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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정보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遺事)
 
 
 
카페 게시글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遺事 하림 윗재실의 주인공인 남계공 조수만(趙壽萬)은 어떤 분인가?
조성래 추천 0 조회 833 20.07.08 10:06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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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0.07.09 11:14

    첫댓글 관정 성래아우님의 남계공할아버지에대한 연구해설은 거의 완벽합니다.남계공은 애석하게 일찍 돌아가셨으나 다행히 아들응경을 두셨고 할아버지 금호의 사랑과교육을 받고 훌륭하게 자랐습니다.그 당시는 아들을 낳고 대를 잇는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응경은 결혼하여 다행히 부부 금실이좋아 아들 여섯 딸 셋을두어 집안에 경사가 터집니다.응경의 장남 언의 아들이 종도이며 셋째 성의 두아들이 신도와 민도 입니다. 우리가
    민도의후손 감찰공파 아닙니까.외아들 응경 ㅡ하구정할아버지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 작성자 20.07.09 21:36

    하구정(下鷗亭)할아버지는 단성, 안의, 예안 3읍에서 청백리(淸白吏) 현감(종6품)을 지내신 15대 조응경할아버지입니다. 鷗(구)는 갈매기 구입니다.
    모두 다 퇴직해서 크게 바쁜 일도 없는데, 조직래(1947년생)님 처럼 선조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도 하고, 이 카페에 글도 좀 올려주시고, 댓글도 좀 달아주시면 카페가 더욱 활성화 될 것입니다. 카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동참해서 완성해가야 합니다.

  • 22.11.22 11:38

    관정 스님, 스님의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몇 자 의견을 올립니다.

    1. 부상토(분산등墳山嶝?); 풍수에 능했던 생육신 조려 어계할아버지가 아버지 안을 ‘보검탈갑형’에 장사지낸 후 부상등(父喪嶝)이라 명명했다고 족보에 전합니다.
    2. 사진에 보이는 족보에서 하구정의 세 부인 중 첫째 부인 순흥안씨는 무자식이고, 두 번째 부인 진주류씨와는 언(堰) 장(墻) 성(城) 3명과 딸(언, 장, 성의 누나) 신홍국(申弘國)이고, 세 번째 부인인 진주정씨와는 균(均) 근(墐) 경(境) 3명으로 모두 1녀 6남으로, 균할아버지와 근할아버지가 빠졌군요.
    3. 관정스님께서 비석 글(묘갈명)은 우삼찬(右參贊, 정2품) 이미(李薇)가 지었다라고 하셨는데, 묘갈명을 지은 이미(李薇)는 남계공의 사위로서 당시 벼슬명이 우삼찬이 아니라 우참찬임. 이미는 하구정의 제매로 함안으로 유배왔던 이행(李荇, 1478-1534)의 둘째 동생으로 좌윤공 금호와 인연이 닿은 듯함. 이권-이기-이행-이영-이미(후에 이봉(李芃)으로 개명) 5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한 수재 집안임. 둘째 이기는 영의정까지 지내나 평판이...

  • 작성자 22.11.22 11:30

    1. 1959년 하림 태생 하촌 조웅래님 댓글 고맙고, 반갑습니다. "아들 조려가 아버지 안(安)을 보검탈갑형에 장사지낸 뒤 부상등(父喪嶝)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족보에 나온다고 하니,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알고 있는 정보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이 카페입니다. 함안조가들의 집단지성을 꿈꿔봅니다.
    2. 남계공의 아들인 하구정 조응경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두 번의 처상(妻喪)을 당하셨네예. 그 당시엔 죽음이 삶의 가까이에 있었다고 봐야 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유명한 양반인 진주류씨, 즉 문화류씨 할머니 자손이네예. 그리고 비석 글을 쓴 우참찬(右參贊, 정2품) 이미(李薇)가 남계공 할아버지 사위였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왜 함안조씨를 양반이라고 하는 지 더 잘 알겠습니다. 명문집안인 함안조가는 당나라에서 한반도로 들어올 때부터 특별히 우수한 혈통을 갖고 들어왔고, 들어온 뒤에도 여태껏 그 우수함을 잘 지켜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 22.11.10 10:42

    4. 조응경의 진주류씨(晉州柳氏) 부인의 생몰년대는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 하구정의 부인은 3명이다. 두 번째 부인 진주류씨(문화류씨)는 간송당 조임도가 지은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함안문화원이 발간한 국역금라전신록(2020.5.15. 도서출판 대보사(大譜社) 발행)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공이 돌아가신 후 남쪽으로 운구하여 안장하고 나서, 부인은 홀로 된 세상에 살아갈 의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일 년이 채 못 되어 몸에 종기가 번지는 바람에 그만 군의 뒤를 따르셨다. 경술년(서기 1550년) 음력 정월 24일로, 춘추 58세였다. 공의 묘소를 함안의 북쪽 응암에 모셨는데, 경술년(서기 1550년) 12월 13일(陰)에 다시 함안의 서쪽 하림(下林) 남계공(南溪公) 묘소 옆으로 이장하였다.” p.74

  • 22.11.22 12:07

    관정스님께서 남계공 재실에 대해 잘 정리해주셨는데 몇 자 덧붙이고자 합니다.

    1. 하구정(조응경) 할아버지가 부친인 남계공(수만)을 경모하여 지금의 위치에 남계공 재실을 짓고 예쁘게 단청까지 마쳤다. 이 소식을 들은 하구정(응경)의 조부인 좌윤공 금호할아버지가 '당장 허물어라, 단청까지 했다니 집안이 곧 망하겠구나'라며 하구정을 심히 꾸짖었다고 족보에 전한다.

  • 22.11.22 12:14

    2. 전중의모(殿中懿謀)의 현판 내용에 대하여; "응경은 부모님에 대한 말이 나오면 으레 눈물을 흘렸다. 특히 부모님 얼굴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몹시 애통해했다. 그래서 화공을 데리고 부모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두 분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르지 않게 하여 생전의 모습 그대로 그리도록 했다. 하루는 하구정(응경)의 모친을 모시다가 모친의 별세 후 다른 읍에 살고 있는 늙은 여종이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당(影堂)에 찾아들었다. 그녀는 모셔 놓은 초상화를 보고 깜짝 놀라며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이 내용을 접한 관포 어득강(1470-1550)이 하구정의 효심에 감복하여 '영당'이란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지극히 한스럽고 슬프다."고 함안조씨충의공파세보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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