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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소산 고란사
(부여 역사)
삼한시대 마한의 여러 소국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백제가 위례성에 터를 잡고 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4세기 후반의 일. 주변의 소국들을 합방하면서 한반도의 허리인 한강유역을 장악해 국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다가 5세기 후반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 도읍지를 웅진(공주)으로 옮겼다가 6세기 중엽에 다시 부여로 옮기게 되었다.
(부소산성 개요)
원래 부여지역은 마한의 작은 소국인 초산국 영토였다. 그 무렵 부여의 이름은 ‘사비(泗沘)’ 또는 ‘소부리’로 불렸다. 높이 106미터의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으로, 백제의 궁성(宮城)이 자리했던 산이다. 성왕이 개축했다는 부소산성은 총길이 2.2킬로미터의 토석혼합성으로, 현재 그 흔적들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다. 고란사는 바로 그 부소산성의 북쪽 강기슭에 자리한 고찰이다.
(사비문 마당)
부소산성의 정문인 사비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넓다. 그러나, 굳이 주차장처럼 시멘트로 포장해 땅을 죽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넓은 마당 왼쪽에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이 발굴조사를 마치고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연꽃을 심었던 연못이 있고, 배수도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복원된 배수로에 키 작은 야생미나리가 파랗게 자라고 있다.
(부소산의 소나무들)
왕궁터 위로 소나무숲이 눈맛 그윽하게 펼쳐져 있다. 소나무는 활엽수를 제치고 부소산의 우점종으로 군림하고 있다. ‘부소(扶蘇)’라는 옛 지명도 ‘소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부소산은 예나 지금이나 ‘소나무산’이다. 부소산의 소나무 종류는 적송, 흑송, 리기다 등 3대 소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리기다가 많은 것은 땔감으로 민둥산이 된 부소산을 살리기 위해 60~70년대에 집중적으로 심었기 때문이다. 리기다는 토종 소나무에 비해 척박한 토양에서도 뿌리를 잘 내리기 때문에 당시 선택의 여지 없이 아까시와 함께 전국적으로 심어졌다.
부소산을 백제 역사가 살아 숨쉬는 역사의 현장으로 만드려면 생태경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리기다소나무는 아까시와 함께 맨먼저 대체해야할 나무로 첫손 꼽힌다. 산림녹화에 세운 공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바 없지 않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리기다소나무의 외관상 특징은, 맹아율이 높아서 줄기에 듬성듬성 솜뭉치같은 솔잎이 나 있고, 솔방울이 토종에 비해 많으며, 바늘잎이 3개씩 붙어있어서 구별하기 쉽다.
(삼거리 이대 군락)
탐방로 삼거리 왼쪽으로는 약수터-하동 정씨 정려각-충령사-서복사 옛터-사자루로 가는 길이 나 있고, 오른쪽으로는 삼충사-영일루-반월루-사자루로 가는 길이 나 있다. 그 두 길은 사자루 아래쪽 안부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삼거리 주변에 이대 군락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자생한 것인지 군용(軍用)으로 식재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화살대 재료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대 군락은 부소산성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부도탑 식수대)
탐방로 옆에 부도탑 모양을 한 식수대가 있다. 얼핏 생각하면 유적지에 맞는 외형 같지만, 한꺼풀 더 벗겨보면 그게 아니다. 부도는 통일신라말에 나타난 선불교(禪佛敎) 문화이기 때문에 백제시대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부여지역에 부도가 나타난 것은 백제와 신라가 모두 망하고 난 다음 고려 때의 일이니, 식수대 디자인을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약수터와 집비둘기집)
수도꼭지를 박은 약수터는 산책 나온 토박이 주민들과 탐방객들의 목을 축여준다.
약수터 주변에는 당국이 집비둘기를 위해 세운 아파트형 새 집이 있다. 집비둘기는 생태적으로 멧비둘기를 구축(驅逐)한다. 때문에 부소산 생태의 자연성과 조류의 다양성을 위해 차라리 새 집을 다른 데로 옮기고 멧비둘기들을 부소산 숲으로 불러올 수는 없을까....
(탐방로 복자기)
부소산에는 보도블럭이 깔린 탐방로가 잘 다듬어져 있다. 보도블럭이 환경친화적인 소재는 아니지만, 관광객들의 출입이 많은 곳에선 차선책으로 선택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복자기가 탐방로를 따라 줄지어 심어져 있다. 주변의 식생과는 잘 어울리지 않지만, 당국이 관광가치를 높이기 위해 심은 것이니 뭐라 할 수는 없다. 복자기는 가을 한때를 붉은색의 단풍으로 화려하게 수놓았던 주역이다.
부소산의 서사면은 몸집이 좋은 참나무들과 활엽수들이 소나무와 경쟁을 하고 있다. 군데군데 늙은 밤나무들도 눈에 띈다.
(서복사지 단풍)
서복사지(西腹寺址), 아직 절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절터이다. 서복사라는 지명은 편의상 붙인 이름으로, 부소산 ‘서쪽 중턱에 있는 절터’라는 의미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에 의해 처음 발굴된 후 여러 차례 조사되었다. 그 결과, 강당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비백제 당시 왕궁의 원찰로 추정되고 있다.
절터 주변에 몇 그루의 단풍나무들이 어울려 마지막 정열을 태우고 있다. 부소산 단풍나무들은 당단풍보다 단풍나무가 더 많다. 당단풍은 손가락 같은 열편이 9~11개 정도인 데 비해, 일반 단풍나무는 열편이 5~7개 정도이다.
단풍이 드는 것은 늦가을의 기온이 내려가면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단풍은 주변에 다른 나무가 얼씬하지 못하도록 독을 분비하는 일종의 타감활동의 하나이다. 단풍이 내뿜는 독성은 다른 종을 죽일 정도로 강력하다고 한다. 단풍잎이 지상에 떨어지면 안토시아닌 성분이 땅속으로 스며들면서 다른 수종의 생장을 막아 이듬해 봄 어린 단풍 묘목들만 자랄 수 있게 한다는 보고가 나왔다.
(구멍난 상수리나무)
숲의 빽빽한 정도를 나타내는 상대밀도를 보면 부소산의 나무들은 소나무, 상수리나무, 벚나무, 때죽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리기다소나무, 갈참나무, 곰솔, 밤나무 순이다. 그러나, 관목층에서 소나무들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부소산에서 소나무의 세력은 점차 약화될 것으로 판단된다. 상수리나무는 어린 개체와 중간 개체 이상의 밀도가 높아 앞으로 세력을 계속 확장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서복사지 주변은 궁녀사 주변과 함께 부소산에서 소나무를 제치고 참나무들이 우점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상수리와 도토리를 따기 위해 바위나 돌메로 나무 기둥을 내려쳐서 참나무들마다 허리에 큰 구멍이 나 있다. 어떤 구멍은 상채기가 너무 커서 속이 뻥 뚫린 것도 있다. 온전한 나무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상채기들이 많이 나 있다.
(긴병꽃풀 군락)
서복사지에서 구드래나루로 내려가는 좁은 오솔길이 나 있다. 호젓하니 걷고 싶은 숲길이다. 소나무와 참나무들이 만드는 주변 숲은 수령이 30년 안팎으로 보인다. 군데군데 개간한 밭들이 보이고, 함부로 자란 대숲도 그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긴병꽃풀 군락이 햇볕 좋은 초지에는 초록융단처럼 깔려있다. 풀의 모양이 동전을 닮았다고 하여 ‘금전초’라고도 하는데, 늦봄에 연한 보라색꽃이 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키가 10센티 정도로 작고, 번식력이 좋아서 사찰 경내외 잡초가 덥수룩한 곳에 심어서 초겨울까지 초록융단을 즐길 수 있는 지표식물이다. 일사량이 적은 곳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맥문동처럼 나무 아래에 심어도 좋다. 꽃에 꿀이 많아 벌과 나비들을 잘 불러온다.
(삼충사 연못)
아까 지나온 삼거리로 되돌아 가면 삼충사가 눈앞에 있다. 삼충사 왼쪽에 편백숲이 있다. 사방조림한 편백숲은 삭막하기 그지 없는 겨울숲에 소나무와 함께 푸르름을 더해준다. 거목으로 자란 은단풍도 노란 낙엽을 눈물처럼 바람에 떨구고 서 있다.
삼충사(三忠祠)는 백제 말기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다. 사당인 만큼 향나무라도 심어두면 좋을 것을 배롱나무와 원예 주목을 심어두었다. 내외삼문을 모두 철문으로 만든 것도 영 눈에 밟힌다. 사당 뒤로 산사태 위험이 있어서 각별한 유의가 요구된다.
삼충사 옆으로 눈맛이 부드러운 연못이 있다. 연못 속에 주변 풍광이 거울 속처럼 맑게 잠겨있다. 작은 보를 막아서 계곡의 물을 가둔 이 연못은 수심이 1미터 미만이다. 바닥엔 넓게 암반이 깔려 있고, 곳곳에 파란 녹조들이 잠겨있다. 이 연못은 수생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수서생물과 양서류들이 알을 낳고, 새들이 찾아와 샤워를 하고 가는, 부소산에서 유일한 습지 비오톱(Biotop)이다.
(토양)
군창지로 가다보면 탐방로 주변으로 이따금 흙이 드러나 있다. 부소산은 토양이 비교적 척박하다. 백마강에 접한 북쪽을 제외하고는 마을이 빙 둘러싸고 있고, 오랜 세월에 걸쳐 마을주민들이 땔감으로 낙엽을 긁어내다보니 낙엽이 썩어 부엽토가 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리기다를 심게 된 까닭도 척박한 토양과 관계가 있다.
게다가 환경오염으로 인한 산성비와 관광객들의 영일 없는 출입과 소나무 우점 등으로 인해 토양이 많이 산성화되고 답압되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석회 등 토양개량제를 전 지역에 살포하여 생명의 숲으로 되살리려는 노력이 최근에 경주되고 있다.
(부소산 우리 소나무)
숲길을 구비돌면 부소산성의 일부인 토성이 나타난다. 토성 주변으로 누천년을 살아온 우리 소나무들이 우뚝우뚝 자라 숲을 이루고 있다. 우리 소나무는 군창터 주변에도 흩어져 있고, 영일루와 반월루 주변으로도 그윽하게 숲을 이루고 있다. 금강송처럼 강직한 맛은 없으나, 유려한 곡선미는 일품이다. ‘백제송(百濟松)’이라 이름 붙여도 결코 억지스럽지 않은, 부소산 소나무 숲은 산림청이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한 바 있다. 걷고 싶은 백제송 숲길은 토성을 따라 유적과 유적으로 이어져 있다.
군창터 가까이에 별나게 생긴 백제송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한 뿌리에서 난 두 줄기가 서로 부둥켜 안고 덩굴식물처럼 휘감고 있는 모습이다.
군창터는 백제 때 군량미를 저장했던 창고이다. 오래 전에 탄화된 곡물이 주춧돌 아래에서 발견되었는데, 보리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궁녀사 가는 길)
길을 따라 내려가면 서복사지에서 올라오는 숲길이 사자루 아래 안부(鞍部)에 이어져 있다. 안부에서 궁녀사로 내려가는 길은 찾는 이가 드물어 호젓하기까지 하다. 궁녀사 지역은 부소산에서 가장 습윤(濕潤)한 지역이다. 몇 종류 습지식물을 비롯해 갯버들, 왕버들, 물오리나무 등등 물을 좋아하는 목본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궁녀사 아래쪽 취수장 일대로 갈대밭이 있는 저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부소산에서는 가장 생태적인 지역이다.
(궁녀사 낙우송)
삼천궁녀의 애틋한 사연을 기리는 궁녀사 담벽에 낙우송(落羽松)이 우뚝하다. 새의 깃털처럼 생긴 잎이 가을이면 붉게 단풍 들면서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원산지인 북미 남부지방에서는 높이 50미터에 지름이 4미터까지 자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처음 수입되어 조경목으로 심어졌으나, 일조량이 많고 습윤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에 산중사찰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청딱다구리)
활엽수지역은 소나무 단순림보다 종의 다양성이 높은 까닭은 역시 곤충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곤충을 먹이로 하는 부소산의 조류들도 대개 이 지역에서 많이 관찰되고 있다. 겨울을 눈앞에 두고 있는 부소산의 조류상은 멧비둘기, 까치, 물떼까치, 직박구리, 오색딱다구리, 청딱다구리, 쇠딱다구리, 박새, 진박새, 곤줄박이, 쇠박새, 참새, 붉은머리오목눈이 등 텃새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청딱다구리는 전체적으로 회색을 띤 녹색이다. 크기는 30센티 정도에 이르고, 주로 활엽수 숲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곤충들을 먹고 산다. 이따금 지상에 내려앉아 개미를 잡아먹기도 하고, 겨울철에는 과일도 파먹는다. 나무에 구멍을 뚫어 보금자리를 만들고 봄에 7개 안팎으로 알을 낳는다.
(사자루를 지나서)
부소산 정상에 있는 사자루는 1919년에 임천면에서 옮겨온 조선시대 관아의 문루이다. 그래서인지, 전통 누정과는 달리 기둥들이 나무젓가락처럼 연약해 보인다.
사자루를 지나면 백화정과 고란사로 이어지는 내리막 돌계단길이 시작된다. 토양유실을 막기 위한 차선책으로 계단 사이를 시멘트로 마감했다.
(부소산 지질)
낙화암과 고란사가 자리한 부소산의 북사면은 경사가 급해서 계단길 오른쪽으로 여기저기 암맥이 드러나 있다. 부소산 지질은 화강암과 편마암이 대종을 이룬다. 그 암맥은 백마강에 접해서 천길 낭떠러지 단애로 끊어진다. 백화정은 바로 그 암맥단애 위에 앉은 정자이다.
(백화정)
<삼국유사>에 따르면,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되는 순간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적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달려와 강물에 몸을 던진...’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당시의 이름은 ‘타사암(墮死巖)’이었으나, 후에 강물로 뛰어든 궁녀들을 꽃에다 비유하면서 ‘낙화암’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백화정도 그런 전설을 바탕으로 세운 정자이다.
(백화정 소나무)
낙화암 백화정과 고란사 일대는 경사가 급해서 유효토심이 거의 없고, 토양도 매우 척박해서 식생이 빈약하다. 이런 박토에서는 소나무나 겨우 살아갈 수 있을 뿐, 다른 키 큰 교목들을 살아남을 수가 없다. 간신히 뿌리내린 소나무들도 뿌리가 앙상하게 땅 위로 드러나 여기저기 발뿌리에 채인다. 토심이 얕아서 잔뿌리들도 활착이 원활하지 못하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백화정 늙은 소나무는 오늘도 건재하다. 척박한 토양 탓에 키는 높이 자라지 못했지만, 줄기가 굵고 가지가 무성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더욱이 나뭇가지를 정자 쪽으로 드리워 백화정 주변을 한 폭의 산수화로 만들어 주는 공덕이 가상하다.
(백마강)
백화정 발 아래 굽어보이는 백마강은 금강 본류이다. 옛 문헌에는 ‘사비강(泗沘江)’ ‘사비하(泗沘河)’ ‘백강(白江)’이라 불렀다. 백마강은 오른쪽 멀리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킬로미터 구간을 가리킨다. 천정대, 조룡대, 고란사, 조룡대, 구드래, 부산, 대재각, 자온대, 수북정 등등의 명승과 유적들이 모두 이 구간에 있다. 낙화암을 비롯해 북사면의 기암절벽들도 백마강이 부소산을 침식하여 만든 침식애(浸蝕崖)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백마강이 부여에 이르러 습지형 범람원(부여평야)을 만들어 누천년동안 이곳 백성들을 먹여살렸다는 점이다. 강변을 끼고 사방천지로 펼쳐져 있는 비옥한 농경지들은 백마강이 백제의 젖줄임을 실감케 해준다.
(고란사 역사)
백화정에서 고란사까지는 2백미터 돌계단이다. 이 구간의 경관보호목으로는 소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팽나무 등이 있고, 주변에 때죽나무들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고란사는 백제 아신왕 때 혜인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때 들어와 백제 망국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원찰로 자리매김을 했을 것이다. 발굴 유물들도 모두가 그 무렵의 것이다.
고란사는 금북정맥의 거대한 바위 위에 앉은 절이다. 절벽단애 아래 가파른 경사지에다 높은 석축을 쌓고 법당과 요사채를 앉혔다. 앞으로는 푸른 백마강이 흘러들고, 뒤로는 절벽단애가 병풍처럼 둘러쳐있다.
그러나, 좌향이 북방이라 햇볕이 들지 않아 전체적으로 어둡고 칙칙하다. 일조량이 적은 관계로 주변의 식생도 빈약하고, 연간 1백만명에 이르는 관광객의 출입으로 고즈넉한 산사의 맛도 기대하기 어렵다.
(고란사 은행나무)
고란사의 법당 건물은 백마강 건너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覺寺) 건물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숭각사의 폐사와 관련해 이런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부여 내산면 녹산마을에 수령이 8백년 된 은행나무가 있는데, 숭각사 주지스님이 불사를 하기 위해 그 은행나무의 가지 하나를 잘랐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 후 주인을 잃은 숭각사는 폐사되고, 남아있던 건물 일부가 고란사로 옮겨져 지금의 법당이 되었다고 한다.
그 법당 앞마당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는데, 녹산마을 은행나무의 후손인지는 알 바 없다. 그러나, 시멘트로 마당을 덮는 바람에 은행나무의 생육환경이 좋지 못한 편이다. 은행나무에 대한 대접이 아쉽다.
법당 처마에 걸린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이다. 현판에 난초를 친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고란초)
법당 뒤로 돌아가면 유명한 고란초와 고란약수가 있다.
고란초는 산의 그늘진 바위틈이나 절벽에 붙어 자라는 양치식물이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길게 뻗으면서 마디마디에서 길쭉한 잎이 달린다. 잎은 한 장 짜리 홑잎으로 진한 초록색을 띤다. 가죽처럼 빳빳하고 광택이 있는 잎에는 양쪽에 좁쌀만한 돌기가 돋아있다. 다른 양치식물과 마찬가지로, 잎 뒤쪽에 포자낭이 동그랗게 무리져 달려 있다.
관광객들은 절벽을 올려다보며 애써 고란초를 찾지만, 아쉽게도 고란사에서 고란초가 자취를 감춘 지는 꽤 오래된다. 관광객들은 현재 유리곽 안에다 인공적으로 몇 포기 고란초를 키우고 있는데, 관광객들은 그것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선다. 고란초가 사라진 뒤 가녀린 오죽 몇 줄기를 심어두었지만, 관광객들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는다.
고란초가 사라지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고란초가 뿌리박고 있는 바위들이 오랜 세월의 비바람에 조금씩 부스러져 떨어져 나가면서 고란초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간접적인 원인으로는, 과거에 비해 크게 나빠진 대기와 수질과 토양의 산성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겨울에도 죽지 않는 상록식물인 고란초는 강 건너 왕흥사 기슭의 인동(忍冬)과 함께 백제혼을 상징한다. 현재 백마강 주변의 주장산, 천정대, 맞바위, 파진산, 성흥산 암벽에 고란초가 자라고 있는만큼, 고란사와 당국은 고란사 고란초에 대한 식생복원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구실사리)
절벽에는 고비, 이끼, 돌버섯이 군데군데 앉아있고, 오른쪽 절벽으로는 구실사리 군락이 솜이불처럼 두툼하게 바위를 뒤덮고 있다.
구실사리는 분류학상 부처손속(―屬 Sellaginella)에 속하는 상록성 양치류 식물이다. 기온이 떨어지고 건조해지면서 푸른색이 일부 붉그스레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철사처럼 단단한 원줄기가 절벽에 붙어서 뻗고, 줄기에서 곁가지들이 번져서 방석 또는 솜이불 모양을 이룬다. 잎은 비늘조각 모양으로 4열로 배열하며 나온다.
(백마산장)
고란사에서 돌길을 따라 내려가면 유람선 선착장으로 이어진다. 선착장 위쪽에 ‘백마산장’이라는 간판이 붙은 낡은 시멘트 건물이 있는데, 문을 닫은 지가 오래되어 흉물스럽다. 철거를 하던지, 리모델링을 해서라도 다른 용도로 사용하던지 해야할 것이다.
(조룡대 청둥오리)
유람선 선착장 옆으로 당나라 소정방이 백마를 미끼로 하여 용(의자왕)을 낚았다는 전설의 조룡대(釣龍臺)가 있다. 마치 작은 섬처럼 보이는 조룡대 바위에 몇 마리의 청둥오리 가족들이 모여앉아 늦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다.
(금강 웅어)
유람선을 타고 구드래나루로 내려가다보면 강건너 모래톱에 낚시꾼들이 앉아 세월을 낚고 있다. 백마강 구간에는 붕어와 잉어를 비롯하여 모래무지와 누치 등이 서식하고 있다.
백마강의 대표어종 가운데 하나가 웅어이다. 웅어는 바다와 민물이 오가는 기수지역을 찾아 산란하는 회유성어종이다. 멸치과에 속하는 어종으로, 길이 30센티에 모양과 색깔이 갈치를 닮았다. 다만, 육식어종답게 입이 유난히 큰 것이 특징이다. 봄에 바다로부터 올라와 갈대밭[葦]에 알을 낳는다. 유득공이 펴낸 <경도잡지>에는 웅어의 그런 생태를 빌어서 ‘위어(葦魚)’라고 소개되어 있다. 정약전의 <현산어보>에는 횟감의 으뜸이라고 했다.
하구에 금강댐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웅어가 강경포구를 지나 이곳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구드래나루)
유람선이 닿는 구드래 나루는 백마강 나루이다. ‘구드래’라는 말의 우리말 어원은 <삼국유사> 왕흥사 전설에 닿아 있다. 백제 임금이 왕흥사(王興寺)에 예불을 드리러 갈 때 먼저 사자수(泗비水) 언덕의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하여 절을 하면 그 바위가 스스로 따뜻해지므로 자온대(自溫臺)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자온대는 곧 ‘구운돌[溫突]’을 가리키고, 구운돌은 곧 지그므이 ‘구들’로 음운변화를 일으켰다. 따라서 구드래는 곧 전설 속의 자온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분명치 않지만, 일본어에는 ‘큰나라’ 또는 ‘본국(本國)’의 뜻을 가진 ‘구다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백제를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배를 타고 금강하구로 거슬러 올라와 구드래나루에 내렸다.
구드래나루 건너에 나트막한 산 하나가 강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백제 당시 그곳의 산신이 백마강을 오르내리며 사비를 지켜주었다는 부산(浮山)이다.
근래 구드래나루 일대는 본가을로 유채꽃과 메밀꽃을 심어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가을 막바지엔 갈대숲과 노을이 구드래강변의 주인이 되어있다.
夕陽峰影落汀洲 석양빛 산그림자 모랫벌에 드리울제
破笠枯藤立渡頭 떨어진 삿갓, 지팡이 짚고 나루터에 이르렀네.
江水悠悠山杳杳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산빛은 아득한데
不堪秋色動人愁 이 가을 빛 쓸쓸함을 어이 견디리
- 원감국사(圓鑑國師) 금강진음(錦江津吟)
첫댓글 사진이 첨부되면 금상첨화일텐데....좀 아쉽습니당...헤~~~
직접 여행을 한곳이 아니라..사진 자료가 없어 저도 아쉽습니다. 앞으로 사진자료도 함께 올릴수 있도록 노력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