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제 근무에다가 휴가철이 다가온다. 관광과 나들이 철이 되었다. 금강산에가 가면서, 경의선 도라산역을 지나면서 도라산에서 정읍사(도라 노피곰) 노래를 불러보자. 고려 임금 충열왕이 긴 세월 정읍여인과 연가로 정읍사 합창했던 도라산, 지금도 정읍사의 메아리가 들리는 듯하다.
기자는 1984년에 38선의 제3땅굴에 견학하러 가서 도라산 전망대에서 국군 안내자의 설명을 들었다. 그가 지휘봉으로 가르치는 비무장지대, 그리고 개성의 고려궁전터가 바로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곳이 바로 정읍사 노래 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던 곳.
도라산과 충열왕, 그리고 정읍사 기자는 도라산과 정읍(태산)시씨 이야기를 고려사에서 탐독해 알고 있어서 더욱 관심 있게 살피고 질문도 하고 돌아온 경험이 있다. 정읍여인과 충열왕의 노래터였던 그곳이 오늘날 노무현대통령과 미국 부시대통령까지 등장하는 임금급 등반 명소가 되었다. 이러한 곳까지 정읍사가 왕의 노래로 불리어진 역사를 알게 된다면 정읍의 문화예술에 대해 더욱 큰 긍지를 느끼리라 생각하여 여기 소개한다. 충열왕과 태산 출신 무비 시씨가 개성 인근 무명의 야산에서 정읍사로를 함께 불러 왕이 '도라산'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고려사 충열왕조에 전한다. 장사훈지음 국악대사전책에서도 '도라산'이란 표현이 나온다. 정읍사의 역사적 문헌을 더듬어 보자면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정읍무고' 자료가 고려사 충열왕 21년 시대의 기록이다. 이 시기에 정읍무고 즉 정읍사를 부를 때에 사용하는 큰 북은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던 이혼(李混)이라는 고려 밀직부사가 귀양에서 풀리고 입각하려는 의도에서 당시 최고의 실력자 무비시씨에게 로비용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정읍사 음악과 처용무를 연주하는 북을 왜 동해안 영덕에서 만들었을까. 이 시대에는 임금 충열왕이 태산(칠보)사람 무비 시씨와 사랑을 나누며 정읍사노래와 춤으로 절정을 이루는 시기이므로 이혼은 동해바다에서 떠 들어온 큰나무통을 목공에게 고급으로 만들어 무비 시씨의 마음을 사서 귀양에서 풀리고 동지밀직지사로 재 등용되었던 것이다. 이혼이란 사람이 목수도 아니고 음악인도 아닌 높은 계급의 신분으로 체통을 잊은 체 천한 작업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뇌물은 상급자의 구미에 가장 잘 맞아야 할 것이고 이를 알아차리는 자가 정계에서 수명이 길 듯이 이혼도 후에 충목왕 때까지 종신 초장의 벼슬을 한다. 이 충열왕 시대는 최충헌의 무신정권, 삼벌초 등을 정읍출신 송씨(송군비, 송송례, 송인) 의 구테타 혁명으로 제거하고 왕에게 정권을 넘겨준 정읍의 권력시대이다. 이때 정읍의 노래패와 기능인은 물론 거의 개성으로 상경해서 활동한다. 지금 일본식 난타 연주 에서 주로 쓰이는 큰북은 정읍사 백제가요 무용에서 쓰인 것을 더 크게 채색하여 호화스럽게 만든 것으로 보여진다. 무비 태산시씨는 백제음악의 계승자 도라산이라는 이름은 정읍사 가사의 첫머리 "달아 노피곰"의 가사에서 연상해볼 수 있다. 몽고나 중국발음으로 "달아"가 '돌아'-'도라'로 전이된 것으로 생각된다. 태산에 사는 시씨는 이전 백제시대 정읍가, 지리산가, 방장(등)산가, 선운산가 등의 노래와 춤에 능숙하면서도 빼어난 미인으로 충열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몽고에서 귀화한 세력가 장순룡의 사위 이곤(이혼과 친척)과 시씨무비와 사통한 것이 발각되었어도 이곤만 죽이려하였고 그 후에도 계속 사냥을 핑계로 몽고 공주를 따돌리고 자주 도라산에서 밀애를 하였다. 충열왕의 몽고왕비(제국대장공주)는 고려왕인 충열왕을 몽둥이로 두둘겨 패기가지하는 포악한 왕비라고 고려사에 기록하고 있다. 제국대장공부의 독살사건은 충열왕의 묵인하에 정읍출신 송분, 송인, 도성기 등의 국내파가 공주친위세력과 몽고파를 제거하기 위한 사건으로 학자들은 파악하고 있다. 23년 5월 충열왕의 몽고왕비(제국대장공주)는 현성사에서 무비의 독살로 암살되었다. 이로 인하여 몽고에서 돌아온 왕비의 아들 태자(후에 충선왕)가 무비를 죽이려 하자 충열왕은 3년상을 마치고 보자고 하였으나 태자가 처형하여 버리자 애첩을 잃은 충열왕은 왕위를 버리고 물러나서 애통한 세월을 장순룡의 집에서 보냈다. 정읍사를 부르는 무비 태산시씨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노래와 술로 지냈다. 여기에 당황한 아들 충선왕은 장안에서 제일의 미녀를 바처 달래였다 후에 이 이가 숙창원비로 삼았다. 정읍관광의 미래는 음악관광에서 국가장려의 농자천하대본 농사꾼도 아닌 장사꾼 아내의 노래는 귀족가요로는 부적합하다. 장사꾼 아내의 노래로 방치한 동양의 비엔나 정읍관광, 이대로 좋은가. 정읍사는 장사꾼의 아내가 아닌 풍왕과 그를 따르는 궁녀, 그리고 견훤왕과 이별한 궁녀, 그리고 여기 소개한 충열왕과 태산 시씨무비의 사랑의 비련의 사연이 녹두장군시대의 파랑새가요 처럼 유행되고 정착하여 내려온 것이다. 같은 책, 같은시대 가요 지리산가도 사랑하는 상대가 백제왕으로 되어 있으나 고려시대 견훤을 상징하듯 "겁탈하려 하여..." 라는 말로 바꾸어 반백제 내용으로 기록된 것이 틀림 없다 안중근의사처럼 고려시대에 몽고공주를 암살한 무비 시씨를 사모하는 백성들의 애창의 가요로서 정읍사는 고려와 조선의 궁중악으로 정착한 민족가요 기둥으로 존재한다. 음악의 발상지 정읍에 정읍사 관광음악이 어디에 있는가 다른지역의 음악관광도 눈여겨 보고 관광정읍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