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제1부 폭풍전야
제2장 신군부의 부장
2. 10.26과 신군부
전두환, 10.26업고 [제2군부파쇼] 구축
광주교도소 긴급조치위반자로 넘쳐
궁정동 총성직후 교도관들 군복입어
독재타도 살얼음 정국속 [박정희시해] 진상 안밝혀진채 김재규 형장의 이슬로
79년 10월이 되자 박정히 유신독재도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오원춘 사건-YH사건-김영삼총재제명-부마항쟁 등이 이어지면서 이제 각계각층 민중과 유신독재는 [최후의 전면전]만 남겨 놓은듯한 양상으로 바뀐다.
이미 2학기 들어 학원가는 연일 반정부시위가 벌어지고 학생들의 구호도 [독재타도]로 변한다.
광주지역도 전남대 조선대등 대학가에 4월께부터 [유신독재타도][구속인사석방]을 주장하는 유인물이 편지봉투에 담겨져 계속 학생들에게 보내지고 있어으나 발신을 몰라 정보기관이 애를 태운다.
대학가 화장실에까지 [대학가 궐기]내용의 낙서가 쓰여지고 운동권 의식학생들은 시위를 모색해오며서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중 10월 3일 전남대 본관에 있는 학생상담지도관실에 불이 나 집기일부를 태우고 꺼진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학생상담지도관실은 서부경찰서 정보과형사와 정보부요원이 상주, 문제학생들을 연일 감시하며 학내동태를 살피던 곳이다.
이 사건은 박유순(철학과4) 고희숙(영교3) 김경희(')등 여학생과 신영일(국사교3)이 모의해 박이 석유를 뿌리고 방화한 것으로 이들은 모두 구속된다.
대학본관에서 방화사건이 터지자 수사기관과 학교당국은 초긴장상태에 빠지고 광주서부서는 이전 사건과 시위준비 관련학생들을 모조리 밝혀내 30여명을 연행하기에 이른다.
편지사건은 박병기(철학4년 제적) 장석응(국사교4) 화장실낙서 사건의 신민정(교육4) 시위를 준비하던 이세천(국문4) 윤만식(농대3) 조순형(') 최영추(') 박병섭(국사교4)등이다.
10월 9일과 16일에는 당국에 의해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서건이 발표된다.
남민전은 과거 좌익사건 연루자와 60, 70년대 학생운동가들이 결합해 [정예운동가들의 전위조직][직업적 혁명가들의 비밀지하조직]의 성격을 표방하며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전남대 출신 김난주 이학영등은 이에 가담해 79년 봄 동아건설 최원석사장집에서 선언적인 [대도]행각을 벌이다 체포된다.
마침내 유신독재를 허물어 뜨리기 위한 범민중적 항쟁은 10월 16일 부산에 불길이 솟아 마산으로 이어지고 이제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부마항쟁이 터지자 정부는 다음 발발예상지를 당시의 상황으로 광주를 지목했을 가능성이 짙다.
5.18 최후 망명자로 최근 완전히 귀국한 윤한봉은 당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박정권은 부산다음으로 광주를 예상한 것이 틀림없었다. 육구비행단은 광주공군기지로 경비행기를 내려보내 만일의 사태에 대비케 했다.
광주전남의 정보부와 경찰에 요시찰 인물을 사전에 예비검속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감을 읽었다.]
윤은 민청출신이 주축이 돼 결성한 [전남민주청년협의회]를 이끌면서 당시 광주.전남권 학원.재야.농민.노동등 전부문운동을 연결, 조직하며 [광주운동권 마당발]역할을 하고 있었다.
윤은 전남대 방화사건이 계기가 돼 광주서부서로 연행된 학생들중 한명에게 유인물 자금을 대준 것이 들통나 10월 19일 광주서부서로 연행된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유신정권의 최후 폭압은 하부 수사기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광주서부서 끌려간 30여명의 학생들은 온갖 고문에 못이겨 있는 사실 없는 사실 가릴 것 없이 과거행적을 줄줄이 토해낼 수 밖에 없었고 [윤한봉이 시켰지]라고 묻는 말에 [아니오]라고 말하면 또다시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로 광주서부서로 끌려간 윤의 회고.
[숙직실에서 고문을 당했는데 내 비명소리를 듣고 보호실에 있던 후배는 물론 일반시범들도 소스라쳐 잠을 깼다. 전투경찰까지 동원돼 [개새끼들 때문에 사람패게 생겼다.]며 몽둥이 타작을 했다. 무릎에 곤봉을 끼우고 책상두개에 동동 매달아 물고문을 한다.
팔과 어리까지 마비됐다. 고문하다 자신들이 지치면 가운데 나를 두고 양쪽에 누워 잤는데 내팔과 다리를 자신들의 팔과 다리에 연결해 네 개의 수갑을 채운채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고문기술자]들의 태도가 바뀐다.
연행자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면서 [당신들의생각을 이해한다]는 동 악몽맡던 며칠전과는 완전 딴판이다.
10월 27일 아침이 밝았다. 연행자들은 바로 어젯밤 자신들이 고문을 받고 있던 순간 유신정권의 상징 박정희가, 신임했던 부하 중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처참한 종말을 고했다는 것을 안다.
광주교도소내 긴급조치위반자들이 갇혀 있는 특사 독방에도 유신말기 박정권의 최후발악이 속속 죄어오고 있음은 물론이다.
당시 이곳에는 고영근 목사등 교계인사, 김병곤(서울대. 전민청련. 고인) 박몽구(전남대) 김윤기(') 등 긴급조치위반사범 40여명이 있었고 이영희교수도 [8억인과의 대화][우상과 이성] 집필과 관련, 특사옆동에 반공법위반으로 수감돼 있었다.
[유신거부자]인 이들은 [정치범]으로 분류돼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는다.
접견.반입도서.운동시간의 제한과 비위생적 처우는 그래도 견딜만 하나 교도관들에 의한 집단폭행, 고문, 각종 보복적징벌, 심지어 추가기소까지 당해 몇 년간 옥살이를 더하는 사람도 많다.
76년 6월 고영근목사가 부인에게 어렵게 전한 당시 광주교도소실태 일부.
[지금까지 있었던 방은 습기차며 빛이 없고, 여러 가지 물어뜯는 곤충들이 우글거리는 방으로 이곳에서 운동을 하지 않고 있으면 곧 완전폐인이 되는 곳이다.
징벌방은 이와같은 방에다 뒤로 수갑을 채우고 개와 같이 엎드려서 입으로 음식을 받아먹어야 한다.]
이같은 동물적 생활에서도 운동시간과 모포를 말리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면회자들의 소식을 엮어 급변하는 바깥세상을 높게 체감한다.
들리는 일련의 정세는 [부마항쟁이 이제 광주와 서울로 이어지면 유신은 끝난다]고 서로 장담하고 있있다.
그러나 10월 27일 아침, 어젯밤까지 정복을 입었던 교도관들의 옷이 푸른군복으로 바뀌고 [박정희가 죽었다]는 뜻밖의 소식이 교도소에 퍼졌다.
정세분석에 일가견이 있던 이들 수감자들은 본능적으로 일단 나갈 수 있겠다는 희망과 함께 [뭔가 상황이 좋지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직감한다.
이들의 예감대로 10.26사건은 거세게 솟아오르는 민중항쟁의 불길을 일시 잠재우면서 유신체제의 껍데기를 일단 붕괴시킨다.
10.26사건의 직접동기에 대해 김재규의 개인적 결단이라는 설과 미국이 개입돼 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동기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수사결과=[그가 직무수행 과정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을뿐 아니라 그의 시국대책건의가 차지철경호실장에 의해 제동을 받아왔다.
특히 그 무렵 시국과 관련해 떠돌던 요직개편설에 따라 자신의 해임을 우려한 나머지 대통령과 경호실장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아보겠다는 망상을 한것]이다.
▲김재규=[대의를 위한 거사다. 유신체제라는 억압구조가 자유민주주의 숨통을 누르고 있었다. 박대통령과 민주회복은 숙명적 대결이었다. 특히 그때 군출동으로 진압한 부마사태의 여파가 서울로 파급될 때 참혹한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국민들의 큰 희생을 막기위해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정분을 야수와 갈은 마음으로 끊었다.
▲五島陸夫(고지마 다카오)=[10.26사건이후 전두환 정권 성립까지의 정치적 변동이 동북아에서 미국의 사활적인 이해지역인 한국에 아시아 전략을 방해하지않는 정권, 전략에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겅권을 재창하기 위한 미국의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됐다. 미국이 박정희 배제를 결정한 이유는
▲박정희 통치능력 저하와 반정부.반박정희 운동의 반미주화조짐
▲박정희의 대미 추종외교 일부수정
▲카터의 대통령 재선 전략에 박정희가 걸림돌로 작용
▲카터정권의 대아시아.한반도정책의 변화등이다.
김재규는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의 지시에 의해 27일 0시 20분께 체포되고 정은 새벽 4시 대통령권한대행 최규하 국무총리의 이름으로 발표된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비상계엄사령관이 된다.
정은 이날 새벽 육본벙커에서 전두환보안사령관에게 [장군이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사건전모를 수사토록 하시오]라고 명하고 전은[잘알겠습니다]라며 부동자세로 경례를 한다.
정과 전의 이날명령-복명 상황은 바로 한달반 뒤 신군부의 [12.12사태]로 역전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그리고 궁정동의 총소리가 난지 불과 1주일도 채 안된 11월1일 일본 미이니치시문은 일본외무성 말을 인용, 주목할만한 기사를 싣는다.
[전두환 계엄사영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라는 제목의기사요지는 다음과 같다.
[... 이소식통은 특히 전사령관에 대해서는
▲박정희대통령을 사살한 김재규전중앙 정보부장이 군부를 쿠데타에 끌어들이려 했을 때 보안사령부를 동원, 저지하고 평온을 유지하려했으며
▲군의 소장엘리트를 여러명 배출하고 있는 육사 11기를 졸업한 실력자로서 그의 동기생들이 실전부대의 사단장을 맡고 있고
▲[10.26]서건수사의 최고 책임자로서 군의 질서유지에 중심인물이라는 점을 들어 군의 실권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아닌 전사령관에 있다고 진단했다.]
김재규도 재판 최후진술에서 [...내년 3.4월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것이다. 이런 상태서 자유민주주의가 출범하면 큰일이다. 힘센놈이 와서 다시 밀면 또 넘어간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80년 5월 24일 오전 7시 광주민중항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김재규는 서대문교도소에서 수갑찬 손으로 염주를 굴리며 사형을 맞는다.
<김선출기자>
첫댓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