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또우 사모웃
Tou Samouth
또우 사모웃(Tou Samouth: 1915-1962)은 "아짜 속"(Achar Sok: 속 선생)이란 별칭으로 더 유명한 캄보디아 공산당 지도자이다. 그는 캄보디아의 공산당을 창설한 멤버 중 한 사람이며, 그 중 온건파의 지도자였다. 또우 사모웃은 훗날의 폴 포트(Pol Pot)가 될 살롯 사(Saloth Sar)를 키워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1. 크메르 반정부활동 경력
또우 사모웃은 베트남 남부지방의 소수 크메르족인 크메르 끄롬(Khmer Krom) 출신으로 원래 불교의 승려였다. 1945년 또우 사모웃은 프놈펜의 오우날롬(Unnalom 혹은 Onalom) 사원의 빨리어 교수가 되었다. 이 무렵 미국 공군이 일본군을 목표로 건물에 공습을 가해 몇몇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사모웃은 상당히 놀라 교외로 거처를 옮겼다가 마침내는 베트남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그는 비엣민(Viet Minh)에 합류하였다.(주1) 1940년대 말에 사모웃은 크메르인 당원 그룹을 대상으로 정치적 자각과 경제학을 강의했다.
또우 사모웃은 손 웟 민(Son Ngoc Minh)과 함께 "캄푸치아 공산당"(Communist Party of Kampuchea: CPK)의 선구자격인 조직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ampuchea People's Revolutionary Party: KPRP) 창당에 가담한 멤버였다. 한편으로 그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모이긴 했지만, 그다지 내부적 동질성이 없는 다양한 좌익 계열 분파의 집합체였던 "이싸락통일전선"(United Issarak Front: UIF)의 여러 지도자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싸락통일전선"이 "크메르저항정부"(Khmer Resistance Government)를 구성했을 때 또우 사모웃의 이름이 내무부장관에 기재되어 있었다.
(주1) Dommen, A. The Indochinese experience of the French and the Americans, Indiana University Press, 2001, p.63. |
2. KPRP 내에서의 지위
캄보디아 공산당 운동 내에서 베트남의 후원을 받던 "도시위원회" 지도자로서, 사모웃의 존재는 여러 불교 승려들을 좌익 운동에 가담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도시위원회"는 시우 헹(Sieu Heng)이 이끌던 "농촌위원회"와 달리 보다 온건한 정책들을 주장했다. 특히 남-베트남에 대항해 싸우는 북-베트남의 좋은 동맹자이자 국가적 통합의 상징으로서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를 캄보디아의 국왕으로 인정했다. 한편 훗날 "크메르루즈"(Khmer Rouge)의 중심축이 될 폴 포트를 비롯한 파리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이 이 위원회 안에서 기간당원으로 성장하며 경험을 쌓아나갔다. 또우 사모웃은 캄보디아 독립 직후부터 폴 포트를 당 내에서 급속 승진을 시키며 후견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농촌위원회"는 시우 헹이 정부에 투항한 직후인 1959에 시하누크의 보안군에 의해 거의 궤멸적 와해를 당했다. 시하누크 정부가 탄압의 강도를 더욱 높이던 상황을 맞이하여,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PRP)은 1960년에 프놈펜 기차역 안에서 비밀회합을 가졌다(KPRP 제2차 당대회). 여전히 시하누크와 협력한다는 입장을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또우 사무웃은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General Secretary). 폴 포트는 누온 찌어(Nuon Chea)에 이어 당 서열 3위에 올랐다.(주2)
(주2) Ross, R. (ed) The KPRP Second Congress in Cambodia: A Country Study, Washington: GPO for the Library of Congress, 1987. |
3. 사 망
1962년 7월 또우 사모웃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 실종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1970년대 후반까지 비밀에 싸여 있었다. 일반적으로 시하누크의 보안경찰이 그를 살해했다고 알려졌지만, 당내 서기장으로 승진하기 위해 폴 포트가 꾸민 계략이라는 설도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폴 포트는 사망 직전 최후로 가졌던 인터뷰에서 이 점을 부인하고, 또우 사모웃이 자신의 자녀가 아프게 되자 약을 구하기 위해 안전가옥을 나섰다가 론 놀(Lon Nol)의 부하들에게 붙잡혔고, 심문을 받다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만일 사모웃이 불었다면, 나 역시도 구속되었을 것이다. 그는 "스떵 미언쩌이 사원"(Stung Mean Chey pagoda)에서 죽었다. 우리는 서로를 아꼈다."(주3)
하지만 역사학자인 벤 키어난(Ben Kiernan)은 폴 포트 그룹이 또우 사모웃의 실종과 관련해 책임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1978년에 작성된 "내부의 적들"에 관한 당 비밀 보고서를 보면, 껀달(Kandal) 도 위원장을 맡고 있던 솜 찌어(Som Chea)를 사모웃 살해 용의자로 고발하고 있다. 솜 찌어는 1962년 무렵에 폴 포트 그룹의 연락원을 맡고 있었는데, 후에 처형되었다.(주4)
1963년 폴 포트는 당서기장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중국의 후원을 배경으로 친-베트남계 공산주의자들을 결정적으로 숙청시킨다.
참고문헌
- Kiernan, Ben. How Pol Pot Came to Power. London: Verso, 1985
|
첫댓글 역사의 슬픈과거는 어느나라에서나,,,있었군요, 우리나라에서도 일제해방후 6,25사변전까지의 혼란기에 있었던 독립투사들과 공산당원들,,그리고 정체를 알수없는 여러단체의 단원들의 실종과 살해,,등등,, 어느나라나 마찬가지 엿었군요,,
하하, 그렇죠. 제가 이 게시판에는 정회원님들도 글을 올릴 수 있게 되어잇던 걸 잊엇네여~ 댓글달기도 물론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구 선생이나 조만식 선생같은 분들이 손웟탄과 유사하고, 몽양 여운형 선생이 이 또웃 사모웃과 유사한 면도 있고 그렇네여... 정치적 입장 면에서 말이죠
결국 역사적으로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이 모두 2차 대전 이후 독립과 더불어 식민지 체제를 극복하는 과정을 겪는데, 한국의 경우 한국전쟁(6.25동란)을 겪으면서, 완전한 남북분단의 안정된(?) 고착이란 형태로 "식민체제"가 "분단체제"로 전환되면서 잠정적인 해결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캄보디아는 한국보다 더 복잡하고 더 오랜 식민지 기간 혹은 그 이전부터의 수백년에 걸친 외세 침탈 기간을 거쳤기 때문에, 독립 후 식민체제 극복 과정이 더 복잡하고 더 오래 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제가 크메르루즈 문제를 단순한 인권과 인도주의라는 도덕적 관념만 들이대면, 지나치게 서구적 보편주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인 크메르루즈가 옿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가, 혹은 왜 그렇게밖에 할 수는 없었는가 그 과정을 더 들여다 보자는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초기 공산주의자들부터 다시 들여다 보는 겁니다.
문제는 크메르루즈 4년반 집권기에 150-250만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 3년 동안에 역시 10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습니다. 그러고도 한국은 분단이 또 된 채로 남앗는데, 그래도 캄보디아는 분단이 안 되엇으니 훨씬 더 양호하게 식민체제를 극복했다고 생각이 되네여.
한국인들이 이제는 망각해버린 식민체제 혹은 분단체제 때문에 또 언제 갑자기 100만명이 학살될 지 모르는 사회가 바로 한국인데, 그러고도 빤히 보이는 결과를 놓고 극우정당에 몰표를 주는 사회이니, .... 참 더 뭐라 할말이 없네여.... 캄보디아 역사를 들여다 볼수록 한국 역사가 더 처절하게 느껴집니다.
약소국의 슬픈역사가,,마음을 울적하게 합니다, 우리네도 별반다르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수없는 외침과,,내부의 반목등,, 결국 국민이 좀더 똑똑하여져야 해결의 기미가 보이는것은 아닐런지요,,,
아마도 그 이면에는 거대한 경제적 사회적 구조가 있어서, 개인적인 자각만으로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문화는 만들어 갈 수 있죠,,,, 좀 더 세련된.... 세련된 문화가 생겨나면 생각과 사회구조도 달라지는데... 다문화적 적응도 일종의 세련된 문화라고 할 수 있죠... 굉장히 어려운 것도 아주 쉽게 아무렇지 않게 두루는 모 그런건데... 사람들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머리로만 안 되고 가슴이 따라줘야 하니가요... 거의 일상적 습관 같은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