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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鄭忠信)장군은 1576년(선조8년)을해(乙亥)년 12월29일 자시(子時), 양력 1576년 병자(丙子)2월11일 입춘(立春)이 을해(乙亥)년12월27일에 들었기 때문에 공의 탄생을 병자(丙子)년 으로 친다. 전라도 광주 향교동(鄕校洞)에서 부친 윤(倫)공과 모(母)는 정경부인(貞敬夫人)영천이씨(永川李氏)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나 1614년(甲寅)조정이 혼란한 것을 보고 세상일에 뜻이 없어 은둔(隱遁)할 생각으로 경남 섬진강 하류에 있는 저도(猪島)에서 도 살았으며 광주(현 담양 창평)으 로 이거하여 1636년(인조14년)에 돌아가신 분으로 왜란과 호란, 반정과 반란이 중첩되었던 어려운 시대를 살아오신 분으로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유능한 군사 지휘관이 되었고, 탁월한 지혜와 전략으로 인조2년(1624년) 이괄(李适)의난(難)을 진압하고 일등공신이 되어 천추만대에 이름을 남긴 景烈公 지(地)의 9세손으로 자(字)는 가행(可行), 휘(諱)는 충신(忠信), 호(號)는 만운(晩雲), 시호(諡號)는 충무공의 군호를 하사받고 금남군 시호를 받은 경렬공 6세손 원종(元宗:현감공)의 고손자이시다.
정충신(鄭忠信)장군은 고려 말에 삼도 도절제 체찰사(三道 都 節制 體察使)를 역임하고 요동 백(遼東伯)에 피봉 되었던 분으로 그의 선대는 증 조대 까지 벼슬을 하던 양반(兩斑)이였으나, 후에 가손이 몰락하여 매우 빈한하게 되었다.
장군은 가난 때문에 어려서 관아인 광주부에 사동(使童)으로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다가 권율(權慄)장군이 광주 목사로 부임하자 그 수하의 지인(知印:전령)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17세의 나이로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종군(從軍)을 하여 그해 7월 권율이 금산군(錦山郡) 진산(珍山)에서 전주(全州)사이에 있는 고개 이치(梨峙)전투에서 승리 한 후 의주(義州) 임금이 임시 피난해계시는 행재소(行在所)까지 장계(狀啓)를 보낼 때 호남의 전세(戰勢)와 이치(梨峙)전투에 대한 첩서(捷書)를 자세히 쓰고 사위인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에게 보내는 서찰(書札)한통까지 보내야하는 전시에, 정충신(鄭忠信)을 비장(裨將)으로 삼아 떠나보내게 하였는데 막중한 임무를 통감하여 묘안을 생각 하다가 첩서(捷書)를 여러 조각을 내어 의 볏짚을 섞어 새끼를 꼬아 망태를 삼아 등에 짊어지는 총명한 지혜로 이십 여일 만에 이천리길 압록 강변 의주(義州)까지 무사히 목표를 달성한 총명함을 인정받아 권율의 사위였던 병조판서(兵曹判書)이항복(李恒福)에게 발탁되어 학문을 익히고 행재소에서 실시한 무과(武科)에 급제 할수 있었다.
이후 충신(忠信)은 이항복의 군관이 되어 명장 이여송(李如松)군대와의 연락을 맡았고 , 그일을 하는 사이에 중국어에 통달하여 어전(御殿)통역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후에 군기시정(軍器寺正), 선사 포첨사(宣沙浦僉使)등을 지내고 1602년(선조34년)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明)나라 연경(燕京)을 다녀왔으며 1617년(광해군 9년)에는 통신사 (通信使)오윤겸(吳允謙)의 수행원으로 일본에도 다녀왔다. 1618년 정월 이항복이 인목대비의 폐비에 반대하여 북청 (北靑)으로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타계하여 장례를 치를 때 까지 정충신(鄭忠信)은 시종일관 측근에서 수행하며 모든 일을 처리 하였다. 그는 그때의 일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여 「백사북천일록 백사(白沙北遷日錄)」으로 남겼다.
장군 충신은 1620년 광해군12년 에 관직에 복직하여 체찰사(體察使)장만의 군관으로 활동하였고, 당상관에 올라 창주첨사(昌州僉使)를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만포진첨사(滿浦鎭僉使)로 있을 때 만주에는 후금의 건주위(建州衛)를 비롯한 집단과 율보리(栗甫里), 니탕개(尼蕩介),등 군소 영웅들이 압록강(鴨綠江),두만강의 두 강변에 나타나 겁략을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을 토벌하기도 하였고 후금은 큰나라로 발전 해 가고 있어 조정 에서는 이윽고 후금의 일을 궁금하게 생각하여 담력과 지략을 겸비한 정충신(鄭忠信)을 후금에 사신으로 보내기로 결정 하였다. 재직 중에 왕명을 받고 중국 심양에 사신으로 파견 되면서 그때 철산(鐵山)가도(椵島)라는 곳에 명나라의 모문룡(毛文龍)이란자가 주둔하여 우리와 후금이 무슨 동맹관계라도 맺지 않나ㅣ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 정충신(鄭忠信)은 만포진첨사(滿浦鎭僉使)로 있었다. 정부는 정충신에게 모문룡(毛文龍) 이 모르도록 조심히 다녀오라고 당부 하였다. 그 무렵이야 요동 땅에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명나라 천지 인데,아무렴 그들에게 눈치체지 않겠느냐. 이왕이면 들어 내놓고 전정 당당 하게 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하여 철산가도의 모문룡(毛文龍)에게도 정식으로 알리고 후금으로 들어 갔던겄이다. 그무렵 후금의 도읍은 심양이었는데 정충신은 심양에서 후금의 요인들과 만났다. 후금인들은 기회랍시고 노기를 띠어 “대체 우리가 무엇을 도둑질했기에 도둑놈이니 오랑케니 하고 욕설을 하느냐? 속내를 알아차린 정충신은 그들의 콧대를 꺽으려고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그래, 도둑놈들을 도둑놈들이라고 부르는데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오?“하고 위엄이 있는 어조로 크게 소리쳤다. ”대체 무슨 도둑질을 하였단 말 이오?“여보시오. 도둑이면 그런 흉측하고 큰 도둑이 어디 있겠소? 천하(天下)를 훔치려는 큰 도적 심 을 가졌으니 어찌 도적 들이 아니오?
하니 그들도 이 소리에 그만 ”우 하하하! 하고 크게 웃으면서“과연 그대는 훌륭한 말을 하였오”장군의 지략에 놀랄 만 하오“ 정충신의 지략에 그들은 겁이 났고 또한 임기웅변의 놀라운 수단에 칭찬과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그들의 그 국내 사정과 후금의 정세를 자세히 파악하고 두 나라사이의 현안 문제들에 대해 협상 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귀국하여,“후금으로 말미암아 받아야할 고통은 명과 우리가 같은 처지일 것이다.”고 하였다. 실로 그 말과 같이 후일 후금은 대청황제(大淸皇帝)를 일컬으면서 우선 먼저 배후의 우리를 공략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의 키고, 다시 열하(熱河)와 산해관(山海關)으로 진격하여 그 씩씩한 팔기(八騎)의 기병 의로써 중원(中原)을 확보 하게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光海君)은 광고(曠古)의 혼군으로써 드디어 그 보위를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인조(仁祖)에게 대를 빼앗기고 말았다. 1623년(인조1년)때 정충신(鄭忠信)은 안주목사(安州牧使)로 방어사를 겸임 하였다. 인조 임금은 정충신(鄭忠信)에게 후금의내부사정을 자세희 물었다. 정충신은 “후금은 가위 두려운 무기를 가지고 있아 오며, 그 기병은 곧 철기(鐵驥)와 같은 것으로서 야전(野戰)으로 서는 다루기가 어려울까 하옵고, 다만 한가지 성을 공고히 하여 수성(守成)에 힘쓰면 혹 방비(防備)할것 같습니다. 병수(兵數)는 자세하지 않사오나 팔부(八部)의 병력과 401초(睄)가 있다하옵고 rnss사는 9만명쯤될듯하오며, 장갑군(長甲軍),을 입은 것으로 매우 용맹하여 공성군(攻城軍)으로 사용한다 하옵니다. 글리고 호마가 만여필 있어 모두 날랜 군사 들이라 하옵니다. 하고 진언하자 인조는 다시 어두운 얼굴로 ”지금 우리장신들은 나아가 싸우지는 아니하고 안에서 지키는 것만 능사로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수없다.“
하며 크게 우수에 잠기니 정충신이,“이제라도 10여만의 군병을 징발하여 1,2년만 잘 훈련 한다면 능히 요동(遼東)이라 한 대도 취 할수 있을 겁니다.”하여 인조(仁祖)를 안심 시켰다. 정춘신은 곧 평안병사(平安兵使)에 임명 되었다가 그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부 원수로서 나라의 동맥을 지키는데 큰 공이 있었다.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難)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이 되어 평소에는 이괄과는 친 형제 처럼 친한 사이였으나 이괄의 편에 들지 않고 이괄의 반군을 서울 과 안산(鞍山)등지에서 격파하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이공으로 그는 진무공신(振武功臣)27인중에 진무일등공신(振武一等功臣)에 뽑혔으나 정충신은 이를 사양하였던 것이니 그 후에 정헌대부(正憲大夫)금남군(錦南君)에1624년(甲子)7월15일 에 봉해졌다. 정충신의 옛집(고향)은 섬진강 하류에 있는 저자강변(猪觜江邊) 저도(猪島)이나 딸 매(梅:남편 進士 尹塓<윤멱>)에게 남겨주고 이사 온 담양군 창평 재촌 이며 선영(先塋)의 묘소는 죽곡(竹谷:문평면 안산리 죽곡)에 작위를 받은 인조2년(1624년8월)15일의 휴가차 들렀으며 이듬해 1625년 정월 오른쪽 뺨이 마비되어 평안감사직을 하직하고 한양 도성 서대문 냉천동 서쪽 에 장만(張晩)의 요청으로 인조께서 내려준 나라의집인 반송방(盤松坊)집에서 지내게 되다.
※참고로 평생동안 일기를 써왔는데 무진(戊辰:1628)년에 집단장이 무너저 도둑이 그곳을 통하여 침입 가나한 살림에 가져갈 물건이 없고 서책만 있었는데 그때 정묘(丁卯:1627)년 이전의 일기가 그 곳에 있어 도둑을 맞아 그이전의 일기는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함.
1627년 (인조4년)에 정묘 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장군은 8도 부원수(八道副元帥)에 임명되어 전국의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였고, 난(難)후에는 서북지방의 방어를 맡았다. 1630년 인조8년 이른바 유흥치의 잔꾀로 모문룡에서 진계 성으로 다시 유흥치 로 바뀌며 황제가 보낸 문관들도 도륙의 피를 본 가도의 난에 총융사(摠戎使)이서(李曙)와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을 가도를 소탕하라는 비변사를 통해 명을 내리면서또한 경기수사와 전라, 충청 양호 수사도 주사(舟師:수군)을 이끌고 나아가 정충신(鄭忠信)을 지원토록 하라하여 가도의 소탕작전에 한치의 차질이 도록 만전을 기했다. 총융사(摠戎使)이서(李曙)는 곧 황해. 평안도의 군사들을 이끌고 육로로 칠산을 향하여 진군 했고 부원수 정충신은 충청수사 송영만(宋英望), 경기수사 유응형(柳應泂)과 함께 강화도 교동(喬桐)에 집결하여 수로로 가도를 향했다. 이때 용양위부호군 임경업은자청하여 평양중군으로 옮겨가 평안감사 김시양의 막하에서 다각적인 첩보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것은 총융사 이서와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이 용병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인조임금의 결단에 의해 시도된 가도(椵島)의 소탕을 위한 수륙양면작전 은 전술상으로도 매우 치밀하고 완벽한 것이 였다. 게다가 임경업(林慶業)이 적의 실정을 탐지해 보내준 탓으로 이서와 정충신은 유흥치의 일 거수 일 투족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이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중략...!유흥치가 그해 5월13일에 49척의 배를 거느리고 등주를 향해 ...중략...!유흥치가 전후로 출발 시킨 배는 모두 89척으로 한척에 3~40명을 시었을 것이니 병력의 총수는 3천 여 명 이 될 듯...중략..!임경업의 정보와 추측은 모두가 정확하여 유흥치는 조선군이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전의를 상실 한채 배를 몰아 등주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여순 에 옛 동료인 경중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뱃머리를 돌려 여순 으로 향한 것이다. 이서와 정충신(鄭忠信)은 쉽사리 가도에 상륙할 수가 있었으며 가도에 있었던 조선 백성들은 천천세 를 불렀다. 조정은 이서, 정충신 등의 노고를 치하하고 유흥치가 다시 돌아 올 것을 대비하라고 명했다. 조선의 주군들이 매양 가도에 주둔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인조는 동원령을 풀었고 이성와 정충신(鄭忠信)은 개선해 돌아 왔다. 그때가 인조 8년 1630년 가을 이였다. 그 후 1631년 인조 9년 의주와 철산이 후금의 땅 이라고 하며 형제국의 맹약을 파기 할 것이라는 홍타이치 의 무례와 오만으로 미구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예고하던 조선은 가도를 소탕했고 오랑케 의 달 병 을 잡아 가두었다는 사실에 들떠 선박은 빌려 줄 수가 없다! 인조는 이 같은 결의를 홍타이치 에게 전하면서 부원수 정충신(鄭忠信)으로 하여금 평안도의 방비를 명했다. 바로 이때 발탁 된 이가 29세의 젊은 무장 이완 (李浣)이였다.
1633년(인조11년)2월 조정에서 후금(後金)의 세폐(歲幣)증액에 반발하여 국교를 단절하는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장군은 체찰사(體察使)김시양(金時讓)과 함께 국교단절에 반대하고 화친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의 국제정세에 정통하였던 그는 후금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이 국가를 이롭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탄핵을 받아1633년3월3일 당진의 유배지로 출발 3월7일 당진에 도착 후 일개월 남짓 당진에 유배해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1633년 4월7일 출발하여 4월24일 장연(長淵)에 유배를 옮겨 있는 중에도 많은 사람들의 온정 속에 도착 일 개월 이 채 못 된 5월16일 장연의 유배생활에서 사문(赦文)을 받고 풀려났으며 옥성부원군 장만의 건의에 인조대왕은 환수된 반적(叛賊)이괄(李适)의토지 일백오십 결(45만평)을 사패지(賜牌地)로 내려주어 지곡농장(地谷農場)으로 하여 자신이 죽은 후에 묻힐 묘(墓)터로 하였고 이듬해인 갑술년(甲戌:1634년)정월20일 서용(敍用)하는 특명으로 1634년(甲戌3월9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으로 그리고 6월5일 포도대장(捕盜大將) 복직되었었고 그 후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내다가 병(病)으로 사임 하였다.
1636년(인조13년)5월에 병이 심해지자 왕이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였으나 장군은 효험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왕은 자신이 입던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壽衣)로 쓰게 하는 등 은전을 내렸고, 충훈부에서 공신의 예로 1636년(丙子)5월4일에 지금의 서대문구 냉천동 서편에서 별세(別世)하여 특별히 상감께서 친히 입으시던 저고리와 도포(道袍)각 한 벌씩을 보내어 염습(澰襲)에 수의로 쓰도록 내리셔 예장(禮葬)하였다. 장군의 묘는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아마힐봉 갑좌(甲坐)경향(庚向)원(原)에 있고 서산 진충사(振忠祠)와 전라북도 장수의 영전 각에서 제향을 지내고 있다. 숙종(肅宗) 10년(1684년)12월에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김만기(金萬基)가 시호(諡號)를 청하는 시장(諡狀)을 지어 올리게 되어 숙종 11년(1685년)공이 별세한지 49년 만인 8월11일에 금남군(錦南君)정충신(鄭忠信)에게 충무(忠武), 정무(貞武), 무열(武烈)등 세가지중에 충무(忠武: 危身奉上曰忠 克定禍亂 曰武)로 결정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이다. 공이 사망 후 조정에서는 숭정대부(崇政大夫),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었다.
정충신(鄭忠信) 장군은 키가 작았으나 용맹하고 지혜로웠으며 또한 덕장(德將)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일등공신에 올랐으나 항상 겸손하고 관직 생활에서 청렴 하였다. 무관으로는 드물게 경전과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천문, 지리, 복서, 의술, 외국어 등 다방면에 걸쳐서 조예가 깊었다. 충신(忠信)의 저서로는 『만운집(晩雲 集)』『금남집(錦南集)』
「백사북천일록 백사(白沙北遷日錄)」『백사집(白沙集)』『만운일기(晩雲日記)』등을 남겼다. 그는 한미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명민(明敏)한 지혜(知慧)와 굳센 성품 ,과감한 전략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입신출세하여 위대한 공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민간에 만은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장군은 오랫동안 전장에서 싸웠고 변방에서 적을 방어한 외에 사신(使臣)의 일원으로 중국, 일본, 후금 등에 다녀온 경험이 풍부하여 국제 정세 에 대한 안목이 넓었고, 지나친 원리주의나 공리공담에 빠지지 않은 매우 현실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후금과의 관계에서 유연한 자세를 가지게 하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자세는 당시 명(明)나라와 의리를 내세우던 당시의 척화파(斥和派)인사들과는 극히 대비되는 것이며 언제나 현실 속에서 역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교훈이 되고 있다.
※.친명(親眀)세력인 척화파(斥和波)와 등거리(等距離)외교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주화파(主和波)간의 정쟁(政爭)이 극심한 것을 개탄하며 정충신(鄭忠信)은“한 개인은 명분 때문에 죽을 수 있지만 한국가가 명분 때문에 망할 수는 없다.”는 일화를 남 겼다.
⌾지천(遲川)최명길(崔鳴吉)이 정충신 에게 쓴 만시(挽詩)
여조부사 가성원(麗朝 副師 家聲遠) : 멀리 고려조 장수 집안 성망(聲望)이
당대 원공 총전 신(當代 元功 寵典 新) : 당대에도 으뜸 공(功) 총전(寵典)이 세로워라
년기 상강 빙 묘략(年紀 尙强 憑 妙略) : 나이오직 젊어 정력과 지혜를 믿었더니
흉노 미 멸 실사인(凶奴未滅失斯人): 오랑 케 멸하기 전 이 사람을 잃었 구나
어포 위수 군은중(御袍 爲禭 君恩重) : 어포(御袍)로 수의(禭衣)하니 군은(君恩)이 막중한대
담석 무저 후 사빈(擔石無儲後嗣貧) : 쌀 한 섬 저축 없이 후손이 가난 하네
천고 정신 응 불민(千古 精神 應不泯): 천고(千古)에 빛날 그 정신 응당 다하지 않아
안봉 돌왕 삽 추민(鞍峯 突兀揷 秋旻 : 길마재 못뿌리 가을 하늘에 우뚝하다.
◘. 격적 가(擊賊歌)
※.조선팔도의 식자(識者)들은 이괄의 역란(逆亂)을 평정한 정충신(鄭忠信)의 용맹하고 겸손한 태도를 지 켜보고 이를 아름답게 여겼으며 이에 백주(白洲)이명한(李明漢)이 鄭忠信을 찬미(讚美)한 시(詩)
서관 지서 유명 장(西關 之西 有名 將) : 서관 서쪽에 명장이 있었는데
남두이남 무등 인(南斗以南 無等 人) : 남두 이남의 무등산 사람이구나.
장년 지절 치 시위(壯年 持節 値 時危) : 젊을 때 절개 갖고 위기를 만났건만
남아 유 담 대어 신(男兒 有膽 大於 身) :사나이 쓸개는 몸집보다 더 컸다.
이만광적 옹 성궐(二萬 狂賊 擁 城闕) : 이만의 역적이 성궐을 포위 할때.
일조 신소 여 소진(一朝 迅掃 如 掃塵) : 하루아침에 소탕하기 하였구나.
공성불거 인소 난(功成 不居 人所 難) : 이룬 공 사양하기 사람마다 어렵건만.
표연 반절 청 강빈(飄然 返節 淸 江濱):표연히 자리 떠나 강가로 돌아가네.
대가 환도 급 소공(大駕 還都 急 召公) :임금님 환도하여 급히 공을 불러들이자.
연화삼월 조자 신(煙花 三月 朝紫 宸) : 늦은 봄 꽃 시절에 조정 에 다시 왔다.
석전사주 산 황금(席前 賜酒 散 黃金) : 어전에서 황금과 술을 하사한 다음.
명 록 일등 삼 공신(命 錄 一等 三 功臣) : 일등 공신 세자사람 녹권 주었다.
기일 원융 기 이공(其一 元戎 其 二公) : 첫째는 원융이고 다음은 공이였으니.
일시 예우 무비론(一時 禮遇 無 比倫) : 한시대의 예우가 비할 때 없구려.
마안 봉두 백 장석(馬鞍 峰頭 百 丈石) : 갈 마재 꼭대기 높다란 바위에다.
대서특서 조 천춘(大書特書 詔 千春) : 큰 글씨로 깊이 새겨 후세에 전하였다.
욱공 차심 서 격호(勖公 此心 西 擊胡) : 어려움 무릅쓰고 서북의 오랑케 처서
연후 삼존 삼 한민(然後 三尊 三 韓民) : 세 차례나 우리백성 안정시켰네.
※.이명한(李明漢):1595년(선조28년)~1645(인조23년)號 백주(白洲),시호(諡號)문정(文靖)연안이씨 정구(廷龜)의 자(子),대제학(大提學), 예조판서(禮曹判書), 시(詩),서예(書藝)에 뛰어남
★.위와 같은 난중(亂中)의 공을 인정한 인조(仁祖)임금께서는 일등공신 정충신의 조부 석주(錫株)공(公)에게 내린 증직(贈職)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이며 조모(祖母)는 정부인(貞夫人) 父親 윤(倫)公에게 내린 증직(贈職)은 순충 적덕 병의 보조 공신(純忠 積德 秉義補祚 功臣)숭정대부 판중추부사(崇政大夫 判中樞府事)에 금천군(錦川君)에 봉하셨고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작위를 내리셨다.(1624년8월)
1631년(인조8년)10월19일, 정충신(鄭忠信)의 아들 빙(砯)이 평남 안주성안 백상루에서 초촐한 잔치를 베풀었다.(주변의 모든 고위관직이 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