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북천전투)
임진왜란 초반 핵심전투는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 탄금대 전투, 평양성 전투였다. 그 중 임진왜란 때 조선의 중앙 관군과 의병들이 뜻을 모아 일본군에 대항하여 최초로 일대 접전을 벌인 전투가 ‘상주북천전투’다.
순변사 이일은 부산성과 동래성이 함락되고 그 이후에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선산에서 지휘관들이 성을 비우고 퇴각한 사실 등 병력규모와 전황을 파악한 뒤 상주성(尙州城)을 포기하고, 상주 북천(北川) 자산 기슭에 부대를 배치한 뒤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1592년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 18,700명은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킨 뒤 서울을 향해 북진했다.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9일 뒤인 4월 22일 곽재우가 임진왜란 최초로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4월 24일 일본군이 경북 상주에 진격해왔다. 상주성 봉화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이자 말을 탄 관군 한 명을 확인 차 보냈다. 그러나 가다가 갑자기 조총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바로 일본군이 나타나서 그의 목을 베고 달아났다. 조선군들은 그것을 보고 사기가 뚝 떨어졌다. 잠시 뒤 여러 명의 일본군이 조총을 쏘며 나타났다. 조선군도 그에 대응하여 화살을 쏘아댔다. 그러나 쏘는 화살마다 코앞에 떨어졌다. 싸움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군이 조총을 쏘며 좌우로 둘러싸서 포위형태로 몰려오니까 맨 먼저 겁을 집어먹고 도망친 사람이 총사령관 이일이었다.
프로이스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에게 보낸 상주전투 승리보고서에 "상주읍성 북쪽의 산 위에 조선군 약 2만이 진쳐있었는데, 전투는 아주 빨리 끝났고, 이 중 1천만 무찌르고 나머지는 뒤편 숲 속으로 무사히 퇴각한 점이 대단히 유감이다"라고 적혀있다.
일본군 제1군은 동래-양산-청도-대구-선산-상주- 조령-충주를 거쳐 5월 3일, 일본군이 침략해온 지 20일 만에 한성(서울)을 함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