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斷想 後記]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병하여 니탕개의 발호를 진압했던 이순신, 신립, 김시민, 이억기 등이 인진왜란에서 어떻게 항전하였는지를 들여다보면 정언신의 죽음을 아쉬워했던 조야(朝野)의 목소리가 허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정언신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이분들의 애국 투혼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언신이 1591년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1년이 채 못 되어 1592년 선조 25년 4월, 풍신수길은 조선 정벌을 명령했습니다.
임진년의 왜란 즉, 임진왜란이지요.
왜적의 선봉과 맞닥트린 첫 전투에서 부산성을 지키던 첨사 정발(鄭撥)이 혼란 중에 전사하고, 다음날에는 동래성을 지키던 동래부사 송상현이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역시 힘이 다하여 전사하고 맙니다.
[원문] 조선왕조실록/선조 25년4월 13일 1592년 명 만력 20년
賊船蔽海而來,釜山僉使鄭撥, 方獵於絶影島, 謂爲朝倭, 不設備, 未及還鎭, 而賊已登城。撥死於亂兵中。 翌日陷東萊府, 府使宋象賢死之, 其妾亦死之
변고를 접한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진압에 나서보지만 이일 역시 상주전투에서 조총의 위력 앞에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주합니다.
○十七日丙午晡時, 邊報至京, 卽以李鎰爲巡邊使, 將精銳, 禦戰于尙州, 敗績, 從事朴箎、尹暹等皆死,鎰單騎走免
이일의 선발대를 뒤따르며 후원군을 이끌던 도순변사 신립은 이일의 패잔병을 수습하여 충주로 물러나 진을 치게 됩니다.
○以申砬爲三道巡邊使
종사관 김여물이 신립에게 조언했습니다.
“장군, 문경새재의 지형이 험하니 이곳을 지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신립은 달래강을 등지고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치도록 명령합니다.
배수(背水)의 진(陣)!
물을 등지고 진을 쳐서 결사 항전을 벌이는 전술이며, 강한 적을 맞아 약한 군사로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보이는 필사의 전술입니다.
신립은 직감적으로 지켜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감지했고 나라의 흥망이 걸린 싸움을 죽기로써 싸워 승리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왜병들은 문경에 이르러 새재의 험함을 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군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무서운 기세로 새재를 넘어 충주로 들이닥쳤습니다.
정돈할 사이도 없이 왜병을 맞게 된 신립의 군사들은 뒤에 큰 강이 있어 달아날 수도 없었으므로 사력을 다해 싸웠습니다.
신립 또한 말을 달려 적진 속으로 뛰어들어 수십 명의 적을 사살하는 투혼을 불살랐으나 힘은 다하고 군사들은 자꾸 뒤로 밀렸으며 달래강은 피로 물들고 시체가 강을 메웠습니다.
당대의 명장 신립도 힘이 다하여 기운을 잃고 말았습니다. 옆에 있는 종사관 김여물을 발견하고 낙담하여 말했습니다.
“종사관, 내가 종사관의 말을 듣지 않아 마안하이. 나는 이제 곧 죽을 몸이니 자네는 어서 몸을 피하시게.”
“장군, 피할 곳이 어디 있습니까? 이미 죽음을 각오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것 없네. 어서 피하여 후일을 기약하시게.”
“아니외다. 남아로 태어나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처럼 의로운 일은 없소이다. 장군과 함께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몰려드는 왜병과 달래 강기슭에 의지하여 백병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힘이 다하자 말을 몰아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장렬히 최후를 마쳤습니다.
○砬至忠州, 諸將皆欲據鳥嶺之險, 以遏敵衝,砬不從, 欲長驅於平原。 二十七日陣于丹月驛前, 軍卒有言: "賊已至州內。" 者,砬以爲驚衆, 卽斬以徇。 賊設伏繞, 出我師之後, 衆遂大潰。砬突圍至㺚川月灘邊, 召其下曰: "無面目見殿下。" 遂溺死。 其從事金汝岉、朴安民, 亦溺死
신립의 패보는 조정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선조는 결국 몽진 길에 올라야 했지요.
육지의 전투가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을 때,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바다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해상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옥포해전으로 첫 전과를 올린 이순신은 사천해전, 당항포해전, 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등에서 백전백승의 해전사를 남기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불멸의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노량해전!
뇌물을 써서 조명연합군과 화친을 맺고 순탄하게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왜적들의 시도에 순순히 퇴로를 열어줄 이순신이 아니었습니다.
출전에 앞서 이순신은 하늘을 우러러 천지신명께 고합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저 원수 놈들을 모조리 무찌를 수만 있다면 이 한 몸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이 처절한 싸움에서 이순신은 운명을 맞이합니다.
“싸움이 한창이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7년 동안 지속된 왜란이 이순신의 죽음과 함께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진주목사 김시민?
김시민은 왜란 중에 진주목사에 부임해 있었습니다.
수차의 공성에도 불구하고 진주성 공격에 실패한 왜적들은 20,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성을 둘러싸고 포위 공격을 감행헀습니다.
이에 김시민은 고을 안에 사는 백성들로 조직된 3,8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성을 철통같이 지켜냈으며 외부에서 협공하는 진주판관, 곤양군수, 함창현감 등 경상우도 관군과 의령의병장 곽재우, 거창의병장 김면, 합천의병장 정인홍 등과 연합하여 2만여 명에 달하는 왜적 중 1만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김시민 역시 전투가 절정에 달한 마지막 날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게 되지요.
이 진주성 싸움은 이순신의 한산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청사에 길이 빛나는 임진왜란 3대첩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진주성의 2차 싸움에서 김시민의 후임으로 부임해 있던 서혜원은 외적들의 2차 침입이 있자 전의를 상실하고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도원수 김명원의 독려로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병장 고종후 등이 진주성으로 달려가 대결전에 나섰으나 목사의 나약한 심성은 조직을 결집하지 못하여 결국 진주성 함락이라는 참패를 불러들였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어땠습니까?
칠천량 전투에서 패하여 배를 버리고 달아나다가 왜적 졸병들에게 잡혀 죽었다는 게 선전관의 보고서 아닙니까?
더구나 이순신이 중용했던 이억기, 최호를 비롯한 우수한 인재들이 이 전투에서 모두 전사(戰死)하였구요.
그러니 숙종조 석학 남하정이 쓴 동소만록, 이조판서 황정욱이 정언신의 죽음을 두고 개탄해 마지않았던 이유, 항간의 풍설이 공감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적어도 정언신의 부장들은 ‘死則生生則死’의 정신으로 전투에 임했다는 공통점이 있고, 戰術과 戰略이 있고, 두려움에 떨거나 도망치지 않았다는 불굴의 기개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동소만록의 아쉬움을 이해할 듯합니다.
동래정씨 홈페이지가 한산하여 우의정 정언신 관련 참고문헌으로 올려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