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텅스텐과 떠난 세월
상동광업소를 재개발하는 캐나다 소재 “텅스텐광산 개발” 업체인 “Woulfe Mining”에 고용되어 상동광업소 재개발에 참여하기 전까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다.
취업도 했었고 가벼운 독서도 하면서 여유롭게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몇 개 하고자 한다.
❏ 반 백수
나의 인생에 또다시 백수가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예전과 다르다.
생산적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시간만 보내는 백수가 아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집안에 자주 있으니 반백수로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서 몇 년간은 어머님 모시고 집에서 1.5km 정도 거리에 있는 우리가 경작하는 작은 밭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어머님은 밭에서 나하고 이야기하시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매우 좋아하셔서 매일 가다시피 했다. 나무 그늘에서 쉬실 때면 피난 오신 이야기와 상동에서 살던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때로는 이야기를 하시다가 어렵고 힘들었던 세월을 추억하고 눈물이 맺히실 때도 있었다. 그 눈물에 담긴 어머니의 인생 여정을 알고 있기에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어머니께서 85세 되시던 해에 화장실 들어가시다가 미끄러져서 화장실 문턱에 허리가 닿아 병원에서 “척추시멘트시술”을 하시고 주치의 권유에 따라 밭에 가시는 것을 중단하시고 거의 집에만 계셨는데, 운동량이 급격히 줄자 당뇨와 혈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질환이 원인이 되어 “뇌경색”이 발생하여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하신 후 완치하셨으나 90세가 넘으시고는 가끔 저혈당 쇼크가 발생하여 약물치료를 계속 받으셔야 했다.
(어머니는 향년 만95세에 저혈당 쇼크로 병원에서 소천 하셨다. 장지는 집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가족묘역에 계신 아버님과 합장했다. 내가 반백수로 있을 때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가족 묘역을 조성하고 고향 세송에 모신 선친을 가족 묘역으로 이장했기에 선친과 합장할 수 있었다)
IMF가 끝났다는 것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았다는 뜻이지
그 돈은 변제했다고 경기가 종전과 같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므로 상당 기간 동안 침체된 경기는 지속되었다.
그 여파로 건축자재와 건설 인부의 인건비가 무척 저렴해서 평택에 사는 막냇동생막 3층 건물을 지었다. 사돈 되시는 분이 건축을 하시기에 공사 전체를 그분에게 맡겼고 나는 매일 공사 현장에 나와서 벽돌을 나르기도 하며 페트병에 물을 얼려서 인부들이 마실 수 있도록 했다. 그들은 숙박비를 아끼려고 건축 중인 건물에서 스티로폼 바닥재를 깔고 잤다.
가을이 오자 우리가 숙소를 무상으로 마련해 줬다. 그들은 건축 경기가 혹독한데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국가나 회사나 가정이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느꼈다.
(서울서 근무할 때 상무이사는 군 장성 출신이었다. 결재를 들어가면 가끔 군대 이야기를 해 주시는데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난다. “무능한 지휘관은 강한 적군보다 더 무섭다” 나는 그 말씀을 하시는 상무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반 백수 탈피
반 백수를 탈피하는 일자리가 생겼다.
후배의 추천으로 아파트 시행 작업을 하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아파트를 건설하고자 하는 부지에서 지주작업(부지매입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뒷바라지하며 매입한 부지를 관리하는 것인데 일의 진척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지역이 김포시내에서 떨어진 변두리에 있는 농촌 마을인데 평생을 대대손손 살아온 집과 농토를 쉽게 매각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업의 진척이 되지 않자 회사에서는 김포지역은 잠시 보류하고 파주시 재래시장 부근에 아파트를 짓기 위하여 지주작업을 시작했다.
지주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 동네 사람으로 여러 곳에서 지주작업을 성공했다고 해서 회사에서 특별 채용한 사람인데 연령이 나와 비슷해서 가끔 시장터에서 술도 하고 대화를 많이 했는데 그의 이야기는 뻥이 세고 알코올에 반은 중독된 사람처럼 술을 항상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거액의 지주 작업비를 타 가지고 지주 작업은 안하고 유흥업소를 출입을 자주하기에 사장님께 보고도 했고 필요하면 지주작업자를 새롭게 선임하자고 했으나 내 건의는 채택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지주작업자가 실종되었다. 사무실에 출근도 안하고 통화도 되지 않아서 다방면으로 수소문하였지만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종국적으로 토지 매입은 중지했고 내가 그 회사를 나오고 난 후에 소식이 없었던 지주작업자를 찾아내어 소송을 제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지하철 플랫폼에 안전문(Screen Door)를 설치한 역사는 1호선 신길역이다.
그 장치를 개발하여 제작하고 설치한 후 철도청과 합의하여 기부채납을 한
회사는 “PSS Tec”이라는 회사이다.
(그 회사 사장은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제과공장에 다닐 때 제과공장을 잠시 운영하던 사장이며 나와는 친척 간이다. 그분은 모교 2회 선배이신 故길경수씨 여동생과 결혼을 해서 길경수 선배님과 처남 매제 지간이고 나는 그 선배님과 사돈이 되었다.)
“PSS Tec”사장께서 나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PSS Tec에 출근하라“고 해서
반백수의 탈을 깨고 출근을 했다.
나는 그 분야에 기술도 없는 맹탕이지만 사장님의 친척이라는 강점으로 인하여 기획실장 보직을 받아서 일을 했다.
”뭘 알아야 면장을 한다. 고 아는 것이 없으니 직원들이 작성하는 설계도면이나 설명서 복사를 해주고 부품 제작을 의뢰할 때 참여하고……. 쉽게 표현하면 봉급을 털도 벗기지 않고 날로 먹는 대우를 받았다.
회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신길역에 안전문 기부 채납한 이후 2호선 강남역 등 4개 역에 스트린도어를 설치했고 지하철 곡선 타는 곳은 객차와 플랫트홈 간격이 넓어서 발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안전 발판”을 수도권 4곳에 설치하여 운영했다.
서울시와 철도청에서 단계적으로 모든 역사에 안전문 설치하는 계획을 발표하고부터 지하철 플랫트홈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하기 시작하자 승강기를 제작, 설치하는 대기업들이 안전문 사업에 참여하면서 경쟁하게 되었다.
경제의 원칙은 약육강식과 같은 것이라서 기술은 있지만 자본이 없는 우리 회사는 입찰에서 적정 가격을 제시했어도 낙찰을 받지 못했다.
(서울시에서 최저 입찰제를 적용해서 대기업들이 덤핑으로 입찰에 참여하므로 도저히 가격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안전발판”은 독보적인 기술이 있어서 어느 회사도 넘보지 못했다)
대기업의 참여로 회사가 어려움에 직면하자 회사에 기여도 못하고 봉급만 타먹는 것이 마음에 큰 부담이 되어서 적절한 핑계를 대고 회사에서 나왔다.
❏ 실어증(失語症)과 미국대사(美國大使)
△ 실어증
평택은 눈이 많이 오지 않는 고장이라서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부터 매년 겨울답지 않는 겨울을 보내고 살았다. 마침 전국적으로 눈이 많이 와서 백설로 덮인 고향의 겨울을 보고 싶어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읽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지은 “설국”의 인상에 남는 첫 표현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밤의 바닥이 하애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추었다…….”을 생각하며 소설 속의 주인공인 백수 시마 무라”같이 특별한 일도 없이 넉넉한 마음으로 고속도로를 피하여 국도로 박달재를 넘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전에는 고향에 가면 벌초하고 즉시 귀가하거나 하계휴가 때는 친구를 만나서 치랭이골에만 머물렀는데 이번에는 눈에 덮인 상동 전역을 보고 싶어서 텃골과 세송도 갔다.
텃골 백운료까지 가다보면 상동광업소를 지나게 되는데 내가 텃골을 가는 목적은 상동광업소를 보기 위함이었다.
상동광업소 경내를 지나다가 깜짝 놀라서 차를 멈췄다. 상동광업소 건물은 거의 없어지고 선광장, 화공공장(DB.PB), 보일러실, 본관 등이 있던 자리는 콘크리트 바닥과 벽만 남아있고, 붉은 벽돌로 지은 APT 공장과 보일러실 굴뚝 그리고 몇몇 창고 건물이 방치되어 흉물로 남아 쓰러질 듯이 서 있었다.
풀 한 포기 찾을 수 없는 을씨년스럽고 냉랭한 겨울에 상동광업소 전역을 둘러보고 나니 갑자기 가슴이 허탈하며 불안해지면서 매우 중요한 것을 상실한 것 같은 마음으로, 가득 찼다.
고향을 찾아와서 자는 잠은 항상 달았는데 그날은 잠을 몇 번 설쳤다.
다음날 집으로 출발할 때 상동광업소 전역을 다시 한번 둘러보고 갔다.
모교 출신으로 유명한 시인이신 모 선배님께서 동문회 회원명부 발간을 즈음하여 기고하신
“빛나는 아침으로”라는 축시(祝詩)에 언급되어 있는 구절이 떠올랐다.
“그곳을 떠나온 이후 실어증을 앓으며 살았다......”
고려 말 ”김재“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고...“라는 시조의 한 구절도 생각났다
상동광업소의 황폐한 모습을 본 충격으로 공황(恐慌)이 찾아와 며칠은 말문이 막혔다. 보지 않았으면 차라리 좋았을 패광 후의 처절한 모습을 본 것이 원인이다.
(며칠 동안은 왜 그런지 말을 하기 싫었다. 집에서는 내가 말이 없는 것이 이상했던지 어디가 아프냐고 묻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온 후 실어증을 앓으며 살았다는 선배님의 마음을 넉넉히 알 수 있었다.)
△ 미국대사
지금은 폐광이 되어 황폐하고 흔적이 사라진 상동광업소에 불과하지만 지난날 광업소가 활발히 가동되던 시기에 엄청난 귀빈이 방문한 일도 있었다.
그 귀빈은 ”베트남전쟁“으로 인하여 상동광업소를 방문하신 것인데 아마도 상동광업소 설립 이후 외국 손님으로는 가장 귀하고 높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베트남 “통킹만 사건” 이듬해인 1965년부터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드는 텅스텐의 안정적 확보가 필요했다
미국은 텅스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하여 단일 광산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상동광업소에 “주한미국대사(브라운)”를 보낸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다. 학교에서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전교생에게 나누어 주고 운동장 입구에서 교문 앞까지 도열해서 미국 대사를 환영하도록 했다.
전교생이 양국 국기를 들고 도열하고 있는데 내덕 방향에서 짙은 황토색 헬리콥터 2대가 날아와서 모교 운동장에 착륙했고, 미국대사와 일행은 광업소에서 영접 나온 회사 간부와 함께 교문 밖에 대기한 광업소 승용차로 이동하면서 도열한 우리들 앞을 걸어서 천천히 지나갔다.
우리들은 일제히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환영했다.
미국대사는 걸어가면서 우리들에게 거수경례로 답례도 하고 손도 흔들어 주고 악수도 해주면서 매우 기뻐했다.
(대사 일행이 광업소로 올라간 후 헬리콥터를 지키면서 대기하는 조종사들을 위하여 영어 선생이신 임종운, 홍영준 선생님이 조종사에게 가서 잠시나마 그들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대사는 광업소를 방문하여 매우 만족한 결과를 가지고 대사관으로 갔다고 하며, 상동광업소는 베트남 전쟁으로 호황을 맞았다.)
❏ 아군과 적군
“거평”에서 대한중석을 인수하였을 당시 회사에는 소속 임원의 승인이 없이는 임의로 회사의 자료나 정보를 거평에 제공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ISCAR에서 대한중석을 인수하였을 때도 그랬었다.
회사가 매각되는 시점이라서 상사의 지시가 종전처럼 먹히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업무상 중요한 지시는 순종하는 것이 원칙인데 상사들의 지시는 공염불에 불과했다,
(우리 회사가 중요시하는 자금, 영업, 채권 등의 자료를 누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제공했는지 인수예정회사인 “거평”에 모두 넘어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임원과 간부사원 심지어 일반 사원도 그 자료를 인수예정회사에 회사의 승인 없이 몰래 갖다 준 것이다. “누가 적군인지 누가 아군인지” 피아구별이 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 상동광업소 재개발 참여
반백수 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휴대전화에 등록된 전화번호가 아니면 전화를 받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전화는 왠지 받고 싶었다.
전화를 거신 분은 대한중석 황금기에 미국과 유럽에 분포하고 있는 해외영업소를 관장하시며 텅스텐을 해외로 판매하는 업무를 총괄하셨던 해외영업상무셨다.
그분께서 재임 시 나는 방호과에서 근무했으니 얼굴을 뵌 적도 대화를 나누어 본 일도 없었지만 같은 대한중석 출신이라서 서로 반갑게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상무님은 캐나다 소재 ‘Woulfe Mining’이라는 광산 개발회사에서 “상동광업소”를 재개발을 하는데 “한국인 사장”으로 재임하고 계셨다. 상무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주신 핵심 내용은 “재개발 준비를 현지에서 책임지고 관장할 인력”을 찾기 위하여 대한중석 출신 십여 명을 접촉하여 추천을 의뢰했는데 그분들로부터 추천된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상동광업소 재개발은 2007년 최초로 “오리엔탈 미네랄즈”라는 외국 기업이 재개발한다고 신문과 방송에 여러 차례 나왔으나 국내외 투자자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개발이 무산된 일이 있었다.
그러한 내용을 알고 있기에 나는 재개발 참여에 긍정적인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광산에 대한 전문지식이 전혀 없어서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두 분 추천하였다.
그러나 나의 추천은 비중을 안두시고 무조건 나에게 참여를 강요하셨다.
나는 상무님의 강력한 권유에도 부정적인 의지를 표명했는데 상무님 말씀 몇 마디에 꼼짝 못하고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게 되었다.
나는 Woulfe Mining 서울 사무소에서 2년간 재개발에 참여한다는 근로계약을 작성하고 ‘Woulfe Mining 상동본부장“으로 임명되어 반백수의 틀을 깨고 현지에 내려가게 되었다.
(재개발 참여와 관련해서 나의 부정적인 의지는 아래와 같은 상무님의 말씀이 있으셨기에 꺾였다.
”박 부장 ! 상동광업소가 재개발되면 박 부장의 고향이 발전되는데 참여를 안 한다고? 그러면 고향과 상동광업소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요? 잘 생각해 보고 내려가시오! “
나는 상무님의 그 말씀에 KO패를 당한 것이다. 상무님과 나는 호흡이 잘 맞아서 일의 성과를 내며 즐겁게 일을 했는데 상무님은 다른 계획이 있으셔서 1년여 계시다가 퇴직하셨고, 외국 금융계에서 근무하다가 Woulfe Mining 재개발 Project에 통역과 계약을 진행하던 회사의 대표이사께서 상무님 후임으로 한국인 사장으로 부임했다.)
❏ 재개발 현장 도착
반백수로 있다가 상동광업소 재개발 현장인 고향으로 내려가는 마음은 기쁨으로 넘쳤다. 내 고향의 상징물인 꼴두바우는 “송강 선생”과 얽힌 전설이 있다.
차를 몰고 수라리재를 넘어가니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선생의 “관동별곡”의 첫 구절이 저절로 입에서 나와서 중얼거렸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었더니 관동 팔백 리에 방면을 맡기시니.”이렇게도 중얼거렸다
“반백수로 빈둥대며 집에만 누었더니 고향 600리에 재개발을 맡기시니...”
현지에 도착하니 Woulfe Mining 소속 “어니스트(Earnest)”라는 호주 출신 백인 광산기술자가 있었다. 내가 초기에 해야 할 일은 이분을 도와서 20여 년간 방치하여 낙반과 지압으로 막힌 갱도를 개척하여 광량 조사를 위한 갱내 시추를 지원하는 일이다.
우선 상동 거주자 중에서 상동광업소 채광 출신을 몇 명 채용했다.
그리고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상동갱 명패와 송덕비를 읍사무에서 보관하고 있음을 알아내어 “재개발본부” 사무실로 가지고 와서 상동 갱에 명패를 붙이고 송덕비는 상동갱 옆에 임시로 설치했다. 특히 “이상구선생송덕비”를 보니 반가워서 거수경례를 했다.
❏ 업무 개시
부여받은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상동광산에 매장된 텅스텐의 매장량
(埋藏量)을 확인하기 위하여 갱내에서 시추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일이다.
시추 작업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인력을 급히 채용했다.
상동에 거주하고 상동광업소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을 우선 채용하고 부득이한 경우는 상동출신으로 탄광에 근무경력이 있는 사람을 채용했다.
20년 이상 닫혔던 상동갱 철문을 열고 들어가니 약 300m 지점에서 낙반으로 갱도가 막혔다.
상동 갱은 주운반(主運搬)갱도로 본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보갱을 매우 잘한 갱도임에도 불구하고 긴 세월 동안 방치했으니 보강목(保坑木)이 부패되거나 사방에서 밀려오는 지압을 견디지 못하여 입구에서 막장까지 1,5km 구간의 갱도가 곳곳이 막혔다.
시추가 가능하도록 Woulfe Mining 소속 “어니스트”와 함께 갱도 개척 작업과 시추기 동력을 제공하는 콤프레샤를 설치하는 등 모든 준비를 마쳤다
준비 작업이 끝나자 시추기술자와 정비공이 내려왔는데 그들은 모두 흑인이고 남태평양 “피지”라는 화산섬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금광에 종사했던 기술자들이었다.
외국에서 온 기술자들을 보조할 인력을 상동사람 위주로 채용했고 상동 출신이 아니라도 아버지가 상동 출신이면 채용했다.
회사에서는 채용되지 않은 상동사람들은 생산이 재개되면 우선적으로 고용하고 지역주민을 배려하는 방침도 세웠다.
(종전 대한중석 내부에서 작성한 ”광량산출 자료“는 해외에서 공신력이 없음으로 새롭게 시추하여 광량과 품위(함량)”에 대한 공신력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시추는 갱외와 갱내에서 동시에 이루어 졌고 갱외는 도급을 주어 진행했고 갱내는 우리 팀에 의하여 진행했다.)
재개발 기술 분야를 총괄하는 광산기술자 “어니스트”는 연령이 나와 비슷하고 미남이다. 숙소에서 같이 생활하면서 친분도 쌓았다. 가끔 그는 노트북에 저장된 자기 여자 친구를 보여주는데 흑인, 백인, 황인종 모두 있었다. 알고 보니 자기가 일을 했던 국가마다 애인을 둔 것이다. 그는 여자들과 화상 통화를 통하여 사실을 인증을 하기도 했고 이곳에서 재개발이 끝나면 나를 “피지”에 꼭 놀러 오라고 했다.
어니스트와 함께 일을 하는데 고급 영어가 필요하지 않았고 의사 전달이 안 될 때는 Body Language를 동원하거나 문자로 써서 주면 단어를 찾아보면 되니까 소통하는데 불편함이 거의 없었다.
(“어니스트”는 갱내 쓰레기 더미에서 철사 줄을 빼내려고 잡아당기다가 철사 줄이 손에서 빠지면서 뒤로 넘어져 허리를 다쳤는데, 치료차 서울 사무소로 올라간 이후 상동에는 다시 오지 않았다.
“어니스트”는 대학병원 검사 결과 골반에 금이 가서 모국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 치솟는 텅스텐 가격
캐나다에 소재한 광산 Project 전문 회사인 Woulfe Mining은 “전략광물”과 “희유광물”의 미래 가격 추이를 판단하여 그러한 종류의 광물을 생산하다가 폐광된 광산 등을 매입하여 개발하여 매각하거나 광산을 직접 운영하는 회사다,
상동광업소는 생산원가에 비해 시세가 너무 저렴해서 폐광했는데 당시의 생산원가는 90불 이상이었고 국제시세는 40불 이하였다.
Woulfe Mining에서 상동광업소 재개발 당시 텅스텐 국제 시세는 MTU당 500불(弗)을 오르내렸다. Woulfe Mining에서는 텅스텐 가격은 더 오른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원가계산을 보수적으로 넉넉히 했는데 생산원가가 350불선으로 나왔다 그러니 텅스텐을 생산을 하면 대박을 맞는다는 계산이 나왔다.
텅스텐 가격이 400불 이상이면 원광석 품위가 0.15% 이상만 되어도 경제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상동광업소는 폐광 전에 원광 품위는 0.56%이었고 0.15%는 Cut Off 하여 폐석으로 처리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국내기업으로는 고려아연이 1,000만 불을 선투자 했고 고려아연 회장께서 재개발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투자자들과 국내 금융기관에서도 현장을 방문했고 투자의 귀재라는 ”워렌버핏“이 소유한 IMC 그룹의 주력 회사로 내가 근무했던 ISCAR사에도 안정적인 텅스텐 확보를 위하여 여러 차례 현장을 방문했다.
❏ 산학협동(産學協同)
모교에서 선생님이 찾아왔다. 아무리 바빠도 모교 선생님이니 하던 업무를 잠깐 뒤로하고 영접했다.선생님은 Woulfe Mining과 모교와 산학협동을 체결하는 것을 요청했다.
나는 아직 개발단계고 투자자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너무 이르니까 회사가 가동을 시작할 때쯤 하자고 했으나 선생님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모교의 학생 수가 해마다 감소하고 있어서 이러한 추세면 빨리 폐교 위기를
맞을 수 있으므로 기업체와 산학협동 체계를 유지하면 그 위기를 지연시키거나 모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의 의견이 얼마나 감사하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악수를 청했다. 본사에 이 내용을 이야기해서 즉시 승낙을 받았고 상동동문회장과 교장선생님에게 통보하여 사장님이 현장에 오는 날 상동마이닝 사무실에서 산학협동을 체결했다.
산학협동 계약에 따라 우선적으로 고등학교 3학년 재학생 1명을 채용했다
❏ 귀빈 방문과 충격적인 의견
상동광산이 재개발된다는 매스컴의 보도로 상동광업소 재개발 현장에 방문의 발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한중석 출신들과 상동에 거주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방문하고 재개발을 축원하고 갔다,
방문자 중에는 막걸리를 갱도 입구에 뿌리고 목례를 하며 축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에게 재개발을 축원하는 촌지(寸志)를 주면서 재개발에 참여하는 동료들을 위하여 회식하는데 보태 쓰라고 하는 모교 선배님과 대한중석 출신 종업원도 계셨다.
전직 상동광업소 소장으로 근무하시가 포항제철소 건설을 위하여 박태준사장의 부름을 받고 포항에 가셔서 포항제철 초대 제철소장을 하신 분도 오셨고, 상동광업소 소장 재직 후 부사장으로 근무하셨던 분들도 오셨다. 동창을 포함한 선후배의 방문은 연인원 수백 명이 넘었다. 상동광업소의 재개발을 기원하며 격려하러 오셨던 모든 분에게 감사의 마음이 아직도 내 마음 깊이 남아있다.
현장 방문자 중에는 상동광업소 폐광 전에 채광부문의 고급간부들과 소장님이
두 분 계셨다. 그분들이 국내 광업부문에서 최고 기술자고 전문가 이므로 채광 전문지식이 전혀 없는 나는 그분들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안전과 환경문제“에 핵심을 두고 질문했고 고견을 구했다.
70년대 이전에는 광산법이 상위법이어서 광산을 운영하는데 큰 제약이 없었지만 지금은 환경법이 상위법이기에 광산 폐기물 처리가 큰 문제이며, 20년 이상 방치한 채굴작업장의 안전이 문제였다.
그분들은 안전을 위하여 노천채굴(Open Pit)이 타당하며, 원광을 정련하기까지 엄청나게 발생하는 ”광산폐기물“ 처리는 종전처럼 ”폐재댐“ 운영이 바람직하다고 하셨다.
그러나 Woulfe Mining은 노천채굴(露天採掘)을 신청했으나 환경문제로 승인을 받지 못해서 ”갱내채굴“을 하기로 했고, 폐재댐 운영은 환경법과 민원이 걸림돌이 되었다. 패재댐 운영이 불가능하자 광산 폐기물은 채굴이 종료된 공동(空洞)으로 이송하여 관리하겠다는 계획을 승인받았다.
Woulfe Mining의 채광계획에 대하여 내가 고견을 구하는 전직 소장님과 채광 간부사원들은 Woulfe Mining재개발 계획에 회의적이었다. 한마디로 Woulfe Mining의 채광계획에 동의하기 힘들다고 하셨다. 특히 광산 폐기물을 처리하기로 한 갱내 공동은 왜정때부터 채굴하던 광산이므로 어마어마한 공동이 도면으로는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낙반으로 진입이 불가하거나 함몰되어 공동을 유지한 면적은 아주 작다는 것이다.
아울러 Woulfe Mining의 계획은 생산원가가 너무 소요되므로 텅스텐 시세가 적정 이상으로 받쳐주지 못하면 재개발이 힘들다는 것이다.
충격적인 말씀이었다. 1년 후 그분들의 예측은 적중했음을 알게 되었다.
❏ 3개 종교와 똑똑한 진돗개
“피지”에서 온 기술자들은 종교가 각각 달랐다. 힌두교, 회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인데 피지라는 나라는 인구가 100만정도 되는 작은 섬나라로 그들의 조상이 인도 대륙과 인도네시아 섬에서 유입되어 힌두교와 회교를 믿는 사람이 많고 영국의 식민지로 있어서 기독교 신자도 많다고 한다. 종교 관계로 그들을 관리하는 게 힘든 것이 아니라 식사 때 그들이 종교적 이유로 기피하는 음식이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이 소고기 바배큐 파티를 하면 힌두교를 믿는 직원은 참석을 안 하고 돼지고기 음식은 회교를 믿는 직원이 기피했다.
그들은 심지어 냉장고 안에 소고기와 돼지고기도 함께 두지 않으려고 했다.
다행히 그들이 닭요리를 좋아해서 냉장고는 항상 닭으로 가득 찼다.
평택 자택에서 기르던 “황진이”라고 부르는 진돗개를 자연 속에서 키우고 싶어서 재개발 현장에 데리고 와서 경비실 옆에 두었다. 황진이는 족보가 있는 황색 진돗개로 웬만한 지시어는 다 알아듣고 행하는 영리한 개로 직원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
어느 날은 회사 경내에 들어온 고라니를 잡아서 경비초소 옆으로 입에 물고 끌고 오기도 했다. 외국에서 온 기술자도 황진이를 좋아해서 틈만 있으면 황진이를 데리고 놀았다. 외국인 직원이 황진이가 영어를 알아듣는다고 해서 믿을 수 없어서 여러명이 모여서 실험까지 했다.
외국 기술자가 영어로 지시하는 “앉아, 일어서, 기다려, 먹지마 등의 단어를 정말 알아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외국 기술자가 황진이랑 같이 놀아 주면서 훈련을 많이 시킨 결과로 보아진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교육의 중요성을 황진이를 통해서 실감했다.
❏ MOU 체결과 먹구름
워렌버핏이 소유한 IMC 그룹과 Woulfe Mining이 MOU를 체결했다.
핵심 내용은 IMC 그룹은 위험성이 많은 채굴부문은 제외하고 옥외에서 광물을 정련하여 정광을 생산하는 부문만 투자하기로 했다.
그리고 MOU 체결시 Woulfe Mining에서 제시한 ”재개발 계획서“를 종합적으로 심사하여 적정하면 본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IMC그룹은 계획서 심사를 위하여 영국에 소재한 ”광산전문평가“회사에
심사를 의뢰하고 별도로 국내 광산전문가를 실사팀에 합류케하여 실사를 진행했다.
심사 팀은 재개발 현장에 며칠 머물면서 통행이 가능한 갱내 곳곳을 둘러보며 실사를 마치고 올라갔다
(국내 실사 팀에는 나와 같이 ISCAR에 같이 부장으로 근무했던 직원이 부사장이 되어 내려왔고, 안면이 있는 광물자원공사 간부사원도 있었다. 실사팀 떠나가고 열흘 정도 흐른 후에 본 계약 체결에 난관이 많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 나는 상동 주민
내가 가지고 있는 Network를 통해서 본 계약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는 정보를 취득하고 홍콩에 출장 중인 사장님께 보고했다
사장님은 나의 보고를 받고 ”아직도 심사가 끝나지 않았고 ISCAR사에서 아무런 언급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보자“고 하셨다.
나는 본 계약 체결이 안 될 것을 직감하고 영월 군수님께 군민(郡民)의 한 사람으로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 이유는 상동광업소 공장부지 대부분이 영월군청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저는 Woulfe Mining 직원이기에 앞서서 상동사람입니다. 영월군청이 소유한 상동광업소 부지를 Woulfe Mining에 매각하실 때에는 Woulfe Mining에게 통보하여 영월관내 금융기관에 재개발 자금을 예치하게 하여 군청에서 입금된 것을 확인하고 매각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고 매각하면 자칫 재개발을 하지 못할 외국기업에게 상동광업소 부지를 뺏길 우려가 있습니다.
(군수님은 머리가 비상하신 분이라서 내가 드리는 말의 핵심을 금방 알아차리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우려하는 것에 대한 방안도 가지고 계신다고 하셨다. 내가 퇴직하고 몇 년 후 Woulfe Mining은 경영 상황이 나빠서 ”Almonty“라는 회사에 인수되었다. 그때까지 영월군청은 상동광업소 부지를 Woulfe Mining에 매각하지 않았다)
❏ 본 계약 체결 불발의 결과
IMC그룹이 영국 등 외부기관에 의뢰하여 실사하고 분석한 결과 Woulfe Mining에서 제공한 자료에 신뢰와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직도 상동광업소 지하에는 양질의 텅스텐과 몰리브덴(Mo)이 대량 매장되어 있다는 것뿐이다.
내가 전직 상동광업소 소장과 채광간부로 근무하셨던 분들에게 받은 고견(高見)은 정확했다.
본 계약 성사되지 못하자 지금까지 발길이 잦았던 국내외 투자자들의 방문이 끊겼고 몇 개월 후에는 회사의 유동성이 부족했는지 직원들에게 점심을 제공하기 위하여 거래한 식당의 식대와 철물점에 지급할 공구대금도 제때에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모든 것이 멈춰졌다
본 계약 체결이 무산되자 ”Woulfe Mining“은 경영 상황이 나빠서 1년여 후에 종업원을 거의 퇴직 조치했고 캐나다에 소재한 ”텅스텐광산 개발, 탐사“ 전문회사인 ”Almonty“라는 회사에 인수되었다.
”Almonty“에서 상동광업소를 개발한다고 5년 이상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아직도 개발자금을 확보하지 못하여 가시적인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나의 판단은 현시점을 기준하여 텅스텐 가격이 400불 선을 유지하면 개발자금을 쉽게 확보할 수 있다고 본다.
(400불을 설정한 근거는 이 글을 쓰기 전에 대한중석 출신 몇 분에게 여쭈어 본 결과다. 2021년 기준 30년 가깝게 방치하여 위험이 산재한 작업장 안전 비용과 폐기물 처리에 소요되는 비용이 생산원가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텅스텐가격은 내가 10여 년 전 재개발에 참여하였을 당시에 비하여 반 토막 이상 떨어졌다가 지금은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다. 2021.8.31. 기준 텅스텐 시세는 305.5 달러이다.
텅스텐 가격은 이렇게 산출한다.
텅스텐 무개 10톤. 순도 95%, 가격 300불, 환율 1,150원으로 가정하여 계산하면
≪ 10(중량) × 95(순도) × $ 300(국제시세)× 1,150(1 $당 환율) = 327,750,000 원≫
■ 기고를 마치며
나는 지금까지 A4 10장 이상 문장을 작성해본 일이 없다.
회사에서 첨부물을 제외하고 A4 용지 9장까지 기안을 했던 것이 최고 기록이다.
이 기고는 상사에게 득재를 위한 문서도 아니고 고향 그리고 텅스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나의 삶의 여정을 두서없이 기록한 것으로 작문에 소질이 없어서 문맥도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졸작이다.
기고문을 10장 가깝게 썼을 때 내용이 너무 길고 지루하므로 줄여서 작성하겠다고 했더니 동문회장님은 현재의 기조를 유지하라고 해서 이렇게 길어졌다.
그래서 이왕 기고를 하려면 통 크게 기고 하고자 생각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중학교 입학했을 때 큰 키는 아니지만 레슬링 선수처럼 어깨가 떡 벌어진 중학교 아래에서 학교에 다니는 멋있는 고등학교 3학년 선배께서 우리 교실에 들어와서 우리의 입학과 중학교 생활을 축하한다고 하시며 ”너희들은 이제 어린이가 아니고 중학생이 되었으니 어린이 때보다 모든 생각을 통 크게 하여야 한다.하셨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동문회에서 e –book을 편집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기고를 결심하게 된 동기는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지난달에 오랜만에 동문회 카페를 방문해서 한 시간여 둘러보다가 나보다 고향에서 오래 살지 않으신 모선배님의 ”고향과 상동광업소에 대한 열정“에 뒤늦게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누구보다 고향과 상동광업소의 혜택을 많이 받는 내가 내 몸 하나 편하자고 더 이상 고향과 상동광업소와 관계된 일에 무관심 한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친한 친구의 동생이 동문회 회장직을 맡아서 봉사하며 고생하고 있는데 동문회에서 추진하는 e-book 제작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55페이지의 장문의 졸작을 작성하면서 피곤을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
휴대전화로 문장을 작성하면 시력이 나쁜 관계로 자판의 촘촘한 글자를 잘 못 눌러서 오탈자(誤脫字)가 빈번하여 수신인으로부터 무슨 뜻이냐는 전화도 받기도 하고 ”카톡 스토리“를 배워서 이야기를 작성할 때는 며칠을 두고 여러 번 오탈자를 수정했는데 이번에는 컴퓨터로 문장을 작성하니 오탈자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자판을 두드리기도 훨씬 쉽고 편해서 좋았다.
나에게 항상 긍정적이셨고 격려와 사랑을 아끼지 않으신 고마우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리며 고향 그리고 텅스텐에 대한 나의 기고를 여기서 마친다.
(오늘은 즐거운 마음으로 교가와 상동광업소 사가를 흥얼거리며 보내야 겠다.
”백운산 젖빛 안개 빛나는 아침 이곳의 고두암이 우리 기르니 천만년 문화제전에 새 날이 밝아~~“
”백두산 줄기 뻗어 태백산 아래 그 이름 상동광산 대한의 보고 캐어서 빛내어라 묻힌 중석을 ~~“) “끝”
상동중고등학교 동문회 e –book 故鄕 이야기 寄 稿 文
구래국민학교 20.상동중 15. 상동고 13회 朴 上 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