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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림 윗재실의 주인공인 남계공 조수만(趙壽萬)은 어떤 분인가?
조수만(趙壽萬, 1469-1491) : 함안조씨 제14대, 호 남계공, 생육신 어계 조여 선생의 손자이고, 대소헌 조종도, 판서공 조신도, 감찰공 조민도, 동은공 ///등의 증조부이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에는 윗재실과 아랫재실이 있다. 아랫재실은 하림 부상토(父喪嶝부상등) 바로 밑에 있는 하림재(霞林齋)인데, 이것은 생육신 어계 조려(1420- 1489, 70세亡) 선생의 부친인 조안(趙安)의 재실이다. 윗재실은 하림 숲 옆에 있는 못 위의 재실인데, 이것은 어계 선생의 손자인 남계공 조수만(趙壽萬)의 재실이다. 남계공 재실에는 경모재(敬慕齋)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오늘은 남계공 조수만 할아버지의 족보를 번역해 올림으로써 이 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고, 그 앞 뒤 할아버지들의 상황을 알아보자. 우선 그 위 아래 대의 할아버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9대 조천계(趙天啓, 고려 판도판서, 정2품)
10대 조열(趙悅, 1419 세종1년亡, 고려말 공조전서, 정2품)
11대 조안(趙安, 벼슬하지 않고 아들 旅(려) 한 명 낳아 놓고, 일찍 별세함[不仕早卒불사조졸]. 하지만 부인 성산이씨(1395- 1493)는 향년 99세를 누림)
12대 조려(趙旅,어계, 1420- 1489년, 70세亡, 증 이조판서, 정2품)
13대 조금호(趙金虎, 1445-1533년 89세亡, 첨지중추부사, 종2품)
14대 조수만(趙壽萬, 남계공, 1469-1491, 23세亡, 장사랑, 종9품)
15대 조응경(趙應卿, 하구정, 1487- 1549, 63세亡, 청백리 현감, 종6품)으로 내려온다.
15대 조응경 할아버지까지는 남계공의 후손은 다 남계공파였다. 남계공파는 임진왜란 때 17대에서 여러 명의 순국(殉國)충신이 나오게 됨으로써 대소헌파, 판서공파, 감찰공파, 동은공파, 우윤공파, 어모공파 등 6개의 파로 분파되었다. 다음 족보 사진의 두 번째 장을 보면 우리 감찰공파 등 남계공 후손들은 다 어계 선생의 차남 금호(金虎)의 후손이다. 어계 선생 슬하에 삼남일녀가 있었는데, 그 삼남은 동호(銅虎), 금호(金虎), 야호(野虎)이다.
12대 려(旅,어계, 증 이조판서 정2품), 13대 금호(내금위장, 첨지중추부사 종2품), 14대 수만(남계공, 종9품), 15대 응경(하구정, 청백리 현감 종6품), 16대 언(堰, 참봉 종9품), 장(墻, 무과부장 종6품), 성(城, 증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종2품), 균(均, 사용司勇 정9품), 근(墐,///), 경(境, 증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 정3품), 17대 종도(宗道,충의공 대소헌, 증 이조판서 정2품), 숭도(崇道,우윤공, 증 한성부우윤 종3품), 신도(信道,판서공, 증 병조판서 정2품), 민도(敏道,감찰공, 증 사헌부감찰 종5품), ///(///,동은공//), 선도(善道,어모공, 어모장군 정3품)
14대 남계공 조수만(趙壽萬) 할아버지의 족보 내용은 다음과 같다.
14대 조수만(趙壽萬) : 남계공, 1469-1491, 23세 별세, 하림리 윗재실, 어계 선생의 손자이자 대소헌, 판서공, 감찰공 할아버지 등의 증조부다.
조수만(趙壽萬) 자는 미수(眉叟)이고, 자신이 지은 호는 남계처사(南溪處士) 이다. 1469년에 태어나서 1491년 7월 11일에 23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그는 진정으로 학문을 좋아했고, 수행했으며,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은거했다. 나라에서 장사랑(將仕郎, 종9품)의 벼슬을 내려줬지만 벼슬자리에는 한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남계공 조수만에 대해 좀 더 알고자 하면, 이 책의 앞 부분에 있는 언행록을 보기 바란다.
(남계공 수만의) 부인은 진주하씨이고, 1465년에 태어나서 1490년, 즉 26세에 별세했다. 진주하씨의 부친은 현감(縣監, 종6품) 하백달(河伯達)이고, 조부는 지평(持平, 정5품) 하충(河漴)이며, 증조부는 참의(參議, 정3품) 하경리(河敬履)이다. 외조부는 좌윤(左尹, 6품) 윤자(尹慈)인데, 파평윤씨이다.
묘는 함안 하림 가남골(묘는 남계공 재실 밖에서 대문을 마주 보고 서서 11시 방향 약 300~400미터 지점에 있다)신좌(辛坐)방향 쌍분(雙墳)이고, 비석 글(묘갈명)은 우참찬(右參贊, 정2품) 이미(李薇)가 지었다.
(한문 원문)
趙壽萬(조수만) 字眉叟(자미수) 自號南溪處士(자호남계처사) 睿宗己丑生(예종기축생) 篤學(독학) 修行(수행) 隱居(은거) 不仕(불사) 將仕郎(장사랑) 辛亥七月十一日卒(신해칠월십일일졸) 見言行錄(견언행록) ○配晉州河氏(진주하씨) 父(부)縣監伯達(현감백달) 祖(조)持平漴(지평충) 曾祖(증조)參議敬履(참의경리) 外祖(외조)左尹(좌윤)坡平尹慈(파평윤자) 乙酉生(을유생)庚戌卒(경술졸) ○墓(묘)咸安下林檟木洞(함안하림가목동)辛坐雙墳(신좌쌍분)墓碣(묘갈)右參贊(우참찬)李薇(이미)撰(찬)
(족보 해설)
1. 나는 처음에는 남계공할아버지의 생존년대를 1469-1551년 93세까지 살았던 것으로 잡았다. 하지만 조직래(1947년 하림태생) 형님께서 내가 작성해서 카페에 올려놓은 글을 보고, 남계공할아버지는 23세에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래서 확인해보니 정말 23세에 돌아가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옛날 족보를 보다가 보면, 생존연대가 60년 오차가 날 수도 있다. 생몰연대를 60갑자로 표기해 놓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계공 조수만(趙壽萬) 할아버지의 족보를 보면, "睿宗(예종)己丑(기축)生(생), 辛亥(신해)七月十一日卒(7월11일졸)"이라고 되어 있다. 예종기축년은 1469년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이후의 가능성 있는 신해(辛亥)년은 1491년도 될 수 있고, 1551년도 될 수 있다. 나는 남계공할아버지는 하림 윗재실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설마 23세에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남계공 할아버지는 93세까지 사셨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남계공 할아버지는 23세에 돌아가신 것으로 확인됐다. 족보책 앞에 실린 남계공할아버지의 언행록을 보니 "成宗(성종)辛亥(신해)七月十一日卒(7월11일졸)"이라고 되어 있어서 1491년에 돌아가신 것이 확인됐다. 23세까지 밖에 못 살은 분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재실을 지어드렸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2. 조선시대의 모든 관리는 종9품에서 시작해서 나이가 들면서 점차 품계가 올라갔다. 물론 능력이 있으면 빨리 진급하게 된다. 남계공 할아버지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벼슬자리에는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종9품이 결코 낮은 품계가 아니다. 조선초에는 조선인의 5~6%만이 양반이었고, 그 중 절반정도가 품계를 가진 벼슬을 했던 것으로 볼 때, 종9품은 그 당시 전체 조선인의 약 3% 안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
3. 남계공 수만 할배는 장사랑(將仕郎, 종9품)으로 관직에 발령이 났지만 관직에는 한 번도 나아가지 않고 조용히 은거(隱居)하여, 학문과 수행을 하면서 살다가 가신 분이다. 자신의 호를 ‘남계처사(南溪處士)’라고 지은 것을 봐도 벼슬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처사는 중국에서 생겨난 호칭이다. 이것은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면서도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황제나 왕이 내리는 시호였다. 조선에서는 학문이 높지만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사는 선비를 "처사"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고 자연 속에 은거하며, 수행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특히 남명 조식의 학풍을 이어받은 서부 경남의 성리학자들은 벼슬을 쫓지 않고 자연 속에서 학문을 닦으면서 수행했던 선비가 좀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의 함안조가 후손들은 부지런히 노동하고, 옛 것 만을 좋아하지 말고, 바른 정신으로 남보다 진취적인 자세로 새로운 것을 빨리 받아들여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은거하는 것보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많이 만나야 발전이 있다.
함안조씨의 성지가 된 하림 가남골 : 족보에는 남계공의 묘는 하림 檟木洞(가목동)에 있다고 되어있다. 가목동은 어디인가? 이것은 가남골을 말하는 것인데, 남계공 재실 뒤의 골짜기이다. 가남골에서의 "가(檟)"는 '개오동(나무)'이라는 뜻이고, "남"은 '나무'라는 뜻이다. 따라서 "가남골"은 '개오동나무 골짜기'라는 뜻이다. 하림 홍골 입구에 남계공 묘역도(墓域圖)를 그려서 안내판을 세운 하촌 조웅래(1959년 하림 홍골태생) 선생의 말에 의하면 엣날에는 가남골에 개오동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가남골에는 함안조가 14대 남계공 수만(壽萬)의 묘를 비롯하여, 15대 하구정 응경(應卿)의 묘와 16대 응경의 장남 堰(언), 차남 墻(장), 삼남 城(성) 등의 묘와 城(성)의 장남인 17대 판서공 신도(信道)의 묘와 城(성)의 차남인 감찰공 민도(敏道)의 묘와 대소헌공의 차남 18대 참판(종2품)공 영한(英漢, 1959년 하림태생 조웅래의 직계선조이다. 웅래의 조부님은 하림 마을의 많은 집들 중 남계공 묘와 영한의 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그 분들을 숭배하며 살았다) 등의 묘가 있다. 함안조씨 대종친회가 2018년에 남계공 재실 뒤 약 400미터 지점에 함안조씨의 시조 조정(趙鼎)의 묘와 함안조씨 2대에서 9대까지의 선조들의 비석을 모시면서 가남골과 하림은 함안조씨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이 함안조씨 시조 묘역은 (전) 동서식품 회장을 지낸 조필제님의 기부금으로 조성되었다. 조필제 회장은 1925년에 함안군 산인면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사가서 경기중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했고, 제일모직, 제일제당, 한솔제지, 동서식품 등의 공장을 설립하고, 그 회사들을 국내외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남계공 재실에서 걸어 올라가서 이 묘소들을 다 참배하고 내려오는 데에는 약 한 시간 가랑 걸린다.
4. 족보 앞부분에 있는 남계공의 언행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남계공은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좋았고, 매우 참되었으며, 학문하기를 좋아했다. 남계공은 기억력이 뛰어났고, 사람됨이 밝고, 빼어났다. 그는 평화롭게 머물렀고, 말수가 적었으나 얼굴에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어서 따뜻하게 와 닿았다. 옛 군자의 기품을 잘 지니고 있었다. 재상(宰相)이 여러 번 남계공에게 벼슬아치가 되어서 관청에 출근할 것을 권했으나 그는 사양하고 끝내 벼슬자리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유유자적하게 자연 속을 거닐며, 노닐다가 평생을 보냈다. 우참찬(右參贊, 정2품) 이미(李薇)가 남계공 수만(壽萬)의 비석 글을 지었다.(이미(李薇)는 덕수이씨이고, 남계공의 사위이다.)
(한문 원문)
將仕公壽萬(장사공수만) 字眉叟(자미수) 自號南溪(자호남계) 睿宗己丑生(예종기축생) 成宗(성종)辛亥七月十一日卒(신해칠월십일일졸) 公有孝友(공유효우)至誠[性]好學(지성호학)强記(강기)爲人明秀(위인명수)平居(평거)寡言(과언)笑溫(소온)溫然(온연)有古君子之風(유고군자지풍)時宰擧而官之辭不就(시재거이관지사불취)徜徉山水(상양산수)以自遣(이자견) 右參贊(우참찬)李薇(이미)撰(찬)碣銘(갈명)
(한자 도움 말) * 爲人(위인) 사람됨. * 徜(상) 배회할 상 * 徉(양) 노닐 양 * 遣(견) 보낼 견. 보내다. 떠나보내다. (감정 따위를) 풀다. 놓아주다.
5. 우리는 족보에 남계공할아버지의 특징을 “篤學(독학, 순수하고도 돈독한 마음으로 학문을 했고), 수행(修行, 도를 닦았으며), 은거(隱居, 조용히 숨어서 살았고), 不仕(불사, 벼슬자리에는 나아가지 않았다)”로 표현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위의 언행록을 보니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6. 우리는 남계공 할아버지의 처가를 봐도, 또 우참찬(右參贊, 정2품) 이미(李薇)가 그의 비문(碑文)을 지은 것을 봐도 그 내지 그의 집안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7. 그 앞 뒤 할아버지들을 다시 한 번 보면 다음과 같다.
9대 조천계(趙天啓, 고려 판도판서, 정2품),
10대 조열(趙悅, 1419 세종1년亡, 고려말 공조전서, 정2품),
11대 조안(趙安, 벼슬하지 않고 아들 旅(려) 한 명 낳아 두고, 일찍 별세함. 하지만 부인 성산이씨(1395- 1493)는 향년 99세를 누림)
12대 조려(趙旅,어계, 1420- 1489년, 70세亡, 증 이조판서, 정2품)
13대 조금호(趙金虎, 1445-1533년 89세亡, 첨지중추부사, 종2품)
14대 장남 조수만(趙壽萬, 남계공, 1469-1491, 23세亡, 종9품)
14대 차남 조수천(趙壽千, 절도공, 1482-1553년 72세亡, 충청병마절도사, 종2품)
14대 삼남 조수억(趙壽億, 현감 종6품)
15대 조응경(趙應卿, 1487-1549, 63세亡, 청백리 현감, 종6품)
16대 6남 2녀 중 3남 조성(趙城, 1529-1558, 29세亡, 동지의금부사, 종2품)
17대 장남 판서공 조신도(趙信道, 1554-1595, 42세亡, 오위도총부사, 정2품)
17대 차남 감찰공 조민도(趙敏道, 1556-1592, 37세亡, 사헌부감찰, 종5품)
남계공 수만 할아버지는 23세에 별세했다. 남계공의 외아들 응경(應卿, 1487-1549, 63세亡, 15대, 하구정)은 4세에 어머니를 잃고, 5세에는 아버지마저 잃었다. 그래서 남계공의 외아들 응경을 그의 조부인 금호 할배가 키웠다.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은 응경은 평생 부모님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그분들을 사모하는 마음을 담아서 남계공 재실인 경모재(敬慕齋)를 짓고, 그 안에 부모님의 초상화를 그려서 모셔 두었다.
(남계공 재실 경모재)
남계공 재실에는 두 개의 현판이 붙어 있다. 경모재(敬慕齋)와 전중의모(殿中懿謨)가 그것이다. 경모(敬慕)는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모한다'는 뜻이다. 전중의모(殿中懿謨)는 '대궐 (같은 재실) 안에 훌륭한 계획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대궐과 같은 크고 화려한 재실을 지은 것은 다 훌륭한 계획이 있어서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懿 아름다울 의. 아름답다, 훌륭하다. 謨 꾀 모. 꾀, 계책, 계획 이 두 현판의 글씨는 아주 잘 쓴 1등급 글씨이다. 이 정도로 잘 쓴 재실의 현판 글씨는 만나보기가 어렵다. 보통 재실에 붙어 있는 글씨는 3~5등급의 글씨가 대부분이다. 이 "敬慕齋(경모재)"의 글씨는 궁궐이나 통도사와 같은 대찰(大刹)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강철과 같은 골격과 균형이 잘 잡힌 근육을 가진 매우 건강한 글씨이다. 이 글씨는 따뜻함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서 이것은 씨름 선수 이만기와 같이 생긴 글씨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씨는 대단한 신사다.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殿中懿謨(전중의모)"의 이 현판은 안정감과 부드러움을 지닌 글씨다. 함안조씨의 격을 말해주는 현판들이다. 원북재와 하림재의 현판 글씨는 3~4등급이고, 응암재의 현판 글씨는 5~6등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북재(院北齋)의 글씨는 따뜻함이나 에너지, 건강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하림재(霞林齋)의 글씨는 밋건, 단정하게 잘 생겼지만 강건함과 따뜻함이 1% 부족하다. 97점짜리 글씨이다.
응암재(鷹巖齋)의 글씨와 그 대문의 글씨인 망추문(望楸門)의 글씨는 일반 재실 글씨 등급인 5~6등급이다.
남계공 재실은 건물도 아주 잘 된 것이다. 요즘 인간문화재급 대목수들의 실력으로는 이렇게 아름다운 선의 목조건물을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 최근에 화재로 다시 지은 숭례문(남대문)의 건물과 현판 글씨는 남계공 재실의 것보다 몇 등급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재실은 하구정 응경 할배가 처음 지을 때부터 작심하고 특별히 잘 지은 건물이다. 남계공 재실은 완벽한 비례와 선을 가지고 있는 건물이다. 한국의 재실 중 제1등급의 건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받아서 조선시대의 1등급의 건물을 잘 보존해야 한다. 필자는 40년이상 명필 글씨를 수집했고, 수십년 간의 답사여행을 통해 많은 고건축물과 미술품을 접해왔기 때문에 이 분야에 밝은 눈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8. 남계공의 재실은 1,500년대에 남계공의 아들인 하구정 할아버지(조응경)가 처음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903년에 중수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족보 책과 재실의 대들보에 적혀 있는 상량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위의 현판은 남계공 재실인 경모재 안에 붙어 있는 것이다. 대들보의 상량문도 남계공 재실의 것이다. 상량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종)왕이 갑자(1863)년에 즉위했고, 그로부터 40년 되는 해가 계묘(1903)년이고, 그 해 7월 28일은 경술일인데, 그 날 사시(오전9-11시)에 기둥을 세웠다. 1903년 8월 3일은 계축일인데, 그 날 사시에 대들보를 올렸다.
(한문원문) "鳳(봉) 聖上(성상, 임금)甲子(갑자)卽位(즉위)四十年(사십년)癸卯(계묘)七月二十八日(7월 28일)庚戌(경술)巳時(사시)竪柱(수주)八月三日(8월 3일)癸丑(계축)巳時(사시)上梁(상량) 龍(용)"
이 상량문을 보면 현재의 재실 건물은 190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의 건축연대를 알 수 있어서 기쁘다. 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잘 찾아보면 재실 중수기(重修記)가 있을 것이다.
9. 조금호의 장남 壽萬(수만, 1469-1491, 23세亡), 차남 壽千(수천, 1482-1553년 72세亡), 삼남 壽億(수억) 등 목숨 수(壽수명) 자가 이름자에 들어간 것을 보면, 그 이름에 세 아들이 별 탈 없이 장수할 것을 기원해 넣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장남 수만(남계공)은 23세에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남계공의 부친이자 응경의 조부인 금호(趙金虎) 할배는 향년 89세를 누렸다. 금호 할배는 어계 선생의 세 아들 중 둘째인데, 그가 어린 손자인 남계공을 키웠다.
이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3대 조금호 : 1445-1533년, 89세亡. 슬하에 수만, 수천, 수억 등 세 아들이 있는데, 25세에 장남 수만을 얻었고, 38세에 차남 수천을 얻었다. 43세에 장손자 응경(應卿)을 얻었고, 47세에 장남을 잃었다.
14대 장남 조수만 : 1469-1491, 23세亡, 19세에 아들 응경을 얻었고, 22세에 아내를 잃었고, 그 다음 해에 돌아가심. 남계공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14대 차남 조수천 : 1482-1553년 72세亡, 10세에 23세의 형 수만(壽萬)을 잃음. 형 수만보다 나이가 13살 작았고, 조카 응경보다는 5살 많았다. 52세에 89세의 부친인 조금호가 돌아가심.
15대 조응경 : 1487-1549, 63세亡, '하구정(下鷗亭) 할배'라고 부른다. 스스로 지은 호가 하구정이다. 4세 때 어머니를 잃었고, 5세 때는 아버지마저 잃었다. 조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47세 때 조부가 돌아가셨다. 조응경의 진주류씨(晉州柳氏) 부인의 생몰년대는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
남계공 할아버지의 증손자가 대소헌파의 파조인 종도(宗道)와 판서공파의 파조인 신도(信道)와 감찰공파의 파조인 민도(敏道)이다. 신도와 민도는 형제이고, 종도는 그들의 사촌 형이다.
* 이 글은 다음카페 <함안조가 하림유사(遺事)>에 올려져 있는 글입니다. 이 글을 함안조가 내지 남계공 후손 및 감찰공파 관계자들에게 널리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2020. 7. 8일 관정 조성래(1959년 하림태생) 올림
첫댓글 관정 성래아우님의 남계공할아버지에대한 연구해설은 거의 완벽합니다.남계공은 애석하게 일찍 돌아가셨으나 다행히 아들응경을 두셨고 할아버지 금호의 사랑과교육을 받고 훌륭하게 자랐습니다.그 당시는 아들을 낳고 대를 잇는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응경은 결혼하여 다행히 부부 금실이좋아 아들 여섯 딸 셋을두어 집안에 경사가 터집니다.응경의 장남 언의 아들이 종도이며 셋째 성의 두아들이 신도와 민도 입니다. 우리가
민도의후손 감찰공파 아닙니까.외아들 응경 ㅡ하구정할아버지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하구정(下鷗亭)할아버지는 단성, 안의, 예안 3읍에서 청백리(淸白吏) 현감(종6품)을 지내신 15대 조응경할아버지입니다. 鷗(구)는 갈매기 구입니다.
모두 다 퇴직해서 크게 바쁜 일도 없는데, 조직래(1947년생)님 처럼 선조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도 하고, 이 카페에 글도 좀 올려주시고, 댓글도 좀 달아주시면 카페가 더욱 활성화 될 것입니다. 카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동참해서 완성해가야 합니다.
관정 스님, 스님의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몇 자 의견을 올립니다.
1. 부상토(분산등墳山嶝?); 풍수에 능했던 생육신 조려 어계할아버지가 아버지 안을 ‘보검탈갑형’에 장사지낸 후 부상등(父喪嶝)이라 명명했다고 족보에 전합니다.
2. 사진에 보이는 족보에서 하구정의 세 부인 중 첫째 부인 순흥안씨는 무자식이고, 두 번째 부인 진주류씨와는 언(堰) 장(墻) 성(城) 3명과 딸(언, 장, 성의 누나) 신홍국(申弘國)이고, 세 번째 부인인 진주정씨와는 균(均) 근(墐) 경(境) 3명으로 모두 1녀 6남으로, 균할아버지와 근할아버지가 빠졌군요.
3. 관정스님께서 비석 글(묘갈명)은 우삼찬(右參贊, 정2품) 이미(李薇)가 지었다라고 하셨는데, 묘갈명을 지은 이미(李薇)는 남계공의 사위로서 당시 벼슬명이 우삼찬이 아니라 우참찬임. 이미는 하구정의 제매로 함안으로 유배왔던 이행(李荇, 1478-1534)의 둘째 동생으로 좌윤공 금호와 인연이 닿은 듯함. 이권-이기-이행-이영-이미(후에 이봉(李芃)으로 개명) 5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한 수재 집안임. 둘째 이기는 영의정까지 지내나 평판이...
1. 1959년 하림 태생 하촌 조웅래님 댓글 고맙고, 반갑습니다. "아들 조려가 아버지 안(安)을 보검탈갑형에 장사지낸 뒤 부상등(父喪嶝)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족보에 나온다고 하니,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알고 있는 정보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이 카페입니다. 함안조가들의 집단지성을 꿈꿔봅니다.
2. 남계공의 아들인 하구정 조응경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두 번의 처상(妻喪)을 당하셨네예. 그 당시엔 죽음이 삶의 가까이에 있었다고 봐야 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유명한 양반인 진주류씨, 즉 문화류씨 할머니 자손이네예. 그리고 비석 글을 쓴 우참찬(右參贊, 정2품) 이미(李薇)가 남계공 할아버지 사위였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왜 함안조씨를 양반이라고 하는 지 더 잘 알겠습니다. 명문집안인 함안조가는 당나라에서 한반도로 들어올 때부터 특별히 우수한 혈통을 갖고 들어왔고, 들어온 뒤에도 여태껏 그 우수함을 잘 지켜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조응경의 진주류씨(晉州柳氏) 부인의 생몰년대는 족보에 나오지 않는다; 하구정의 부인은 3명이다. 두 번째 부인 진주류씨(문화류씨)는 간송당 조임도가 지은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을 함안문화원이 발간한 국역금라전신록(2020.5.15. 도서출판 대보사(大譜社) 발행)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공이 돌아가신 후 남쪽으로 운구하여 안장하고 나서, 부인은 홀로 된 세상에 살아갈 의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일 년이 채 못 되어 몸에 종기가 번지는 바람에 그만 군의 뒤를 따르셨다. 경술년(서기 1550년) 음력 정월 24일로, 춘추 58세였다. 공의 묘소를 함안의 북쪽 응암에 모셨는데, 경술년(서기 1550년) 12월 13일(陰)에 다시 함안의 서쪽 하림(下林) 남계공(南溪公) 묘소 옆으로 이장하였다.” p.74
관정스님께서 남계공 재실에 대해 잘 정리해주셨는데 몇 자 덧붙이고자 합니다.
1. 하구정(조응경) 할아버지가 부친인 남계공(수만)을 경모하여 지금의 위치에 남계공 재실을 짓고 예쁘게 단청까지 마쳤다. 이 소식을 들은 하구정(응경)의 조부인 좌윤공 금호할아버지가 '당장 허물어라, 단청까지 했다니 집안이 곧 망하겠구나'라며 하구정을 심히 꾸짖었다고 족보에 전한다.
2. 전중의모(殿中懿謀)의 현판 내용에 대하여; "응경은 부모님에 대한 말이 나오면 으레 눈물을 흘렸다. 특히 부모님 얼굴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몹시 애통해했다. 그래서 화공을 데리고 부모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두 분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르지 않게 하여 생전의 모습 그대로 그리도록 했다. 하루는 하구정(응경)의 모친을 모시다가 모친의 별세 후 다른 읍에 살고 있는 늙은 여종이 초상화를 모셔놓은 영당(影堂)에 찾아들었다. 그녀는 모셔 놓은 초상화를 보고 깜짝 놀라며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이 내용을 접한 관포 어득강(1470-1550)이 하구정의 효심에 감복하여 '영당'이란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이 지극히 한스럽고 슬프다."고 함안조씨충의공파세보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