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교황으로 선출된 마르티노 5세.
프랑스 왕과의 권력분쟁에서 힘을 잃은 교황이 로마 교황청이 아닌 프랑스 아비뇽에 체류하게 된 이른바 ‘아비뇽 유배’ 사건. 1305년 프랑스국왕의 권력을 등에 업고 교황이 된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가 교권을 장악하려는 왕의 압제를 이기지 못하고 아비뇽에 체류하면서부터 이후 73년간 교황들의 유배는 지속됐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재위 1370∼1378)는 과감히 프랑스와 결별을 선언, 교황청을 바티칸으로 옮기고 아비뇽 시대를 마감한다. 하지만 교황이 로마로 돌아온 지 1년 만인 1378년 갑자기 사망하자, 로마인들은 프랑스 출신 교황이 또 선출돼 아비뇽 시대로 돌아갈 것을 염려했다.
이에 추기경단은 이탈리아 출신 대주교를 교황 우르바노 6세(재위 1378∼1389)로 선출했다. 우르바노 6세는 막강한 행정권을 행사하던 추기경들의 쇄신을 비롯한 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그의 개혁의지가 때로 독선적 양상을 보이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프랑스 추기경들은 교황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우르바노 6세를 강제 해임, 제네바의 로베르 추기경을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378∼1394)로 선출한다. 프랑스 추기경들의 지지를 얻어 교황이 된 클레멘스 7세는 즉위 후 곧 아비뇽에 자신의 교황청을 설립한다.
이로써 한 교회 안에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이른바 ‘서구 대이교’(1378∼1417)의 시작이다.
로마와 아비뇽의 두 교황은 각기 자신이 참된 교황이라고 주장하며 지지세력 구축에 나섰고, 이에 따라 서유럽 정치권은 물론 교회 전체가 양분된다. 심지어는 한 가정에서 아버지는 우르바노 6세를, 어머니는 클레멘스 7세를 참 교황이라고 주장하며 싸울 정도였다.
교회 분열이 극에 달하자 여기저기서 이른바 ‘공의회 우위설’이 대두된다. 이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고 있기에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공의회 소집 권한은 교황에게 있었으므로 일치 공의회 개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1389년 우르바노 6세가 사망하자 로마 교황청은 보니파시오 9세(재위 1389∼1404), 인노첸시오 7세(재위 1404∼1406), 그레고리오 12세(재위 1406∼1415)를 잇따라 후임으로 선출했고, 아비뇽측도 1394년 클레멘스 7세 사망 이후 베네딕도 13세(재위 1394∼1423)를 후임으로 뽑는 등 분열은 계속됐다. 각 교황들은 재일치를 시도했지만 늘 무산되고 말았다. 한결같이 상대방의 퇴임을 요구하는 방안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양측 추기경들은 1408년 프랑스 피사에서 교회회의를 개최,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을 해임하고 알렉산델 5세(재위 1409∼1410), 요한 23세(재위 1410∼1415)를 잇달아 교황으로 선출, 한 교회에 로마·아비뇽·피사 교황 3명이 존재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만 낳는다.
분쟁해결이 미궁에 빠지자 그리스도교 일치에 관심을 갖고 있던 독일의 지기스문트 황제가 나서 독일 콘스탄츠에서 공의회 개최를 요구한다. 교황은 이를 수용,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를 개최한다. 요한 23세가 공의회 개최를 승낙한 이유는 로마와 아비뇽 교황을 해임한 피사 교회회의의 결정을 확인, 자신의 교황직을 보장받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공의회는 교황 뜻에 굴복하지 않았다.
교부들은 공의회의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고 공의회는 교황 우위에 있다는 교령을 발표,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 교황을 직위 해제하는 대신 교황특사로 임명하고 아비뇽의 베네딕도 13세, 피사의 요한 23세 교황은 해임하는 동시에 마르티노 5세(재위 1417∼1431)를 교황으로 선출함으로써 40여년간 이어진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중적 교황선거로 야기된 서구 대이교를 종식시켰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지만 다른 한편 세속군주 개입에 의한 분쟁해결로 인해 교황 권위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