
- 1983. 2. 15 水上洞․水下洞을 安東市에 편입
- 1987. 1. 1 豊山邑 丹湖洞을 남후면에 편입(9개동)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으로 安東市 南後面
○명칭유래
- 남후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는 安東府의 남쪽에 있다하여 府南이라 칭하다가 숙종때 남선과 남후 두면으로 갈라지면서 南後面으로 불리어지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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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音里 |
- 넓고 큰바위가 여러곳에 산재하고 있어 廣岩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光音이 되었다 한다 |
武陵里 |
- 眉川江이 산부리를 돌아 흘러 들어가므로 무릉개라 하였다가 이가 변하여 武陵이라 부름 |
皆谷里 |
- 고려말 思复齋 權定 선생이 접거하였던 곳이며 안동김씨와 밀양박씨의 동성마을이며, 옛날 맛좋은 무가 생산되어 왕에게 진상했다고 하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검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皆谷里라 한다 |
儉岩里 |
- 400여년 전에 순천김씨가 개척하였고 마을뒤에 검은바위가 있어 검바우라 했으며 이곳은 선비들이 모여서 소일하던 곳이기도 하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야리를 병합하여 儉岩里라 한다 |
古下里 |
- 골이 日字 모양으로 생겨서 고일이라 하였고 이 마을은 고일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아랫고일, 하고곡, 하고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곡, 신기, 덕곡, 죽리를 병합하여 古下里라 한다 |
古上里 |
- 이마을은 남후면 지역으로 고일 위쪽이 되므로 웃고일 또는 상고곡, 상고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납시리, 중방리, 흠실 등을 병합하여 古上里라 한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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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阿里 |
- 원래 아틈실(阿谷)은 상아리와 하아리를 통칭하는 명칭이다 위쪽에 있다하여 웃아틈실이라 하고, 아래쪽에 있다해서 아래틈실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 어귀에 돌문이 서 있다 |
下阿里 |
- 아틈실(阿谷) 아래쪽에 위치한 하아리 전체를 아래 아틈실이라 부르며 선녀마을, 남짓골, 샘수골, 고개넘어, 재궁못을 통틀어 일컫는 마을이다 |
丹湖里 |
- 이지역은 본래 서선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현과 오미를 병합하여 丹湖里라 하여 풍산읍에 있었으나 1987년 1월1일 남후면에 편입되었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南先面 |
○연 혁
- 조선시대 숙종때 安東府 府南을 南後面․南先面으로 개편
- 1896. 8. 4 安東郡 南先面으로 개칭(16個洞)
- 1914. 3. 1 府郡面 폐합에 따라 臨西面 일부를 병합하여 10個洞으로 개편
- 1983. 2. 15 亭上洞․亭下洞을 安東市에 편입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으로 安東市 南先面
- 1995. 12. 1 梨泉3里를 신설
○명칭유래
- 남후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安東府의 남쪽에 있다하여 南後面과 합하여 府南이라 칭하다가 숙종때 남선과 남후 두면으로 갈라지면서 南先面으로 불리어지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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梨泉里 |
- 마을 중앙에 아주 큰 배나무가 있어서 뱁실, 이곡(梨谷)과 마을에 큰 우물이 있어 샘들, 천평(泉坪)을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梨谷洞과 泉坪의 이름을 합쳐 梨泉이라 칭함 |
申石里 |
- 마을에 원숭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고 하여 납동 또는 신석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泉坪里와 九尾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申石里라 칭함 |
九尾里 |
- 마을에 구미천이 구비쳐 흐르므로 구비, 구미라고 불리우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일동을 병합하여 九尾里라 칭함 |
新興里 |
- 고려시대 윤씨가 마을을 개척하여 망실(望實)이라 칭하여 살아오다가 마을이 운수가 없어 망해갈 무렵 노승이 신흥으로 이름을 고치고부터 부유한 마을이 되었다 하여 新興里라 칭함 |
道老里 |
- 옛날 마을 앞산에서 회의를 하였는데 이 마을을 가리킬때 노인이 손가락질을 하였다고 하여 지리골, 지로골(指老谷)로이라 불리우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로곡,신사동, 백양동, 사부곡, 도율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율과 지로의 이름을 따서 道老里라 칭함 |
峴內面 |
- 옛날에 동구밖에 큰 소(沼)가 있었으며, 소 옆에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소와 소나무안에 있다고 하여 솔안 또는 내리(內里)라는 마을과 마을뒤의 덧티고개 밑에 있다하여 덧티, 가현(加峴)이라 하는 마을이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리, 가현, 도율 일부를 병합하여 加峴과 內里의 이름을 따서 峴內里라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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院林里 |
- 조선 효종때 남취리 선생을 배향하기 위한 魯林書院이 창설되었는데 고종5년에 철폐된 후 서원마라 하다다 서원의 원(院)자를 써서 院里라 불리우지는 마을과, 노림서원 부근에 있다고 서원 이름을 따라 노리마 또는 魯林으로 불리우는 마을이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암리, 노림리, 원리, 토파동, 외하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院里와 魯林의 이름을 따서 院林里라 칭함 |
外下里 |
-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무수무, 중리, 신기, 음지, 양지를 병합하여 外下里라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臨河面 |
○연 혁
- 삼국시대 : 고구려 屈火郡
- 신라시대 : 경덕왕때 曲城郡
- 고려시대 : 臨河縣
- 조선시대 : 숙종때 臨河縣을 臨縣內面․臨西面으로 개편
- 1914. 3. 1부군면 폐합에 따라 臨縣內面河으로 개칭(5개동)
- 1974. 7. 1 縣下洞는 길안면에, 輞川洞은 임동면에 월곡면의
老山洞․石東洞은 임하면에 각각 편입(안동댐 건설)
- 1983. 2. 15 松川洞과 石東洞이 安東侍에 편입
- 1993. 11. 15: 思義里가 임동면 박곡리와 임하면 臨河里에
각각 편입(임하댐 건설)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으로 安東市 臨河面으로 개칭
○명칭유래
- 臨河라는 지명은 臨縣內面․臨西面이 병합할 때 반변천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하여 臨字와 물河字를 써서 臨河面으로 불리어지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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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河里 |
- 임하리는 臨河縣의 官衙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縣內, 縣內洞이라고 하였으며 또 반변천이 흐르는 강가에 있다고 하여 臨河라 하였다고 한다. |
川前里 |
- 천전리는 내앞이라고도 한다. 마을 앞에 반변천이 흘러서 유래된 것으로 주로 1리를 지칭하는 것이다. 내앞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지닌 마을임 |
楸木里 |
- 마을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가래나뭇골, 또는 추목추목골(楸木谷)이라 하였다. 추목리란 행정명칭도 이 마을에서 따 온 것이다. |
新德里 |
- 신덕이란 명칭은 마을 앞에 연못이 있어 신당(新塘)이라 하였는데 이 新塘과 이덕(伊德)이라는 자연부락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 新德里임 |
琴韶里 |
- 이 마을은 원래 금수 또는 금양이라고 하였는데 마을의 안산(案山)인 비봉산(飛鳳山) 봉우리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마을 앞 들에 흐르는 수로가 비단폭을 펼쳐 놓은 듯이 물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그러다가 비봉산 아래에 있는 오동소(梧桐沼)엔 거문고가 있어야 부합이 된다는 전설에 의하여 금소(琴韶)로 개칭되었다. 또 일제강점기 때에 금소에서 만세시위를 강하게 하여 일본인들이 마을의 이름을 금소라고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옛날에 일정한 거리마다 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역을 두었다 하여 금소역촌 또는 역마라 불리기도 하였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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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谷里 |
- 고곡리라는 명칭은 마을이 위치한 곳이 산골짜기이며 이 골짜기가 깊고 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
梧垈里 |
- 梧垈라고 하는 명칭은 마을에 오동나무 숲이 있어서 梧桐枝葉이라 칭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梧桐 숲의 터란 뜻에서 오대리라고 칭함 |
老山里 |
- 노산리의 명칭은 마을이 盧山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으로 盧山村이라고도 하였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吉安面 |
○연 혁
- 고려시대 초기 吉安部曲
- 고려시대 충선왕 때 吉安縣 승격
- 조선시대 숙종 때 吉安縣을 吉安面으로 개칭
- 1896. 8. 4 安東郡 吉安面으로 개칭(12개동)
- 1904 길안면과 임남면으로 분리
- 1914 府郡面 폐합으로 臨南面, 臨東面․臨西面 일부, 靑松郡 縣北面․府西面 일부를 병합하여 吉安面으로 개칭(14개동)
안동군 길안면으로 함
- 1974. 7. 1 안동댐 건설로 知禮里․枝里를 臨東面으로 臨河面 縣下里를 吉安面에 각각 편입
- 1993. 11. 15 임하댐 건설로 知禮里 일부를 大谷里에 편입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으로 현재의 安東市 吉安面으로 개칭
○명칭유래
- 길안 이라는 지명은 편안하고 이 고을에 살면 만사가 형통한다는 뜻으로 신라시대 吉安部曲, 고려 충혜왕때 吉安縣, 府郡面 폐합에 따라 吉安面이라 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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泉旨里 |
- 마을을 개척할 당시 샘물이 솟아나는 큰 웅덩이가 있었는데, 샘물의 맛이 좋다고 하여 샘나루, 천지라고 하였다. 한편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족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피난올 것이라 하여 성을 쌓았다가 왕이 오지 않고 현재의 예천군 하리면으로 가버렸으므로 성(城)을 완성하지 않고 철거한 흔적이 있어 성제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
晩陰里 |
- 원만음은 약 400년 전에 영양남씨(英陽南氏)와 의령옥씨들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마을 명칭은 마름, 만음, 원만음이라고 하는데 두리봉(斗里峯)의 응달에 마을이 있다고 붙여진 것이다. 그리고 晩陰里라는 행정명칭이 이 마을의 이름을 따 온 것으로 만음리의 본동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
柏子里 |
- 마을 명칭은 약 400년 전 선방재 아래에 마을을 개척할 당시 잣나무가 많아서 백자라 하였다고 하며 또 백자리(栢子里)의 주된 마을이라 하여 원백자라 한다. 백자리의 행정명칭도 이 마을에서 따 온 것이다. |
金谷里 |
- 금곡이라는 명칭은 쇠가 많이 나는 골짜기라 하여 붙인 것이다. |
松仕里 |
- 송사리는 원래 臨河縣의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편에 의하여 安東郡 吉安面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송제동, 마사리, 대사동의 일부를 통합하여 송사리가 되었는데 松仕里는 송제와 마사의 명칭을 따서 만든 명칭이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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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寺里 |
- 고려때 마을에 큰 절이 이었기 때문에 大寺洞이라 붙여진 명칭임 |
古蘭里 |
- 14 세기 경 이 마을을 개척할 때 골안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골안이라 하였으며, 1914年 行政 區域 改編에 따라 古蘭洞이라 하였다. |
黙溪里 |
- 이 마을은 원래 거묵역(居墨驛)이라 하다가 조선 연산군 6년에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선생이 여기로 우거(遇居)하면서 그 다음 해에 묵촌(默村)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송암폭포(松岩瀑布) 위에 만휴정(晩休亭)을 건립하면서 그 정자 앞 냇물이 잠잠히 흐르는 모습을 보고 다시 묵계(默溪)라 칭하였다 |
九水里 |
- 약 300년 전부터 귀현(龜峴)이라고 써 왔으나, 70년 전 일본인이 거북 구(龜)자가 쓰기 어려워 구수(九水), 즉 아홉 구(九)자를 썼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이곳은 9곳에서 물이 나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
杯芳里 |
- 마을의 명칭은 주민들이 술을 즐겨 마셨다 하여 잔배라는 이름을 붙여졌다고 하며 선비들이 마을을 개척한 후 풍류시를 읊으며 술잔을 들었다고 하여 배방이라고 칭함 |
龍溪里 |
- 용계라는 명칭은 약계(藥溪) 권순기(權舜紀) 선생이 마을 뒷산을 보고 용이 누운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
大谷里 |
- 마을 명칭은 마을이 위치하는 골이 깊고 크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하며 또 차거운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縣下里 |
- 吉安縣의 縣廳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고 縣下里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따온 명칭임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臨東面 |
○연 혁
- 조선시대 : 肅宗때 臨河縣을 臨東面으로 개편
- 1896 安東郡 臨東面 으로 개편(11개동)
- 1908 內․外 臨東을 병합 臨東面으로 개칭
- 1914. 3. 1 府郡面 폐합으로 3개리을 임하면에 편입(8개동)
- 1963. 9. 1 知禮出張所 설치
- 1975. 7. 1 안동댐 건설로 행정구역 개편 7개리 편입(13개동)
- 1989. 6. 1 면소재지 현 위치로 이전
- 1991. 4. 15 知禮出張所 폐지
- 1993. 11. 15 임하댐 건설로 知禮里를 朴谷里에 편입(12개리)
- 1995. 1. 1 시․군 통합으로 안동시 임동면으로 개칭
○명칭유래
- 臨東이라는 지명은 肅宗때 臨河縣에 屬하였다가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臨東으로 불리어지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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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平里 |
- 中平里는 원래 臨河縣의 지역으로 두 하천이 합치는 중간 지역이라 하여 중드루, 또는 중평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
水谷里 |
- 조선 明宗때 柳城 선생이 이곳에 입향하였으며 당시 마을뒤 峨岐山에서 물줄기가 마을을 둘러싼 형상으로 흐르고 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朴谷里 |
- 마을이 큰 골짜기에 위치하면서 그 지세가 항아리와 유사하다고 하여 호곡(壺谷)이라 하였다가 다시 박모양과 같다고 하여 호곡(瓠谷)이라 하였으며 또 박곡(博谷)으로 부르다가 박곡(朴谷)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
輞川里 |
- 고려말에 염흥방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병을 길러 그 세력이 막강하자 약탈을 일삼았다. 나라에서 관군을 보내어 마을 앞 半邊川에서 토벌하니 그 사병들이 이곳에서 전멸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을 망지내(亡地川)라 칭하였다. 그러나 그 후 지명에 망(亡)자가 있어 좋지 않다고 하여 輞川으로 고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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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川里 |
- 高川里는 안동에서 청송으로 넘어가는 가래재 아래에 넓은들 한 가운데 하천이 흐른다고 하여 高川이라 불리워진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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枝 里 |
- 명칭유래는 반변천이 두 곳에서 합류하여 가지처럼 보이는 지형 때문에 가지골로 불렀다. 또 산의 형세가 갓 모양과 같이 생겼다 하여 갓골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옛날 오승(吳昇)이라는 장수가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인근에서 제일 큰 나무가지가 있다고 하여 원지라고도 불렀다. 또 지동의 본동이라는 뜻이라고 하여 원지라고도 한다는 설도 있다. |
葛田里 |
- 갈전리는 갈전, 갈밭으로 부르는데 칡덩쿨이 일대에 무성하게 번져있는 것을 개척하여 이룬 마을이라고 한데서 유래되어 葛田이라 칭함 |
馬嶺里 |
- 수몰되기 전의 이 마을 명칭은 맛재, 마령이라고 하였다. 마을 모습이 우마(牛馬)가 짐을 싣고 있는 형국, 또는 말발굽 형상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
馬 里 |
- 마리는 원래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이었으며 삼한시대에 마읍군(馬邑郡)이 있었다고 하여 마읍, 맛골, 마읍촌이라 하였다. |
沙月里 |
- 원래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지형이 달과 같이 생기고 강에 모래가 많았어 사월, 사드레, 사들, 사월천, 사평 등이라 하였다. |
渭 里 |
- 위리는 원래 임하현에 속하였으며 마을이 위쪽에 있다고 하여 윗골, 위곡, 위동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위리 앞에 흐르는 작은 하천이 있는데 현재의 대곡천이다. 대곡천이라 하기 전에는 위천(渭川), 위수(渭水)라고 하였는데 수원이 풍부한 위수가 흐르는 마을이라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
大谷里 |
- 대곡리는 마을을 형성할 당시 큰 골짜기라고 하여 大谷이라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禮安面 |
○연 혁
- 고구려 시대 買谷縣으로 정함
- 신라시대 善谷縣으로 칭함
- 1390(공양왕 2년) 길주 禮安縣으로 개칭
- 1895(고종 32년)禮安縣에서 禮安郡으로 개칭
- 1914. 3. 1 府郡面 폐합에 따라 宜東面․東上面 일부, 北先面․東後面 일부, 奉化郡 才山面 일부를 병합하여 安東郡 禮安面으로 개칭(13개동)
- 1963. 9. 1 三溪出張所 설치
- 1974. 7. 1 月谷面 7개리, 禮安面 9개리로 합병 현재 禮安面
○명칭유래
- 禮安이라는 지명은 고려 太祖때 성주 李能宣이 의거하여 귀순하였다하여 禮安縣으로 되었다가, 府郡面 폐합에 따라 安東郡 禮安面으로 불리어지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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川前里 |
-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 光山金氏가 최초로 마을을 개척 하였다고 전해지며, 임하면의 내앞 마을처럼 마을 앞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으므로 내앞 또는 川前洞이라 하였다. |
浮浦里 |
- 고려 중기부터 조선말기까지 시행해 온 驛院公營制度에 의하여 禮安縣에 속했던 浮羅院이 있었으므로 부라원, 부라리라 하였다. |
歸團里 |
- 구한말 예안군 동하면의 지역으로서 구다니 또는 구단이라 하였는데,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갈동을 병합하여 귀단동(리)이라 하였다. |
台谷里 |
- 예안면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뒤에 태봉(胎峯)이 있 으므로 이름을 탯골, 또는 태곡(台谷), 태동(台洞)이라 부른다. |
仁溪里 |
- 예안면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안동군 동상면에 속해있었 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구리, 도동리, 전두리, 건천리, 송곡을 병합하여 동계천(東溪川)의 뜻을 따서 인계동(리)이라 하여 칭함 |
三溪里 |
- 예안군 동상면에 속하였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늣골, 성황리, 오도락, 원음, 고감을 병합하여, 성황리 앞에 세 내가 합하여 흘러가므로 그 뜻을 따서 삼계동(리)이라 칭함 |
道村里 |
- 도촌리는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며 길골, 또는 질골, 길곡(吉谷), 도곡(道谷)으로 불렀는데 그 유래는 옛날에 물편 사람들이 영해에서 소금이나 해산물을 지고 영양을 거처서 장갈령(長葛嶺)을 넘어 이 마을을 지나 예안까지 내왕하였는데, 장갈령에서 이 마을로 뻗어 내려오는 길을 길골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통마, 톳골, 오미골, 수락골, 고사리골, 평지마, 사래실을 병합하여 도촌동(리)라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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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川里 |
- 이 마을은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학리, 부모리, 장갈리를 병합하여, 동쪽 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내(川)의 뜻을 따서 동천동(리)이라 칭함 |
新南里 |
- 예안면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며 봉화군과 닿아 있다. 예안군 동상면의 지역에 속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고죽, 정자곡, 구통, 두곡, 산양평, 점곡과 봉화군 재산면의 남면리 일부를 병합하여, 산성(山城) 남쪽이 되므로, 그 뜻을 따서 신남동(리)이라 칭함 |
棄仕里 |
- 이 마을은 산기슭에 형성된 마을이므로 처음에는 지실어촌, 지실이, 기실기, 지시러기 등으로 불렀으나, 고려말 사간 권정이 조선 태조가 부르자 자신의 거처를 이곳 玉山으로 옮기고는 옥산동 또는 기사리(棄仕里 : 벼슬을 그만둔 마을)로 칭함 |
道木里 |
- 이 마을은 산천의 그윽하고 아름다움이 마치 武陵桃源 같고, 복숭아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도목(桃睦) 또는 도목촌(桃睦村) 이라 불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어떤 점장이가 와서 마을 주위에 복숭아나무가 있으면 해롭다고 하여 도목촌(道木村)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또 도목(道睦)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남첨 선생이 강학하던 장소를 기려 후손들이 8칸의 정사(精舍)를 지은 뒤 편액을 '도목정사(道睦精舍)'라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도(道)로서 일족을 돈목(敦睦)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舟津里 |
- 주진리는 낙동강 가의 나루터가 되므로 배나드리, 배나들, 또는 주진(舟津)이라 칭함 |
桂谷里 |
- 계곡리는 안동군 임북면에 속하였으며 계일, 또는 계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마곡, 전시곡, 장성 백리를 병합하여 계곡동(리)이라 칭함 |
鼎山里 |
- 정산리는 구한말 안동군 임북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정정리(上鼎井里), 하정정리(下鼎井里), 등산리(登山里), 계곡리(桂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정정(鼎井)과 등산(登山)의 이름을 따서 정산동(리)가 칭함 |
九龍里 |
- 옛날 안동군 임북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구렁이 있으므로 구렁, 또는 구룡방이라 하였다. |
美質里 |
- 미질리는 구한말 안동군 임북면의 지역으로서 미지리, 또는 미질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계, 벌탄, 벽지곡, 동파를 병합하여 미질동(리)이라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陶山面 |
○연 혁
- 조선시대 禮安縣
- 1895. 5. 26 禮安郡 宜東面으로 개칭(16개동)
- 1914. 3. 1 府郡面 폐합으로 宜西面 8개리, 邑內面․奉化郡
下南面 일부를 병합하여 安東郡 陶山面 으로 개칭(10개동)
- 1974. 7. 1 안동댐 건설로 禮安面 西部洞․東部洞․宣陽洞 3개동을
편입(13개리)
- 1974. 7. 1 西部出張所 설치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에 따라 安東市 陶山面으로 개칭
○명칭유래
- 도산면의 지명유래가 되는 ‘陶山’은 太白山에서 떨어져 내린 지세가 北에는 투구봉 西에는 龍頭山 國望峰 南에는 靈芝山으로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산이 많은 지역과 절경지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하여 질그릇 陶字와 뫼 山字를 써서 陶山이라 불리어지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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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溪里 |
- 태백산(太白山)의 지맥인 용두산(龍頭山)과 도산면 태자리에서 근원하여 온혜(溫惠)를 거쳐 흐르는 냇물이 상계(上溪) 마을의 퇴계종택 앞을 지나 낙동강에 흘러드는데, 종택 앞으로 흘러가는 냇물을 퇴계(退溪)라 한다. 원래 냇물의 이름은 토계(兎溪)였으나 명종 원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이 냇가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냇물의 이름을 퇴계(退溪)로 고친 후 선생의 아호(雅號)로 삼았는데, 후에 토(兎)자를 음(音)이 같은 토(土)자로 고쳐 마을 이름을 토계(土溪)로 불렀다고 한다. |
汾川里 |
- 고려말엽에 군기시소윤(軍器寺小尹)을 지낸 이헌(李軒) 공이 동네를 둘러보니 낙동강 물이 밝게 흐르므로 부내라 불렀다고 하며, 한자로는 汾川 또는 汾江村이라 한다. |
宜村里 |
- 낙동강 물이 두갈래로 흘러 마을이 섬같아 보인다고하여 섬촌, 섬마, 섬마을이라 불리우는 섬촌과 어진(仁)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뜻으로 宜仁 마을을 병합하여 宜村이라 칭함 |
遠川里 |
- 遠川里는 부끄러운 것을 멀리하라란 뜻으로 멀 원(遠)字와 주역에서 부끄럽다는 의미의 마을 촌(村)字를 취한 遠村과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 수려하고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청결하고 광채가 아름답다고 하여 川沙美, 내살미, 川沙, 등으로 불리우은 川谷 마을의 이름을 병합하여 遠川이라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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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川里 |
- 丹川里는 마을뒤에 붉은 점토질의 산맥이 뻗어있고 강가의 자갈도 연분홍 빛인데 이로 인하여 붉은단(丹)字와 모래 사(沙)字를 딴 마을이름인 丹沙와 양지마르고 기후가 온화하여 목화재배의 적지로 예로부터 목화산지라 하여 매내, 메내, 면천(綿川)의 마을이름을 병합(丹沙와 綿川)하여 丹川이라 칭함. |
佳松里 |
- 佳松里는 퇴계선생이 청량산을 왕래하던 중 강가에 늘어선 소나무가 참으로 아름답다하여 嘉松, 佳松, 佳仕里라 불리우는 마을 이름과 마을앞 낙동강 물이 올미라는 절벽에 부딪쳐서 깊은 소(沼)를 이루는데 이 소의 언덕부분에 위치하고 있다고 소두들(쏘두들) 혹은 沼塢, 松塢, 松塢里로 불리우는 마을의 이름을 병합(佳仕里와 松塢)하여 佳松이라 칭함. |
太子里 |
- 太子里는 원래 奉化郡 下南面의 지역으로서 태자산(太子山)이 있어서 太子山, 太子山里 또는 줄여서 子山이라 불렀다. |
溫惠里 |
- 溫惠는 예로부터 온천(溫泉)이 있어서 여러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게 되었다하는 뜻으로 온혜(溫惠)라 하였다 한다. |
雲谷里 |
- 운곡리는 마을이 높은 곳에 형성되어 항상 구름이 서린다 하여 구름실, 구래실, 구레실, 雲谷이라 불리우는 마을과, 마을 부근에 떡갈나무가 많으며 칡이 엉켜 우거져 골짜기를 이루었다 하여 갈골 혹은 葛谷로 부르는 마을의 이름을 병합(雲谷과 葛谷)하여 雲谷이라 칭함. |
宜一里 |
- 宜一里는 구한말 禮安郡 宜西面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을리, 북평리, 연곡리, 효잠리, 매정리와 邑內面의 교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宜西面의 첫 동리라는 뜻으로 宜一이라 칭함 |
東部里 |
- 東部里는 구한말 禮安郡 邑內面에 속한 지역인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만촌동, 관저동, 교촌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禮安邑의 동쪽이 되므로 東部洞(里)이라 칭함. |
西部里 |
西部里는 원래 禮安郡 邑內面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관저동, 교촌동, 만촌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예안읍의 서쪽이 되므로 西部洞(里)이라 침함. |
宣揚里 |
宣揚里는 구한말 예안군 邑內面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선안동, 무양동, 교촌동, 천전동의 각 일부와 西面의 구송동 일부를 병합하여 선안과 무양의 이름을 따서 宣揚洞(里)이라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祿轉面 |
○연 혁
- 삼국시대 고구려 買谷縣의 한 지역으로 소속 되고 그 뒤 신라때 善谷縣
으로 고쳐 내령군(奈靈郡, 현재의 영주)의 領縣 의 한지역 이 되고
- 고려시대 현종때 禮安縣 西面․北面에 속하여 (吉州 : 안동)에 소속
- 조선시대 禮安郡 西面․北面에 속하였으며
- 1895. 5. 26 禮安郡 西面으로 개편(11개리)
- 1914. 3. 1 府郡面 폐합에 따라 북면의 11개리와 邑內面․榮州郡 川上面․奉化郡 林只面 일부를 병합하여 安東郡 祿轉面으로 개칭(10개동)
- 1995. 1. 1 安東市․郡 통합으로 安東市 祿轉面으로 개칭
○명칭유래
- 녹전이라는 지명은 부군면 폐합시 녹전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으며, 한편으로는 福(祿)이 굴러 들어오고 토질이 비옥하다 하여 녹전으로 불리어지게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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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坪里 |
-. 예안군(禮安郡) 북면(北面)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방하동(方下洞),성천리(聖泉里),신기리(新基里),호암리(虎岩里),이현리(梨峴里),문평리(文坪里),삼대(三坮),주곡(周谷),효잠(孝岑)안흥리(安興里)를 병합하여 신기와 문평의 이름을 따서 新坪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葛峴里 |
- 예안군(禮安郡) 북면(北面)지역이 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굴현(屈峴), 갈곡(葛谷), 상등곡(上登谷)을 합하여 갈곡과 굴현의 이름을 따서 갈현동(葛峴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梅井里 |
- 예안군(禮安郡) 북면(北面)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골매리(骨梅里) 신정리(新井里), 고정리(古井里), 쥐심골, 담말을 병합하여 골매(骨梅)와 신정( 新井)의 이름 뒷자를 따서 매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
元川里 |
- 예안군(禮安郡) 북면(北面)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원당리(元塘里), 어리(於里),길명리(吉明里)와,영주군(榮州郡) 천상면(川上面) 오천동(汚川洞)과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九川里)의 일부를 합병하여 원당과 오천동의 이름을 따서 元川洞이라 칭함 |
沙川里 |
- 예안군(禮安郡) 북면(北面)지역 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사기막(唦器幕)과 간천(艮川)의 각 한자씩을 따서 사천동(沙川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祿來里 |
- 예안군(禮安郡) 서면(西面) 녹전리(祿轉里)이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녹전리(祿轉里), 구용곡(九龍谷), 중평(中坪), 정전(庄田),내동(來洞)등을 병합하여 녹래동(祿來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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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松里 |
- 예안군(禮安郡) 서면(西面)지역 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송음리(松音里), 죽전리(竹田里), 능리(陵里), 유빈동(柳殯洞)을 합하여 죽전과 송음의 이름을 따서 죽송동(竹松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九松里 |
- 예안군(禮安郡) 서면(西面)지역 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지례(智禮), 구단(九丹), 우보(遇甫), 광현(廣峴)과 읍내면(邑內面)의 교촌동(校村洞)의 일부와 신동일부(新洞一部)를 병합하여 구단과 이곳에 있는 솔밭의 뜻을 따서 구송동(九松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四新里 |
- 예안군(禮安郡) 서면(西面)지역 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신안리(新安里), 가야리(佳野里), 도치리(都治里), 송두리(松頭里), 어석리(於石里), 안지리(安智里)를 병합하여 새로운 동을 구성하여 사신동(四新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西三里 |
- 예안군(禮安郡) 서면(西面)지역이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동현리(東峴里), 사천리(沙川里), 이전리(梨田里)등 세지역을 합하여서 서삼동(西三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中區洞 |
○연 혁
- 1914. 3. 1 府郡面 폐합때 東門內․西門內․雲興․泉里․ 新世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東部洞이라 하고 新世․安幕洞의 일부가 합하여 栗世洞으로 개편
- 1931. 4. 4 安東邑制 실시에 따라 西部洞을 本町3․4丁目과 八紘町2丁目으로 栗世洞을 누정, 太師町, 栗世町으로 新世洞 일부를 영남산의 이름을 따서 嶺南町이라 했으나
- 1947. 4. 1 일본식 동명변경에 따라 本町3丁目은 三山洞, 本町4丁目은 西部洞, 太師町은 北門洞, 法上洞 일부를 갈라서
木城洞으로 개칭
- 1964. 3. 1 三山․西部․北門洞을 통합 中區洞으로 개칭 玉井․ 栗世東을 통합 玉栗洞으로, 新世․法興洞을 통합 新興洞으로, 東門․東部․雲興洞을 통합 東區洞으로, 南門․南部․泉里洞을 통합 南區洞으로 개칭
- 1973. 7. 1 木城. 花城洞을 中區洞에 편입
- 1983. 2. 15 東區․南區洞을 통합 東南洞으로 개칭 象牙洞 일부가 新興洞에 편입
- 1997. 7. 1 中區․東南洞을 통합 中區洞으로, 玉栗․新興洞을 통합 東區洞으로, 中區東의 花城洞을 法上洞으로 편입
- 1998. 12. 1 中區․東區洞을 합쳐 행정동을 中區洞으로 개칭
(법정동 15個洞)
○ 명칭유래
- 安東市內의 中心地域에 位置하고 있어 中區洞이라 불리워짐 |
西部洞 |
- 安東府城을 중심하여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있었는데 그 중 서문(西門)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西門內洞이라고 하였다. |
北門洞 |
- 본래 安東府 동부의 지역으로서 안동부성의 북문이 있었으므로 그에 접한 거리를 북문거리 또는 북문통이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栗世洞의 일부를 분할하여 이곳에 있는 태사묘의 이름을 따서 太師町이라 하다가 1947년 일본식 洞名을 변경할 때 北門洞으로 고쳤다. |
三山洞 |
- 현재 안동시보건소 앞에서 동쪽으로 삼뭇들, 장거리들이 있어서 삼뭇돌․삼맷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음 |
木城洞 |
- 목성산(木城山)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木城으로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栗世洞 |
- 고려시대부터 불리던 지명으로 밤나무가 많이 있는 골이라 하여 밤적골․밤저골․栗世洞이라고 불리운다. |
玉井洞 |
- 맑고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新井里․玉井洞으로 칭함 |
法興洞 |
- 신라 때 법흥사(法興寺)가 있어서 이 일대를 법흥골․法興洞이라 칭함 |
新世洞 |
- 옛날에 새 절이 있었다 하여 새절골․새적골․新世洞이라 칭함 |
象牙洞 |
- 지형이 코끼리의 이빨(象牙)처럼 생긴데서 연유되어 상앗골․ 쌍아골․象牙洞이라 칭함 |
東部洞 |
- 安東府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東部라 칭함 |
雲興洞 |
- 본래 安東府 동부의 지역으로써 운흥사(雲興寺)가 있었으므로 雲興洞이라 칭함 |
東門洞 |
- 安東府의 동부지역으로서 安東府城의 동문 부근에 있었으므로 동문거리 또는 동문동이라 칭함 |
南門洞· |
- 安東府의 지역으로서 安東府城의 남문 부근에 있었다고 하여 남문거리 또는 南門洞이라 하였다. |
南部洞 |
- 安東府의 남쪽에 있었다고 해서 남문거리․南部洞이라 칭함 |
泉里洞 |
- 옛날에 큰 샘이 있었으므로 샘결 또는 샘마을, 泉里洞이라고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明倫洞 |
○연 혁
- 1914. 3. 1 郡面폐합에 따라 安幕洞 으로 개편 관할
- 1931. 4. 1 安東邑制 실시에 따라 安幕町, 明倫町1․2丁目으로 개편
- 1947. 4. 1 일본식 洞名 변경에 따라 안막정을 安幕洞으로,
명륜정1정목은 明倫洞으로 명륜정2정목은 新安洞으로 개편
- 1964. 3. 20 명륜․신안동을 통합 明倫洞으로 개칭
- 1983. 2. 15 臥龍面 西枝․中佳邱․山野里 일부가 安幕洞에 통합
- 1992. 5. 26 신안현대아파트 건립으로 안막동 일부가 明倫洞에 편입
- 1997. 7. 1 명륜동과 안막동을 통합 明倫洞으로 개칭
○명칭유래
- 옛날 향교가 있던 동이라 하여 향교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향교의 강당인 명륜당 이름을 따서 明倫洞이라 칭함 |
明倫洞 |
- 옛날 향교가 있던 마을이라 하여 향교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향교의 강당인 명륜당 이름을 따서 明倫洞이라 칭함 |
新安洞 |
- 安東府의 동북부에 있어 安幕洞의 일부였으나 1931년 1읍제 실시에 의해서 명륜정2정목이 되었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의해서 안막동에서 나와 독립되었다는 뜻으로 新安洞 으로 명명함 |
安幕洞 |
- 옛날에 순흥안씨의 효자가 시묘하던 막사가 있었다고 하여 安幕洞이 되었다는 내력과 고려태조가 견휜의 군사를 물리칠때 안순이 할멈의 주막있던 마을이라 하여 安幕洞으로 불린다는 설도 있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龍上洞 |
○연 혁
- 조선시대 安東郡 府東面 龍上洞이라 칭함
- 1914. 3. 1 府郡面 폐합에 따라 安東郡 安東面 龍上洞이라 칭함
- 1931. 4. 1 安東面이 安東邑으로 승격 龍上 1․2․3區로 구분
- 1947. 4. 1 安東郡 安東邑 龍上洞을 龍上洞과 城谷洞으로 분리
- 1973. 7. 1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城谷洞과 龍上洞을 통합 龍城洞으로 개칭
- 1983. 2. 15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安東郡 臨河面 石洞2洞을 龍城洞에 편입
- 1998. 12. 1 龍城洞과 松川洞을 통합 龍上洞으로 개칭
○명칭유래
- 고려 공민왕이 안동에 왔을 때 岐山에다 성을 쌓고 이곳에 말을 먹였다 함.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부임할 당시 비만 오면 낙동강의 제방이 유실되더니 하루는 마씨 성을 가진 사람의 꿈에 청룡이 나타나 선어대에서 황룡과 등천시합을 할 테니 황색물이 끓는 곳에 칼을 던져달라고 부탁하여 마씨가 그대로 하자 황색기운이 없어지고 뇌성벽력을 치며 청룡이 등천에 성공하고 고마운 뜻으로 들판을 마씨에게 주었다 하여 이 마을을 마뜰이라 하고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龍上이라 함 |
龍上洞 |
- 고려 공민왕이 안동에 왔을 때 岐山에다 성을 쌓고 이곳에 말을 먹였다 함. 맹사성이 안동부사로 부임할 당시 비만 오면 낙동강의 제방이 유실되더니 하루는 마씨 성을 가진 사람의 꿈에 청룡이 나타나 선어대에서 황룡과 등천시합을 할 테니 황색물이 끓는 곳에 칼을 던져달라고 부탁하여 마씨가 그대로 하자 황색기운이 없어지고 뇌성벽력을 치며 청룡이 등천에 성공하고 고마운 뜻으로 들판을 마씨에게 주었다 하여 이 마을을 마뜰이라 하고 용이 승천하였다 하여 龍上이라 함 |
城谷洞 |
- 고려 공민왕이 피난 왔을 때 이곳에서 궁녀와 마부가 죽자 안동에 역질과 흉년이 돌아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리니 변고가 없어졌다고 함. 그후 한집 두집 사당주변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선왕데이 마을로 부르게 되었으며 근래에 城谷洞으로 칭함 |
宋川洞 |
- 반변천 안쪽에 시냇물이 흐르고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많아서 솔뫼․솔걸․송걸 등으로 부르다 근래에 宋川洞이라 칭함 |
石洞洞 |
- 이 마을은 약 350여년전 배찬이라는 선비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지형이 떡을 찌는 시루모양으로 되어 있고 방모양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석실이라 부르다 근래에 石洞洞이라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西區洞 |
○연혁
- 1896. 8. 4 安東郡 府奈面
- 1914. 3. 1 府郡面 폐합으로 玉洞에 편입
- 1931. 4. 1 安東邑制 실시에 따라 法上洞 일부를 法上町
2․3․4丁目으로, 玉洞 일부를 八紘町4․5丁目으로 개편
- 1947. 4. 1 법상정2정목을 大石洞으로, 법상정3정목을 安興洞으로,
팔굉정4정목을 沃野洞으로, 법상정4정목을 廣石洞으로,
팔굉정5정목을 堂北洞으로 개편
- 1964. 3. 20 大石洞과 安興洞을 大興洞으로, 沃野洞과 廣石洞을
大新洞으로 각각 통합
- 1997. 7. 1 大興․大新․堂北洞을 통합 西區洞으로 개칭
- 1998. 12. 1 행정동 통합에 따라 江南洞(亭上․亭下․水上․
水下洞)을 西區洞에 통합
- 2005. 9. 1 행정동 조정으로 法上洞(法上․金谷․花城洞)을 西區洞에 통합하고, 4개 법정동(亭上․亭下․水上․水下洞)을 분동하여 江南洞 신설
○명칭유래
- 西區라는 명칭은 시내 중심지에서 서쪽에 위치하며 西區라고 하였으며, 大興․大新․堂北洞이 통합되면서 西區洞이라 칭함 |
廣石洞 |
- 마을안에 넓은 돌이 있었다 하여 너븐돌 또는 광석이라 하여 廣石洞이라 칭함 |
堂北洞 |
- 법룡사의 법당뒤에 당집이 있었는데 그 북쪽에 있는 마을 이라 堂北洞이라 칭함 |
大石洞 |
- 마을안에 지름이 3m 정도 되는 반석(盤石)이 있어 大石洞이라 칭함 |
安興洞 |
- 安東邑에 새로 일어나는 洞里라는 뜻으로 安興洞이라 칭함 |
沃野洞 |
- 安東府의 옥(獄)이 있었다고 하여 옥거리 또는 옥리로 불리다가 沃野洞이 되었음. |
金谷洞 |
- 고종 22년 權寧準 선생이 金谷書堂을 짓고 후진양성을 한데서 유래하여 金谷이라 불렀음. |
法尙洞 |
- 통일신라시대에 법상사(法尙寺)가 있었다고 하여 法上洞이라 칭함 |
花城洞 |
- 옛날에 꽃재라고 부르던 이름에서 유래.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太華洞 |
○연 혁
- 1896. 5. 26 지방관제 개편으로 安東府 府內面 玉洞로 편입
- 1914. 3. 1 郡面폐합으로 安東郡 玉洞에 편입
- 1931. 4. 1 安東邑制 실시로 玉洞의 일부를 八絃町 六丁目 으로 개편
- 1947. 4. 1 八絃町 六丁目이 太華洞으로 개칭
- 1963. 1. 1 安東市 승격으로 安東市 太華洞
○명칭유래
- 太華라는 명칭은 太華山의 이름을 따서 太華洞이라 하였음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平和洞 |
○연 혁
- 1895. 5. 26 지방관제 개편으로 安東郡 府內面 玉洞에 편입
- 1914. 4. 1 군면 폐합에 따라 玉洞으로 개칭
- 1931. 4. 1 안동읍제 실시로 상반정(常盤町) 개칭
- 1947. 4. 1 일본식 동명 변경으로 상반정이 平和洞으로 개칭
- 1963. 1. 1 안동읍이 안동시로 승격 安東市 平和洞 개칭
- 1997. 7. 1 행정동 통폐합에 따라 雲安洞, 平和洞 통합 ⇒ 平和洞
- 2003. 1. 1 행정통 증설 17통⇒ 18통
○명칭유래
- 平和洞이란 명칭은 풍수지리학상으로 安東에서 산세의 운기가 가장 좋고 수려하며 平和롭고 아늑한 문화촌이라 하여 平和洞이라 칭함 |
平和洞 |
- 平和洞이란 명칭은 풍수지리학상으로 安東에서 산세의 운기가 가장 좋고 수려하며 平和롭고 아늑한 문화촌이라 하여 平和洞이라 칭함 |
雲安洞 |
- 雲安洞이란 지명은 자연석 암벽에 운안동천(雲安洞川) 마고동천(麻姑洞天) 이란 조각이 있었으며 1947년 광복후 안기동에서 분리하여 운안동천을 따서 雲安洞이라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安奇洞 |
○연 혁
- 1896. 8. 4 安東郡 府內面
- 1914. 3. 1 府內面 폐합에 따라 安奇洞과 斗牛峴村과 北先面 伊下里 일부를 병합하여 泥川洞으로 개편
- 1947. 4. 1 安奇洞을 安奇洞․雲安洞으로 분리
- 1963. 3. 20 安東市 승격으로 安奇洞과 雲安洞을 통합 安奇洞으로 개칭
- 1997. 7. 1 雲安洞을 平和洞에 편입
○명칭유래
- 安奇洞은 원래 安東府 府內面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安奇驛이 있었다고 하여 안기역마 혹은 안기골이라 하였다. 1964년 3월 20일 동기구 개편에 따라 安奇洞이 되었다 |
安奇洞 |
- 安奇洞은 원래 安東府 府內面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安奇驛이 있었다고 하여 안기역마 혹은 안기골이라 하였다. 1964년 3월 20일 동기구 개편에 따라 安奇洞이 되었다. |
泥川洞 |
- 원래 安東府 府內面의 지역으로 왕달봉에서 발원한 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마을앞을 가로 지르고 꺽어서 북서쪽으로 흐른다고 하여 지르내라고 하였다. 또 이 마을에는 진흙이 많고 그 질이 좋아서 陶器(도기)를 만들었다고 하여 도천이라 하다가 泥川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玉洞 |
○연 혁
- 1896. 5. 26 지방관제 개편으로 안동군 부내면 옥동 편입
- 1914. 3. 1 府郡面 폐합에 따라 安東府 서쪽의 安奇驛 마을과 옥거리 일부 병합하여 玉洞 편입
- 1931. 4. 1 安東邑制 실시에 따라 玉洞의 일부를 갈라 八紘町 四․五․六丁目과 常盤町, 玉洞町으로 개편
- 1947. 4. 1 일본식 洞名 변경에 따라 玉洞町을 玉洞으로 개칭
- 1964. 3. 20 玉洞을 屋洞分會로 개칭
- 1973. 7. 1 玉洞分會를 玉洞으로 개칭
○명칭유래
- 安東府의 옥(獄)이 있던 곳이라 하여 玉洞이라 칭함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松下洞 |
○연 혁
- 1895. 5. 26 安東府 安東郡 府內面 玉洞에 편입
- 1914. 3. 1 府郡面 폐합에 따라 부내면 서쪽의 옥동, 서선면의 막곡동 일부를 편입하여 松峴洞이 되었고, 본동과 서후면의 경광동, 서선면의 막곡리 일부 편입하여 鷺下洞 신설
- 1964. 3. 21 鷺下․ 松峴洞을 松下洞會로 행정구역 통합
- 1973. 7. 1 : 松峴․鷺下洞을 松下洞으로 통합
○명칭유래
- 1973년 법정동인 松峴洞과 鷺下洞을 통합할 때 松下洞으로 칭함 |
松峴洞 |
- 安東府 부내면 지역으로 솔티고개가 있으므로 솔티라 했으며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松字가 든 곳을 두려워했기 때문에이 마을이 안전했다고 전해진다. 솔티고개를 한자로 松峴으로표기 현재에 이르고 있음 |
鷺下洞 |
- 원래 安東府 府內面 지역으로써 마당재 들에 白鷺가 내렸다해서 白鷺下田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되어 鷺下洞이라 칭하였음. |
행정구역 |
연혁 및 명칭 유래 |
江南洞 |
○연 혁
- 1914. 3. 1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水上․水下洞을 安東郡
南後面으로 亭上․亭下洞을 南先面으로 편입
- 1983. 1. 1 安東郡에서 安東市로(남선면 정상․정하동,
남후면 수상․수하동) 편입되면서 江南洞 신설
- 1998. 12. 1 행정구역 통합으로 江南洞을 西區洞에 편입
- 2005. 9. 1 행정동 조정에 따라 西區․法上洞 통합으로
江南洞 신설
○연 혁
- 安東郡 南先面 亭上․亭下洞과 南後面 水上․水下洞이 安東市에 편입되면서 낙동강을 경계로 남(南)쪽에 위치한다 하여 江南洞이라 칭함 |
水上洞 |
- 마지동, 수심동, 강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수심동의 윗편에이라하여 水上洞이라 칭함 |
水下洞 |
- 마지동, 수심동, 강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수심동의 아래쪽에 위치한다하여 水下洞이라 칭함 |
亭上洞 |
- 안동시 낙동강 건너편에 있는 亭上洞은 정자촌의 위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
亭下洞 |
- 亭下洞은 한말(韓末)에 건축된 주원정이 있는 정자 밑 동리라 하여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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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은글 올린다고 수고많았소
많은 참고가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