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waverich.net
라스베가스 (Lasvegas)는 스페인어로 ‘초원’이라는 뜻이다
1700년대, 스페인 무역상이 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사막을 둘러본 뒤 <초원>이라 명명했다 하니 반어법의 경지도 이 정도는 돼야 신선하지 않겠는가?
1905년, 솔트레이크와 남쪽 캘리포니아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면서 라스베가스는 그 구간의
가장 중요한 정류장이 됐다.
1911년, 비로소 시로 승격이 됐지만 당시 인구는 네바다 주 인구의 1%, 주변 도시를 포함해도
3천여 명에 불과했다.
1930년, 인구가 5천명을 넘어서고, 그 해, 라스베가스 인근 콜로라도 강에 미국의 경제 공항
탈출 목적으로 후버댐 건설이 계획됐다.
전국에서 건설노동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라스베가스로 몰려들었다.
건설 경기 덕에 인구가 늘어났지만 라스베가스는 여전히 척박한 사막일 뿐이었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머무는 동안 먹고 마시고 쉬고 즐길 장소였다.
때맞춰 1931년에 네바다 주에서 카지노가 합법화됐다.
도박사들을 끌어들이기에도 충분한 조건이었다.
벅시 시걸(Bugsy Siegel)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가난한 러시아 유대인 이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빈민가 출신이었던 그는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갱단의 일원이 됐고 도둑질과 도박으로
시작해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는 주류 밀매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1934년, 이미 갱단의 악명 높은 보스였던 시걸은 이제 그만 더렵혀진 검은 손을 씻고
합법적인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새로운 사업거리를 찾기 위해 네바다 남부를 여행하다가 라스베가스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노동자들이 득실대고 있었지만 먹고 마시고 쉬고 즐길 장소가 전무한 모래사막 라스베가스는
그의 사업적 영감을 자극했다.
카지노도 허락된 마당에 지친 노동자들에게 삶의 기쁨과 활력을 주면서 대박날수 있는
합법적 사업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벅시의 머릿속에서 꿈같은 상상력이 불타올랐다.
벅시는 자신을 대표로하는 네바다 포로젝트 켈리포니아 지부를 설립하고 최대 지분을 확보한 뒤
주주들을 모집했고 마피아 조직에서 100만불을 빌려 1946년 라스베가스에 최초의 호텔을 지었다.
이름하여 호텔 플라맹고. 당시로는 엄청나게 큰, 룸 77개에 카지노 도박장까지 갖춘
초호화 호텔이었다.
그가 사막 한가운데에 카지노가 딸린 초호화 호텔을 짓겠다 발표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비웃었다.
후버댐 노동자 말고 누가 일부러 멀리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까지 와서 먹고 마시고
도박을 즐긴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끝내 관철했고, 꿈은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
호텔 플라맹고는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의 시발이 됐고, 아직까지도 라스베가스 중심부에 위치해 옛날의 명성을 지키고 있다.
호텔 플라맹고로 촉발된 라스베가스의 환락 문화는 세계인들을 유혹해 한 해 5천만에
육박하는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아무도 꿈꾸지 않았던 때 남과는 다른 꿈을 꾸고, 그 꿈을 기어이 실현해,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도시 라스베가스를 창조해낸 벅시 시걸.
지금 인천 청라에 진행되고 있는 스타필드 청라 프로젝트와 최첨단 거주시설 청라 웨이브리치가
그때 그시절의 라스베가스를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 너무 과하다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2년후 청라 웨이브리치가 준공이 되면 반드시 그 가치와 몸값이 대우받는 청라 웨이브리치.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스타필드가 바로 10미터 앞에 지어지고 있는 이유만으로도
투자의 가치는 충분하다.
투자의 눈은 아무나 가지고 있는게 아닌 것 같다.
아직도 청라를 10년전 황무지로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감히 청라 스타필드와 바로 옆에
지어지고 있는 청라 웨이브리치 공사현장을 실제 방문하기를 강력히 권한다.
보시게되면 찬란한 라스베가스를 창조해낸 벅시 시걸의 심정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지고
귀가하게 될것이다.
속보 : 청라 웨이브리치 계약자 선착순 5명 현금 100만원 지급 결정!!
청라 웨이브리치 대표전화 : 1544 - 4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