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7. 10. 15. 00:32
포석정의 크기와 구조
경주 남산 포석계곡 끝자락에 사적 제1호인 포석정의 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 포석정은 신라 1,000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아픈 사연을 간직한 유적으로 알려져 왔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신라 제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게 잡혀 자결하고 왕비를 비롯한 여러 궁녀들은 그들 침략자의 노리개가 됐다.
그리고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을 세움으로써 신라는 결국 패망하게 되었다는 기록으로 우리는 지금도 포석정이 패
배의 치욕적인 역사현장으로 기억 한다.
1998년 5월 포석정 지역에서 砲石(포석)이라고 새겨진 신라기와편이 출토되어 이를 화랑세기에 나타나는 포석사(鮑石詞),
즉 신주를 모시는 사당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발표되었다. 즉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한 성스럽고도 경
건한 장소였다는 해석이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군신들을 포석정에 군신들을 불러놓고 왕이 술 마시고 즐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
하기 어렵다. 나라의 안위를 위한 제사를 지내다 참변을 당했다는 해석이 오히려 설득력을 지닌다.
경애왕이 잔치를 베풀고 놀이에 빠져 결국 신라가 패망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재해석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포석정 옛사진(일제시대)
지금까지도 이 포석정이 정확하게 언제 어떤 연유로 마련되었으며 그 주된 용도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포석정 터에 남아있는 포석은 다듬은 화강석 돌을 사용하여 물이 흘러가도록 한 구조인데, 전체적인 형태가 마치 바다의 전복 껍질
둘레와 같은 모습을 담고 있다.
전체가 구불구불하여 물이 흘러가면서 속도가 완만해지도록 돼 있다. 그 특이한 형태의 시설은 세계에서 그 예를 볼 수 없는 그야
말로 신라인의 독창적인 작품이다.
▲포석정을 이루는 돌의 겟수이다.
▲땅속에 뭍혀잇는 부분이다.
KAIST 항공우주공학과 장근식 교수의 연구실에서 포석정을 1/6 크기로 줄인 모형을 만들고 이 모형에 물을 흘려 보냈더니 16군데에서 수로의 벽면을 따라 작은 소용돌이가 생기는 와류현상(渦流現狀)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명 회돌이라고 하는 이 와류현상은 물이 관이나 수로를 따라가다 떨어져 나올 때 생긴다.
구전에 의하면 포석정에서 신라의 왕과 신하들은 흐르는 수로에 술잔을 띄워놓고 자기 자리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석 잔의 벌주를 마시는 놀이를 했다고 하는데 술잔은 물이 흐를 때 생기는 회돌이 때문에 천천히 돌았던 것이다.
1998년 10월 경주문화엑스포 위원회에서 포석정에 술잔을 띄워 보기로 실험을 하기로 정하고 인간문화재인 어느 석공의 도움으로 절반 크기의 포석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을 흐르게 한 뒤 술잔을 띄워보았더니 술잔이 물을 따라 흐르지 않고 정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포석정 기념관 건립을 위해 주변을 발굴하던 중 포석이라소 새겨진 명문기와 여러 점과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포석정 주변에서 출토된 암기와와 막새
▲포석정 바로 옆 동편 계곡에는 계욕장(제사를 올리기 전,몸를 깨끗이 하기 위해 목욕을 하는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계곡 바닥에 있는 높고 큰 바위에 한 명의 사람이 들어가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돌을 쪼아내어 판 흔적이 있으며
동편 산쪽에서 물이 들어오고 계욕장의 물은 서편 개울로 빠져나갈 수 있게 홈을 파 놓은 흔적이 남아있다. 뒷쪽에 보이는 산
이 남산이며 이 계곡은 포석계곡이다.
출처> 토함산 솔이파리 솔뫼선생 자료 일부 편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