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序 論
사람들이 몰려온다. 일주일에 단 하루. 포근히 쉴 수 있는 시간들. 그들은 왜 몰려오는 것인가? 무엇을 하러 교회로 오는 것인가? 예배를 드리려 함인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자 함인가? 물이 흘러가듯 순서들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끝났다. 물밀듯이 빠져나가는 사람들.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무엇에 은혜를 받았다는 말인가?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설교이다. 그 날 목사님에게서 들었던 설교에 대한 평가인 것이다. 많은 말들이 있다. 교회가 왜 부흥하지 못하는가? 세상이 타락할 대로 타락했다고 말한다. 바쁘다고 말한다. 시험과 유혹이 너무 많다고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 이다. 그렇다면 설교란 무엇인가? 그 설교의 메시지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설교를 전하는 설교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앤드류 블랙우드의 「설교학」에서는 "설교는 예술이다." 라는 높은 차원의 예술적 이상을 내포한 설교에 대하여, 리챠드 리셔의 「설교 신학」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떻게 신학이 설교에 기여하며, 그리고 선포적이고 말로 표현되는 실천적인 활동인 설교가 어떻게 신학에 기여하며, 신학을 최종적 표현의 형태로 이끌어 오느냐를 보여주고자 애쓰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로이드 존스의 「목사와 설교」에서는 세상의 일반 역사는 역사를 참답게 이룩한 사람들은 말할 줄 알았고 메시지를 전할 줄 알았으며, 자기들이 산출해 낸 효과적인 결과로 민중들을 행동케 했던 위인들이었다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나타내 주고 있고, 또한 데이비드 풀러가 편집한 「스펄전의 설교 노트」에서 스펄전은 마치 고무풍선을 막연하게 부풀게 하는 것과 같이 당신의 시각을 그런 곳에 허비하면서 이 모임에서 저 모임으로 뛰어 다니는 것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당신의 설교 준비는 당신의 임무 중에 첫째입니다." 라고 경각시키고 있다.
침체되고 낙심된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 교회는 생명이기에 성장함이 당연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설교가 있어야 교회가 성장한다. 성장하는 교회를 만들려면 어떤 설교여야 하는가? 그 설교는 신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설교는 설교여야만 하는가? 신학이 개입되어서는 안되는가? 그 설교를 전하는 메신저는 어떠해야 하는가? 세상이 바쁘다. 모든 것이 빨리 빨리 움직인다.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 쉼 속에서 여유 있음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사색할 맘이 없다. 그런 속에서 위의 네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마음의 여유를 얻었다. 사색할 시간을 가졌다. 바쁘게 뛰어가다 멈추어 서서 지금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니 이 순간이 바로 시작할 때라는 맘을 가지고 네 권의 책을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Ⅱ. 本 論
1. 앤드류 블랙우드의 "설교학"
앤드류 블랙우드는 설교자에 대하여 설교자는 일종의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설교 내용과 전달은 창조적인 상상력을 지혜롭게 이용함으로써 더 빛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계화된 사회,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자동화 시대에 살고 있다. 상상력이 메말라 가고 있다. 책 속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사는 시절은 지나간 것인가? 기도와 열심으로, 독서와 연습으로 한 편의 설교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앞에 앉아 버튼만 누르면 잘 정리된 설교 한편이 나온다. 젊은 교역자들의 현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런 유혹이 많다. 몇 백개의 설교를 CD롬에 저장했다고 자랑하면서 판매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을 파는 그들의 마음속에 교역자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설교의 의미와 이유 뿐 아니라 그 방법도 알아야 마땅하지만 성경의 존재 의미와 이유, 그리고 그것을 캐내는 방법을 과연 젊은 교역자들이 알고 있을까?
"구약 성경의 설교자가 가졌던 신앙은 충성의 신앙이다" 라고 말한다. 젊은 교역자들에게 성경에 대한 충성이 있는가? 젊은 설교자는 점차 자기의 성경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경을 사랑한다면 교회 또한 사랑하여야 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지하게 전파되고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거룩한 성례전이 거행되는 것을 볼 때, 논란의 여지도 없이 그 곳이 곧 하나님의 교회인 것을 보게 된다? 고 말하였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지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교역자의 사명이 아닌가. 설교자가 무엇을 하거나 어떤 것을 미완성인 채로 두든지 아무튼 전파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훌륭한 설교를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고 또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여야 한다. 젊은 설교자는 설교를 만드는 끈기 있는 작업을 두려워하기보다 계획에 따라 작업하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회화와 마찬가지로, 설교에 있어서 젊은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관계된 기술적인 용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설교할 줄 모르면서 배우려는 태도까지 없는 설교자라면, 교인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벌어진다. 설교자는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 설교자가 의도한 어떤 진리를 깨닫도록 유도하고 또한 특정한 사실을 깨달아 행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훌륭한 설교자는 회중이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하늘의 비전을 받아 그들의 특유한 문제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참 진리를 그의 마음으로부터 끌어낸다. 상상력이라는 것은 예술가가 가장 편안하게 느낄 때, 가장 잘 발휘되기 때문에 생명을 사랑하고 성경을 익히 알고 있는 젊은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읽을 때에는 눈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많이 찾아낼 수 있다.
본문을 채택하는 데에는 몇 가지의 지도적인 원칙이 있다. 첫째는 그 본문이 실제로 성경의 구절이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성경을 통하여 세워 주는 설교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풍성한 사람이다.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당신이 현명하다면 당신 자신을 수도관으로보다 저수지로서 내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수도관은 물을 받는 대로 곧 사방으로 나가게 하지만 저수지는 물이 가득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낭비 없이 넘치는 부분만큼의 물을 나누어주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풍부하여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찰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서둘러서는 안된다. 당장 예술적인 설교를 만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한다. 성경을 바라보는 안목과 회중을 이해하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대충하려고 하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심령이 메마른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풍성한 설교자, 그리하여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봉사하는 힘을 주는 성경의 진리를 생활로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가를 의아하게 생각지 말고 오히려 목회자는 많은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오고 있는가를 주님께 여쭤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또 자기를 발견하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진 사람이 강단에 있고 그가 무엇인가 끄는 힘을 가진 빛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람들은 먼 곳에서라도 교회를 향해 올 것이다. 인생의 무대에서 설교는 강단 위에서 계속 움직여야 하되 너무 서두르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2. 리차드 리셔의 "설교 신학"
설교가 교회의 삶에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자기 반영인 교회의 신학으로부터 소외되어 온 사실에 계속하여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학과 설교를 통합하는 가능성들을 탐구하기 이전에, 우리는 아마도 설교가 신학으로부터 소외된 결과를 묘사하므로써 어두운 면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내용의 결핍이요, 두번째로는 응집력의 부족이요, 세번째는 설교의 권위의 상실이요, 네번째는 설교의 부적합성이다. 칼 바르트는 신학을 교회의 언어와 생활을 측정하는 교회의 "자기 검증" 이라고 부른다. 하인리히 오토는 교의학은 설교자들에게 하나의 설교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최상의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목회적 병기고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설교는 신학이다. 그리고 신학은 설교이다 라고 말했다.
신학은 설교자로 하여금 보다 광범한 의미의 복음의 모든 요소들-창조, 타락, 섭리, 성화, 교회, 종말론-과 성경의 모든 본문들을 기독교 신앙의 이 구조적인 핵심에 연결시키도록 한다. 모든 것을 핵심에 연결시키는 설교자는 확실히 신학적이고 성서적인 단련을 하는 것이며, 또한 인격적인 단련을 하는 것이다. 신학이 설교를 복음에 복귀시키는 다른 길은 설교자들에게 무엇이 복음이 아닌가를 말해 줌으로써 가능하다. 설교를 준비하고 전달하는 모든 단계에서 설교자는 청중의 마음과 환경을 자세히 탐구해 나간다. 한 인간으로서의 설교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목회하지만, 신학자로서의 목사는 우리 시대의 유동성, 역사주의, 세속주의, 평범한 종교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안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설교자가 가진 신학적 능력만이 그로 하여금 핵심, 즉 영원한 복음 진리를 보존하면서 인간의 상황을 하나님에게 연결시키도록 한다. 설교는 신학의 궁극적 표현이다. 신학이 추구해 온 것은 설교를 향한 것이었다. 선포적인 신학으로부터 신학적인 선포에로의 변화는 설교자 안에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설교 안에서 셋이 합류하는 결과를 낳는다. 설교는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에 밀착하며, 예배의 상황 안에서 발생한다.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이 장차 올 영광의 환상을 통하여 부름을 받은 것처럼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내다본 영광을 통하여 그 행진 명령을 부여받았다. 어거스틴은 설교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서술" 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야기는 창조로부터 재림까지의 하나님의 계획이 지속하는 한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선포는 언제나 권위적이고 직접적이며 실존적인 "그러므로" 가 뒤따르는데, 이는 구원 사건과 우리 삶의 이야기들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교회가 현재 주를 통하여 누리는 새로운 삶은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신 역사적 경험의 연속이다. 우리는 우리의 설교를 예수의 이야기에 고정시키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요약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하는 때에만 설교를 경청한다. 그가 가르치고 선포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열쇠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는 말이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모든 설교자는 말씀이 역사 할 것을 알고 있으며,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설교가 구원의 주제를 재차 명확히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제시하는 한, 우리의 설교 가운데 임재하여 축복하시는 분은 설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설교의 영광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청지기직, 즉 은총 가운데서 받아서, 겸손함과 어린 아이 같은 신뢰를 가진 설교자가 받아들이는 청지기직 가운데 존재한다. 성서는 설교의 원천이며, 설교자의 버팀목이다. 누구든지 성서적 설교를 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 사람은 성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한다.
3. D.M. 로이드 존스의 목사와 설교
로이드 존스 목사는 설교사역이란 내게 있어서 어떠한 소명보다도 가장 높고 위대하고 영광스런 소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오늘날 기독교회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진정한 설교이며, 그것은 역시 명백하게도 세상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설교하는 문제뿐 아니라 교회 자체까지도 의문시되는 세대에 살고 있고 사람들이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권위에 입각해서 말하는 동안에는 위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었으나, 일단 거기서 떠나 사색하고 논리화하고 억측을 부리고부터는 웅변이나 구변의 위대성은 여지없이 하향 길을 걷게 되고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교회나 기독교 목사의 제일 첫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우리 주님은 택한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맨 먼저 "내 증인" 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결코 어떤 것도 우리를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그는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이유이든, 아무리 큰 필요성이든 간에 그리해서는 안되며, 교회는 사회단체도 정치적·문화적 공회도 아니며,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영적 세계에 대하여 사람 위에 임한 모든 은혜로운 세력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만일 구원이 사람에게 가장 큰 요구이며,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곤경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인 무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이것에 관해서 듣는 것이며, 자신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처리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필요를 깨닫고 거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하는 순간,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된다.
교회의 일차적인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끌어 주고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차적인 목적을 떠나 다른 어떤 일을 할 때 동기야 아무리 순수하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결과는 뻔하다. 성경을 상세히 파헤쳐 전함으로써 한 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조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남녀 할 것 없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의 지식" 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만일 진리의 지식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저 겉으로 나타난 증상들을 완화시키고 그때 그때의 문제에 대한 미봉책만을 쓰고 있는 것밖에는 아니다. 하나님은 토론되거나 논박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계신 분이며 자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설교 그 자체이며, 설교가 올바르며 설교하는 일이 제대로 될 때 성령께선 메시지를 듣게끔 사람들을 이끌어 오고 모여들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교와 방법, 그리고 "의사 전달의 문제" 로 성급하게 나아가서는 안된다. 설교는 인간 영혼과 전인격, 전인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 설교는 듣는 사람의 문제를 가장 핵심적이고 근본적으로 다루어 준다. 설교에는 언제나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서 생사 문제와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란 전인을 다루는 것이고, 듣는 이가 감복하게 되어 이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시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그 설교를 듣는 자 안에서 일어나고, 무엇인가가 체험되며 그렇게 되어 설교가 전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사람들에게 직접 들이대라는 부름을 받았고 우리는 그저 그것에 관한 것들을 말하지 않고 실제로 그 말씀 자체를 그대로 전달해 주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통로이며 운반 도구인 것이다. 전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나타내시기를 가장 기뻐하셨던 말씀, 전도는 위대한 설교들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위대한 전도자는 위대한 설교들을 준비했던 사람들이다.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붙잡힘을 당하고 끌려 있다는 사실로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그는 그 문제로 충만해져서 그것을 나눠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 그것으로 너무 감동하고 감격한 나머지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를 갈망해야 한다. 설교자는 회중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돕는 것을 간절히 소원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힘과 열심과 뚜렷한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4. 데이비드 풀러의 "스펄전의 설교 노트"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또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마른 뼈들의 골짜기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생기가 사방에서부터 불어온다면, 모든 뼈들이 그 생기로 인하여 살아나리라."
스펄전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려면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주의 선하심을 믿는 순수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순종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전체를 쏟아 바쳐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을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함으로 만족을 가질 수가 있다. 참다운 만족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가지고 자족해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가졌으나 그리스도를 소유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요, 모든 것을 잃었으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다. 어린양은 먹기 위한 것이며, 아낌없이 모두 먹어야 하고, 또한 모든 사람이 다 먹어야 하며, 단 한번에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이 사는 사회의 중심이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 라면 이는 축복 받은 일이다. 때에 맞는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죄인으로서 주님께 나아가야 하며, 의인인 체하여 기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당신 자신의 영혼 속에서 싸움을 시작하라. 그러하므로 피를 죽이고,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기타 교만한 모습들을 낮추어라. 더욱 죄악의 전쟁터로 나아가서 거짓과, 미신과, 무자비와, 압제와 술취함과 불결함과 어디서든지 어떠한 곳이든지 모든 죄악의 종류와 싸워라 무장한 자에게는 오직 승리 뿐이리라.
죄인들은 스스로 살아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의 능력을 베푸시리라. 죄인이 자신의 곰팡이 냄새가 나는 한 조각의 빵 껍질을 갖고 있는 한, 그는 하늘의 만나를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소경을 인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보게 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는 그들 앞에 진리를 제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을 뜨게 할 수는 없다. 그 나머지 일은 하나님 한 분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피조물 된 인간의 가장 슬픈 상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양심을 가리운 채 읽으며, 성경이 나타내고 있는 구속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모든 놀라운 증거들을 눈가림한 채 지나쳐 버리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들을 모르는 채 지나쳐 버리며, 하나님의 지으신 꽃들과, 별들과, 태양의 일몰, 그리고 수천 가지의 자연의 영광스러운 사물들 속에서 살면서 그러한 축복을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결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또한 조그마한 관심도 가지지 못하는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 비난받지 않는 일이라면 이 또한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Ⅲ. 結 論
우리는 언제나 설교하기 전에 성령의 감동과 기름 부으심을 기다리며 간구하고 있는가? 성령의 역사가 최대의 관심사인가? 설교자에게는 사람의 노력과 열심을 초월하여, 성령에 의해 쓰임을 당해, 그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가 되는 위치에서, 설교 사역을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성령을 통해 설교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있어야 한다.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이는 아무런 능력도 가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설교한 것은, 아니 내가 설교한 것은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고, 바로 죽은 설교가 되는 것이다. 이 능력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 능력을 간절히 기대하고 또 갈망해야 한다. 능력이 임할 때 그에게 복종하며, 저항치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성령에 의존할 때 필요하다면 작성한 설교 내용 모두를 잊어버리고, 그래서 성령께서 나를 끌어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그의 능력을 바로 내 안에서 나를 통하여 나타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에 대한 두려움에 항상 짓눌려 있다. 그 짓눌림에 사역조차도 두려워 움츠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나는 그저 도구요, 통로일 뿐이다. 놀라운 것은 한 메시지를 통하여 그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며, 그 속에서 각기의 메시지들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설교는 듣는 이에게 무엇인가가 체험되며, 일어나게 한다" 는 말에 강한 도전을 받는다. 살아있는 설교,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설교인 것이다.
라일락이 아름다운 4월이다. 이 4월을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계신다. "너는 나의 도구로 택함 받았다." 이 사명에 붙잡힘 당하고 끌려있다는 사실로, 나도 감격하여 다른 이에게 나눠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도구로써의 자리에 바로 섬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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