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의 사자성어(46).>
조강지처(糟糠之妻 )
지게미 조(糟), 겨 강(糠) , 조강이라 함은 ‘지게미와 겨’를 뜻하고, 갈 지(之). 아내 처(妻), 지처는 ‘~의 아내’라는 의미이다 . 따라서 ‘조강지처’라 함은 “지게미와 겨를 함께 먹은 아내, 즉 고생을 함께 한 아내”를 말한다, 곤궁(困窮)할 때부터 어려움을 함께 겪은 본처(本妻)를 흔히 일컽는 말이다.
조강지처는 후한서(後漢書)의 송홍전(宋弘傳)에 나오는 말이다.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누님인 호양공주(湖陽公主)가 과부가 되었다. 광무제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누님을 다시 혼인시킬 생각으로 신하 중 누구가 마음에 두는 지를 물어보았다.
“송홍(宋弘) 같은 사람이라면 남편으로 우러러보고 살 수 있겠지만, 그 외에는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그녀는 송홍이 아니면 재혼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송홍은 덕망이 높고 정직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누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러면 어디 한번 힘써 보지요”하고 약속한 광무제는 송홍이 공무로 어전에 들어오자, 호양공주를 병풍 뒤에 숨겨두고 송홍과 자신의 대화를 엿듣게 했다.
이런 저런 에기를 하다가 광무제는 송홍에게 넌지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속담에 이르기를, 지위가 높아지면 친구를 바꾸고, 집이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꾼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러자 송홍은 서슴치 않고 대답했다.
“신은 가난하고 친했을 때 친구는 잊어서는 안되고,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고생을 함께 한 아내는 집에서 내보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신문 빈천지교불가망 조강지처불하당:臣聞 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
이 말을 듣고 광무제는 송홍이 물러가자, 조용히 누님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이 틀린 것 같습니다”
충무공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충무공 전서에 보면, 당시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충무공의 사람됨을 알고, 자기의 서녀(庶女)를 이순신에게 소실(小室)로 보내려고 했다. 당시 사회에서는 축첩이 인정되던 시대였다. 무관에게 병조판서는 크나큰 후광이 될 수 있어 누구나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자 했다.
그러나 충무공은 망서리지 않고 거절했다. “아내가 있는 몸으로 어찌 다른 여자를 탐하겠는가? 내가 벼슬길에 처음 나온 마당에 어찌 권세있는 집에 의탁하여 출세하기를 도모하겠는가! (오초출사로 기의탁적권문: 吾初出仕路 豈宜托跡權門). 강직하기로는 앞서의 송홍이나 충무공이나 매일반임을 알 수 있다.
조강지처의 조(糟)자는 쌀 미(米)변의 글자이다. 술을 걸른 뒤 찌거기를 의미한다. 1950년대의 한국은 그야말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살아가던 시절이었기에 술 찌거기도 맛이 있었다. 강(糠)자 역시 옆에 쌀미(米)자가 붙어있다. 쌀겨라는 뜻을 가진 한자이다. 가난한 시절에는 쌀겨 역시 죽을 쑤어서 먹으면 훌륭한 식량이 되었었다. 60년대 70년대 한국은 국민 소득이 100달러도 안되는 세계 최빈국(最貧國)중의 하나였었다. 그러니 그 가난했던 시절에 결혼한 세대들은 대부분이 조강지처와 사는 셈이다
옛말에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아내를 생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를 가빈사양처(家貧思良妻)라고 한다. 사치나 하고 외모나 다듬는 아내는 집안을 든든하게 할 수가 없다. 반면에 근면하고 검소한 아내를 두면 집안이 일어서게 된다. 따지고 보면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서게 된 것도 검소하고 부지런한 한국 여인네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에 결혼한 필자는 박봉의 공직생활에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서울 변두리의 단독주택의 화장실은 재래식이었다. 수세식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비온 뒤에 변소에 앉아 변을 보는 경우에는 궁둥이를 위로 들썩거려야 했다. 밑에 똥물이 튀어 올라오기 때문에 이를 피하면서 일을 보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 가난한 환경에서도 아내가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 주었기에 오늘날 이만큼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항상 필자는 아내를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고, 아내 말에 순종(?)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가난을 같이 한 아내를 떠받들면서 생활해 가고 있다.
현명한 아내는 남편을 귀하게 만든다는 옛말이 있다. 이를 현부영부귀(賢婦令夫貴)라고 한다. 남편이 잘 되는 것은 언제나 아내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실학의 대가로 다산 정약용을 꼽는다. 다산이 유배살이 10년째 되던 해에 다산의 아내 홍씨 부인은 다산에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다홍치마 여섯 폭을 귀향지인 강진으로 보냈다. 그걸 보고 자기를 잊지 말라는 은근한 사랑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다산은 그 치마에 글을 써서 아들과 딸에게 보냈다. 이를 제하피첩(題霞帔帖)이라고 한다. 현명한 부인 덕에 다산은 5백권이 넘는 저서로 학자의 대업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조강지처라는 말도 퇴색되어가는 감이 있다.‘조강지처불하당’의 ‘불하당(不下堂)’은 ‘집밖으로 끌어내려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즉, ‘집밖으로 내쳐서는 않된다’는 뜻이다. 이는 봉건시대의 가부장 시절에 통용되던 말이다. 오늘날 같이 호주제도 자체도 없어진 양성평등의 시대에는 ‘누가 누구를 쫓아낸다’는 말이 통용되기 어렵다.
산아제한을 권장하던 70년대애는 자녀를 적게 낳는 사람이 애국하는 사람이었으나, 출산율 저조로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에 있는 오늘에는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 된다. 남아선호사상도 많이 쇠퇴하였고, 딸이 오히려 부모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는 말도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졸혼(卒婚)이니 황혼이혼(黃昏離婚)이니 해서 남자들의 신세가 초라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가끔 보도되고 있다. 이런 판국에서는 그저 이사갈 때 애완견 곁에 꼭 붙어있어야 그나마 쫓겨나는 것을 면하게 된다는 우수개 소리도 들린다. 그간 사회가 많이 변한 것이다.
아일랜드의 소설가 조지 무어(Geoge Moore(1852-1933)는 “인간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찾아서 세상을 여행하다가 결국엔 가정에 들어와 그것을 발견한다고”말했다. 가정은 안식의 터전이며, 행복의 샘터이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마음의 평온함을 뜻한다면, 된장국에 밥 한 사발 비며 먹어도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珍羞盛饌)을 가득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그러니 조강지처를 잘 받들면서 한 세상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크나큰 낙(樂)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2022.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