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그 5일간의 기록
숭례문은 1396년(태조 5) 축조된 서울도성의 정문으로 1398년 준공되어 1447년(세종 29)과, 1479년(성종 10)에 각각 개수, 증축되었으며, 1961~1962년에 해체수리되었다.
기단 양측은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순종 2) 길을 내기 위하여 헐었다.
2008년 2월 10일 그날은 아마도 우리가 서양력을 쓴 이레 가장 길었던 연휴의 끝이었다. 주말근무제를 실시하는 경우, 이틀만 휴가를 내면 무려 8일동안이나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해외로 가서 연휴를 즐겼고, 또 어떤 사람은 고향으로 가서 휴가를 즐겼으며, 혹은 연휴기간에도 일을 해야 됬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연휴가 끝나가는 무렵 오후 10시경, 우리는 다소 당황스러운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바로 국보 제1호이자 서울의 상징이고 대한민국의 상징이며 우리들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였던 숭례문이 화염에 휩쌓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이되자... 수십여대의 소방차와 수백명의 소방대원이 동원되었음으로 당연히 진압될 줄 알았던 숭례문의 끔찍한 모습을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뉴스화면을 통해 보여진 숭례문의 화재진압과 붕괴장면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숭례문의 현판은 뉴스 보도를 통해 수차에 걸쳐 알려졌지만, 경복궁으로 들어오는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 세로로 걸려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경복궁은 화마를 피할 수 있었지만, 결국 숭례문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체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만약 범인이 경복궁에 방화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란 생각을 하면 고개가 저어질 정도이다. 아마도 경복궁에 방화를 했다면, 문화재 손실은 물론 주변건물들로까지 화재가 번져 인명피해마저 났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쩌면 숭례문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고 불꽃속으로 사라져 갔는지 모른다.
3일째 되자 범인은 문화재 방화 전과가 있던 69세 노인으로 밝혀졌다. 이유는 1차 방화당시 자신에게 주어진 1900만원의 벌금과 개인사유지가 재배갈되면서 지급된 토지보상비에 대한 불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범죄는 너무나 엄청나다.
그러나 그의 범행못지않게 그동안 국보1호에 대한 허술한 관리가 집중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4일째가 되자 각종 중장비를 동원한 무지막지한 현장정리작업이 시작되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그렇게 언론의 비판을 받고, 그렇게 수만은 전문가들의 지적을 받으면서도 철거에 가까운 문화재 파손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비난여론에 밀려 "별도 보관장소에서 보관해 적극 활용"하기로 결정
숭례문 잔해를 일반쓰레기장에 무더기 폐기하다가 발각돼 국민적 분노가 일자, 14일 더이상 잔해를 방출하지 않고 보존하겠다고 긴급 진화에 나섰다.
도데체 문화재청에는 문화재를 전문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나 있었던 것일까? 지극히 상식적이고 비전공자가 보아도 잘못된 일을, 그래도 전담관리팀이란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진행하려 했던 것이다.
만약 여론이 며칠만에 잠잠해 졌다면, 문화재청 공무원들은 언제 그랬냐는듯 대규모로 문화패를 파손하였을 것이다.
문화재청에서 한가지 잘한일이라면 숭례문의 국보 1호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 것인데, 그것조차 무의미 해 질뻔 했다. 그러고 보면 칸막이를 한 것도 밀어부치기식 진행을 하기 위했던 것이 아닌가란 의혹마저 든다. 하지만 그곳을 방문하였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지각있는 우리국민들은 문화재청의 그런 어처구니 없는 처사를 좌시하지 않았다.
비록 방화로 엄청난 손실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국민의 힘으로 더이상의 파손행위를 저지하였던 것이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방화가 있은지 5일이 지난 14일 오후 숭례문 잔해 폐기 파문과 관련, "훼손 부재 중 재사용 여부와 학술적 가치 유무, 복원시 참고가치 유무 등을 분류 기준으로 정해 처리키로 하고 현장에 문화재위원과 문화재청 직원을 고정 배치해 반출을 차단하고 있다"며 "앞으로 훼손 부재 선별 작업을 더욱 더 엄격하게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이어 "현장에서 수습된 부재를 대상으로 장력 검사 등을 통해 재사용 가능 여부를 신중하게 가리고 재사용이 안되는 부재도 별도의 보관장소를 정해 향후 전시ㆍ학술연구 목적으로 적극 활용토록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이에 따라 14일부터 폐자재의 현장 방출을 중지시키고 장내 분류하기로 했다. 여론의 질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상식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게 문화재청의 현주소인 셈이다.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이전 숭례문의 모습.
마치 두팔을 벌리고 있는 듯한 성곽 사이로 촘촘하게 옛날 기와집이 들어 차 있다.
하지만 이 당시에도 일제가 방치한 탓인지 사람들이 아무 통제없이 숭례문안쪽까지 들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옛것을 사랑하고 아꼈던 우리조상들은 그저 이곳이 모두와 함께 담소나 누눌 곳으로 인식하였지, 방화라는 끔찍한 만행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보 1호로서의 숭례문
숭례문은 얼마전까지 남대문으로 불리며 차츰 숭례문이란 본래의 이름은 잊혀진 때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 문에 왜 숭례란 이름이 붙여졌을까? 우리 민족은 옛부터 음양오행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직접적으로 어떤 방향을 가리키기보다는 그것과 의미가 같은 다른 말을 사용했다. 숭례문의 '례'는 다섯 가지 도리[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에서 '禮'에 해당한다.
선조들은 이 다섯 가지 도리를 서울의 사방에 세웠다. 보신각(普信閣)을 중심 축으로 4대문을 '인(동)-의(서)-예(남)-지(북)'(흥인문(興仁門)-숭례문(崇禮門)-돈의문(敦義門)-숙청문(肅淸門))라는 이름을 붙이고 북문만은 예외로 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이 이름 대신 그냥 '남쪽을 향하는 문'으로 바꿔 버렸다. 한마디로 강재로 창씨개명을 당한 셈이다.
1930년대 숭례문, 일제는 통행과 도시개발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옛 서울을 둘러쌓고 있던 도성을 대규모로 철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남대문을 남겨둔 것은, 그들의 식민지에도 우수한 문화재가 있음을 대외에 흥보하기 위해서였다.
일제는 국 1933년 8월 9일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보존령'을 공포하여 이듬해에 이를 시행하게 되는데, 조선총독부는 보물 1호로 남대문을, 보물 2호로 동대문을, 보물 3호에 원각사지십층석탑을, 보물 4호로 보신각종을 일괄지정하면서 부터 국보1호로써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인해 한 때 국보선정 자체가 일제의 잔재라 하며 다시 논의 되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다. 그런데 그 논리의 주된 참고대상이 역설적이게도, 바로 일본의 국보선정 시스템이었다. 일본은 잘 알다시피 국보의 가치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일종의 순위를 매기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우리도 가장 가치있는 것을 전무가의 의견이나 국민의 여론을 종합해 하자는 것이었고, 그럴경우 가장 유력시 되었던 후보가 훈민정음이었다.
물론 훈민정음은 현대 한글의 원형으로, 어느 유무형 문화재와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의 가치를 가진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보로 지정된 문화유산은 그 하나하나가 고유의 가치와 우리의 숨결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것에까지 순위를 매긴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 것이다.
또 경복궁은 조선시대 건축물중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오래되었으며, 건축수법으로 볼 때 국보 1호로 지정되어도 전혀 손색없을 걸작이다.
국보 1호는 비록 순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갖는 의미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다소 상업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무형의 자산보다는 유형의 자산이 보다 랜드마크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숭례문은 600여년의 역사동안 수많은 파괴와 고난속에서도 서울의 중심에 우뚝 솟은 성문으로, 우리들은 물론 그곳을 방문한 수많은 외국인에까지 무한한 감동과 여운을 남겨 주었다.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국보 1호
이제 숭례문 화재는 지나갔다. 그렇다고 잊어 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혹시 경제 논리만을 앞세워 '어차피 불타 없어진거 200억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없다.
또 숭례문 소실의 안타까움을 표현할 길이 없어 헌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숭례문은 다시 부할 할 수 있으며 부할해야만 된다.
단순히 경제적인 논리로만 보더라도, 국보 1호가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와 관광효과 서울의 이미지 상승등을 고려해 볼 때 그 가치는 년간 수백억원이 관광효과를 내왔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파괴와 실패의 역사도 우리가 간직해야 할 또 하나의 역사이다. 오늘의 잘못을 교훈삼는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
한 예로 뉴욕무역센터 빌딩이 9.11 테러로 무너진 뒤 '그라운드 제로'라고 부르며, 일부 현장을 보존하고있다. 또 원폭으로 무너진 일본의 도쿄 돔은 세계문화 유산으로 까지 지정돼어 있다.
이 밖에 파괴된 체 원형 보존된 문화재는 수 없이 많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의 붐베이나 과테말라의 안티구아는 화산활동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파괴된 곳이었지만, 파괴된 흔적마저도 원형보존함으로써 엄청난 가치와 부를 창출하고 있다.
이제 남대문을 어떤식으로 복원할것인가는 우리들의 손에 달렸다. 그리고 더이상 문화재청의 일방적인 밀어부치기식 혹은 무사안일한 행정과 복원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그림은 복원 예상도이지만, 개인적으로 저 형태는 반대한다. 왠지 답답해 보이고 꽉 막힌 형태이다. 물론 숭례문은 기본적으로 성곽을 관통하는 문이어서 원형에 가깝에 복원한다는 취지에는 동의하겠지만, 그래도 심미적인 기능도 좌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왼쪽 성벽이라도 국보 1호 지정당시 모습을 유지하여 조금은 개방적인 면도 유지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불에타고 심하게 손상이 간 목재등을 무리하게 재 활용하는것 역시 자제해야 한다.
따라서 불탄 자재등은 국립중앙박물관등에 특별실을 마련하여, 따로 복원전시 해야 됨을 주장한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오늘의 역사교훈을 후대에 전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에탄 나무조각하나 깨진 기와 한 조각도 소흘하게 버려서는 안된다. 비록 행정상의 미흡과 문화재 관리소흘로 큰 손실을 입긴하였지만, 우리가 이 국보 1호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다시 살려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후세에게 전해 줄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 땀과 노력의 모든과정이 진정한 국보 1호를 만드는 것이리라. 어떤 사람은 숭례문 앞에서 조의를 표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과장적인 행동이다. 아직 숭례문은 죽지 않았다. 다시 살아나기 위한 기나긴 여정을 이제는 시작해야 될 때이다. 아울러 모든 문화재에 대한 전면적인 재정비와 관련규정도 하루빨리 마련되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