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왜곡과의 전쟁 - 작가들과의 만남
1. 노정우와의 만남
2000년 2월 1일 오후, 쌀쌀한 날씨였다.
모 중앙일간지 편집위원 이모,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여
심사를 기다리고 있던 김호와 함께
선릉역 1번 출구에 있는 상제리제 빌딩 지하 뷔페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식사가 끝난 후 그날 오후, 포이동(현재 양재동) 거리를 걸어가면서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몇 번이고 걸음을 멈췄다.
드디어 그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지난 10년 간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곳을 찾아 다녔다.
풍문만 믿고 하와이, LA 한인회에 국제전화를 걸기도 했었고,
LA와 하와이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랬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그는 나의 사무실(선릉역 근처)과 가까운 곳에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양재동 삼호물산 근처의 그의 한의원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한 후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침내 내가 만난 그 사람,
바로 허준의 스승은 ‘유의태’라는 논문을 발표한 장본인,
경희대 한방병원장 출신의 노정우 박사였다.
나는 다시 한번 노정우 박사의 논문을 상기했다.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청년 허준의 모습을 보고 기록한 인물은 유희춘이었다.
그런데 허준 사후 350년이 지난 후,
노정우는 허준의 스승을 ‘유의태’라고 했다.
미암 유희춘의 기록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 ‘유의태’였다.
노정우는
자신의 논문에서 허준이 태어난 곳이
김포군 양촌면 능곡리이고,
어렸을 때에 할머니의 친정에서 자랐을 것이라며,
허준이 산청에서 자란 장소를
“경상도 산청군이라고 믿어진다.”
라고 기술하였다.
이어서 허준에게 의학을 가르친 柳義泰에 대하여
“조선 중기 진주 근처에는 허(許)씨와 유(柳)씨가 많이 살았다.
산청 지방에 柳義泰라는 신의(神醫)가 있었다.
柳義泰는 인품이 호탕한 기인으로 많은 일화와 전설을 남겼다.
柳義泰는 의술이 고명하며 박학다재하여 산천을 유랑하면서 자유분방한 멋으로 생을 즐겼다.
柳義泰는 당시 경상도 일대의 뜻 있는 인사들 사이에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라고 말했다.
이 논문에서
노정우는 柳義泰가 허준의 스승이라고 단정하지 않고
“유의태가 허준의 의학적인 재질과 지식을 키워준 스승이었다는 것이
여러 각도로 미루어 보아 부합되는 점이 있어 수긍이 간다.”(
라고 말했다.
현대 학계에서 발표된 논문 중에서
허준의 스승을 유의태라고 밝힌 첫 논문이자 마지막 논문이다.
그런데 노정우는 어떻게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이라고 발표하였으며,
한양에 거주하는 허준이 어떻게 산청에 왔다는 것을 알았을까?
노정우가 지어 냈을까?
아니면 허준과 유의태가 기록된 문헌을 가지고 있었을까?
나는 이런 의문을 갖고 그를 직접 만났던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산청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철호입니다.
박사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무엇이 궁금하신지요?”
“박사님께서는 논문에서 허준의 스승이 유의태라고 하셨는데
혹시 그 근거가 있습니까?”
잠시 나를 바라보던 노정우 박사가 말했다.
그의 대답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65년 모백과사전에서 허준의 약전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허준을 연구하였다. 허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다. 족보를 조사해 본 결과 허준의 조부가 경상우수사, 조모가 진주유씨로 되어 있어 진주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진주에 거주하는 허모에게 전화하여 ‘허준의 조부가 경상우수사, 조모가 진주유씨로 되어 있어 허준이 진주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였다. 진주 근처에 유명한 한의로부터 의술을 배운 것으로 판단된다. 혹시 유명한 한의가 있었느냐?”고 존재 여부를 허모에게 물었다. 허모가 ‘산청에 수백 년 전부터 유이태라는 전설적인 명의가 있었다.’고 답변하여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진주근처의 대성인 ‘진주유씨(晉州柳氏)’ 의로울 ‘의(義)’ 클‘태(泰)’ 유의태로 허준의 스승으로 발표하였다.’ <2000년 2월 1일 노정우와의 대화에서>.
나는 기가 막혔다. ‘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허준의 스승을 ‘유의태’라고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산청 생초 출신이고,
외가가 금서면 화계라고 산청과 유이태에 대해 설명했다.
“저는 1951년 산청 생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생초에서 졸업하였고, 외가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이다. 어린 시절 외가에서 많이 머물렀다. 외증조부님께서는 문집을 남기셨고, 외조부께서는 산청향교 전교를 지내셨다. 매년 여름과 겨울방학 때 외증조부님 재실(西湖齋)에서 지냈기에 외조부님, 외가 동네의 나이 많으신 할아버님들로부터 구전이야기도 들었다. (중략) 1973년 타향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산청 생초에서 살았다. 어느 누구도 저에게 柳義泰 구전 설화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없다. 산청에는 거창유씨 유이태의 구전 설화만 전해지고 있다.” <2000년 2월 1일 노정우와의 대화에서>.
나의 설명을 들은 노정우박사가 말했다.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나의 오류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허준의 스승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이 반드시 밝혀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점에 대한 오류는 인정한다.
허준의 스승은 역사학자들이 밝혀내야 할 몫이다.
거창유씨가문에 미안하다.” <2000년 2월 1일 노정우와의 대화에서>
허탈했다. 더 이상 그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후 나는 그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던 내용을 그날 사무실에 돌아 와서
김호에게 전화로 알려주었고,
내가 2013년 박사과정 당시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논문에 이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김호는 누구이며,
필자와 어떤 만남이었을까?
그와의 첫 만남 시기는 1999년 후반기이다.
1999년 7월 24일로
KBS에서 방영한 역사 스페셜
“허준은 과연 스승을 해부했을까?”를 시청한 날이다.
그는 역사 스페셜에서
“유이태가 저서를 남겼다.”고 말하였다.
그 당시 필자는
1975년 유이태 후손의 허락 없이 누군가가 가져간
유이태 저서를 찾고 있었던 때 이었다.
필자가 KBS에 김호를 만나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남겼다.
1개월이 지난 후 김호가 전화를 걸어 왔다.
그 후 그를 만났는데 실망했다.
그 이유는 그는 1975년 유이태 후손 집에서
유이태의 저서를 가져간 두 분의 학자 중 한분이 아니었다.
둘째로 그는 서울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의 30대 초반의 젊은 학자이었다.
책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유이태가 홍역치료서 <마진편>을 남겼다고
내가 모르고 있었던 내용들을 알게 되었다.
그날 나는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필자는 그에게 유이태 가문에 전해오는
“유이태가 청나라 황제를 치료한 설화”를 들려주었으며
“<유이태유고>와 <유이태효행장>을 소장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필자에게 조심스레
“<유이태유고>와 <유이태효행장>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말하였다.
필자는 그에게
“<유이태유고>와 <유이태효행장>을 복사하여 줄 수 있다.”
고 답변하였다.
얼마 후 필자는 그를 다시 만나 복사본을 건네주었다.
그 후 그는 유이태를 연구하였고,
유이태가 남긴 또 다른 의서
<실험단방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는 분을 소개해 주기도 하였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인서문견록> 해외 영인본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가톨릭대학교를 거처 경인교육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필자에게 박사과정 공부를 권유했다.
필자가 그에게
“경인교육대학교에서 공부하면 되지 않겠냐?”고 질문했더니,
“경인교육대학교는 교사들만이 입학할 수 있다.”
그리고 “한의학을 공부하려면 경희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다.
그는 필자가 학문을 하는데 많은 격려를 보냈고, 도움을 준 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