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뜨 언덕 / 김정아
우리 4형제는 직업 군인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강원도 최전방인 철원과 김화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닌 탓에 방학을 하면 서울에서 학원을 다녔다. 몇 명 친구들과 친구 집에서 한 달 정도 같이 먹고 자면서 학원을 다녔던 싱아처럼 새콤한 추억이 있다. 남산식물원으로 어린이대공원으로 동물원으로 다니면서 풋풋한 소녀 시절을 보냈다.
장충체육관 근처의 탁구장은 우리의 아지트였다. 지금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달달한 추억이 있다. 그때는 샴푸가 그다지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우리가 방학이면 학원을 다니면서 신세를 졌던 친구는 부모님이 이혼을 한 친구였다. 할머니 댁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방학을 하면 아빠가 계시는 서울로 갔다. 아빠가 사업을 하시는 잘 사는 친구였다. 목욕탕 진열장에 영어로 쓰여있는 목욕제품을 신기하게 들여다보던 단발머리 소녀가 눈에 선하다. 어리바리한 나는 샤워를 하면서 주방 세제를 샴푸로 알고 머리를 감았다. 아무리 헹궈도 거품이 사그라지지를 않았다. 주방세제인 것을 나중에 알고는 얼마나 당황을 했는지 모른다. 당황해서 낑낑거리며 머리를 헹구었던 추억이 개봉동 파란 대문 집에 문패로 남아있다. 이부자리를 잘 개서 장롱에 차곡차곡 정돈을 해놓은 나를 보시고 “정아는 시집가서 잘 살겠다” 칭찬하시던 알랑 들롱을 닮았던 친구 아빠는 이제 고향 뒷동산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 우리는 친구들과 뿔뿔이 헤어졌다.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은 구미로 포항으로 춘천으로 대전으로 청운의 꿈을 안고 외지로 떠났다. 그때는 공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시절이었다. 공부를 잘 했던 남자 친구들은 부산기계공고, 구미공고, 포철공고, 전북기계공고로 진학을 했다. 그렇게 도시로 유학을 떠났던 그들은 대학 진학만이 유일한 꿈이었다. 시험과 부족한 수면과 씨름하면서 푸른 시절을 보냈다. 아무리 바빠도 숨 쉴 곳은 있다고 방학 때면 모여서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다녀오고 탁구, 테니스를 하면서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대학을 다니면서 여자친구가 생기고 남자친구가 생기면서 가슴앓이도 하고 이별도 하면서 풋풋한 시절을 보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후회 없이 사랑도 했다. 부모님의 자유로운 교육방식 덕분에 구김살 없이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제일 친한 벗이 전교 1등이었다. 교복도 벗지 않고 공부를 하는 공부벌레였다. 아침마다 교복 치마를 다림질해서 입는 나를 보고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 큰 딸이 교복 다리고 구두 닦는데 시간을 버리지 않으면 S대학 가고도 남을 거야.” 맞는 말씀이었다. 친구는 최고의 대학을 갔다. 멋을 부리는데 시간을 써버린 나는 당연히 그 친구를 만나러 S대학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나의 20대는 눈부신 날들이었다. 영화처럼 다가온 사랑을 위해서 내 전부를 버렸다. 그리고 아낌없이 사랑을 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나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아름다운 이별도 했다. 20대의 사랑은 이별도 아름답다. 누구를 사랑하는 일은 최고의 감동이다. 내 가슴에 감동이
없는 삶은 없었다. 새벽부터 노래를 불러주는 새들이 있어 행복하다. 누군가를 위해서 내 마음 한자리를 내줄 수 있으니 이것 또한 감동이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내 삶에 함께 해준 모든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사랑해줘서, 사랑하게 해줘서 고맙다.
첫댓글 고향 친구라 그런가 나랑 자라온 과정과 풍기는 사고방식 등 유사한 면들이 아주 많네
게다가 추억을 떠 올리고 서술하는 섬세한 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
서울은 밤 새 약간의 비가 왔는지 출근길이 젖어있네
한탄강의 소녀로 영원히 살고싶다. 건강 챙기고 오늘도 행복한 하루 짓기 바래. 고마워, 창원아.
좋은 친구들인듯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