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12는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가 담긴 주요 법안 수, 3은 그중 올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 수다. 새 정부 청사진은 결국 입법을 통해 국민 앞에 구현된다. 그런 점에서 남겨진 숫자 ‘9’는 여소야대(與小野大) 속 새 정부의 내년도 과제를 의미한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통화에서 “지난 5월 힘차게 출항한 윤석열호(號)가 거야(巨野)의 파도 앞에 멈춰선 형국”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가 입수한 정부의 ‘국정과제 관련 주요 법안 추진현황’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핵심 법안으로 12건을 선정, 입법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실제 국회 문턱을 넘은 건 세제 정상화 법안(종합부동산세 세율 인하 등)과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법안(반도체 지원), 고등·평생교육지원 특별회계 법안(미래 인재 양성) 등 3개뿐이었다. 다른 경제·사회 분야 법안 9개는 국회 계류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8일 서울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원자력안전위원회 합동 2023년 정부 업무보고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 고학수 개인정보위 위원장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대통령실 사진기자단© 제공: 중앙일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8일 서울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원자력안전위원회 합동 2023년 정부 업무보고에서 한덕수 국무총리,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 고학수 개인정보위 위원장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대통령실 사진기자단
①재정 정상화= 나라 살림의 건전성을 규율할 재정준칙 도입부터 무산됐다. 예산편성 때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3.0% 이내로 유지하도록 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박대출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9월 발의됐으나, 논의를 시작하지도 못한 채 해를 넘기게 됐다. 10월 25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시정연설에서 건전재정 기조를 내세우며 “2010년 이후 처음으로 전년 대비 예산(내년도)을 축소 편성했다”고 말했다. 대외신인도 유지와 재정지속 가능성, 미래 세대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건전재정 기조를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지난 1일에야 국회 기재위 안건으로 상정, 현재까지 소위원회 논의도 시작하지 못했다. 위원회 존속기간을 규정한 ‘행정기관 소속 위원회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도 정부조직법 처리문제와 엮이면서 국회 행안위에서 멈췄다. 다음은 11월 30일 행안위 법안심사소위 회의록.
▶한창섭 행안부 차관=“위원회 존속기한 6개월 전까지 행안부 장관과 연장할지를 협의하고 법률 개정사항은 3개월 전까지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안으로, 전문위원 검토의견에 동의합니다.”
▶김교흥(더불어민주당) 소위원장=“이것도 정부조직법과 관련 법안입니다. 양당이 협의하기로 돼 있습니다.”
▶한 차관=“이것은 정부조직법하고 직접 관련이 없는 사항으로 생각이 되고요.”
▶천준호(민주당) 위원=“국회에서 논의하기로 했다잖아요.”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 24일 서울 중구의 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축하미사에 참석했다. 대통령실 제공© 제공: 중앙일보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 24일 서울 중구의 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축하미사에 참석했다. 대통령실 제공 ②민생·안전= 법사위에 잡혀있는 스토킹 처벌 법안이 대표적이다. 법무부는 스토킹 범에게 전자발찌를 채우는 내용의 개정안을 10월 입법 예고했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기소할 수 없도록 한 반의사 불벌죄 규정도 폐지하겠다고 했다. 이는 윤 대통령이 9월 서울 신당역에서 역무원 스토킹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이러한 범죄가 발붙일 수 없게 하라”며 법무부에 해당 법 보완을 지시하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관련 법안은 여전히 법사위 법안소위에 계류돼 있다. 법사위 관계자는 “처리가 시급한 일몰제 법안을 중심으로 처리하다 보니 해당 법안에 대한 논의가 늦어지고 있다”며 “여야 간 견해차가 큰 법안은 아니다”고 말했다.
부모급여 도입도 아직 국회 복지위 법안소위에 멈춰있다. 윤 대통령의 대표 공약으로, 보건복지부는 지난 13일 내년부터 만 0세 아동을 키우는 가정에 월 70만원, 만 1세 아동에는 월 35만원이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 법안이 아직 국회 문턱을 못 넘고 있는 실정이다. 복지위 소속 민주당 관계자는 통화에서 “국민의힘이 부모급여 법안 같은 국정과제 중심 법안이 있다면, 민주당도 마찬가지로 중점 추진 법안이 있다”며 “양당 지도부가 큰 틀에서 주고받는 식의 합의가 아직 안 됐다”고 말했다.
올해 말로 종료되는 일몰(日沒) 법안인 근로기준법 개정안(30인 미만 업체 8시간 추가연장근로제)도 끝내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했다.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안(안전운임제),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건강보험의 국고 재정 지원)과 함께 일몰 3법으로 묶였기 때문이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 28일 “제일 급한 것은 근로기준법상 유연노동제 연장인데 민주당이 안전운임제와 서로 맞바꾸자는 취지로 이야기하고 있어 처리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안전운임제 연장은 국토교통부와 화물연대 간 교섭 이후 당정협의, 정부 입장 발표까지 3번에 걸쳐 공식 약속한 사안”이라고 맞섰다. 1기 신도시 등 노후신도시 재생에 관한 법률도 상임위에서 진척 없이 잠을 자고 있다. 국민의힘 소속 국회 국토위 관계자는 “국토부의 관련 연구용역이 끝나는 대로 본격적인 논의에 나설 예정”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인 지난 4월 29일 오전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내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 반도체 연구 현장을 둘러보던 중 반도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중앙일보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인 지난 4월 29일 오전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내 나노종합기술원을 방문, 반도체 연구 현장을 둘러보던 중 반도체 웨이퍼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③미래·먹거리= 국가 첨단산업 육성에 대해선 여야 간 이견이 적은 편이다. 일단 반도체 등 특화단지 조성·운영을 위한 인허가 신속 처리 기간을 30일에서 15일로 단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반도체 특별법이 지난 2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양자기술 등 RD 투자 및 관련 인재양성을 규정한 ‘국가전략기술 육성에 관한 특별법안’도 지난 27일 소관 상임위를 통과됐다. 반면, 벤처업계 숙원인 복수의결권 제도 도입 법안(벤처기업법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국회 법사위에 회부됐으나 뒷순위로 밀리며 본격 논의조차 못 했다. 정부 관계자는 “예산부수법안이나 반도체 법안처럼 통과된 3개 법안도 엄밀한 의미에선 민주당과의 협상 속에 그 취지가 퇴색한 측면이 있다”며 “170석 가까운 거대 야당이다 보니 원안 사수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토로했다. 여권 고위 인사는 통화에서 “무기력한 여당의 지리멸렬함과 거대 야당의 몽니가 결합해 주요 공약 법안조차도 제때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며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 드라이브 역시 법안 처리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내년이 더 걱정이다”고 말했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