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의 꿈 3 (1)
그날 새벽녘까지 탁현총과 함께 마신 소주가 다섯 병이 넘었다. 탁현총은 계속 술을 입에 댔다. 술고래였다. 나는 술에 약했으므로 그가 다섯 잔을 마시면 한 잔 꼴로 마셨는데, 그것이 나를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그의 이야기가 흥미가 있었으므로 그렇게 많이 취하지는 않았지만 다리는 휘청거렸다.
"부장님, 제 얘기가 재미있습니까?"
"한 인간의 불행한 역사를 재미로 안다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을까?"
"역시 부장님은 요즘 보기 드문 휴머니스트이십니다."
"그래서 그 후 윤찬준은 어떻게 되었나?"
"찬준이는 우선 생계부터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일이라도 해야만 했습니다. 기술 없고 빽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란 것이 뻔한 것 아닙니까?"
"노동을 했단 말인가?"
"노동판의 인부는 신원 보증이 필요 없죠. 그때 한창 서울 외곽의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서울 도심에서는 지하철 공사 때문에 인부가 모자랐습니다."
윤찬준은 서울에서 지하철 공사장의 인부로 6개월간 일하다가, 동료를 따라서 원주 치악산 근처의 콘도 공사장에서 우연히 탁현총과 알게 되었다.
그때 탁현총은 군에서 제대를 한 후 미술 대학의 은사였던 Y화백의 조수로 있다가, Y화백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생계를 위해 공사판을 떠돌고 있던 중이었다.
탁현총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다가 소주잔을 입에 탁 털어 넣었다.
"윤찬준이 그의 여동생을 만나게 됐나?"
내가 묻자 그는 슬픈 눈초리를 하면서,
"만났습니다. 윤찬준이 그의 여동생이 있었다는 고아원을 찾아가 사진을 입수했죠. 그 사진을 갖고 동생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다녔죠. 유흥업소를 비롯해 사창가란 사창가는 모두 훑었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경기도 포천 근처, 법원리의 사창가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탁현총은 그 말을 하면서 또 눈물을 흘렸다.
열일곱 살의 창녀, 윤찬준은 자신이 소지하고 있던 사진을 박영숙에게 내보였다. 박영숙은 영양 실조에서였는지 다른 소녀들 보다 여위었고, 다만 퀭한 두 눈동자만 마치 화석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법원리 사창가 골목에서, 윤찬준은 다리를 벌리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창녀를 발견했다. 윤찬준이 지나가자 그 창녀가 호객을 했다.
"싸게 해줄게 따라와."
윤찬준은 어린 창녀가 잡은 손을 본능적으로 뿌리쳤다.
"나하고 놀아. 내가 기분 맞춰 줄게."
윤찬준은 끈질기게 따라붙은 창녀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검은 동자보다 흰자가 더 많은 큼직한 눈, 약간 까칠까칠한 피부. 그는 창녀의 손을 뿌리치려다가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 아저씨 뭘 봐? 그러지 말고 나를 따라와."
윤찬준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던 사진을 꺼내 보았다. 사진 속의 소녀는 더욱 어렸다.
창녀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박영숙이지?"
"아저씨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난 네 오빠야."
"웃기고 있네. 나한테 오빠가 있을 리가 없어."
"가자, 네 방으로."
"그래. 돈 있지?"
윤찬준은 창녀가 이끄는 데로 갔다.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골목 판잣집 이층에 그녀의 방이 있었다. 이층이라고 하지만 나무 사닥다리를 얹어 놓은 다락이었다. 빛이 들어오는 공간이라곤 창호지가 붙어 있는 조그만 문밖에 없었다. 방 안은 절벽이었다. 푸른 등이 켜져 있었다.
그녀는 앉자마자 돈부터 요구했다.
"화대부터 내놔."
윤찬준은 주머니에 든 오천 원짜리 몇 장을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노동판에서 며칠 동안 번 돈이었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치마부터 벗기 시작했다.
"벗지마. 난 네 오빠야."
윤찬준이 눈물이 글썽한 채 외쳤다.
"난 공짜가 싫어. 그 동안 공짜 밥만 먹어 왔기 때문이야."
"안 돼!"
윤찬준은 그녀가 벗으려는 치마를 추켜올려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난 네 오빠다. 정말이다."
그제야 그녀는 찬준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완강히 말했다.
"난 오빠 같은 건 없어."
"자, 이건 네 사진이다. 네가 있던 불광동의 고아원에서 가져 온거야."
그녀는 그걸 들여다보더니 남의 말처럼 이야기했다.
"정말이네, 당신이 내 오빠?"
"그래."
"이 사진은 어디서 났어?"
윤찬준은 사진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좁은 방구석에 도배가 되어 있는 성모 마리아 사진을 쳐다보았다. 성모 마리아는 울고 있었다. 인자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우는 모습이었다. 윤찬준은 문득 그 성모 마리아를 그려 보고 싶었다.
박영숙은 윤찬준의 그런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윤찬준은 방 한쪽에 처박혀 있는 다 쓰지 않은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볼펜을 꺼내 그 성모 마리아와 함께 박영숙의 얼굴을 스케치했다. 스케치가 끝나자 그는 그 그림을 박영숙에게 주었다.
"잘 그렸는데. 아저씨는 그림쟁이야?"
"그래. 아저씨가 아니라 네 오빠야."
"거짓말?"
"앞으로 자주 찾아올게."
"그냥 가면 내가 미안하잖아."
하면서도 그녀는 오천 원짜리 몇 장을 품안 깊숙이 넣어 두는 걸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윤찬준은 소리 없이 울었다. 윤찬준이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사창가 골목을 빠져나오자 땅거미가 졌다. 박영숙은 윤찬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속아만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탁현총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부장님, 그 친구는 그때 절망하고 있었어요. 저 역시 제 탄생 의 비밀을 모른 채 절에서 자랐지만, 저보다 그의 절망은 더욱 깊고 감당하기 힘든 것 같았어요 그러나 그 절망을 그는 용케도 견뎌 냈지요. 오직 그림 그리는 데 인생의 가치를 발견했지요. 그는 제가 보기에도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습니다. 날아가는 학을 그리는 데 있어서 몸짓 동작 하나에까지 마치 카메라가 잡은 것처럼 섬세하게 묘사하곤 했어요. 그가 그리는 그림은 생동감이 넘쳐흘렀지요. 영혼이 있다고나 할까요. 소 한 마리를 그리는데, 소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소가 갖고 있는 생각까지 그렸지요. 큼직한 눈망울 속에 깃든 절망 같은 것을 표현했는데, 제가 보기에도 섬뜩한 것 같았어요. 그림을 그냥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주입시켰지요. 그만큼 그는 남의 절망을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와 함께 Y화백 밑에 잠시 있었지만 그는 그저 심부름만 했을 뿐, 한 번도 옷을 잡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떠오르는 영감을 잡아서 그대로 그려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탁현총에게 물었다.
"그 사람의 그림을 갖고 있나?"
"한 점 있죠. 꼭 한 장이죠."
"보여 줄 수 있겠나?"
"나중에 보여 드리죠. 그러나 많이 훼손이 돼서 아마 그 재미를 잘 모를 것입니다."
윤찬준은 공사판에서 험한 일을 하면서 탁현총에게 자신에 대 한 이야기를 흉금 없이 털어놓았다. 그때 탁현총은 윤찬준의 어머니 엘레나 수녀의 모습을 그려 보기도 했다
경기도 일산 근처의 금촌 성당을 찾아간 탁현총은 주임 신부 에게, 자신은 화가인데 벽에 붙여 둔 성모상을 그려 희사하겠다. 는 제의를 했다. 주임 신부는 그에게 신자냐고 물었다. 그는 신자는 아니지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어서 그런다고 했다. 그랬더니 주임 신부는 한번 그려 보라고 했다.
"그때 제가 그린 성모상은 인자하고 자비로운 성모상이 아니었습니다. 고통 받는 성모상, 로마 군인들에게 짓밟히고 불량배들에게 능멸당하는 일그러진 성모상이었습니다. 원죄의 고통에 구원을 얻지 못하는 미완성의 성모상이었습니다. 타락한 이 세상의 어머니로서 그렇다고 아들의 생명을 죽일 수 없는, 죄는 많지만 그 죄를 끝까지 감내하고 출산할 수밖에 없는 성모상, 그러나 그가 낳은 아들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축복받을 수 없는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의 고통스런 얼굴을 그려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렸나?"
"그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도 섬뜩했습니다. 눈은 살기로 가득 찼고, 한쪽 가슴에 품은 어린아이는 무서움과 기아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축복받지 못할 아이를 낳아 놓고, 그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성모, 아니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성모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건 성모상이 아니지 않나?"
"그렇지 않죠 윤찬준에게는 아마 그런 성모상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원하는 그것을 그렸을 뿐입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